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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가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사람이 따라 가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이 사람도 따라 가야 하는 길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목숨을 버려서 자신은 사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은 형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마치 불을 밝히고 사라지는 초와 같이 이 육신이라는 삶의 장막이자 형식을 소진해가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야 하는 창조 목적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목숨이라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과는 좀 다른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무생물이나 심지어 사회의 제도와 같은 것에도 살아 있다고 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목숨은 정말로 단순하게 육신에 한정하는,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고 하는 것 그것 하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생명은 의도와 목적이 이루어지고 있으면 산 것이고, 목숨은 육신이 숨을 쉬고 있으면 산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목숨을 버리고자 하면 살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몸 가진 인생을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용하면 살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의를 지켜내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교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한정된 말씀이 아니라 일상에서 늘 있어야 하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이 복음은 순교하는 특별한 상황과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 외에도 그냥 매일 큰 변화가 없을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은 늘 목숨을 버려야 하는 일들로 가득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사람 사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눈뜨면 일어나는 집에도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있어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고, 집을 나와서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제법 많은 이들과 마주치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때로 그렇지 않은 날과 세월이 있어도 우리의 삶은 그렇다.


그렇게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다 처음에는 선악과를 먹은 인생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나 같이 자기가 마주하는 일과 사람에 대하여 어떤 것이 선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나 법은 물론이고 자신이 살아오면서 자신 만이 경험한 것과 여러 가지 가치 기준에 의하여 누구나 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다 가지고 있다.


사람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실재로 어떤 부부가 삶은 감자를 찍어 먹는 것이 소금이다 설탕이다 하면서 결국은 이혼을 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사람은 다들 그렇게 작고 사소한 일에도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자기 생각이 다 있다. 그건 누구나 살면서 자신을 조명해 보면 매 순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순간 상대가 옳다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법과 기준과 그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용납되지 않는 죄인이라 주장하는 그 주장에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가진 세상적인 가치관, 또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그 가치관에 나를 내어 주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희생이 따른다.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빌라도에게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인하여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 가셨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주장이 옳다고 수용하면 그것에 따르는 희생이 수반된다. 어떤 일은 분명히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인데 잘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잘 하고 옳다고 주장하는 대로 두면 많은 경우 일을 그르치고 그렇게 되면 일을 수습하기 위한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희생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상의 일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유대인과 로마인이 가진 선악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신 것이었는데 그렇게 사람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이유는 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크게는 나라간의 전쟁이고 작게는 우리가 만나는 일상에서 다른 기준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삶은 많은 희생과 수고가 따른다. 그것이 사랑이다. 내가 사회적으로 볼 때 선하게 여기는 선한 일을 베푸는 것은 사랑의 변방에 있는 것이고, 자신이 옳다 주장하는 그 주장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기준에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고 그것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신 것도 바로 그 이유다.


