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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38-46 요나의 표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25. 14:17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언제나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에 열광한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기대하고 무엇을 만드는 사람이 없듯이 하나님도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이라는 존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정하고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죄라는 것이 있다. 죄가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보면, 사람이 정해진 것은 하지 않고,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좋은 신앙이라 하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죄다.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악하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 이상의 것을 할 때 선하고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가치관을 가진 세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으로만 보면 사람은 이 육신을 가지고 율법의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율법 자체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것을 지키면 선하고 지키지 못하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세대가 바로 악한 세대라는 것이다.


사람이 만족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하여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안식하지 못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표적을 구한다. 즉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 사람으로서 자신의 한계와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 이상의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모습을 부인하고 그 이상을 구하는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부인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것 앞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것 외에는 사람에게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사람이 기대해야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에 기대해야할 표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에 따라서 무엇이 기적인지가 좀 다를 것이다.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기적이 아닐 것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변화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믿고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먹는 변화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탈 인간, 초인적인 인간,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만이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 자랑 할 것 보다 감추고 싶은 것이 더 많아 보이는 이 육신을 가진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어떤 악한 세대가 바라는 기적이라도 일으켜서 내려오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와 지금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 진화론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성경에 사람의 모양이 달라졌다는 기록은 없다.(단지 수명이 짧아졌을 뿐.) 심지어 선악과를 먹음으로 신체에 다른 변화가 일어난 것도 없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던 그 사람과 지금의 사람은 같다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뿐.


사람이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고, 혼자서 하는 일이 들통 나는 것을 난감해하고, 감추기 위하여 옷을 입고 사회적으로 여러 신분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또한 능력을 덧입히는 것은 다 원래의 모습에 불만이 있어서이다. 그래서 그 불만스런 모습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기적이라 하고 늘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바라고, 또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적이다.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져서 못 박히셨다.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신 것이다. 육신이 벗었다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벌거벗은 듯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사람의 모습 그대로가 악한 세대가 표적을 원하는 가치관으로 볼 때 전혀 기적을 일으킬 수 없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신을 주장하셨기 때문에 발가벗겨져서 죽으신 것이다.


그것이 요나의 표적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모습이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것과 같이,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도 도리 수 없고, 유대인의 왕도 될 수 없는 사람의 원래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언함으로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시려고 삼일 만에 살리신 것, 그것이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볼 때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사람 그 자체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진정한 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볼 때 절대로 안 되는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볼 때, 육신을 가진 이 인생은 하나님의 아들은 고사하고 사회적으로 살아가기에도 부족한 존재인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만한 기적이 어디에 있겠는가?


정말로 기적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 가진 삶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생의 온 힘을 쏟다가 그것이 아니라 원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이고,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십자가의 기적이고, 그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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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씀하시는 악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악>과는 좀 다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어떤 것을 악한 것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일반적인 견해에서 보듯 살인과 절도와 같은 것이 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악함의 뿌리가 있으니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악하다고 하신 것은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때 그것을 들은 서기관들이 하나님 외에 사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이 참담하다고 생각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사람들 사회에 있는 많은 죄악들의 원인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물론 직설적으로 그렇게 표현된 곳은 찾기 어렵다.)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삶의 모습을 보고 악하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이 개선되지 않으면 화가 나고 그것이 장성하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가 모든 죄의 근원인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나름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용납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에는 숨도 쉬지 않듯 가만히 있어야 하고, 이러한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선과 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 아니 누구라도 사람의 죄를 사하거나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것이 용납될 수 없었다.


악한 세대라는 것은 바로 그런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대를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일을 판단하는 세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예수님계시든 0 혹은 1세기나 지금의 21세기를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실 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불가하고, 사람이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자를 고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대는 다 악한 세대인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은 부족하고 연약하다. 육신의 기능도 동물들에 비하여 부족한 것이 많고, 또 자연 앞에서 무력한 모습이기도 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통제하지도 못할 때가 많은 그런 연약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런 연약함으로 인하여 사람은 그것을 감추고 자신은 남과 달리 그렇지 않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추한 일들을 꾸미고 행하는 그런 부정한 존재이다.


그렇다보니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사람이 가진 갖은 연약함을 감추고 숨기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우선 옷을 입고, 또한 화장을 한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 화장실에 가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은 감추고, 공부한 것, 사회적으로 자신이 이룩한 것,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있는 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내 민다. 그러니까 자신은 연약함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모든 행동의 조상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다. 아담이 선과 악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이 생기고 나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 벗은 모습을 감추어야 할 것이라고 하신 적이 없음에도 그것을 감추어야 했던 단 하나의 변화는 선악과를 먹은 것, 그것이었다. 즉 선과 악에 대한 기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 기준으로 보니 자신의 모습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바로 그 아담의 생각과, 인자가 죄 사하는 권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서기관의 생각과, 귀신 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함과 같이 세상에 자신의 생각을 빼앗겨서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를 고치는 것을 오히려 귀신의 힘으로 고친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의 생각과, 오늘날 세상에서 성공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래도 사람이 이 정도는 되어야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본이 된다는 각양의 기준을 제시하는 생각은 다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이 옳다고 인정받는 세대, 그 세대가 바로 악한 세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대는 늘 표적을 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능력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거나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기적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고상해지려하고 더 똑똑해지려 한다. 세상의 철학과 과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욕구로 가득한 세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감출 수 있는 기적인 것이다.


