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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의 시작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이신지에 대한 회의가 들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확인하는 것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19절까지는 세례요한의 그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을 하시는 말씀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답의 가장 마지막을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 함을 얻느니라.>라고 마무리하고 계신 것이다.


사실 세례요한의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을 하시는 시작도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세례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시작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은 몸에 어떤 문신 같은 것이 있거나 머리가 빛나거나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가지고 답변을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을 함축하면 <행함과 믿음>이라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행동 가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즉 병이 고쳐지는 것은 표현된 현상이고 예수님이 그 원인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에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외식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종교적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책망하시고 교훈하시는 것으로 그냥 쉽게 생각하지만 그게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신앙에 큰 전환이 생길 수 있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 그리고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내용, 어떤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생명과 내용으로 인하여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사람의 삶이 그 생명의 본성을 표현하는 행동과 삶과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을 따라서 하려하고 그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 말씀을 지키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선함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용과 본질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지키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도로교통법을 어기면 벌금을 부과한다. 그러면 도로교통법이 벌금을 부과하기 위한 법인가? 도로교통법이 교통신호를 어기면 벌금을 부과하는 것은 벌금을 부과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법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벌금을 잘 부과하면 도로교통법을 준수하는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그건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들은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자기들이 심지어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키려는 그 율법의 내용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피리 불 듯이 말씀하셔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말씀하시기를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 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언뜻 상관이 좀 없어 보이기도 하겠지만, 행함이라는 것은 그런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이 있고,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혜라는 것은 원인을 볼 수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리 소리가 들리면, 또 애곡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 원인과 의미를 아는 것, 그것이 지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혜가 있다는 것은 원인에서 비롯되는, 즉 생명에서부터 나오는 행함이 있고 그런 법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옳다함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하시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비밀이라고 하시는 말씀들이 다 이것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과 사람 지으신 목적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고, 그것을 아는 것이 같은 생명을 가진 것이고, 그것을 아는 것이 피리 소리의 의미를 아는 것이며, 그것을 아는 것이 외식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세 번째 시험도 그것이다. 무엇을 본질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지, 육신이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것이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고, 그것이 표현된 것이기에 표현된 것을 믿고 지키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무엇이 그렇게 나타난바 되었는지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말씀으로 말미암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바울의 말씀 역시 그것이다. 또한 농부와 씨로 표현된 모든 성경의 말씀도, 씨가 자라서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이 가지고 있는 구조, 곧 법칙이 이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세대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던 그 세대와 다를 바가 없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서 지켜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외식하는 것에 가깝고,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므로 그 생명이 있으면 모든 말씀은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잉태되어 나기만 하면 사람으로 살아가는 육신의 모든 기관과 또한 그 육신으로 살아가는 모든 방법과 행위와 모양을 본능으로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아무리 범하려고 애를 써도 다 지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자를 죽일 수는 있어도 호랑이로 만들 수 없듯,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삶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을 가치 있게 하는 것만 신경 쓰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방법론이기 때문에 어떻게 표현해도 무방한 것이다. 


