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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에 신랑이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여기서 금식에 대하여 알아보기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을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행위로 지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행위가 아니라 본질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들으면 과연 그래도 되는가 생각하고 또 의문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블로그를 보고 있는 분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보통은 예수님께 병자와 같이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 찾아와서 그것을 회복시키시면서 말씀과 의를 품은 기적을 보이시고, 이것에 대하여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이 시비를 걸고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는 구조가 많은데, 여기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같이 하지 않느냐며 질문을 하고 있다.


앞에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포스팅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여정을 세례 요한을 통하여 설명한 적이 있다. 우리는 다 애굽의 피라미드가 상징하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인생을 바라보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출애굽 시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맞추어 가고 서고 살듯이 광야를 하나님의 말씀을 규범처럼 행위로 지켜내려는 신앙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일렬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자유롭게 살게 되는 신앙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 신앙의 여정에서 두 가지 큰물을 건넌다. 하나는 홍해라는 바다, 곧 세상을 거쳐내고, 다음은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바다는 늘 말하듯 세상을 의미한다. 특히 홍해를 건널 때는 바닷물이 갈라져서 바다의 밑바닥을 걸어서 건넜다. 그것은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다. 들어갔는데 그 안에 있지 않고 나왔다는 것은,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피라미드로 대변되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가득한 바다 같은 세상에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물세례를 의미한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은 광야의 삶과 같이 어떤 소리(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맞추어 행동 하듯, 하나님의 말씀이 음식 먹는 것, 가고 쉬는 것에 이르기 까지 다 신호와 같이 명확한 행동 규범으로 지키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또 하나의 세례 곧 성령 세례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행위로 지키는 것에 대한 반항이나 반대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렇게 살도록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여기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게 하시려 한 것과 같이.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의문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신은 다르다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려 할지 모르지만 거의 예외 없이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도 홍해 앞에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의심한 것과, 세례 요한도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물어보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의 신앙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렇듯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야말로 생수가 자기 안에서 넘치듯 성경 말씀에 대한 의문이 없고, 생명이 심령 안에 있어 의지로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생명의 본성이 삶을 주관하므로 성경 말씀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까지는 많은 의문과 불신의 여정을 거치게 된다. 이것은 지나서 보면 누구나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이것을 안다고 그런 과정을 건너 뛰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죽을 땅이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죽어야 하느냐고 의심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이라 말씀하셨다. 신앙이 얼마나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나,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았다.


지금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바리새인과 같이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 역시 의심이고 반문이다. 이것을 요즈음의 말로 바꾼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자연스럽게 지키면서 살 수 있겠느냐?

라고 반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그것과 같은지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대하여 답변하시면서 혼인잔치에 신랑이 있으면 금식할 이유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는 것은 신랑이 없는 것이 금식의 상태라는 것이고, 하나님께 금식을 하는 이유도 신랑을 달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신랑이 혼인의 목적이고, 혼인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신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그 심령 안에 혼인잔치의 신랑과 같이 예수님의 생명이 있으면 굶을 이유가 없는 상태이고, 또한 배부른 상태라는 의미이다.


이런 모든 말씀은 다 한결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상이 없으시기에 하나님 스스로를 표현하셔서 그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목적과 의를 달성하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성품을 표현하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목적이다.


