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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말씀은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다 아는 말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와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어도, 도덕적으로나 사회 윤리에 있어 아주 도움이 될 말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이 윤리적은 것은 결과적으로 그런 것이지,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론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제는 <의>에 관한 것이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다. 구제하라고 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도우라는 말씀이 아니다. 살인이나 간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고 육신에 관한 살인과 간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경제적인 형편을 최종목적으로 삼지 않으신다. 더 엄밀히는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의를 나타내시려고 하실 때 필요하다면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면 사람이 곧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도 상관하지 않으신다. 성경에서는 의에 관하여 하나님께 반하면 민족을 쓸어버리기도 하시는데, 그깟 경제적 상황이 하나님께 중요한 관점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제함도 하나님의 의와 연관된 말씀인 것이다. 


그 의를 나눔, 의가 간절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눔에 있어 육신을 가진 사람이기에 나눔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나누는 것으로 구제가 표현되고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의 육신의 삶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구제하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왜냐하면 재화와 용역에 관한 구제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육신에 관하여는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 안에 있으면 결국 육신의 삶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기준 조차 지켜내는 , 아니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하라(마 6:1)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그것을 알아주는 것을 목적으로 나타내거나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은밀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갚으시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의를 숨기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의를 행하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듯이 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는 드러내려 한다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주 은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은밀한 것은 성령이 보이지 않으심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보고 자신도 감동을 받아 그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아가는 과정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아니 영혼 깊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은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의를 전해지는 과정에서 육신의 눈과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보았기에 그것이 심령 안에서 싹이 나는 것이고, 들었기에 싹이 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은밀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 은밀함이 어떻게 왼손이 알도록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하면 하나님께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옳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육신으로 여유가 있어 구제하는 것이야 좋은 일이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문자 그대로 은밀히 하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상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하지 않음만 못하다. 왜냐하면 돈 잃고 목적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구제는 의를 구제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형편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이를 위하여 구제하고 수고하는 것은 의를 구제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다 보니 구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상 주신다고 하니 은밀하게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밀하게 구제하라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고 하니 신문에 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성경은 외식이라고 한다. 즉 내용 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그 생명이 된 사람이 은밀할 수밖에 없는 성령의 감동으로 생명이 전하는 의의 구제라는 내용 때문에 나타나는 구제가 아닌 구제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고, 왼손이 알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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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연관 지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잘 없다.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사람이 알고 있다면 그런 것에 대하여 분명히 이야기 해 나가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은 든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는 말씀을 하나의 말씀으로 하고 계신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도 하시는데, 이것은 교회공동체가 정말로 새겨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관계,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삶의 목적이 된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사랑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온전함과 연관된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과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다른 종교의 사상과 세상의 학문의 기조에 편성된 흔적이 있으면 그것을 변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창조과학회와 같은 시도,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을 신앙의 타락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냥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이면 누구나 감동할 수 있고,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으면서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했고, 과학적인 이해 능력이 부족해도, 다른 사람이 볼 때 사람으로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사는데, 그 이유가 예수님 때문이면 되는 것이다. 그게 신앙의 전부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신앙의 가치를 대단하게 여긴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2,000년이라는 가마득한 옛날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대단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은 정말로 유일한 신이시고,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구원자이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 대단함은 우월한 자리에 서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은 정말로 대단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닌가? 그런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분이다.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고 대단한 것이고, 그것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것이지만, 그 대단함과 자부심은 정작 그것을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종이 되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을 섬기고, 그것을 모르면서 오히려 안다고 소리치며 알고 있는 나를 죄인 취급하는 것에 내어주기 위한 대단함이고 자부심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 모든 믿음과 자부심과 하나님의 영광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 동안 내내 기독교인들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이 정말로 놀라운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고,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타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영광을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온전하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놀라운 믿음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섬기고, 그들을 자신과 같은 자리로 부르기 위하여 그 모르는 사람들, 쉽게 죄인이라 규정하는 그 사람들에게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못 박은 백부장이 오히려 예수님의 그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그 사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을 전한다. 오늘도 길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은 그렇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보여줌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이 없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가진 세상의 지식과 또한 신앙에 대한 가치관으로 나를 심판하고 규정하는 것에 나를 죄인으로 내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신앙을 가진 것이 하나의 '갑'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과 신앙이 부족하고 잘못되고 없는 것을 훈계하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온전하심도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아니다. 그런 것과 거리가 먼 것이고, 오히려 그것은 신앙이나 믿음이 없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원수가 되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을 기준삼아 세상과 사람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심판하고 판단하여 다른 사람을 그 기준에 따라 악한 것을 제하려 강압하고 스스로 정한 선한 것을 강요하는 그것이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의 모습과 가치관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원수 관계가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 내가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과 같이 나도 죄인이 되어 그들이 옳다는 것에 의해서 나는 죄인이 되어 심판을 받고 죽는 것 그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사람을 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또한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는 알고 돌아서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그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한 인생의 의미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한 사랑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고, 그렇게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바뀌는 가장 온전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어떤 것을 보고 자기 마음 안에서 바뀌어 나오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온전하게 바꾸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에서 밖으로 의가 표현되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의 법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의 가치를 갑의 위치에서 전하려 하는 것에 있어 크게 안타깝게 생각한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과 대적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쳐부수려 한다. 이건 신앙에 있어 엄청난 오류다. 그러나 이것은 만연한 것이다. 교회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크게 지은 것을 비판하면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목사가 실정법을 위한 한 것을 따지고 들면 마귀의 짓이라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신앙이 없으면 목회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교회나 목사나 신앙에 대하여 도전하고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를 내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자기 아들을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신앙 없이 믿음이나 목회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나를 내어주지 않고, 교회를 지키겠다고 그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원수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돌아가신 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원수들의 가치관에 나를 내어 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온전한 계획이기에 그렇게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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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43-48 원수를 사랑하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3. 10:55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숙제와 같은 말씀이다. 실제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나?'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고 또 질문을 많이 한다. 이 문제가 아주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기도 하다.