즉 생명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은 일정하게 규율로 정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율법적인 세계에서는 반드시 정해진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을 때만 일렬로 걸어간 것과 같이. 그것이 광야의 세계고, 그것이 율법의 세계다. 바로 그 세계의 최고가 세례요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라도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이다. 반대로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생명의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그 행함으로 옳다 인정받는 것은, 지혜가 있다는 것은 그 행함이 원인이 있는 행함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생명의 본성이 있어 그 생명이 표현되는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구조가 하나님께서 생명이 되시고 사람으로 그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지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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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계시던 그 당시에 대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하여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먹지 않으니 귀신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이 와서 먹으니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반응 없는 세대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병으로 본다면 문둥병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 계실 때, 그 세대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때가 그랬다면 지금은 더하면 더한 것이다. 종교를 떠나서 주변의 일에 무관심한 것으로 가늠한다고 해도, 오죽하면 고독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세대이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 시대 현상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은 해야 할 일,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길 가다가 피리 소리가 들리면 사람이 춤을 추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말씀은 다 자신과 상관이 있는 피리소리, 또한 애곡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것이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목적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사람이 바로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아무 것도 먹지 않으니 귀신들렸다 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니 먹는 것을 탐하고 죄인들과 친구가 되었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상황에 따라 다른 말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보면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어떤 성경의 말씀이라도 자신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서 생명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연구하는 사람은 학문적 성과나 믿기 힘든 기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가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에게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귀가 없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귀 있는 자는 사람 몸의 한 기관으로서의 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 즉 예수님의 말씀과 자신이 상관이 있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암호라는 것이 있는데, 평범한 말이지만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 귀가 있는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암호라고 한다. 한국 사람에게 숫자 4는 많은 경우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서인지 나쁜 숫자로 인식된다. 즉 숫자 4가 좋지 않은 수로 들린다는 것은 한국인의 귀라는 말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와 같다. 한국인이 아니라도 숫자 4는 다 인식한다. 객관적인 인식은 다 한다는 것이다. 성경도 문자만 알면 다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마치 숫자 4를 수로 인식해도 한국인과 서양 사람들은 다르게 느끼듯이 성경을 읽고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고 믿는 것과 그것이 자신에게 마치 한국인에게 숫자 4가 가진 의미가 주관적으로 전달되듯이 성경을 듣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귀가 없는 이들은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을 하셔도 귀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귀가 없다는 것, 그것은 성경도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도 왜 주셨는지 목적과 본질적인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것이기에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 유대인들에게는 성경에서 오리라 한 엘리야가 와도 모르고, 하나님이 약속한 예수님이 와도 못 박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온 인류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를 가리켜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오신지 카이로스 시간 개념으로 2,000년이 넘은 이 시대도 사람들은 귀가 없는 경우가 많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모른 체 그냥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성경의 기적들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여기고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신념을 동원해 가면서 믿으려고 한다. 그런 관점은 다 귀가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에 널려 있고, 밤이면 온 하늘이 교회의 빨간 십자가 네온으로 넘쳐나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과 같이 그 많은 교회와 하나님의 말씀들이 말씀을 주신 본질을 외면 한 체 객관적인 사실로 믿으려 하고, 무엇보다 신앙을 힘입어 이 땅에 사는 동안 복 받고 성공하는 삶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고 듣고 믿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자신이 상관이 있는 관계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슬픈 일이 생기면 같이 슬픈 그런 관계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아닌데 하나님을 믿노라 하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은 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TV에 나오는 유명인을 알고 그 사람이 어떤 야에서 유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치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과 예수님과 자신이 상관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없으면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 것도 성경을 믿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믿기 어려운 어떤 것을 믿는 것에는 신념보다는 학문적인 연구로 인한 증명이 더 효과적이다. 아마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신앙도 학문이 되어 신학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 문자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하지 말라는 말을 강하게 이야기 할 때, ‘그거 하면 죽을 줄 알아라.’라고 말한다. 그것이 죽이겠다는 말이 아니듯, 성경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분명히 문자로 표현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의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의다. 그런데 그 의를 알려고 하지 않고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으려 하는 것, 그리고 그 문자가 기록한 것을 사실로 입증하고 신념으로라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사람에게 어떤 믿음을 요구하시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세례 요한을 보고는 금식한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은 먹는다고 비난하는 것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라도 성경의 의를 모르면 성경의 내용이 서로 상충되기도 하고, 자신으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연구할 문제가 아니다. 신념이 더 필요한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믿음이 없는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기록하신 분과 보는 것과 가치관과 생각과 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같다면 성경이 온통 거짓말이라도 알아들을 사람 곧 귀가 있는 사람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성경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셨기에 그 한계를 확실히 알고 계시는 사람에게 사람이 들어야 하는 말씀을 사람이 모르게 하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와 가치관이 아직 다른 문제이지 믿음이나 신학적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즉 예수님과의 관계가 피리를 불 때 춤을 출 수 있는 상관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성이 믿음이고 생명이다. 같은 생명은 그 생명의 고유한 행동을 이해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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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2-19 세례 요한의 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14. 16:14 Writer : 김홍덕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지적한 연고로 붙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증에 스스로 의심이 들어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이신지에 대하여 물어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천하의 세례요한이 어떻게 그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다른 면으로 본다면 그런 의심 한번 하지 않고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어떤 시대와 세대의 오늘에 읽어도 그것을 대하는 그 사람의 현재 자신의 말씀으로 읽혀지는 것이 가장 제대로 성경을 읽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을 객관적 사실로 보려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그게 무슨 문제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은 의가 아니라 문자로 성경을 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 세례 요한이 의심하고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이신지를 물어보라고 한 것은 오늘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적어도 마태가 볼 때 신앙의 여정에 있어 누구라도 그런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것을 전하고자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최고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최고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표현되듯 그 자아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념과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로 신앙생활을 하는 세계를 말한다. 여자는 성경에서 늘 형식을 나타내는 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앙이 교회에서 또는 성경을 읽고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그것보다 더 온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세계를 기웃거릴 때는 거의 필연적으로 그 기웃거리는 세계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 더 온전한 세계는 이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듯, 하나님의 의가 생명으로 자기 심령 안에 있어서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 마치 생명이 그 본성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금할 길이 없이 된다는 것을 아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전에 정말로 성경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세계인 행위와 소유의 신앙에서 존재가 먼저 확립되면 그 존재에 맞는 행위가 나타나고 그 존재에 맞는 것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이 세계를 의심하고 경계했는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곧 율법의 세계에서 가장 큰 자다. 율법의 세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세계다. 율법이 명하는 어떤 행동규범은 의지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본성이 그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본성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것이 안에 있으신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이신 것이다.


