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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과 그 앞뒤에 나오는 외식에 관한 말씀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과,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과 두 주인에 관한 말씀들은 전부 하나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 역시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좀 확장해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궤를 같이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Allegorical한 해석이 아닌가 싶겠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을 기반으로, 또한 주제 중의 주제로 삼고 있고, 그 주제는 생명과 같은 것이기에 그 생명이 보여주는 다양한 본능과 생명에서 비롯된 행동 양식을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고백적이고 간증적인 측면이 아주 강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성경의 주제를 아는 사람(여기서 안다는 것은 체험하고 체휼되어 자신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이 그 생명을 표현하고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수학 교재를 저술한 사람이 수학을 알지 못하고 기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는 관점은 성경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고,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며, 그것을 주제로 삼은 목적은 성경을 읽는 사람, 곧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회복되어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경의 주제와 기록 목적을 알지 못하거나, 그것과 다른 것을 목적으로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게 믿는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 자신이 본질을 왜곡시킨 하나님일 뿐이다. 그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성품과 의도와 다르게 하나님을 대하는 모든 신앙은 다 우상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성경의 주제와 목적을 알게 된 사람에게 성경은 자신의 일기와 같고, 자신의 자서전과 같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심령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싹이 나고 생명이 되어 자신 안에 거듭난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자신의 몸과 행동과 삶을 주관하게 되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 보는 자신의 삶이 성경을 읽을 때 마다 그 안에서 증거를 찾고 확인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 곧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늘 말씀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을 사람의 유전자와 분리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 곧 정체성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떻게 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법은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하는 관점은 늘 이와 같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반대로 살려고 해도 되지 않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생명의 특성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고, 생명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았다는 것,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바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생명의 본성이 된 사람이 된,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이미지와 성품을 나타내는 아들이 되는 것이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해보면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육신은 영이시기에 육신이 없으신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며, 이 육신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표현되는 도구이며, 그려지는 캔버스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 전부가 그렇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면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살면서 이 육신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이 육신에게 본질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육신으로 행하는 행동이 육신을 주신 주된 목적이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육신은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생명이 표현될 때 사용되는 표현법이고 도구이며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의 어떠함이 먼저가 아니라, 이 육신으로 표현할 그 무엇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 사람 안에 채워야할 하나님의 목적과 의가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스스로 그것을 채우고, 그래서 서로를 심판하고, 그것도 모자라 진흙에 짚을 넣어 만들고 구워(사람에게 뭔가를 더하고 단련시켜) 하늘에 이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금식하라고 하고, 내용 없는 육신의 어떤 모양 곧 외식을 금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뜻은 외면하고 말씀을 행동 강령으로만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이다. 즉 사람들이 의는 외면하고 행위로만 하나님께 나아오려 하니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온전하신 하나님의 의가 있어 비롯되는 행동 양식을 법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을 테스트하거나 약 올리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용 없이 형식이 나올 수 없음에도 그렇게 하겠다는 이들에게 내용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을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율법이나 복음이나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나 같은 의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내용은 없이 내용에서 비롯된 형식을 어떻게든 완성해 보려는 인생들에게 내용이자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내용(말씀)이 있어 그것이 표현(육신)되는 온전한 모습으로 오셨기에 율법이 완성된 것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 쉬운 것인데 사람들이 자기 안에 하나님 아닌 것을 채워 놓고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안에 있어야 비로소 행할 수 있는 것들을 내용 곧 하나님의 의는 없이 행동만으로 지키려 하니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성전에 이방 신상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단순한 진리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보니 어느 순간 부끄러워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이 육신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로 규정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처럼 되려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는 어떻게 보면 육신에 대한 관점이 자기 맘대로 보는 상태로 바뀐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 중앙에 두셨는데, 그것은 만족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악과는 어떻게 보면 육신이다. 더 정확히는 육신에 대한 관점인 것이다. 이 육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에 부족한 것으로 보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고, 이것을 하나님이 지으시고 만족하심과 같이 이 육신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셨음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은 회복이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선악과의 문제도 율법의 문제도 다 해결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이 육신에게 필요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사람이 채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아의 배고픔과 갈증과 정체성을 채우는 온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육신의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으신 육신이 필요한 것을 예비하지 않으셨겠는가?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려면 먹고 마시는 것 보다 교회 생활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냥 당연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계속) - 중요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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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9-34 눈은 몸의 등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9. 17:0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또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도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을 육신의 눈으로 보면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복음의 보편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복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복음이어야 한다. 맹인이든, 병든 자든, 또 죄인이든 창녀든 그 누구라도 그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 복음이다.


