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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또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비단 보물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만 생각해봐도, 집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때론 그것 때문에 집에 일찍 가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데, 하물며 자신이 보물로 여기는 것이라면 마음이 항상 그곳에 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당연한 말씀을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인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보물로 여길 것인가 하는 것과, 땅과 하늘은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보물이라는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가치는 본질을 알아야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무엇인가를 보물로 여긴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의미를 알 때 보물로 여긴다는 것이고, 그 의미가 가치가 있다고 여길 때 보물이 되는 것이다. 가치나 본질을 모르면 돌 같이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다이아몬드를 돌처럼 가지고 놀았다고도 하는데 가치를 모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최영장군이라는 사람이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그게 황금을 돌처럼 여기라는 것이 아니다. 돈이라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보물로 여기고, 어떤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것을 본질로 또 목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의 이유에 있다. 자동차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이동하고자 하는 목적의 달성 능력에 있다. 또는 경주용 자동차는 경주에서 승리하는 목적에 그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라도 그 존재의 목적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의 가치, 사람의 보물은 존재의 의미 그것이 최고의 보물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어떤 능력이나 자신이 가진 재물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매기면 굉장히 분노하고 화를 낸다. 배신감을 느끼고 모멸감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그냥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가치를 매길 때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렇듯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가치는 존재의 의미이지, 사람이 가진 돈이나 능력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땅에 있는 것에 둔다. 땅에 있는 것,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과 같은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좇는다. 그리고 그것에 명분을 부여한다. 세계평화나 나라의 민주화와 같은 것에서부터 가족을 위하여 까지 다양한 것을.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의 의미를 되묻곤 한다. 그것은 자신이 가치 있는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이 들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 존경받는다는 스님도 "인생은 무(無)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어갔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적질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보물, 곧 자신의 가치를 하늘에 두라고 하시는 것이다. 마음은 보물이 있는 곳에 있으니,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는 것은 마음을 하늘에 두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하늘에서 찾으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하늘에서 찾으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땅과 하늘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하늘의 상태를 땅이 표현하는 것이다. 하늘이 흐리면 땅이 젖고, 하늘이 건조하면 땅은 마른다. 하늘에 봄이 오면 땅에 꽃이 피고, 하늘이 차가워지면 땅에 겨울이 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땅의 흙으로 지어진 인생은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의와 뜻을 자신의 보물로 여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 하나님의 뜻을 보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에 맞는 가치를 회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치, 사람이 가장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삶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과 같은 것을 좇지만 그것은 좀이 슬고 동록이 들며 도적이 훔쳐가듯 사라지고 결국은 삶의 의미를 잃고 만다. 그것은 다 땅에서 비롯된 것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땅이 변하듯 따라오고 수반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의 의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결국 사람의 가치, 사람에게 보물과 같이 가장 귀한 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창조주에게 있는 것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 때 진정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 피조물이다. 정말 목적에 맞는 성능 좋은 자동차의 가치가 그런 것이듯. 그리고 그 목적이 창조주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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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6-18 금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8. 16:47 Writer : 김홍덕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은 이어 금식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금식이라는 것은 대 속죄일에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규례가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금식이라는 것을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금식기도로 보통 통용된다. 어쨌든 금식은 하나님 앞에 속죄하고 신앙에 대한 표현인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금식을 해라 하지마라는 말씀은 하셨다고는 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은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금식할 때 슬프고 힘든 표정을 짓지 말고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하게 하여 아무 일도 없는 것과 같이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구제도 그렇고 금식도 그렇고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말씀을 하신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들에게 자랑하듯 하지 않고 조용하고 은밀하게 선행을 베풀고 또 종교적 수행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건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은밀함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은밀함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은 금식이라는 것이 사람이 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은 금식이라는 것이 사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은밀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것은 금식은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은 사람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은밀한 것은 숨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어떤 일은 사람들이 나타내는 것과 다르게 은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쉽게 이야기 한다면 영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영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이것도 역시 성경을 문자로 읽고 행동 규범으로 보면 금식할 때는 조용히 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보게 된다.


금식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떤 일에 대한 표현이다. 금식이라는 것은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속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속을 비운다는 것은 다 목적이 있다. 내시경 검사를 위하여 전날 밤부터 금식하는 것은 위장의 상태를 잘 보기 위한 것이고, 음식으로 인하여 탈이 났을 때는 위장을 쉬도록 금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 정치적, 사회적 이유로 금식하는 경우에는 투쟁이 목적이기에 그것을 단식투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금식은 굶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속을 비우기는 비우되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비워낸다는 것은 지금 들어 있는 것은 그 자리에 있을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금식이라는 것은 사람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닌 것이 있는 것을 비워내고 채워야 할 것을 채우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금식의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람이라는 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미지 곧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심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의 성품을 사람 안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 담겨 있는 상태일 때 그것을 비워내고 원래 사람에게 채워져야 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말씀이 채워질 수 있도록 그것을 비워내는 것, 그것이 금식인 것이다. 그래서 대 속죄일에 금식을 하는 것이다. 금식과 속죄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해서 보면, 기도라는 것은 결국 사람 안에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이다. 기도는 곧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구한다는 것은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채운다는 것, 즉 깨달을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이루어진 상태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기도를 예수님의 이름, 곧 정체성과 생명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은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 두시기 원치 않은 것을 밖으로 다 내어버리고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두시기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온전한 금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금식을 했다는 것이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되는 것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을 자랑하고 다녔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보듯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다. 지금도 금식을 했다는 것은 어떤 신앙의 훈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부흥강사들이 간증한답시고 자기가 금식한 것을 교묘히 끼워서 이야기 하는 것도 그것이거니와, 금식한 사람 못지않게 금식한 사람을 보면서 신앙을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금식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대단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비워내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또 채워야 할 것은 어떤 것인가? 채워야 할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 아닌가? 그것은 성경책이 변해서 예수님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본성이 하나님 말씀의 의와 같기 때문에 그 의와 말씀이 예수님의 육신과 삶을 통하여 표현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렇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금식이라는 것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 아닌 것을 비워내고 그리스도의 본성인 하나님의 의를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말씀은 도발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 교회가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은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또 천국 가서 잘 살기 위한 것이다. 냉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구원도 거의 그것의 자격 요건으로 보일 정도이다.


