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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2 핍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4. 15:39 Writer : 김홍덕

핍박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디오그모스(διωγμός)' 인데 '디오코(διώκω)'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말의 의미는 '추적하다, 박해하다, 뜻을 따르다'와 같은 의미들이 있다고 한다.(헬라어를 공부해 본적이 없어 검색하여 참조함)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언어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고, 문장에 들어갔을 때 앞뒤에 사용되는 말과 연결되어 의미가 정확히 생성되었다고 한다.(아마 그래서 서기관이라는 신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핍박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말의 어원들을 보면 아무래도 어떤 뜻을 따르다 보면 생기는 박해를 말하는 것 같다. 뜻을 따르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도 연관이 있고, 뜻을 따르다보니 자신과 다른 뜻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받는 어려움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라 생각이 된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마 5:11-12)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예수 믿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은 구분 없이 핍박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어려움이 전부 핍박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핍박에 대한 반응과 보상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블로그에서 정말로 강조하는 것이 몇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법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법인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하면 십자가는 우리가 다시 지기 힘든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만약에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심청전을 읽고 감명을 받고서 바닷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심청전을 정말로 제대로 읽은 것은 효자, 효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심청전의 작가가 의도한 것이 독자에게 완성되는 것이다. 성경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이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 성경이다. 그렇다는 것은 성경에 있는 말씀을 문자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이 심청전을 읽고 효자가 되듯 자신의 것이 되는 것, 그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법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그 코의 생기로 만든 사람이 또한 그것이다. 세부적으로 본다면 율법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규례는 어기시면서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것도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핍박을 이야기함에 있어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 안에 핍박의 정확한 이유와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을 보면 분명히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군사를 불러서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예수님인데 끌려가셔서 사형수가 되고 사형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만약에 예수님이 초인적인 능력으로 십자가로 가지 않거나, 아니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능력을 보였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었겠지만, 육신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는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므로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인생을 구원하시고자 한 뜻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가장 억울하게 핍박을 받으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라고 죽였으니 그만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은 저항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떨 깎는 자 앞의 어린양과 같이 말없이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핍박인 것이다.


예수님의 핍박이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하려 하고, 또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 대상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과 같이 되려는 사람들의 핍박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대표되는 예수님의 삶에서 핍박이 무엇인지를 찾고, 우리는 또 그것에 대하여 어떤 모양으로 살 것인지를 알 때, 비로소 하늘의 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핍박받아 지신 십자가의 도와 다른 것은 핍박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믿음이 생긴다. 이 믿음은 정말로 강력한 것이다. 옛날 말에 '신학생이 데모하면 막을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신학생이 데모하면 그 슬로건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데모인데 죽음인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신념이다. 특히나 데모와 같이 능동적 행동이라면 무조건 신념이다. 그건 십자가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성전(지하드)도 그런 모양 아닌가?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면서 자신과 신앙이 다르다고 대항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이 좋아서나 혹은 자부심으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는 것을 강요하는 모습들을 보이곤 한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대하는 주변사람들의 반응, 특별히 만류하거나 저항하는 모습을 핍박으로 여긴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고 능동적으로 다른 사람을 자극하여 일어난 반응과 저항은 핍박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핍박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자신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수고와 희생,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손해와 고통이 핍박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졌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능동적으로 자극하는 것과, 내가 믿음이 있다는 이유로 받는 수동적인 고난과 헌신적인 수고는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보여주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는 이유일지 모른다. 아니 그렇다.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헌신과 수고를 감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과 같이 보인다. 아무런 성과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삶을 보고서 '왜 그렇게 어리석게 사느냐?'고 하는 것이 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수고하는 그 수고, 남다른 희생과 그 수고가 핍박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으로 사랑함에도 그리스도라는 것 자체가 싫은 것, 몰라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알면서 그것이 싫어서 십자가의 도로 살아가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렇게 산다는 이유로 박해하는 것이 핍박인 것이다. 이것은 미묘한 것 같지만 중요한 차이이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이유 그것 때문에 받는 핍박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받는 핍박이다. 그런데, 군인을 하늘의 군사로 물리치지 않고 순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을 깨닫게 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강요하고 능동적으로 전하는 복음, 자신이 믿음을 가졌다는 선민의식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가졌으므로 나눠주듯 복음을 전하며 부딪치는 저항을 핍박의 전부로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인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예수님의 생명은 순종과 수동적인 믿음의 삶이다. 능동적으로 남다른 복음과 하나님의 계시를 가졌기에 없는 사람에게 적선하듯이 전해주는 그런 생명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도 그 아들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섬김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시기 위하여 십자가까지 지신 그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의 생명과 그 삶으로 살아간다는 것 때문에 수고하고, 욕먹고 비난 받고, 그것은 어리석은 삶이라 조롱을 받는 것 그것이 핍박이다. 진정한 핍박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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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열정은 다른 것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3. 24. 10:24 Writer : 김홍덕