그런 수고와 희생은 필연적으로 육신을 가진 삶을 소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길과 같은 생명으로 소진하고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숨은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이기에 육신의 모든 가치를 대표하는 것이다. 바로 그 목숨을 버리고자 한다는 것은 육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이 옳다고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산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선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삶을 산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모두가 자기 삶이 옳다고 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추구하며 사니 세상은 항상 소란하고 갈등이 넘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이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가 만연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선함을 인정받는 것은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는 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주장하는 것 그것이 선이라는 것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선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군가 딱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정의하라고 한다면 나는 자신의 생각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 자신의 가치관이 선한 것이고 옳은 것이라 주장하는 그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내는 생각과 그로 인한 상황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것은 내 생각 아닌 모든 것에 순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진정한 선함이다. 사람의 육신은 바로 그것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 산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삶을 사는 사람으로 인하여 갈등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평화의 왕인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누가 가다가 휴지를 주우라고 하면 주워야 하는 것인가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떨어진 휴지를 보고 그냥 가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휴지가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또 세상이 자기에게 준 권세로 그것을 주우라고 요구하면 줍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렇듯 어떤 일 앞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요구되는 것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살았을 때 십자가에 그렇게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을 사는 것,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반대로 목숨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육신의 번거로움과 육신의 체면과 자기가 생각하는 의로움에 대한 자존심을 챙기고 얻는 삶이다. 그런 것은 누구나 좋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신앙 안에서 보면 문제가 좀 다르다. 그러니까 길에서 전도하는 사람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그것이 정말로 좋고 선한 것이며 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맞지만 그것을 그렇게 강제하듯 주장하는 순간 자신의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려고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존귀한 분이라는 것을 지키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바로 그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을 강제로 전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고, 진리는 언젠가 다 대접을 받는다는 것만 알아도 예수님이 진리라는 그 절대성은 결국 다 인정받게 되는 것인데 사람이 그것을 주장하는 순간 유대인과 같이 자신의 선함이 되는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나,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시는 말씀이 싫은 사람, 생각지도 않고 있는 사람을 영업하듯이 교회에 데리고 오라는 것이 아니다. 길에 가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잔치를 채우라는 것은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열심히 살아서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오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삶, 목숨을 버려가는 삶이 주는 성령의 감동이 있게 하라는 말씀이다. 길이라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고, 가장 사람을 강하게 권하는 것이 그 마음 안에 스스로 감동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고, 때와 무관한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신앙인들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순교라는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아니 지금 내 앞에 벌어진 상황에서 모두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하고, 자신의 목숨과 육신의 평안과 안위를 위하여 추구하는 그 모든 주장 앞에 나를 내어 주어 십자가를 지듯 수고하고 희생하는 사랑으로 사는 것,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요,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어 성경의 모든 말씀을 범하려고 죽어라 애를 써도 항상 지키고 사는 삶이 되는 하나님 세계의 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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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는 무엇인가? 보통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인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문제들은 많은 경우 상대적이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건강이 좋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의 십자가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보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면 경제적인 문제가 자기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십자가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다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것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진 자신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가진 고유한 자신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보편성이 있게 말씀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진 자기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는 독립된 자신의 인생, 육신을 가진 삶 그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는 것은 육신 가진 너의 삶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삶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산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육신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사람이 가진 육신이 바로 자신의 십자가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속한 육신의 삶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행위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필리핀인가 어떤 나라에서는 실제로 그런 행사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는 관점이 아주 초보적인 결과로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는 관점은 아주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들은 그 명령의 표면적인 실천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의미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아니다. 이는 이 블로그 요한일서에서 다룬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또 하나의 행동 규범으로 보면 그것은 율법주의가 되고, 반대로 의미만 알면 되지 행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거나 필요 없다고 하면 영지주의가 된다.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마치 생명의 본성 곧 유전자가 그 생명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의 의와 목적이 사람 안에 생명처럼 있으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그 의가 사람 안에 생명의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으면 예수님과 같이 자기 십자가 곧 육신 가진 삶을 예수님과 같이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을 나타내는 한 방법으로,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으로 인하여 실재로 십자가를 질 수도 있는 것이다. 베드로처럼.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보는 이런 관점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아무 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앞서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사람 안에 하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회복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이 회복되어 사는 삶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육신을 가진 삶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이며, 그 총화가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이 삶을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삶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은 삶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하나님을 모르고 모독했다고 죄인이 되어 사형을 당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도 어떤 분야, 또 어떤 일에 마주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수긍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마주 했을 때 그 일에 대하여 분명히 잘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자기의 생각대로 하려 하는 것을 수용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반드시 문제가 되고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는 수고를 감당하여야 한다. 바로 그 수고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은 곤고한 일인 것이다.


