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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23 나사렛 예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11. 17:10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의 나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나심을 중심으로 말씀들이 있지만, 2장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헤롯왕이 죽고 애굽에서 돌아 올 때에 요셉이 아기 예수를 걱정하여 나사렛으로 이주하게 되어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있다고 하는데, 갈릴리나 나사렛의 지명의 의미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갈릴리나 나사렛이나 부유한 동네는 아니었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라는 나다나엘의 말에서 보듯이 좋은 동네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사렛 예수라는 예수님의 호칭은 정말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말이다. 특히나 지금 이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고 숭배(경배가 아니라)하는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와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라는 것은 지금으로 보면 천한 동네의 예수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한번 이야기 해 본다면, 유년주일학교 학생들이 간혹 하는 질문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하기도 하지 않을까 싶다. "예수님은 똥 눴나요?"하는 그 질문 말이다. 이건 일면 우습지만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반사적으로 '그걸 말이라고?' 라며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기에는 뭔가 예수님이 신비로운 느낌을 가지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 질문을 하면 반사적인 대답이 아니라, '사람이니 당연히 그랬겠지?' 근거를 도입하고서야 그렇다고 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화장실도 안 가실 정도로 거룩(이것이 진정한 거룩함의 의미는 아니지만)하고 경건한 분으로 여기는 의도는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경건함과 신성은 다른 사람과 육신의 차이나 육신을 가졌지만 생활 방식이나 성격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보다 높고 다른 모습을 보이셨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한 마디로 빈민촌이다. 가난하고 또 돌아서면 당시의 사람들이 터부시하는 부류의 사람들인 죄인과 창녀와 병자와 세리와 같은 사람들이 득실대는 그런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한국의 강남과 같은 곳과는 전혀 반대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비범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하고 보통의 사람과 다를 것이 전혀 없는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사항이다. 그래서 이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 이사야의 때부터 예언된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상태고, 동일한 신분과 육신으로 오신 것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원하실 자기 백성이 다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유대 왕실이나 로마의 황실에 태어나심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삶을 사시면서 '나를 따르라' 하셨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따를 수 있을까? 물론 왕족이나 몇몇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되겠지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자리를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 중에서도 아주 기준이 낮은 사람의 신분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회 정의라고 하는 것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건 성경을 몰라도 아주 모르는 소리다. 그냥 문자만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심청전을 인신매매가 성행하는 막장드라마로 보는 사람일 뿐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구속이 차비 대신 내어주듯, 죄 없는 사람이 죄 지은 사람 대신해서 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의 구속은 십자가의 대속이다. 그것은 높이 달리는 구속인 것이다. 옛날 십자가나 여타 사형 집행에 있어 그 집행 장면이나 주검을 사람들이 보게 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구속과 삶은 그 모습을 보고서 '나도 그렇게 되어야겠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법인 것이다. 마치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가 나는 것을 보고 자신도 하늘로 날아올랐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수님의 구속의 법이 바로 이런 구조를 따른다는 것을 모르면 예수님께서 나사렛 예수이신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 문제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해결하려 하셨던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심도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잉태되듯 거듭나는 것임을 보여주심으로 누구나 성령의 감동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한 동네인 나사렛에서 오신 분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누구라도 '(그들도 되는데)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구나!'하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본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나사렛예수 그 자체이다. 나사렛에는 천하고 당시 사람들이 죄인이라 손가락질 하는 그런 사람들 있는 곳이고,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그런 동네이기에, 나사렛 예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죄인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십자가가 그렇듯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더 나은 곳, 더 고상하고 더 안정적인 곳으로 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열심히 그렇게들 살아간다. 살다보니 그렇게 되는 삶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를 모르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누구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시듯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죄인 같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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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25 예수님의 이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10. 11:42 Writer : 김홍덕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이다.(마 1:21)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은 몇 가지가 더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임마누엘'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이다. 그 각각의 이름은 다 의미가 있다.


먼저 "예수"라는 이름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대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 의미가 대단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의 옛 철수 영희처럼 흔한 이름이었다. 즉 그 이름의 희소성이나 의미 자체가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름과 같은 일을 실재로 하셨기 때문에 그 이름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 된 것이다.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자손 곧 왕족의 혈통으로 오신 것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기 백성'은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를 다르게 해석해 본다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더 이해하기 쉬울듯하다.