최근에 아들 녀석이 보고 싶다고 해서 온 가족이 함께 '위플래쉬'를 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관점에 좋은 영화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그저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의 음악버전 정도의 주제와, 영화로서의 구성은 많이 아쉬웠고, 마지막은 열정적인 연주는 볼만 했지만 영화 구조로 본다면 뭔가 하다가 만 것 같은 그런 상태로 끝난 것 같았다.





영화로서 완성도나 느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사람마다 다를 뿐 아니라 나는 영화를 평론할 만한 사람은 아니기에 나의 의견은 뭐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별 가치도 없는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광기와 열정은 다르다는 것이다. 광기와 열정을 어떻게 구분할까? 이러한 비교에 있어 드라마 정도전에 나오는 정도전과 이방원의 비교가 적절한 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드라마 후반부에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잡혀 죽을 지경이 되어 옥에 갇히게 되고, 드디어 내일이면 정도전에 대한 형이 집행하기로 한 전날 저녁, 죽마고우인 정몽주는 정도전을 찾아가서 내일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때 정도전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는 반드시 온다. 내가 아니면 다음 세대, 그 세대도 아니면 그 다음 세대에서라도 반드시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는 온다.





정도전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일했다. 그건 그 당시로 보면 역적모의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꿈을 향해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이방원은 달랐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결국 그는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정도전이 시작하여 탑승한 이방원이 정도전의 꿈에 흠집을 낸 것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광기와 열정의 차이이다.


이방원은 광기로 가득 찬 것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열정이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늦어지고, 또 당대에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일이 있어도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믿음에 자신을 맡긴 것이고, 이방원은 자기가 아니면 안 되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차이다.


한 개인이 어떤 꿈을 이루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광기는 환호를 받을 수는 있지만, 부럽지 않고, 열정은 환호함이 없을지라도 그와 같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광기는 '대단하다.'는 찬양을 받을 수는 있지만, '나도 저럴 수 있겠다.'는 희망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열정은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어떤 것에 몰입하면 많은 것을 잃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것을 잃어가며 그것을 성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광기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즉 다른 사람의 마음과 인생까지 희생하는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에도 주인공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들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즉 몰입하면서 희생하여야 할 것에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감정도 잃어버리는 것이 광기다.


반면에 열정은 다르다. 열정은 몰입하지만 자신을 희생한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시간을 희생한다. 다른 사람이 상처 받을 상황이면 자신의 것을 보류하고, 자신의 것을 희생하며 다른 방법을 찾고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열정이다. 그것은 결국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영화로 비교한다면 아마 '위플래쉬'와 '비긴어게인'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된다. 위플래쉬가 광기의 영화라면, 비긴어게인은 열정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비긴 어게인에서 마지막 옥상에서 다들 마음을 모아 녹음하는 장면이야 말로 열정의 장면이다.)





