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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7-12 구하라 주실 것이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4. 08:01 Writer : 김홍덕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마 7:7)


이 말씀은 기도의 기초에 관한 말씀이기도 하고, 심지어 기독교 신앙 밖에서도 어떤 꿈과 희망에 대한 노력을 독려하고 격려하는 말로 사용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러니까 무엇을 구하라는 것인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이라도 다 구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설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냥 아무거나 구하면 하나님께서 다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에 맞는 것을 구해야 주신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는데, 그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전지전능하시니 뭐든지 구하기만 하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그것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다 주실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르치신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벗어나서 이 말씀들을 맘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특히 말씀 중에 목적어가 없다고 자기 맘대로 아무 것이나 넣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속적으로 경계하라고 하시는 외식하는 것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외식이라는 것이 내용이 없는 형식, 하나님 의는 심령 안에 없으면서 의에서 비롯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은 다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면서 악한 사람도 그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는 말씀을 이어서 하시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가 볼 때 좋은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부모라도 자식이 뭐가 달라고 할 때, 그것이 아버지가 볼 때 좋다고 생각하지 않고 위험하고 아들을 악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도 아들에게 그것을 줄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사람에게 좋은 것이 아닌 것을 구한다고 주실 리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 의는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 곧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모든 인간이 구해야할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으로 사람에게 증거가 되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먼저 육신에 관한 것을 구하는 삶의 포인터가 육신의 삶에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모든 것을 육신의 문제에 두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인생의 숙제요 의미요 목적인양 살아가기 때문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니 육신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6장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시리라고 하는 말씀을 어떤 이들은 육신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이 들어주시기 위한 전초과정이나 조건이나 열쇠쯤으로 생각한다. 마치 금도끼 은도끼의 착한 나무꾼이 아니라 금도끼 은도끼를 목적으로 신령에게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게 통할 리가 없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것이 있으면, 아니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안에 있으면 그것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인생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죽은 사람도 살리시고, 또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시기 위함이라면 한 민족을 멸하는 것, 아니 홍수로 세상을 다 쓸어버리시는 것이라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육신의 필요를 주시는 목적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본질이라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은 것을 보고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아브라함도 엄청난 거부였고, 다윗왕도 그랬으며, 솔로몬은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다. 어디 그 뿐인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 기적을 일으켰는가?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되고, 또 신비한 능력을 행하며, 또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 같이 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순종을 감당한 사람이었기에 그것에 필요한 것을 주신 것이다. 즉 먼저 하나님의 의와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목적, 또한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의 목적이 먼저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외면한 체 그 결과인 육신의 필요를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무처럼 생각해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릇으로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순종하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를 청하고, 그 목적 앞에 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고 그것이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제사보다 나은 순종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기에 무엇이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피조물이 스스로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좋은지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아버지가 더 잘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왜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아무거나, 육신의 필요에 간절함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오히려 이 육신은 죽을 만하면 죽는 것이 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일 때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하면 주신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목적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나라다.


하나님의 의, 사람을 향하신 오직 하나의 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 형상이라는 것이다. 예수 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그것이 있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육신의 필요는 다 들어 주실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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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심판에 대하여 비판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형제를 비판하고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형제를 심판하면 하나님이 너도 심판했으니 너도 나의 심판을 받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형제를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근원적인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형제를 심판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도 언젠가 심판을 받을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형제를 심판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안에 없으면서 그 형식만 지키는 것이 외식이듯, 하나님의 의가 없기에 심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안ㅍ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고 하셨다.


거룩하다는 것의 원어는 '코데쉬(kodesh)'라는 말인데 이것은 '구분하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한다. 즉 거룩하다는 것은 구분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은 세상의 모든 신들과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신이 사람의 공로와 소유를 드림에 축복하는 신인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로 가늠하시는 구분된 신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구분하시는 것으로 구분된 것을 말한다. 율법에서 먹지 못하는 짐승들로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이나 또 비늘이 없는 생선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도 다 구분됨에 관한 것이다. 굽이 갈라졌다는 것은 신앙에 있어 가치관이 구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비늘이 있다는 것도 세상을 의미하는 바다와 구분된 것을 먹으라는 말씀이기도 하다.(먹는다는 것은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가치관이 구분되고, 신앙이 구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구분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하나님께 공로와 십일조와 같이 소유를 드리면 이 땅에서 복을 받아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축복을 받아 풍족하게 살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들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믿게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과는 확연히 구분된 신앙을 가질 때 비로소 구분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구분된 것이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이유도 사실 그것이다. 그러니까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가난하지도 않고, 초라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소유와 공로를 드리면 축복을 받는 다는 것과 같은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전통적인 타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늘 책망을 받는 것이 이방신을 섬기고 하나님의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을 가져다 놓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구분되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은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늘 책망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다른 이방인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구분되지 않고, 존재의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관습과 행위, 그리고 십일조를 드림과 같이 하나님께 자신의 소유를 드리는 것이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증거라고 생각했고, 자신들이 그렇게 행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위로 할 것 같으면 피로 구분되는 민족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고 민족이라는 것은 혈통으로 구분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종족이 아니라 생명으로 구분하시겠다는 것이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이고, 생명이라는 것은 존재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존재인가를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다는 것이지, 어떤 규례를 지키고 있느냐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하나님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블로그에서 정말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세상에서 성공할 수도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지금의 교회가 타락했다고 한다면 이유는 오직 그것이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행함으로 봉사하고 신앙적 행위를 하자고 가르치고 설교하고 그것을 좇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봉사든 그 어떤 신앙적 행위는 그런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 먼저이지, 그것을 행동으로 따라 한다고 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또한 인고의 결실과 같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을 구분 없는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 체 행위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다른 신과 구분이 되지 않게 섬기는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그것은 의가 그 안에 없다는 점에서 외식하는 것이나 같으므로 또한 외식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만약에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주면 개나 돼지나 우리를 해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과 연관해서도 의미를 새겨볼 수 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신앙적인 비판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일면 거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전투는 이기고 전쟁은 진다는 말이 있다. 남을 비판하는 것 특히나 신앙에 대하여 남을 심판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아주 거룩한 것 같은 일이다. 마치 전투를 이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다른 것이다. 즉 이방신과 구분함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거룩하심은 옳은 것을 가지고 잘못하고 있는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모르면서 온전히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갈 때 끌려가시는 의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고 구분된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 온전한 것을 알면 알수록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살펴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다. 이는 참 거룩한 것 같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면 너희를 오히려 헤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즉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분임에도 온전치 않은 자들이 온전하다 또 의롭다고 주장하는 심판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시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시더라는 것이다. 또한 그랬더니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죄를 시인하고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구분된 것이고, 이것이 거룩함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서 벗어나서 거룩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성공을 채색하는 것과 또한 신앙이란 이름을 형제를 심판하고  비판하는 것이야 말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가 안에 없는 외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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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5 비판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2. 10:30 Writer : 김홍덕

