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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에워쌀 지경이 되자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실 정도가 되었을 때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과 대화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한명은 서기관이고 또 한명은 제자. 예전에는 이렇듯 누가 예수님께 묻는지는 주목하지 않고, 거저 예수님의 대답만 가지고 누구에게는 따라 오라하고, 누구에게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는지 몰라 의문스럽기만 했다.


지금 예수님께 한 서기관이 나와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이라고 말씀하셨다. 뒤에 상세한 설명은 없지만 문맥으로 볼 때 '오지마라'는 말씀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 오겠다는데 왜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으며, 거처가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일까?


먼저는 이 질문을 한 사람이 서기관이라는 것이다. 서기관이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늘 외식하는 자의 대명사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말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외식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겠다고 머무를 곳이 없다고 답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에 관하여 답변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분이 서기관이라는 것 그것 하나로 이 사람을 판단하셨는가 싶지만 그것은 아니다.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부를 때 "선생님이여"라고 불렀다. 호칭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상의 정체성이다. 뒤에 나오는 제자는 "주여"라고 예수님을 부른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것, 예수님의 생명의 본질보다는 그 표현된 형식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서기관에게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하시는 것이다. 머리 둘 곳이라는 것은, 머리는 몸이 있어야 한다. 즉 머리의 생각이 표현될 몸이 바로 머리 둘 곳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풍을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몸은 머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중풍이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고치시는 분,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인생으로 표현되기 하시는 본을 보이시는 분이심을 보이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서기관의 마음, 서기관의 안목과 같은 삶에는 예수님의 생각이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그 날의 서기관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중심에 있어서 그것이 육신을 가진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아닌 사람은 아무리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죽겠노라 외쳐도, 그곳에는 예수님께서는 머리를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그런 신앙에는 머리의 생각과 같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각오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능동적이고 필사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와 같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 안에 있으면 DNA가 그 생명을 표현하듯 자연스러운 것이다. 머리의 생각이 몸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이.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가룟유다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한 번도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은 선생이기는 했지만 주님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몸의 머리 같이, 생명의 유전자와 같이 나의 삶을 주관하는 것임을 인정할 때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서기관도.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

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은 오히려 부정적인 답을 하고,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서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은 또 아버지의 장례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의아한 말씀을 하신다.


특히나 이것이 우리에게 의문스러운 것은 부친의 장례 치르는 것 보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아주 걸리는 말씀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는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는 육신이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자를 말한다.


