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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4:1-6 외인을 향한 지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3. 08:24 Writer : 김홍덕

지혜는 사람들이 가진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다. 지식은 사람의 삶의 형식에 관한 의문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지혜는 삶의 목적과 살아가는 이유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다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모였다.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학교나 학원을 가면 되지만, 왜 사는지를 알고, 또 지식을 통하여 익힌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즉 사람이 왜 하느냐를 아는 것과 밥 짖는 법을 아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지혜와 총명이 함께 하기를 구하였다.(골 1:9) 그리고는 어떤 것이 지혜인지, 즉 무엇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고 삶의 의미인지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끝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고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 모양인지를 말씀하였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상전에게 종에게 모두에게 또한 어떤 사람이라 해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의 삶의 모양이 어떠한지를 말씀한 것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기회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또한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외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대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외인들이란, 교회 밖에 곧 신앙 밖에 있는 이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것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별 것 아닌 일로, 또한 심지어는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신앙적 관점에서 무시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서는 대적할 대상으로 까지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은 지금도 만연한 생각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바울사도는 다르게 말씀하고 있다.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사람의 본질이자 내용이 <사람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됨으로 하나님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의를 잊고 형식에 몰입한 신앙을 율법주의라고 했고, 의만 인정하고 삶의 형식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을 영지주의라고 했는데, 율법주의자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밥도 같이 먹지 않을 정도였다. 즉 외인을 대하는데 지혜는 물론이고 뭐 제대로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육신의 혈통 그 자체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즉 신앙적 인종차별이라고 할까 뭐 그러했다.


반면에 영지주의자, 곧 의만 있으면 되니 삶의 형식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오판을 한 사람들은 육신의 삶을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므로 외인들, 즉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죽어라 열심인 사회적 요구와 삶의 수고들을 외면하고 그저 하나님을 믿는 의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영지주의적인 관점은 이 시대에서 신앙적 순수성에 몰입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그러한 기류는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것들을 교리나 신앙의 모습으로 선택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조차 이단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이는 2014년 대한민국의 여름을 달구었던 유병언의 구원파가 바로 그런 것이다.


앞에서도 지속적으로 말해온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생명의 유전자가 본성으로 표현되듯 살아가는 내용과 본질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이 더 알지만, (신앙의 계시가) 더 밝지만 오히려 모르는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보여주심과 같이 사람을 대할 때 그렇게 살아가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나 영지주의와 같은 것은 생명이 본성이 되어 표현되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심겨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는 이 하나님의 법이 소실된 신앙인 것이다. 율법주의는 내용이 없고, 영지주의는 형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은 외인과 세상에 대하여 온전한 지혜,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의 존재 이유, 삶의 의문을 해결한 지혜가 없는 것이다.


외인에 대한 지혜는 결국 신앙 밖에 있는 사람이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사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지혜가 그 최종 단계이다. 지혜라는 것이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고 사람이 가진 가장 중대하고 크고 어려운 의문이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들을 지혜로 대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 의문의 해답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 해답은 그리스도이신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곧 하나님의 의를 삶으로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용과 형식 중 어느 하나가 결여되고 훼손된 신앙으로는 의문을 해결할 지혜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의문이라는 것이 내용과 형식이 연결이 안 되고 그 고리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생긴 의문인데 율법주의와 같이 내용이 결여되고, 영지주의와 같이 형식이 훼손된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여 삶의 의문을 해결하는 지혜를 보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외인들을 대하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의 교회가 정말로 잘 하지 못하는 문제일지 모른다. 특히나 한국교회는 더더욱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을 문자대로 보고 지키려 하는 신앙들은 형식이 좋아지면 신앙도 좋아질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교회를 화려하게 지어 하나님께 영광이 돌린다 하고, 반면에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사회 사람들이 볼 때 광신도 내지 이단같이 자신들만이 모여서 교회가 절과 같이 산속으로 또 외지로 떠나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려 하는 모양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련의 모습들은 외인들에게 지혜로 다가갈 수 없다. 그리고 외인들에게 지혜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내용이 되고, 삶이라는 형식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사람들에게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또 언제 찾아가도 평안히 자기 삶을 안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외인들을 지혜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교회의 문제 뿐 아니라 개인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씨가 없는 땅에 씨를 뿌리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전도라 하고 그 열매가 나오게 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신앙이 없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는 신앙이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다 그 자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고, 또한 그런 사람들이 신앙 가진 사람들로 인하여 감동하지 않는다면 또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꽃이라 이름을 부를 때 꽃이 되는 것처럼, 신앙 없는 사람이 신앙 가진 사람들을 보고 삶의 의문이 해결되는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되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의미가 있어지기를 바라셔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성품과 생명이 자신의 내용이요 본질이고 삶의 의미가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하나님을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심으로 하나님이 의미가 있어지셨는데,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화가에게 캔버스와 같은 것이다. 세상도 그러한 것이다.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표현한 증거를 세상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요 13) 이것이 바로 외인들을 지혜로 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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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4:1-6 그리스도의 비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2. 12:18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짧은 편지에서 간단해 보이지만 많은 것을 말씀하고 있다. 성경을 객관적 사실로서 연구하고 공부하고 또 그것을 전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골로새서는 교회 안에서 세상의 학문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 인정받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가정과 사회 생황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심화시키면서 골로새서의 연구를 해 갈지 모른다.