<비판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일 뿐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보편적 도덕 기준의 명언과 같은 말씀이다. 이 말씀에 나오는 비판은 영어 단어로 보면 심판이라는 의미가 대표적 의미인 judge이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주기도문 전후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의 과실, 죄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과 또 은밀한 중에 구제하면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말씀과 같은 법칙을 가진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정확히 다시 보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심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심판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심판자와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발달된 상황이라면 변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특히나 심판하는 사람과 심판 받는 사람은 분명한 법을 기반으로 상하 관계가 성립된다. 심판하는 사람은 적어도 그 심판하는 법에 관해서 심판 받는 사람보다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법에 있어 더 높은 사람이어야 심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뒤 이어 눈에 티끌과 들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심판하는 것으로 다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언뜻 생각해 보면 도적질 하지 말라는 법을 가지고 도적질 하는 사람을 심판하면 언젠가 그것을 심판한 사람도 절도에 대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 같지만, 실상은 그것보다 더 싶은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하신 것이 그것이다. 눈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몸의 등불이다. 즉 삶의 모든 가치와 방향을 제시하는 가치관이다. 그 가치관에 티끌 같은 문제가 있다고 심판한다는 것은 눈에 들보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여기서 티끌과 들보는 레벨이 다른 것이다. 특히 들보라는 것은 건축물로 본다면 근간에 해당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은 가치관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눈 안에 있는 들보는 가치관의 근간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형제의 잘못을 보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 의의 근간이 무너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외식한다는 것은 거듭 말하고 있듯이 내용이 없이 형식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의는 없이 형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자는 외식하는 자요,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으므로 먼저 하나님의 의를 채우고 나서 형제 눈에 있는 티를 들먹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고 남의 잘못을 비판하면 나도 언젠가는 동일한 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일차적인 해석에 머물 것이 아니다. 어떤 내용이라도 남의 허물을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는 외식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의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앞에서 심판이 이루어지려면 법이 있고, 심판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어떤 법에 대하여 더 밝은 사람, 더 깨끗한 사람이라 할 만한 사람이 있어야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한다는 것은 자신이 더 의로운 사람이라는 교만한 마음 없이는 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어떤 것에 대하여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형성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는 외식하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이 세상의 모든 법에 대하여 가장 밝은 분이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특히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이기에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떤 것이라도 심판하실 수 있는 자리에 계시다는 분이다.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도 아주 명확하고 확실한 심판을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심판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고 심판하는 그런 심판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를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그 기사를 접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스스로 심판하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심판의 들보, 심판의 근간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들보가 없는 눈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그것을 고치려 한다. 특히 지적하고 심판하고 또 나름 충고를 한답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이 왜 그런 잘못을 하는지를 분석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과시하기도 한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주제가 신앙이라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그런 모습이 너무 많다.


한 교회에 말씀에 아주 밝은 목사님이 계셨는데, 교인들의 신앙이 좀 잘못되었다 싶으면 그 사람 없는 자리에서 그것을 은근히 말하면서 늘 여론을 조성하여 결국은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훈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한 권사님이 그 목사님에게 '왜 그렇게 뒤에서 자꾸 이야기 하시느냐?' 물었더니 '앞에서 말하면 그 사람이 죽습니다.'라고 답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사람 죽이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 복음인가요?"라고 그리고 "사람을 교훈하는 방법이 말 뿐인가요?'라"고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비판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비판 대신에 십자가를 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 그랬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모른다고 제자들을 책망하시지 않으시고 비유로 말씀하시고 같이 살아내시고, 결국은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게 되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라며 다 도망가고 십자가 밑에는 겨우 요한 사도 한 명만 남고 떠나버렸다. 하지만 바로 그 예수님의 모습이 모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했고,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책망하고 남을 일을 책망하지 않으셨더니 스스로 그 눈의 가치관을 다 바꾸어 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심판은 그런 것이다. 사람이 잘못한다고 심판하고 비판하고 뒤에서 분석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니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고 돌이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고 또 자신들도 그 분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단순히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질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을 것이 아니라 어떤 심판,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보이신 것임을 함께 알고 이 말씀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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