그것에 반해 율법의 세계는 율법에 기록된 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치명적인 약점이자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어떤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이 자신의 행동을 규칙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이 없다는 것, 그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천 가지를 평생 잘 지키다가 어느 한 순간 단 하나, 그 작은 한 순간에만 지키지 않거나 지킬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다 어긴 것이 되는 것이다. 야구에는 퍼펙트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투수가 단 한 명의 주자도 내 보내지 않고, 점수도 한 점도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단 한 명의 주자 그것도 다른 선수의 실수로 주자가 나가기만 해도 퍼펙트는 깨진다. 그리고 그 깨진 게임은 퍼펙트냐 아니냐? 라는 관점에서 보면 점수 100점을 주고 패한 것과 같은 것이듯 율법도 그런 것이다.


그런 세계에 있던 세례 요한으로서는 당시의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이들에게 비난을 받는 예수님께서 과연 메시아인지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인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면서도 어떤 신앙에 대하여 검증할 때는 자신이 타락한 교회에서 인정하는지를 따지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신 것은 어떤 논리나 말씀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증거들을 제시하셨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

는 것을 세례 요한하게 가서 이야기 하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인 증거가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이 바로 율법적인 생각이다. 세례 요한에게 그렇게 답하신 것에는 세례 요한은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세례 요한이라는 정체성이 예수님의 표현된 모습을 메시아의 정체성으로 보는 세계의 최고봉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은 육신이 병든 사람을 고치고, 육신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는 것에 있지 않다. 정작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내려오지도 못했고, 세금도 못 내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런 것이나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린 사람도 다 죽고 없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이라면 오늘 우리는 무슨 상관인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인 증거를 병을 고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사람 본연의 정체성이 각종 병과 같이 아프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하여 가난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기 때문에 그 메시아의 본성이 입고 오신 육신을 통해서 육신을 가진 자로 대변된 병자들을 고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된 소식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를 찾는 것이라면 왕궁에서 찾으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본질인 자신이 아니라 옷과 같이 자신의 육신이 가진 문제가 귀하게 되는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세상의 문제이므로 세상의 왕이 사는 왕궁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다른 선지자보다 큰 것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과 예언이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니 그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자신이 전하고 외쳤던 모든 것이 실제로 나타나서 증거가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말 한대로 선진들의 전한 증거의 원천인 약속을 보았고, 그 모든 말씀이 예수님께로 이어지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모든 선지자 보다 나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낳은 자, 곧 육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려는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과 그런 가치관에 있어서 최고는 세례 요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도 천국에서는 작은 소자 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화가가 그린 꽃도 오늘 피었다 지는 향기 나는 작은 꽃 보다 못한 것과 같은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나라의 본질이다.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분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심령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된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다. 이 생명이란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을 말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행동 규범으로 아는 가치관에 사로 잡혀 있다. 그것은 오네시모와 같이 옥에 갇힌 것과 같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그러니까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늘 애써도 끝나지 않는 한없는 수고에 갇힌 것이다. 그래서 짐이 가벼운 예수님께 가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관점에 대하여 정말로 본질에서 비롯되는 본성이 바로 언뜻 읽을 때 <행하라.>로 보이는 성경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때로 세례 요한과 같이 그것이 의심스러워도 자신과 세상과 또한 말씀을 잘 살펴보면 왜 성경말씀이 병든 자를 낫게 하는지, 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은 정말로 생명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과 또한 생수와 같이 자기 안에 땅에 심겨진 한 알의 씨앗과 같이 심겨지듯 듣고, 그 말씀이 잉태되어 예수님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본성이요 말씀과 같아서 예수님께서 그 본성을 표현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행동 규범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애곡해도 가슴을 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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