물론 제자의 아버지는 죽었을 것이다. 다만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 장례를 치르게 두라고 하신 것은 그 장례를 지를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는 죽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제자는 죽은 자가 아니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따르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생명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아니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보고 그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를 장사지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죽고 다시 나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은 죽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명이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듯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장사지내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제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해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교회에 가는 것과 같은 것을 좋은 신앙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좋은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사회나 또한 자신이 속한 환경이 어떤 것을 요구해도 그것에 맞추어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안 되는 것이 있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을 때도 그냥 끌려 가셨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누구 길래, 이보다 더한 일이 있단 말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세상이나 삶이 요구하는 것을 뿌리치거나 거부하면서 예수를 믿으려 하는 이유는 결국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신앙은 자신이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지킬 수 없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요구하는 것을 이기는 것을 신앙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다. 내가 세상의 것을 좇아가려는 내 마음을 이기는 것이 신앙이다. 세상이 나를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할 때 '사탄아 물러가라!'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잡혀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오겠다는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우리 마음에 죽어야할 것, 곧 내 마음에 옳다고 생각하는 의를 가지고 있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은 생명 같은 것은 죽은 자를 장사지내듯 장사지내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는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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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기 전에 마지막 말씀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성경의 문맥을 가지고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전혀 무관한 사항은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의가 결국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씀을 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다음에 먼저 문둥병을, 그리고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이 두 병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인생의 회복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여 삶이 일그러진 인생을 표현한 문둥병과 또 하나님의 의가 삶을 지배하지 못하는 중풍을 고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중풍과 문둥병을 고치신 것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 주신 것은 병을 고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병든 것을 고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바로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가 병든 것을 고치셨다. 병명은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그냥 열병이라고 나온다. 사람이 아파서 열이 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몸이 어떤 병에 저항하는 경우에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몸 스스로가 열을 올려서 병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났다는 것은 어떤 것을 그 안에서 없애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장모라는 것은 아내의 어머니다. 즉 딸을 낳은 여인이라는 것이다. 물론 베드로의 장모가 또 다른 자녀로 아들을 두었을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베드로에게는 여자를 낳은 여인이다. 그것이 바로 열병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 이건 육신의 여자와 아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여자이고 예수님의 신부라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즉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와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다 하나님 앞에서 여자라는 것이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여 여자가 남자의 성을 따르는 아이를 낳는 것에 비유된 것이다. 즉 남편의 생명을 낳는 것이다. 즉 남편의 유전자를 말씀이 육신이 되듯 육신으로 낳아야 하는 존재가 바로 아내이고, 여기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은 남편의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생명을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다시 그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 곧 아들과 같은 생명을 낳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자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역할인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는 딸을 낳은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가 열병이 들었다는 것은 그것을 이제 벗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 형식과 같은 여자를 낳는 자리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열병이 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비약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이 사실 이와 같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어떤 형식을 더 잘 지키면 신앙이 나아질까 고민하느라 열나고, 교회는 어떤 형식의 행사를 추진해야 더 나은 결과를 낳을까 열병처럼 고민하는 것이다. 신앙의 형식이나 행사와 같은 것은 다 형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 여자를 낳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런 신앙을 벗어 버리려 하면 이만저만 열병을 앓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은 신앙의 규례와 형식을 좇고, 교회는 더 새로운 행사를 기획하려 하면 얼마나 힘 드는지 모른다. 그러다 그런 것들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다른 것을 찾으려 하면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든지 열병을 앓는 것과 같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다 간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듯 딸을 낳은 신앙을 벗어버리려 열병이 난 베드로의 장모, 그러니까 이제 사위가 예수님을 만났듯 자신도 열병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자리에 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그녀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더 이상 딸이 아닌 아들, 곧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이 자기 안에 잉태되기를 원하는 신앙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손을 만지시니 낫더라는 것이다.


이에 그 여인, 곧 베드로의 장모는 바로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병이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위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여 열병이 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늘 딸과 여자와 같은 형식만 추구하고 그런 것만 생각하다, 그것을 떠나 온전한 신앙을 회복하고 싶어 열병이 난 사람이 온전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병자들이 회복되는 것은 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를 회복하게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병을 고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은 그런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든 기적을 뒤로 하고 자신을 구하는 기적은 보여주지 않으신 체 십자가게 달려 돌아가셨다. 그것은 기적을 행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기적의 목적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한 번의 제사로 회복하는 십자가에서는 그런 기적들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낮에 태양이 뜨면 모든 전구를 다 소등하듯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사와 기적은 바로 이런 것이다. 문둥병에 걸린 것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못하여 자신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있는 상태의 모든 인간, 그리고 중풍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주관하지 못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그 안에 낳지 못하여 괴로운 삶, 이런 모든 것이 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회복하게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병든 자들을 고치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이라는 것도 더불어서.


(알립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치유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 카테고리 <치유>를 참조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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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병을 고치고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예수님께 한 백부장이 왔다. 백부장은 당시 군대에 있어 실세였다. 당시 군대는 휘하에 몇 명의 군사를 거느린 수를 기준으로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이렇게 계급이 있었는데, 천부장은 실제 군사를 1,000명을 거느린 경우보다 백부장의 여럿 모아 장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백부장이 실세였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백부장이 자식이나 부모도 아니고 자기 휘하에 종이 아픈데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풍을 앓고 있는 종을 대신해서. 중풍은 머리의 생각이 몸으로 전달이 되지 않는 병이다. 사람이 생각은 멀쩡한데, 그 몸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중풍이다. 군대로 말하면 명령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로 보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인생의 삶이 그렇지 않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흔쾌히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는데, 이 때, 백부장의 대답이자 요청이 대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감당 못하겠으니 말씀으로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고 하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자신도 남의 휘하에 있고 또 자기 밑에도 사람이 있는데 자신이 가라하면 사람이 가고, 자신이 오라하면 사람이 온다고 말을 한 것이다. 중풍이 어떤 병이고, 그것에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고 하신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 중에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칭찬한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하나는 이 백부장이고, 또 하나는 수르보니게 여인 이렇게 두 사람.