지금도 이 시대에는 사람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영웅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어벤저스라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것이 바로 악한 세대가 바라는 표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물론 영화는 오락 그 자체일 뿐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이 하늘을 날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히어로가 되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 그렇지 못한 이 육신을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구체화 한 것이 바로 무화과 나뭇잎이다.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이다.(무화과는 이스라엘의 나무이므로) 율법은 사람의 행동에 대한 규례이다. 즉 사람이 가진 연약함을 감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명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연약함을 감추는 것은 그 연약함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악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잘 관리하면 인간의 연약함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표적은 다른 게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표적은 오직 사람의 능력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주 오만한 기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분명한 한계 안에 두신 것은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분명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의 범주 밖의 일을 일으키면 신앙이 좋다고 하거나, 그러면 믿겠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사람의 범주 밖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사람의 능력 밖은 모두 하나님의 영역이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데, 그 중에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그 주권 중에 사람으로 표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고, 그 외의 영역은 또 하나님의 생각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위를 쪼개는 바람과 같은 위대함은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만나면 사람은 다 죽을 수밖에 없다. 바위를 쪼개는 판에 사람이 견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세대의 사람들이 구하는 표적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그것이다.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사람들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또한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려 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면 다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목적을 알고 살면 세상에 있는 사회적 요구를 십자가 지듯 할 것이고, 종교적인 규례는 범하려 해도 율법이 완성되듯,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 되듯 지켜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기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요나는 그다지 착한 선지자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의 모습을 대변한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 곧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살다가 요나가 바다에 빠지듯 세상에 삼켜져 있다가 돌이킴으로 삼일 만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모든 인생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바다 곧 세상의 법에 삼켜져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란 자신의 생각대로 살다가 어느 순간 세상의 가치고나 앞에 먹히듯 죄인이 되는 자신을 알고 원래 사람의 자리인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표적 중의 표적이고, 기적 중의 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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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성령 훼방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바알세불이라며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이어져 있다는 것은 생소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것에 이어서 성령의 훼방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은 앞에서 포스팅한 바와 같이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의 법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말씀을 하시고, 또 이어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 말로 인하여 심문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렇다는 것은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고치시는 예수님과 그 치유를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폄하하는 바리새인, 그리고 그 말에 대하여 성령을 훼방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말이 심판 날에 심문의 대상이 된다는 이 모든 것은 다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신앙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결국은 그 사람의 말로서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는 생명과 같아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말과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즉 낭중지추라는 말과 같이 속에 있는 것은 언제라도 다 표현되기 마련이기 때문이고, 또 표현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다. 외식이라는 것은 속에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노릇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있어서 그것이 표현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말씀은 그 안에 없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외식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가 좋은 과실을 맺는다고 하시는 것은 생명의 법이 그렇다는 것이고, 바리새인들과 같이 안에는 생명이 없는데 그 행동만 좋은 열매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성령이 고치시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기는 하지만 정작 그 율법이 왜 있는지는 알지 못하면서 행동만 지키려고 하는 것임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외식하는 행위, 곧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며,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선한 말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서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낸다고 하시면서 사람의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이것은 '욕하면 지옥 간다.'는 식의 해석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 그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선하면 선한 말을 했을 것이고, 악하면 악한 말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심문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것이라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도덕적인 기준으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한다.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모든 상황, 모든 일에 온전하게 선함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선과 악을 사람들의 행동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과 악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되는 형식일 뿐 선과 악의 본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보고 악하다고 하신 일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심에 유대인들이 '사람이 어떻게 죄를 사하는가?'하며 참담하다고 했을 때이다.(마, 9장) 이것은 지금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를 고치신 것을 두고 성령이 아니라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그랬다고 하는 이들도 같은 마음이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들은 사람이 사람 그 자체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정하여져서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려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백성을 회복시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교회가 목사를 청빙하고, 장로를 선출하는 방식을 보면 그렇다. 형식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 어떤 신분과 재물이 어느 정도인지가 목사를 청빙하고 장로를 선출하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것이 없으면 목사도 장로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제대로 하려면 그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신앙 고백을 보고 청빙해야 할 것이다.) 그런 지금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의 죄를 사한다고 하자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돈 없으면 장로 되기 힘들다는 것은 그런 것이 없으면 교회에서 신앙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인생의 상태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보고 듣게 되었는데 그것이 불만이라는 것은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없다며 참담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안에 선한 것이 없고, 그야말로 그 마음에 악한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위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도 세상적인 소양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악한 것이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말은 그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을 고치는 것을 보고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죄를 사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악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그 안에 악함으로 인하여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그런다고 말을 한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요, 선한 것이 없는데 선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심판 날이 되면 그런 모든 것이 다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들, 그런 생각을 가진 이는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훼방했으니 사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보면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보지 않는다. 허나 바로 그런 생각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구원의 길을 보이시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가 상실된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자꾸 비판하는 것 같지만,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선출할 때 사회적으로 좋은 지위에 있거나 부유할 때 유리하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재물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육신을 가진 사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 훼방이다. 성령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 육신을 가진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자를 고치심을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그런다고 하는 것과, 서기관들이 중풍병자에게 죄가 사하여졌다고 고치시는 예수님을 참담하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은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그런 생각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 자체로는 안 되고, 종교적 거룩함이 있든지, 요즘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좀 인정받든지 해야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육신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보는 같은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육신 그것만 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하기에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영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그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말로서 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듯,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예수님을 보는지를 그 사람의 말로서 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심판의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재판하듯이 심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지적을 하는 것이 심판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한다는 증거다. 하지만 예수님의 심판은 그렇게 '너 이랬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내어놓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이 육신에 아무 것도 더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가치관, 그것이 자신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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