그 하나님의 목적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기적을 일으켜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우리 같은 삶을 사는 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있고, 그 삶이 그 목적, 그 생명을 표현하는 삶을 사셨기에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는 어느 시대, 어떤 나라나 문화에 살더라도 예수님과 같이 인간이라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는 본성으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과,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그 존재가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 삶을 주관하는 의와 본성으로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삶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또 금식하듯 애쓰지 않아도, 또 세상에서 성공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화가 있어 보는 이들도 그렇게 살고 싶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말씀만 온전히 깨달으면 성경의 말씀을 다 행하며 살 수 있느냐?>라는 의문이나,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는 그런 형식을 지키지 않고, 그런 종교적 노력을 하지 않느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자신의 삶이 그 생명으로 주관되고 있다는 경험이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그런 의문이 있다면 바다는 절대 잔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이 평안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이 없듯 신랑이 없는 것이므로 금식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들은 것이 있다면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은 사람이 사람이라는 삶을 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그런 삶을 사는 자리까지 가서 그 삶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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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 자신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여 가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 뜻을 배우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는 호세아에 나오는 말씀으로 원문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에 대하여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경건하고, 행실로 본다면 세리나 창녀 그리고 죄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도덕적이고 경건한 삶을 신앙으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했다고 모든 것이 엉망인 사람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런 그들에게 성경을 인용해서 성경을 다시 배워오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빈민촌에 사는 사람이 억만장자에게 경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건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성경의 조문은 알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보고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인데 그것보다 긍휼(인애)을 원한다고 하신 것이다. 제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위한 것이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바꾸어낸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 그 자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 하는 세리와 죄인은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죄인이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제사를 드리는 가치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이 있는데 그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고, 죄를 시인한다는 것은 그런 가치관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사를 드리는 가치관, 세리와 죄인들을 죄인이라 규정하는 가치관은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 그 자체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므로 사람의 행위를 규제하고 더 나아가서 본능조차 억제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제사의 규례가 정결하게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결함 역시 율법과 마찬가지로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정결함이라는 의가 있다. 그리고 그 정결함이라는 것이 바로 인애라는 것이다. 즉 제사가 본질이 아니라, 제사를 통하여 보이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으로 보면 문자가 아니라 행간을 읽어야 하듯이 제사라는 것도 행간과 같이 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긍휼과 인애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긍휼함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할 때 예수님께서 지금 보여주고 계시는 것과 같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이다. 이 죄인들은 사람들이 죄인이라 여기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자리에 온 사람들이다. 즉 세상의 가치기준, 바리새인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고 공론화되는 것을 감추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범죄하고 숨은 아담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긍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려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지금도 어떤 교회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못살게 굴고 버리기도 하는데, 그건 이단 중에 이단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보자. 이건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그 예수님을 지금 죽이려고 한다. 아직 예수님 외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알게 하려 하시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상황인데,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므로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칼을 뽑아서 항거했다. 그리고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노라니 도무지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도 모르겠고, 또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이 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교회도 그렇게 노력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죽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살리려고 사람을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애와 긍휼을 모르는 것이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서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있는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많다. 교회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교인들을 비난하고, 사회적 요구에 불응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핍박이라면 저항한다.


그것은 마태의 집에 온 죄인들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즉 사회가 자신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의 교회를, 또 예수님을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며 항거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회와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여 죽으신 것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태의 집에 죄인과 함께한 예수님을 비난한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바리새인이 달리 바리새인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 지금이라고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교묘한 모습으로 믿는 사람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기준으로 심판 받는 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죄인이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태의 집에 모인 죄인들은 그렇게 모이면 죄인이라 흉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그날이 아니어도 늘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인데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죄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무릅쓰고 지금 모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기준 앞에, 바리새인들의 기준과 법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시인하고 무릅쓰고서 모인 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제사를 긍휼함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보다 번제를 그리고 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들이 볼 때 어처구니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립은 예수님이 죽으실 때까지 계속된 것이고, 지금도 늘 우리 곁에 있는 대립과 갈등이다.


반대로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사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 들여서 그 삶이 하나님의 의와 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음을 무릅쓰고 모인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제사의 의미가 완성되고, 바리새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율법이 완성된 온전한 모습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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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에서부터 마태를 부르시고 또 이어 금식에 대한 말씀까지 계속 보이시고 말씀해 가시는 내용은 주제가 있다. 지금 마태복음이 전개되고 있는 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시고 산상수훈을 하시고 내려오시는 일련의 행적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형식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에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보이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대하는 두 부류, 하나는 심령이 가난한 백성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이 그들 인생의 본질과 의로서 받아들여지고 있고, 또 한 부류인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과 같은 부류는 그들이 가진 가치관, 곧 본질이 아닌 형식과 행위를 중요하게 보는 그 가치관으로 예수님과 대칭점에 서려하기에 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다.