지금 이 말씀, 이 상황은 중풍병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면, 오히려 그 종이 아프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중풍이라는 것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머리의 생각이 몸에 미치지 못하여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중풍이다. 군대로 치면 대장의 말이 사병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그런 관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문둥병을 고치셨다. 문둥병은 사람이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못함으로 자신의 몸이 일그러져도 느끼지 못하는 병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진 삶을 살다가 예수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나에게 이루어질 때 문둥병과 같이 일그러진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중풍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이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삶을 지배하지 못하는 상태를 중풍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머리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중풍이듯,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 하는 사람의 삶이 그렇지 않은 것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생명을 보이시는 것이다.


그런데 실세이고 자기 집에 사람이 오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는 백부장의 종이 중풍이 걸렸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는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과 중풍이라는 관계가 예수님의 말씀이면 고쳐지는 관계라는 것을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자신의 위치로 볼 때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청하는 것이다.


이 백부장의 믿음이 칭찬받을 만한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과 자신과 자신의 종, 또 중풍이라는 병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자신에게도 주권을 가지신 분이고, 중풍이라는 병도 예수님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는 분명한 주권의 실체를 알고 또 그 아는바 대로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 백부장은 자신이 처한 위치,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중풍이라는 병이 머리의 생각이 몸에 잘 전달되지 않는 병이듯, 자신의 종이 중풍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이 예수님의 오신 목적 안에 없고, 하나님이 형상을 회복하여 그 성품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지금 그는 표면적으로는 종의 중풍을 고치려는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삶을 고치려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는 것이다. 


믿음이란 수동적인 순종의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이루어지게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의와 무관하게 자신이 하나님께,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드리고, 하나님은 그런 것을 좋아 하는 분이라고, 또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이 백부장과 같은 마음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금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지은 것과 같다는 말씀으로 맺어진 산상수훈을 마치고 내려 오셨다. 그러니까 말씀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보이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 보이시는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려고 몰려 온 상황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것과 신앙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특히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경향이 많이 나타난다. 세상의 삶은 대충하면 되고, 교회에서는 바로 살면 된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그런 생각이 짙어지면 세상 사람들과 삶을 공유하는 것이 신앙에 해가 된다고 하여 따로 모여 공동체를 구성하겠다며, 전원교회나, 유병언의 공동체와 같이 독립되고 일반 사회와 단절된 공동생활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백부장은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그러니까 백부장이라는 지위와 그 지위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표현 양식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을 행하시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터전이고 형식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어떨 때 보면 정말로 죄악 밖에 없는 것 같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보일 수 있는 마음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믿는다고 하나,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들을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건져달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이 세상은 잘못되었고, 타락했고, 죄악 밖에 없는데 그 안에 자신이 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안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는 손을 쓸 수 없어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또한 세상은 마귀가 점령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쳐 주시기를 바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들은 다 모순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혹은 일부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적어도 일부가 마귀의 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통치의 사각지대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이 세상의 어느 한 구석, 사람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 우리가 볼 때 죄악이 만연한 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경륜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좇고, 세상을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초등학생 같은 것이다.


죄악에 짜든 것 같은 세상은 하나님의 회복이 그려져야 할 도화지 같은 것이고, 종과 상전이라는 반인격적 사회구조지만 백부장은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알듯이 모순덩이 같은 이 세상의 문제들도 순방향 혹은 역방향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기에 모든 것이 충만한 세상이다. 이것이 바로 바다 속의 물고기기 짜지 않음 같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비늘이 있는 물고기를 먹으라고 하신 이유이다. 즉 바다가 짜다고 물고기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짠 바닷물을 먹고 그 안에 살지만 자신은 구분되고 그것으로 생명을 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백부장은 바로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백부장과 같이 유력한 이가 그 시대가 로마의 압제 아래 있어 정치적 독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고 그 시대의 죄악과 부패를 알지 못 할리 없지만 그는 그 사회의 구조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섭리가 투영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믿음이 칭찬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중풍은 머리의 생각이 몸을 다스리지 못하는 병인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고치셨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내는 몸인데 하나님의 의가 그 몸과 삶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이고, 산에서 내려 오셔서 군중과 죄인들의 삶에 들어오셨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삶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백부장은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이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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