하지만 골로새서에는 단순히 그런 교회 상황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현상으로서 분명한 것이었지만, 그러한 것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러니까 세상의 과학과 철학과 같은 것은 다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것이 신앙의 본질의 자리에 앉는 것은 신앙의 근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은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러한 것은 다 땅의 것, 곧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의 본질에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땅에 있는 것이 본질이 되는 것은 결국은 남편과 아내, 또한 사회 속의 인간관계와 같은 것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의 생활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람의 생활 방식,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되는 삶은 신앙을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기반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인간 본질의 모습을 보고서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고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 안에 두고, 또한 다른 모든 사람이 인간이라는 연약함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좀 손해보고 수고하고 죄인이 되는 모습인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의인이 죄인 앞에서 죄인이 되는 세계이다. 이것이 정말로 비밀이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더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그 비밀이 바로 이 비밀이다. 이 비밀은 곧 십자가의 비밀이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온전히 하나님의 안목, 그러니까 심령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볼 수 있게 하는 비밀인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도 할 수 있는 치명적인 것이다. 즉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삶의 곤고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중에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정에 두는 물건들도 아무리 멀쩡하고 번듯해도 그 용도가 불분명하면 버려지거나 중고시장에 내다 팔아 버린다. 즉 존재의 목적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삶 안에서 형성하려 한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에서 많은 의미를 찾는다. 또 사회 속의 어떤 분야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수학 선생은 수학을 가르치는 교단에서 그 의미를 찾고, 기술자는 기술로 물건을 만들 때 삶의 의미를 얻은 듯 생각한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들에서도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비밀이다. 왜 비밀인가 하면, 사람들은 어떤 것이라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미를 가질 수 있게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옳은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러니까 수학 박사는 수학에 있어 다른 사람보다 더 박식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려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런 것이 무너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수학 박사, 수학 교수에게 "수학도 잘 못하면서 무슨 소리냐?'라고 한다면 이는 엄청난 일이 될 것이다. 수학 교수에게 있어 그것은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고, 전쟁 도발과 같은 것이다. 세상의 법으로는 그런 것이 용납될 수 없다. 즉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그 가진 것에 대한 세계의 의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수학 박사의 말은 수학이라는 세계에서 옳은 것이 되고, 야구 감독의 말은 야구라는 세계 안에서 옳은 것과 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세계에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려고 한다. 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이렇다. 수학에 대하여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잘 구분하고, 선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것이 많을수록 더 의미 있고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법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법은 반대다. 더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 의하여 심판 받고 죄인이 되는 것에 순종하는 세계가 바로 십자가의 법이다. 세상의 법으로 보면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상황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사형수가 된 상황이 아닌가?