지금 막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곧 육신을 가진 인생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건 북한에서 자유가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고 거리에서 외치는 것 이상으로 정말로 파격적인 것이다. 서기관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마태복음의 진행만 놓고 본다면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또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실 때 까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저항이 없지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신 중풍병자의 회복에서 부터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고 있다. 즉 그들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와, 선악,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의가 다르다는 것이고, 그 견해의 차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이유가 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죄목이 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까지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하고 죽은 것과 같은 것이 무엇이며, 그러한 것과 사람의 정체성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려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 유대인들은 의가 다르면 같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 즉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같은 의를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 앉았다는 것은 그들과 의가 같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였고, 그렇기 때문에,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리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존재였다. 세금이라는 것이 로마에 상납할 분량만 정해져있지 얼마를 거두는지는 전적으로 세리의 몫이었기 때문에 로마에 10원을 내게 되어있다면 100원을 거두든 1,000원을 거두든 상관하지 않았고, 세리는 그것으로 착복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그야말로 매국노와 같은 죄인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죄인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 앞에 모인 세리와 죄인들은 그런 고백이 없는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누구나 그들을 다 매국노 세리와 또 버젓이 성경에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다고 기록된 것은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보고 있음에도 예수님과 식사하러 왔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들 앞에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 것이다. 즉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죄인이라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오기 위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이라 욕하는 것을 인정하고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인인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관점에서 죄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죄인이라 욕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 되는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심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 나아가려면 자신을 죄인이라 욕하는 사람들 앞에 자신이 공개되어도 가겠다는 사람들이 지금 마태의 집에 모인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 기준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이 되는 것을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신성모독 죄를 선고함에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 말씀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성경이 사람이 죄를 시인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시인한다는 것은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이라고 하는 것에는 어떤 기준이 있다. 그러니까 어떤 법으로 볼 때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기준은 당연히 율법이다. 즉 율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세리와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세상의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바라보는 관점, 유대인들이 세리와 창녀를 죄인으로 보는 그 율법적 관점이 세상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 말씀의 내용인 의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율법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은 사람의 행위가 어떠한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죄인이 되고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이 육신을 가진 사람 그 자체로서는 항상 죄인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지금도 성공한 사람이 언론에 보도되고 영광을 받는다. 그건 좋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성공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언론에 보도되는 순간 다 죄인이자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영광을 받는 것은 사람이라는 연약한 본성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성공의 기준은 잠을 자지 않고 무엇을 할수록 성공하고 영광을 얻는다는 법이 승자와 의인을 만든다는 것이 기준이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면 할수록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흙으로 지어진 사람을 흙을 굽워 단단한 벽돌을 만들 듯 하는 것이고, 그 벽돌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러는 것이기에 그것이 바로 세상의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시인한다는 것은 그런 기준 앞에서 나는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의인이 되는 기준에 나는 적합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육신이 가진 한계와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늘 자책하면서 어떻게든지 그것을 극복하려 애쓰고 그렇게 되지 않은 스스로를 비판하고 좌절하면서 다시 그렇게 해 보려고 하고 또 다시 실패하고 그러다가 어떻게 세상의 기준 이상의 자리에 오르면 그것이 성공한 삶이라 생각하고, 심지어 교회도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다 세상의 법이다.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은 그런 법에서 볼 때 다 죄인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이 그런 법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 앞에 모임으로 드러내고 인정한 것이다. 요즘말로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볼 때 바리새인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보고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그 죄로 못 박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이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죄에 대한 개념이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예수님이 보이시기고 갈등이 본격적으로 생기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 9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율법적인 가치관, 곧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판단하여 죄인을 만들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런 기준 앞에 사람이 그것을 육신을 가진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없다고 시인하고 바리새인들의 기준, 세상의 기준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이 그것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바리새인이 가진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며 보이시고 전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의며. 그것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바리새인과 마태의 집에 모인 세리와 죄인들 중에서 누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인가 할 때,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분명히 자신들을 죄인 취급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여서 예수님과 함께 먹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를 같이 나누는 그들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며, 그들이 율법을 주신 의미와 목적을 알아 완성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들, 바리새인과 세상의 기준에서 죄인이 된 그들에게 의인이 필요한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에 의하여 사회적이고 종교적으로 병든 자와 같은 자가 된 세리와 죄인들에게 예수님이라는 의원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긍휼이라는 것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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