즉 자기 백성, 예수님이 가장 먼저 어떤 백성의 세계를 열었고, 그와 같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은 죄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이 육신이 된 사람이 가진 생명의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의 처음이고,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사람이라는 형식과 하나가 되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인생의 목적을 보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나인 예수님의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있는 그 상태를 바로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정체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고,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요 17장) 계신 상태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인 사람인 것이다. 이것을 굳이 설명한다면 예수님의 상태에 대한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직분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인데, 옛날에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임명하는 신분이 세 가지가 있었다.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인데 대표적으로 왕과 제사장을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왕이요 제사장이신 분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왕은 어떤 세계에 있어 최고를 말하고, 어떤 나라의 통치이념을 가진 존재, 다르게 말하면 통치이념이 육신이 된 존재를 왕이라고 하고,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신분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왕이신 세계는 이 땅의 어떤 정치적인 나라, 국가론에 의한 나라의 왕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세계에 있어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첫 열매라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왕이신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기준이고 표준이라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통해서 표현된 존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기준이고 표준이고 그 세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존재이자, 그 세계가 육신으로 성육신 된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라는 기준에서 빗겨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도 아니며 구원을 받은 존재도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잔뜩 긴장하게 하는 표현이지만 피할 수 없는 명제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명백한 기준과 법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괜찮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독생자이신 것은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와 신앙이 같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런 것을 설명해 갈 때 마다 현재의 교회가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신앙은 십자가와 반대인 것이 많다. 세상에서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도덕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도 오류다.


먼저는 도덕이 복음과 결합할 수 없음이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정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생명의 방향성이다. 그리스도인이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지, 도덕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묘한 것 같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도덕이 나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 도덕적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삶을 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기에 죽어서 천국에 가서 잘 살 것이라는 방향성을 가진 것은 도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 것이기에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서, 또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한 사랑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면 다 거짓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도덕적인 생명이 없는데, 사후에 잘 살겠다는 이유로, 또 세상 사람들에게 욕  먹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외식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도덕이 이러한데, 세상에서 성공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가장 타락한 신앙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라고 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생명이다. 국화꽃을 내는 줄기는 그 생명이 국화이기 때문이다. 복숭아가 열리는 것은 복숭아라는 생명이 나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그 이름과 같은 생명이 그 분의 정체성이여서 이름과 같은 삶을 표현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이름 같은 삶을 보이신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런 삶을 살도록 지어진 존재일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을 우리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평생 애만 쓰는 신앙인으로 남을 뿐이다. 성경은 그저 요원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에서 자기 백성이라는 것은 자신과 동일한 생명,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지어진 존재로서 그 목적이 회복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육신을 가진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형상이자 이미지인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구원이 있고, 또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같이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인생의 내용과 목적이 우리의 삶으로 표현되는 하나가 된 삶을 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임마누엘이신 것은 또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런 상태의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모든 이름은 나도 그러한 삶을 살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돈 달라, 밥 달라, 배우자 달라고 기도할 때 서명처럼 부르라고 있는 이름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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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25 성령으로 잉태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9. 11:27 Writer : 김홍덕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마 1:20하)

마태복음이 신약의 처음이고, 또 그 중에서 1장에서 성령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신약을 기준으로 여기에서 성령이 처음 언급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고 나면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오시는 과정인데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잉태되었다는 것은 마치 <터미네이터 1> 에서처럼 미래에서 온 사람(후손)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상한 모양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어떻게 보면 알쏭달쏭한 이런 의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잘 알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마 1:21)고 하셨는데, <죄>라고 하는 것은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 곧 정체성을 벗어난 것이다.


죄의 원어는 '하말티아'라고 하는데 이는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창이나 화살은 과녁에 맞을 때가 자기 자리인데 그것에서 벗어난 것은 죄라는 것이다. 또한 주기도문에서는 죄를 빚(debt)으로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할 빚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빚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면, 우리가 스마트폰을 구매하는 것은 그 스마트폰이 전화와 내가 원하는 기능을 제공해줄 것을 기대하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스마트폰은 구매자인 주인에게 전화와 원하는 기능을 제공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능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구매자인 주인의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는 죄 가운데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도 원래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에 비해서 보면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부엌칼은 요리하는 것에 사용되기 위한 목적 안에 있는데 그것에서 벗어나서 아무리 다른 것을 잘 베어낸다해도 그것은 위험하며 목적을 벗어난 상태가 되는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바로 그런 죄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목적을 위하여 지음 받고 부름 받음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We)>의 개념과 같은 것이다. 


테니스 동호회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속한 동호회를 말할 때 당연히 우리라고 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로 살아야 하는 백성을 말하는 것이고, 자기 백성의 죄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에서 구원한다고 하면 교도소나 옥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것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고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가지신 뜻을 보이셨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신 구원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며, 이 세상의 왕이 되는 것으로 세상 죄에서 사람을 구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이 위대해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방해가 되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육신을 가졌기에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루어내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 너무 보잘 것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모습 때문에 그들에게 심판 받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사람이 그 마음에 감동을 받고 자신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리에서 벗어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함으로 죄를 시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형상인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회복이 되는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


바로 그 감동이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보는 그 사람 마음 안에서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또한 자신이 위대함을 추구하던 삶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목적하신 정체성이 아닌 죄악 중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 감동, 그 감동을 주는 그 영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안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여자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우리 모든 인생들의 마음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잉태되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심령으로 우리가 살게 하시는 법을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 아래에 있던 백부장이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 마음 안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을 한 것이다. 바로 그 고백을 자아내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성령의 임무라고 할까 성령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을 깨닫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우리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을 때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성령의 감동을 주면서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심의 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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