사람이 어떤 것에 몰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한 가지 일에라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범인보다 광기를 가진 사람이 더 대단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 광기가 음악과 예술 같은 것이라면, 하지만 나는 그런 광기보다는 아무 것도 특별함이 없는 인생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할 수 있다면 열정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것이 예술의 세계이든, 종교의 세계이든, 스포츠나 정치나 학문 그 어느 것에 있어서라도, 꿈을 좇아가는 길에 남의 마음이나 기회가 아니라 때로 물러서는 것과 같고 꿈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런 좌절을 경험하는 한이 있어도 나의 마음, 나의 시간, 그것을 투자하고 희생하며 가는 그런 열정 그것이 진정 꿈을 좇는 것이라 생각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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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12 팔복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3. 15:20 Writer : 김홍덕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어떤 것이 청결(헬 : 카다로스)하다는 것은 비었다는 뜻과는 좀 다르다. 청결하다는 것은 있을 것이 깨끗한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비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안에 채워져야 할 것, 그리고 그 채워진 상태가 하나님이 보실 때 청결한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았는데 그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원래 있던 곳(사람 속)이 깨끗하게 치워진 것을 보고 이전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간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 12장, 눅 11장) 즉 사람이 그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어떤 것을 채워야 하는가 하는 것이 청결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무엇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깨끗한 것에 무엇인가를 담기 위함이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셔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우리 안에 무엇인가를 채우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채우고자 하시는 것이 채워졌을 때 그것이 바로 청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채워져야 할 것, 우리 안에 채워졌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청결하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채워져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나타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처음 존재가 누구신가 했을 때,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라고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을 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온전하게 있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서 정말로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보았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 영상과 이미지가 각인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아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안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또한 그런 사람을 알아보기에 그런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본래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으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본다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라 대접하였고, 야곱도 에서를 만날 때에 하나님을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있어서,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며, 그런 사람은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듯이 마음 안에 있어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없는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하나님을 만난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인생의 목적, 하나님의 형상과 말씀과 의가 그 사람 안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러한 것이 온전히 마음속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복을 누릴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 나오는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라는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샬롬'이라는 말인데 그 뜻은 잘 아는 바와 같이 평화인데 그 의미는 평화라는 것은 서로 균형이 맞춰진 상태일 때 평화이기 때문에 이 말은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이후에 '평안하뇨?'라고 하실 때 그 평안이 바로 이 에이레네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그러니까 형체가 없으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 형상이란 영어로 image이다. 즉 그것은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떠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생명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바로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사람을 지으셨을 때와 같이 육신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생명(유전자)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표현되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고, 그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지시고 동일한 육신을 가지셨기에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시려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평안이고 화평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평안이 되는 상태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義)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화평이고 평안인 것이다. 에이레네라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다.



○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기에 나오는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티오코'라는 단어라고 하는데, 이는 '뜻을 따르다,' '좇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하는 것은 '의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어떤 핍박이 수반되어도 따라 간다는 것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의를 따라 간다는 것은 그 의를 옳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북한 주민이 탈북하여 남쪽으로 오는 것을 의로 표현해 본다면, 사람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 안에서 사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탈북하여 남쪽으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탈북 과정도 의를 좇아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는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들은 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다. 즉 하나님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천국, 곧 하나님 나라가 저희의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의 의인 민주주의를 좇아 온 사람은 대한민국이 자신들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좇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흔히들 핍박이라고 하면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의를 따라 가는 과정에서 겪는 곤고함이라는 것은 핍박이 맞지만, 예를 들어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예수 믿으라고 떼를 쓰다가 그 사람들이 한 소리 하는 것은 핍박이라 할 수 없다. 그건 핍박이라기보다 자초한 일이고 어떤 면에서 보면 벌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낮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또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법이다. 그 의를 좇아가면서 겪는 곤고함은 수고와 희생의 곤고함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아니라, 의를 따라가다 보니 감당하는 곤고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곤고함이 바로 다른 사람이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이지, 그런 원인인자 없이 당하는 곤고함, 그리고 다른 사람을 능동적으로 자극함으로 받는 반사작용을 핍박이라 하면 곤란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핍박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핍박을 받으셨는데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잡히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의 군사들로 물리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잡혀서 처형당하신 그런 핍박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핍박이다. 그것이 의를 따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러 왔다고 하니, 예수님의 이름과 성경 말씀으로 사람의 마음을 시끄럽게 능동적으로 자극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겪는 육신의 수고와 비난과 괴로움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과정이 표준이다. 그렇게 할 때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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