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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43-48 원수를 사랑하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3. 10:55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숙제와 같은 말씀이다. 실제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나?'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고 또 질문을 많이 한다. 이 문제가 아주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기도 하다.


원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나에게 행악한 원수에게 밥 퍼주고 발 씻겨 주는 그런 모습을 보이라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말씀의 실체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생명이 되라는 말씀이다. 모든 성경이 그렇듯, 성경에 표현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율법적 관점에서 도전하면 어려운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다면 성경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에서 비롯된 행동 양식이기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참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어진 말씀을 우리는 간과하면 안 된다. 그냥 살다가 나와 원수가 된 사람이 있는데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4-45)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물론 따지고 들면 성경 어느 한 절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그 강렬한 말씀 사이에 눈에 크게 띄지 않는 말씀들이 아주 중요한 단서이고 열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한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말씀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빛을 비추고 비를 내린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선과 악을 분리하고 선한 것만 추구하려는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자기의 하나님이 있는 것의 대칭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원수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곧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한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도 기도하셨고, 또 원수 같은 그들을 대적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인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모습이다.


그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가진 가치관이 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으로, 사람이 어떠해야 선하게 된다는 자신들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께 원수들이나 하는 짓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볼 때는 예수님은 정말로 악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 악함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스스로 왕이라 하는 반역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에게 '그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며 기도하셨고, 또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를 찌른 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게 하여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는 사랑, 사람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알게 하는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 즉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셨다는 것이다.