특히 교회나 신앙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신앙 좋은 사람들에게 더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더 좋은 신앙이라고 인정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신앙이 복된 소식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좋은 신앙을 주셨으면 주셨지, 그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신앙이라는 조건으로 대접 받는 것을 위하여 주신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라도 모든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한다. 신앙 좋은 사람에게는 복된 소식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저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앙 좋은 사람을 보고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고, 더 좋은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마음에 불 일 듯 소망이 일어나면 되는 것이지 신앙이 좋다고 신앙 없는 사람을 심판하면 그건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잠깐 딴 곳으로 간 것 같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생각이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분명히 여기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신의 눈으로 볼 것이라 생각이 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눈이 육신의 눈이라면 맹인은 예수 믿을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즉 그렇다는 것은 이것은 육신의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렇다는 것은 복음은 사람의 형편이 어떠하더라도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흔히들 사람이 가진 눈은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육안이고, 두 번째는 식안(識眼)이고 다음으로는 혜안(慧眼)이고 가장 높은 수준의 안목을 목안(目眼)이라고 한다. 육신의 눈과, 지식의 눈, 그리고 지혜로운 안목, 그리고 그 모든 것 보다 더 나은 안목은 목적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은 가치관이다. 즉 사람의 가치관과 안목이 어떤 안목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것은 목적을 아는 안목과 가치관은 몸에게 등불을 비취듯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목적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몸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그 사람의 가치관과 안목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며, 그 가치관과 안목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향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성경을 흐르는 기본적인 흐름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안목과 가치관이 사람의 삶을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몸을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를 바로 알고 있는 안목이 있어야 몸이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육신과 삶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으로 이끌 때에 안목이 온전한 것이며, 그럴 때에 삶이 상하지 않고 온전해 진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어진 말씀과 같이 몸은 하나이기에 하나의 안목을 좇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을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목적은, 존재의 목적은 당연히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몸이 어디로 가는지와 주인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몸을 가진 인생이 두 가지 가치관을 좇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친관은 결국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한다면 신앙의 타락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 보다 하나님과 다른 것을 혼합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전에 이방신상을 가져다 놓는 것이고, 영지주의가 또한 그것에 뿌리를 두고 타협한 것이다. 타협이라는 것이 결국 신앙에 있어 두 가지를 함께 섬기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앞에서는 보물에 대하여 그리고 이 말씀 다음에는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런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육신에 관한 것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물을 땅에 두지 말라고 하시고, 의가 육신보다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아는 눈, 곧 가치관과 안목이 있어야 사람이 몸으로 살아내는 삶이 땅에서 오는 것을 함께 섬기지 않고 온전해 진다는 것이다. 이 말씀들은 생각해보면 오묘한 말씀이다. 하나로 흐르는 연결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을 본질로 여기고, 인생이 어디를 보아야 하고,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또한 그 구조, 그 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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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또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비단 보물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만 생각해봐도, 집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때론 그것 때문에 집에 일찍 가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데, 하물며 자신이 보물로 여기는 것이라면 마음이 항상 그곳에 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연한 말씀을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인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보물로 여길 것인가 하는 것과, 땅과 하늘은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보물이라는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가치는 본질을 알아야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무엇인가를 보물로 여긴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의미를 알 때 보물로 여긴다는 것이고, 그 의미가 가치가 있다고 여길 때 보물이 되는 것이다. 가치나 본질을 모르면 돌 같이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다이아몬드를 돌처럼 가지고 놀았다고도 하는데 가치를 모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최영장군이라는 사람이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그게 황금을 돌처럼 여기라는 것이 아니다. 돈이라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보물로 여기고, 어떤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것을 본질로 또 목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의 이유에 있다. 자동차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이동하고자 하는 목적의 달성 능력에 있다. 또는 경주용 자동차는 경주에서 승리하는 목적에 그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라도 그 존재의 목적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의 가치, 사람의 보물은 존재의 의미 그것이 최고의 보물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어떤 능력이나 자신이 가진 재물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매기면 굉장히 분노하고 화를 낸다. 배신감을 느끼고 모멸감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그냥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가치를 매길 때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렇듯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가치는 존재의 의미이지, 사람이 가진 돈이나 능력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땅에 있는 것에 둔다. 땅에 있는 것,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과 같은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좇는다. 그리고 그것에 명분을 부여한다. 세계평화나 나라의 민주화와 같은 것에서부터 가족을 위하여 까지 다양한 것을.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의 의미를 되묻곤 한다. 그것은 자신이 가치 있는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이 들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 존경받는다는 스님도 "인생은 무(無)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어갔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적질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보물, 곧 자신의 가치를 하늘에 두라고 하시는 것이다. 마음은 보물이 있는 곳에 있으니,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는 것은 마음을 하늘에 두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하늘에서 찾으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하늘에서 찾으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땅과 하늘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하늘의 상태를 땅이 표현하는 것이다. 하늘이 흐리면 땅이 젖고, 하늘이 건조하면 땅은 마른다. 하늘에 봄이 오면 땅에 꽃이 피고, 하늘이 차가워지면 땅에 겨울이 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땅의 흙으로 지어진 인생은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의와 뜻을 자신의 보물로 여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 하나님의 뜻을 보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에 맞는 가치를 회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치, 사람이 가장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삶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과 같은 것을 좇지만 그것은 좀이 슬고 동록이 들며 도적이 훔쳐가듯 사라지고 결국은 삶의 의미를 잃고 만다. 그것은 다 땅에서 비롯된 것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땅이 변하듯 따라오고 수반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의 의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결국 사람의 가치, 사람에게 보물과 같이 가장 귀한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창조주에게 있는 것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때 진정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 피조물이다. 정말 목적에 맞는 성능 좋은 자동차의 가치가 그런 것이듯. 그리고 그 목적이 창조주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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