기독교 신앙이 타락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한마디로 증명할 증거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라는 말을 전하고 그것에 매료된다는 것이다. 그게 알고 보면 면죄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생각,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복 받는 것에 두는 생각, 또 고상하게 예수 믿는 사람이 잘 살고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성공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싶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비워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지는 것은 오직 십자가로 인하여야 하지 예수 믿는 사람이 잘 사는 것을 보고 교회로 온다면 그건 오는 사람이나 본이 되는 사람이나 다 돈이 하나님인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문 돈은 고사하고 옷 한 벌도 없었는데도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은밀하게 싹이 되어 금식한 마음에 채워져야 하는 것이지,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을 잘 갖추었다고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금식으로 비워내어야 할 것들이다.


금식은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담으려고 만드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을 비워내는 것이다. 바로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육신의 음식을 금하는 금식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지거나 기쁨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듯 하는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은 뭔가 부끄러워 감추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은밀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금식이 사람의 심령 안에 있어서 안 될 것을 비워내고 하나님의 의를 채우는 것이고, 그것은 영적인 일이기에 은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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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신 다음에 이어서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말씀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기도하는 것과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기에 이어서 말씀하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이 좀 궁금하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우리가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인데, 가르치신 배경에는 외식이라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이어서 기도를 가르치신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셨다. '그러므로'라고 했다는 것은 앞에 어떤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식에 관한 것이었다. 즉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고 기도를 가르쳐줄테니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 뒤에는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이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고 말씀을 하신다. 즉 기도라는 것과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일원론적 관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좀 다르게 표현하면 존재론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비유하자면 술 마시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이원론적 관점이라면, 일원론적 관점은 누가 술을 마셨느냐 하는 문제이다. 즉 행위냐 존재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보는 관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인들은 일원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동전의 앞뒷면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 자체의 가치관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과 매우 연관된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의 관점이 아니라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관점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나에게 어떤 존재이냐 하는 것이다.


존재와 행위는 단계적인 것이다. 모든 행위는 존재에서 비롯된다. 어떤 행위든 존재가 먼저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는 그 존재의 본성이나 특성에 맞는 행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존재의 신이시고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것에 관심이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위를 먼저 본다. 물론 행위는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행위를 보고 존재를 가늠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행위를 표현한 다른 사람의 속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는 시인하는 것이지, 심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스스로 표현해 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신앙인들이 행위를 바로하면 존재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성경을 거꾸로 보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런 관점으로 깔끔하게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이 어렵고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은 것은 성경의 탓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관점 때문인 것이다. 성경은 존재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존재, 즉 생명이 표현하는 행동을 말씀하고 있는데, 반대로 행동을 하면 존재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으로 보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주 이야기하듯 군인이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인은 군복을 벗어도 군인으로서의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고, 또 어떤 임무에 따라서는 군복을 벗고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된다고 생각하면 우선 몇 가지 군인 흉내는 내겠지만 이것저것 하다보면 문제가 생기고 들통이 나는 것이다. 그것처럼 성경을 존재의 본성에 대한 말씀으로 보지 않고, 행위 규범으로 봐서 어떤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으로는 성경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외식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외식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내용 없는 형식, 존재가 먼저 정의되지 않은 행위, 그것이 바로 외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에 있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로서 먼저 존재가 정의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식하지 않는 사람, 곧 내용이자 생명인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이 주기도문에 이어 있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다른 내용이 아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너희 안에 하나님의 의인 그리스도의 생명을 구하라> 그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면 풀어서, 또 어떻게 보면 압축해서 가르치신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인 것이다. 그 기도가 이루어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고,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 나타남이 바로 행함인 것이다. 그래서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것과, 행함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14절에 말씀하신 잘못은 영어 성경에서는 sin against you(NIV), trespasses(KJV)로 나온다. 즉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자리를 넘어서 나의 경계너머로 들어와서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용납하라는 것이다. 그 용서의 첫 열매가 바로 십자가이다. 즉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님께 죄를 범한 사람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을 용서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바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유대인과 같은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침범한 죄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이다.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담보로, 혹은 기대하거나 계약 조건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행위를 한다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어야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용서하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나 같은 생명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생명으로 인한 본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에서 비롯된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 그 생명은 곧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생명이기에 그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용서하신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입증하기 위하여 오신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그것을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것이 기적이고, 그 생명이 있어야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그런 생명은 하나님이 보실 때 분명히 살아 있는 생명이기에 죽음 가운데 두실 수 없어서 살리시다보니 부활인 것이다. 


부활이라는 놀랍고 정말로 모든 신과 구분되는 그 기적도 하나님이 사람 살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것 보여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께는 일도 아닌 것이다. 만들기도 한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생명, 남의 죄를 용서하는 생명은 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어야 살았다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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