십자가의 도는 가지고 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되는 세계이다. 사람들은 단순하게 가진 것을 베풀어 주고 나누어 주는 것이 사랑이고 하나님의 법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신앙인의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대세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정말로 안타까운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가지고 있는 것을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으로 인하여 없는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되고, 종이 되고,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고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비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아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인데 예수님보다 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한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고 십자가의 도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수학 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수학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당한 일이겠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아이들이 수학을 배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면 맞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하지만 수학 선생이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수학을 알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자신은 수학을 모르는 사람과 같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흔히들 말하는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즉 수학을 잘 아는 선생이 아니라, 수학을 모르는 아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그런 모습으로 다가갈 때 아이들에게 수학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수학 선생이 자신이 선생이 아니라 학생과 같이 수학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면 웃길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그 모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라면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고, 하나님의 권능을 계속 보여주면 될 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죄를 주는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사형을 당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잘 하는 영역에서 그것에 도전을 받으면 항거하기 마련이다. 부부가 싸우는 것도 같다. 아내가 남편의 일을 이래라 저래라 하면 남편 입장에서는 남자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이 더 잘 아는데 간섭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자신이 잘하고 또 수고한다는 것을 몰라주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선악과에 뿌리를 둔 생각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상대를 굴복시키는 말 중에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바로 세상의 법을 상징하는 말의 하나이다. 수학 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십자가의 도는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세상 사람들 중 초보적인 사람은 자신이 어떤 세계에서 더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그 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은 그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그리스도의 삶은 가졌다는 이유로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자신과 같이 될 수 있도록 수고하고 목숨을 내어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비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셨던 유일한 분(독생자)이셨는데 그것으로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으려 하거나 그것을 가르치시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은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랑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죄인이 되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과 같이 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재물이나 지식과 같은 초보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본질과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신앙인들, 소위 말하는 목회자들은 신앙이라는 것, 또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투철한 모습을 보인다. 신앙을 지키기고 외치기 위하여 죽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하면 항상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세상의 법이다. 


목회자가 진정으로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한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신앙 없는 사람으로 몰고 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고, 또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때, 그것에 대항하고 그런 사람들을 교회에서 몰아내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시인할 때 까지 오히려 종과 같이 수고하고, 신앙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수고하고 살아낼 때 바로서 하나님도 전해지고, 신앙도 온전해지며, 교회가 올바로 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인 것이다.


수학 선생은 학생들의 모습에서 자신도 학생들과 같이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자신을 낮추고 비워서 그들과 같이 생각하면서 함께 생각을 공유할 때 온전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교육이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것에 있어 자신이 더 아는 세계에 있어 항상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알지 못하는 종과 같이 살아갈 때 비로소 십자가의 도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에게 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듯 가장 중요하고 존재의 본성에 관한 것에 대하여 그렇게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삶의 형식에 관한 것에서 어찌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


남편이 아내에게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대접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으로서 귀한 존재이기에 집안일을 감당하고 수고하면 감동이 있지 않겠는가? 또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 더 잘 알지만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수고하고, 또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라 비난할 때 묵묵히 그들이 그것을 잘 할 수 있도록 수고하는 삶을 사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생명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말해 왔다. 그것은 심히 의심스러운 이론이나 논리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진리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절대로 개의 생각이나 개가 물건을 보는 방식을 알 수 없다. 생명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개의 사고와 인지 방식을 이해하려면 개로 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이 이와 같다. 그래서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거듭남은 어떤 날짜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방언과 같은 어떤 현상이 동반되는 것이 아니다. 이 거듭남의 증거는 자신 스스로 안다. 만일 어떤 날 사람의 정체성과 이 세상의 법에 대한 안목이 바뀌었다면 스스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평소에 도로에 자전거가 얼마나 많이 다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나가거나, '자전거를 하나 살까?' 생각하고 거리를 걸어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있는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또한 사람이 거듭나게 되는 과정은 씨가 땅에 심기는 것 같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그것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땅에 심겨진 씨가 열매가 되는 것과 같고, 여자가 자신과 성씨가 다른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이고 사람은 땅이며,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가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사람 안에 어떤 것이 들어가서 그것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어떤 것, 무엇이 들어가느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것이다. 십자가 맡에 있던 백부장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하나님의 이미지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그 백부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하나님의 법,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기 때문에 존귀케 되고 "목사님! 목사님!"하면서 대접 받는 것과 같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이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나온 법으로 죄인이 될지라도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은 종과 같이, 또한 십자가에 달리듯 죄인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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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끝인사를 해가는 바울 사도의 권면에, 계속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런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한데 이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말씀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하게 된다. 그렇다는 것은 은혜를 베푼 사람의 은혜가 자신에게 은혜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주신 은혜가 나에게 절실하고 나에게 은혜가 될 때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런 감사함이 자신에게 있었다. 그리고 여러 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하라고, 특히나 항상 감사하라고 권면한다는 것은 자신이 권면하는 성도들도 자신과 동일한 감사의 이유가 존재하고 있고, 그 이유에 상응하는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은혜가 항상 있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는 사람, 감사함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은혜가 항상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있는 은혜가 있음을 알고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로 은혜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취업이 되면 감사한다. 취업을 감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취업이 은혜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취업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빈번하다 쳐도 하루에 한번 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가면서 겪는 일에 대한 감사는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는 매일 겪는 일들은 다르지만 그런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므로 매일 있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항상 감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굉장히 근접한 생각이지만 우리가 삶의 형식에 대한 절실함이라는 것은 '항상' 이라고 할 정도로 연속적이지 않다. 오히려 어떤 날은 절망적인 상황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 취업과 같은 삶의 형식에 관한 은혜이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는 것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진정한 감사, 항상 감사하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서 감사한다는 것은 적어도 태어나지 않은 것 보다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을 시작할 당시 스스로는 몰랐고, 또한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자아를 주시고 인생으로 살게 하셨다는 것, 그 자체를 감사하는 것이 바로 항상 감사하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면서 살아가며 겪는 일들의 결과에 따라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면서 살았지만, 그래도 늘 삶은 곤고하고 또 육신의 일이라는 것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틈바구니 안에서 어쩌다 간절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에 한 없이 기뻐하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내키지 않는 결과지만 그래도 감사하라고 하시니 감사한다고 말은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한 감사, 하라고 해서 하는 감사는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누적되면서 마음 안에는 '그래도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라는 생각을 떨치기 쉽지 않았다. 삶이 곤고해 질 때면 죄가 될까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으니 처음부터 이 삶이 없었더라면 상은 몰라도 죄도 없었을 것이니 그랬더라면 하고 바라기도 했었다.