원수라고 하면 무협지에 나오는 '내 부모를 죽인 원수'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원수는 비단 그런 원수뿐 아니라 사람이 다른 사람을 원수로 여기게 되는 기본 이유가 있고, 그 이유로 인하여 서로 원수가 되는 모든 사람들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원수가 되는 모든 이유가 바로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하여 판단하고 그 중에서 악을 응징하고 선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그 선악과의 본성이 모든 원수 관계의 근본 원인이고, 그 마음이 드러나서 서로 원수가 되었을 때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또 자기가 정한 기준에 악하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 그것을 죽이려 할 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를 보여서 그 사람에게 선과 악의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사람은 그렇게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사람을 심판하는 것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사랑을 나타내라는 말씀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즉 이것은 악인이라는 것이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악인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든 사람은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므로 죽은 자와 같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서 보신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거나 악인을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악은 모두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악을 뿌리 뽑고자 자행하는 것과, 선을 이루기 위하여 남을 죽이기까지 하는 선악과의 본성이 사람이 아는 모든 악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성들이 사람 사이에 원수를 만드는 것이다. 모든 사람 사이의 원수는 그렇게 생기는 것이고, 그렇게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의 과제로 삼고 실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개가 될 수 없듯이, 그런 생명을 가진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오히려 그렇게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것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싶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생명의 본성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싶은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 길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성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는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 사건에서 비롯된 원수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의 범주로 놓고 보면 오히려 일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들을 말한다. 그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사람에게 선을 이루기 위하여 또 자신이 생각하는 악을 물리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 원수가 되는 모든 인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죄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긴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선하다는 것을 말하고 증명하기 위하여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사람에게 대항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죽을 것이다. 괴로울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죽음을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죽음이야 말로 살아 있다는 것이기에 살리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런 죽음을 당한 나의 모습,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죄인이 되어 죽어가는 모습을, 선을 주장하고 나를 십자가에 끌고 가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이 보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고, 자신도 그런 삶을 살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서 삶의 의미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죽인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감정적이고 사건으로 비롯된 사람 관계 안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정확한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한 탓도 있다고 봐야 한다.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분이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을 찌른 자들 까지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랑의 법과, 또한 그것을 깨달은 자들이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사랑을 전하신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한다. 하지만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죄인이 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원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성은 어떻게 보면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적어도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정말이어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이 쉬운 것이 되어야 한다. 본성이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은 이유가 있다. 성경이 어떤 측면에서 보면 간증과 같고, 체험한 사람들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체험한 사람에게는 너무 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요원한 것이다. 수동 운전을 하는 사람은 경사진 곳에서 브레이크 없이 엑셀과 클러치만으로 정지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체험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도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분명, "왜 노력해야하지?"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이 그러하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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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도 다 아는 복수(?)의 규례인 <눈에는 눈>이라는 것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는 익히 아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예수님께서는 지금 율법에서 중요한 사항들을 다시 이야기 하시면서 어떻게 보면 더 지키기 힘든 법으로 바꾸시고 있다. 하지만 이건 율법을 지키는 행동 기준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 곧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어주라는 것이나 빌려달라고 하면 뭐든지 다 빌려주라는 것은 육신이 살아가는 것에 관한 규례나 재화나 감정이나 사건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와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블로그의 내용을 보고 행여나 행동은 문제가 없고 의(마음)만 선하면 된다는 이야기인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간음의 문제를 놓고 보자. '간음이라는 것이 정해진 내용과 형식이 아닌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육신의 간음은 간통법도 폐지된 세상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네?'라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성경도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심청전을 읽고 인신매매를 논하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간음이라는 것으로 보면 정해진 짝이 아닌 것과 연합하는 것은 비단 남녀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간음은 하나님의 의를 담아야 하는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는 것 그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육신으로 남녀의 문제에 있어서도 문제가 될 행동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간음이라 여기시는 것을 아는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의 모든 표현은 그 생명의 본성에 따라 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육신의 행동 강령이나 행동 기준으로만 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 곧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그 성품이 본성인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 모세의 율법이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오른뺨을 때리면 왼편도 대어 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같이 가고, 무엇을 달라고 하면 주고, 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이 행하기 쉬운 것이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게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이 말씀을 딱 들으면 이게 사람의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도 모르실리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악하다고 하신 말씀 중에 친구들이 들것에 메고 와서 지붕을 뚫고 내려서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심으로 고치셨다. 그때 이를 본 서기관들이 그 마음에 "어떻게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있느냐?" 생각한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그것을 악한 것이라고 하셨다.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 9:3-4)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악함은 행동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관에 있어 스스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사람을 규정한다는 것은 규정하는 기준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어떤 것이 선하고 어떤 것이 악하다고 스스로 규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악과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규정했을 때 이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청년이 찾아와서 "선한 선생이여" 했을 때,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반문하시면서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했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하여 함정을 판 질문을 할 때 예수님께 묻는 자들이 "당신은 참되시고(어쩌고 저쩌고)"할 때도 성경에는 "악함을 아시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악한 것,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시는 악한 자는 한 마디로 선악과를 먹은 인생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 마음에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있어서, 자기가 생각하는 선함을 주장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황에 따라 그 선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그렇게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엄히 금하신 것이라는 것에서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원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그들이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이 아주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사람에게 죄를 사한다고 하는 것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도, 또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려는 것을 외식이라고 하신 것도 다 자신들이 가진 선의 기준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오리를 가자는 수준도 아니고, 오른뺨을 때린 것도 아니라 목숨을 내어 놓으라고 했는데, 그 때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말없이 따라가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악한 자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한 사람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신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보면 지금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오른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관한 말씀이다. 오른편이라는 것은 의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오른뺨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시비를 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신앙을 시비 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왼편을 대어주라는 것은 신앙에 대하여 시비를 걸어오면 왼편 곧 육신으로 살아가는 형식에 관한 것까지 희생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시비를 걸면 그 시비를 거는 사람이 감동할 수 있도록 육신의 삶을 살아내라는 말씀인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나온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절실한 말씀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경제적 부족함이나 사회적 부족함을 시비를 거는 것은 그래도 용납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시비를 걸면 웬만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많은 경우 이것에는 사생결단을 낸다. 그래서 신학생이 데모하면 말릴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다닌다고 시비 거는 주변인들에게 단호하게 대응하기도 하는데, 그런 모습들은 하나같이 눈에는 눈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모르는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온전히 알았던 분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 자기 말을 하려하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신앙이 좋다고 할수록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알수록 신앙에 대하여 오류라고 생각되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에 가만히 있지 않고 거의 사생결단의 각오로 그 문제에 대응한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불법 소프트웨어를 쓴다거나 교통 위반을 했다거나 하는 것에 대하여는 오히려 자랑하듯 떠벌려도 문제되지 않지만, 신앙에 대하여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용서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교회 세습이나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뭐라고 하면 교회의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며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악한 자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군사봉기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이기지 못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오른뺨 곧 신앙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악한 자에게 왼뺨 곧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삶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십자가에 달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사람들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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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33-37 맹세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31. 13:55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어떤 것으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를 들어 흔한 말로 "하늘에 대고 맹세한다."와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또한 율법에서는 맹세에 대한 말씀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맹세라는 것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자신이 분명하게 그것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지금으로 치면 뭐랄까 담보를 잡히고 대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의 말에는 맹세를 분명히 지키라고 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인가? 맹세라는 것을 무력화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율법의 완성과 어떤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지금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성경, 곧 그 당시 유대인들이 말씀을 행동강령으로 지켜내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다시 말씀하고 계신다. 살인에 대하여, 간음에 대하여, 그리고 이제 맹세에 대하여, 그리고 이어서는 보복에 대하여,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율법에 대하여 다시 말씀하고 계신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의 완성은 율법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을 살게 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사람이 그런 자리로 가지 않고 있는 상태가 죄의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법이 없으면 죄의 행위가 있어도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2015년) 대한민국에서는 간통법이 폐지되었다. 즉 법이 없어진다는 것은 이제 간통이 더 이상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율법이 없으면 사람이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죄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죄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위로는 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존재론적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행위로 접근하려는 가치관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어떤 기준에서든 그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의 기준이 있어서 사람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을 선하다고 또 의롭다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타당하다고 결정하는 습성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실 목적으로 율법을 주셨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이 다 지켜낼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이라는 것은 세부적으로는 사람마다 잘 지킬 수 있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사는 동안, 죽을 때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킬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형제를 보고 노하는 자는 살인한 것이라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라고, 또 어떤 것으로도 맹세치 말라고 하시는 것은, 그런 행위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께 행동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제 율법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런 행동이 본성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지키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율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향기가 없는 꽃그림과 같은 것일 뿐이다. 율법의 완성이란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맹세한다고 하는 것에 있어 최고의 맹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에 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맹세나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맹세가 다른 맹세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기필코 이루어내겠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의지를 내세우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지로 이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니 구름이 있는 하늘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모든 뜻을 가진 하늘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은 땅의 모든 변화에 대한 의를 가진 곳이 하늘이다. 하늘이 변하면 땅에 봄이 오고, 하늘이 변하면 땅에 추운 겨울이 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맹세하여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기온이 땅의 계절이 되듯, 하늘의 뜻이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이 맹세하여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맹세함으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땅에 씨를 심으면 하늘에 봄이 온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싶다면 맹세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의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것이 아닌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루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게 맹세가 아니라 순종으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고, 생명의 본성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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