이 블로그에 자주 인용하는 정도전과 정몽주의 마지막 대화가 그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반드시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기 손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정몽주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지켰다. 그것이 자신이 믿는 이상적인 국가에 대하여 자신이 십자가를 진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일이 잘못되면 버릇처럼 큰 일 난다고 말한다. 종이컵 하나 사용하는 것도 때로는 '사람이 그래서 되느냐?'는 핀잔을 들을 수 있다. 그 작은 일 하나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함에 굴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굴복한다는 것이 바로 죄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에 대하여 상대가 옳다고, 이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러면 사람들이 일에 따라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싶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일 보다 더 급박하고 어이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는데 그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데 끌려 가셨다는 것은 온 인류의 구원하는 일이 망쳐질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의 목숨을 요구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끌려 가셨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는데도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자기가 생각하는 선함이 아니라고 죽이려고 하는 이 상황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과 로마인들이 자신들이 선하다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온 인류를 구원할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그것도 극악무도한 죄인과 같은 사형수가 되어서 말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것이 육신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다.


그러므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사람 사이에서 무엇인 선한가를 다툼에 있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선하다고 주장하고 나는 틀린 사람으로 만드는 것 앞에 나를 항상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보다 더 심각하게 나에게 선을 주장하는 일이 죽을 때까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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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예수님보다 자신의 혈육(부모나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것 또한 많은 신앙인들이 상당히 오해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런 오해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이나 요한일서 4장과 같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이 사람에게 육신에 관한 헌신을 기록한 것으로만 보면 사랑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증거이자, 사람에게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먼저 있으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랑,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희생과 헌신의 모양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심령 안에 본성과 생명으로 있어서 그것이 표현될 때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자,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다. 생각해보면 젊은 남녀는 서로 끌리고 소위 밝힌다고 말하듯 혈기 왕성할 때는 이성이면 다 좋아할 수 있지만 오직 한명의 이성만을 자신의 짝으로 사귀어 가고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것은 그 한명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스치며 지나가고, 또 서로 얼굴은 보지만 인사도 없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중에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어떤 관계로 인하여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그렇게 부여된 의미로 인하여 서로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사람의 사랑이고 또한 그것이 삶이다. 그런 연고로 사람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없어지면 살아가는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게도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고 또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의미를 알게 하는 것,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인생이기에 살아가는 목적과 이유와 의미를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수님보다 부모나 자식을 더 사랑하면 예수님께 합당치 않다고 하시는 것은 헌금보다 부모님 용돈을 더 더리면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예수님보다 보모나 자식에게 두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또한 독립된 인생으로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이유가 다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부모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동양의 유교에서 그런 사상이 강한데,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나의 근원인 부모도 또한 부모가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부모에게 근원을 찾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 부모 역시 근원의 근본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가는 하나의 고리이기에 인생으로서 진정한 삶의 의미가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그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생의 존재 목적의 표상이고, 육신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와 이유를 가지신 분이기에 그 목적과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부모나 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부모나 자식에게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으려 하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합당하다는 표현이다. 여기서 특이하게 합당(worthy)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아닌 부모나 자식에게서 인생의 의미나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될 가치나 자격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의 본질을 모르고 자신의 신념과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선악과를 먹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육신의 부모를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있노라 하고 그 부모를 또한 자식을 외면하면서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합당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법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도 육신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되듯,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그 육신을 통하여 그것이 표현되게 된다. 사랑이 표현이 된다고 하는 것은 부모나 자식에게 누가 봐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부모와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여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또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자신과 같이 인생의 의미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사랑일진데 부모와 자식 그리고 또한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부모를 배척하지 않는다. 부모나 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며 부모나 자식은 돌보지도 않고 교회만 다니는 것이 예수님께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은 알지 못하고 모양만 아는 외식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아는 것, 또 알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 그 부모나 자식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아는 사람이 되도록 헌신하고 사랑할 것이고, 또 같은 신앙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생명을 나눈 형제로서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육신의 사랑 표현법으로 대변되는 사랑으로 예수님을 대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자신의 사랑으로 또한 자기 인생의 목적과 본질로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기에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찾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서 발견하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인생을 주신 이유를 그 안에서 발견하므로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나 자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 말씀을 알게 되었다면 예수님과 같이 모든 인생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는 사랑의 수고를 감당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의 부모와 자식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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