감사함은 감사하다는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만족함이 있어야 한다. 서울대에 가고 싶은 사람에게 그저 대학에 합격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은 아니다. 대학을 가고자 하는 것이 은혜의 전부라면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어쨌든 반쪽 감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만족이 없는 것이고 항상 감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한다는 것은 이 삶 자체가 만족스럽고, 태어나지 않음 보다 더 만족하고 은혜롭고 감사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의 감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감사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감사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감사한 사람을 말한다. 즉 그것은 자신의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가 자신의 간절한 필요 곧 채워졌을 때 만족하고 감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지 않은 것 보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더 감사하다는 것은 정말로 삶에 대한 만족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삶의 질고가 하나도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삶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양하고 어떤 것은 자신으로서는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서 곤고해 지더라도 그런 모든 일에 대한 의미가 자신의 존재 이유 곧 태어나지 않음 보다 귀하고 좋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의 해결이나 삶의 필요가 채워지는 표면적인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와 한계와 어려움을 겪는 삶 그 자체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자신의 간절한 목마름을 해갈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감사를 알고 또 항상 감사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삶 전체가 감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를 감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지으신 이의 목적이 자신의 간절한 욕구와 일치하는 사람이 가지는 정말로 구분된 삶이다. 구분된 것을 거룩함이라고 할 때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그것에 감사한다는 것은 정말로 거룩한 마음이고 거룩한 사람이다.


자신의 원대로 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목적을 생각하기 이전에 살아가는 문제 안에서 문제가 해결되고 그런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감사가 귀하긴 해도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그런 일이 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그 있는 문제들도 늘 만족할 수 있는 상태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이 바로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모든 것을 감사한다는 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중에 항상 감사하는 것은 불행하고 또는 만족하지 못한 결과를 손에 쥐고서도 '이게 어딘가?' 라며 감사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감사, 항상 하는 감사, 자신을 존재하게 하심을 감사하는 것과는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가장 근간은 자신을 존재하게 했다는 그 자체가 감사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거나 그런 신념을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한 만족이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즉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그것이 자신에게 진정한 만족이 될 때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그 자체가 감사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 감사함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은 언제나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감사한 사람이니 존재하는 한 항상 감사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살아가면서 겪는 일이 어떤 기준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다고 해도, 그 삶의 모든 모양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 자체에 감사하는 것이므로 그 감사는 진정으로 참되고, 맘으로는 불만인데 감사하는 것과 같은 아쉬움도 없는 그런 감사함이고,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또한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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