원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나에게 행악한 원수에게 밥 퍼주고 발 씻겨 주는 그런 모습을 보이라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말씀의 실체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생명이 되라는 말씀이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 성경에 표현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율법적 관점에서 도전하면 어려운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면 성경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에서 비롯된 행동 양식이기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참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어진 말씀을 우리는 간과하면 안 된다. 그냥 살다가 나와 원수가 된 사람이 있는데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4-45)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성경 어느 한 절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그 강렬한 말씀 사이에 눈에 크게 띄지 않는 말씀들이 아주 중요한 단서이고 열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한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말씀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빛을 비추고 비를 내린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선과 악을 분리하고 선한 것만 추구하려는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자기의 하나님이 있는 것의 대칭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원수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곧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도 기도하셨고, 또 원수 같은 그들을 대적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인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모습이다.


그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가진 가치관이 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으로, 사람이 어떠해야 선하게 된다는 자신들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께 원수들이나 하는 짓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볼 때는 예수님은 정말로 악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 악함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스스로 왕이라 하는 반역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에게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며 기도하셨고, 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를 찌른 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게 하여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는 사랑, 사람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알게 하는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 즉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셨다는 것이다.


원수라고 하면 무협지에 나오는 '내 부모를 죽인 원수'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원수는 비단 그런 원수뿐 아니라 사람이 다른 사람을 원수로 여기게 되는 기본 이유가 있고, 그 이유로 인하여 서로 원수가 되는 모든 사람들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원수가 되는 모든 이유가 바로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하여 판단하고 그 중에서 악을 응징하고 선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그 선악과의 본성이 모든 원수 관계의 근본 원인이고, 그 마음이 드러나서 서로 원수가 되었을 때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또 자기가 정한 기준에 악하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 그것을 죽이려 할 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보여서 그 사람에게 선과 악의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사람은 그렇게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사랑을 나타내라는 말씀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즉 이것은 악인이라는 것이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악인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은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므로 죽은 자와 같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서 보신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거나 악인을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악은 모두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을 뿌리 뽑고자 자행하는 것과, 선을 이루기 위하여 남을 죽이기까지 하는 선악과의 본성이 사람이 아는 모든 악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성들이 사람 사이에 원수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사람 사이의 원수는 그렇게 생기는 것이고, 그렇게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의 과제로 삼고 실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개가 될 수 없듯이, 그런 생명을 가진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오히려 그렇게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것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싶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생명의 본성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 길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성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는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 사건에서 비롯된 원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의 범주로 놓고 보면 오히려 일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들을 말한다. 그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사람에게 선을 이루기 위하여 또 자신이 생각하는 악을 물리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 원수가 되는 모든 인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죄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긴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선하다는 것을 말하고 증명하기 위하여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사람에게 대항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죽을 것이다. 괴로울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죽음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죽음이야 말로 살아 있다는 것이기에 살리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런 죽음을 당한 나의 모습,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죄인이 되어 죽어가는 모습을, 선을 주장하고 나를 십자가에 끌고 가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이 보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고, 자신도 그런 삶을 살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서 삶의 의미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죽인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감정적이고 사건으로 비롯된 사람 관계 안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정확한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한 탓도 있다고 봐야 한다.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분이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을 찌른 자들 까지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랑의 법과, 또한 그것을 깨달은 자들이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사랑을 전하신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한다. 하지만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죄인이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원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성은 어떻게 보면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적어도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정말이어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이 쉬운 것이 되어야 한다. 본성이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은 이유가 있다. 성경이 어떤 측면에서 보면 간증과 같고, 체험한 사람들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체험한 사람에게는 너무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요원한 것이다. 수동 운전을 하는 사람은 경사진 곳에서 브레이크 없이 엑셀과 클러치만으로 정지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체험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도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분명, "왜 노력해야하지?"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이 그러하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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