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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8-25 남편과 아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12. 22:02 Writer : 김홍덕

남자와 여자



바울 사도는 남편과 아내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남편은 (성)씨를 가진 사람이다. 전통적으로 인류는 대부분의 경우 남자의 성씨를 아이들에게 부여하고, 서양에서는 결혼과 동시에 여자들의 성씨 또한 남편의 성을 따라가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러한 모양을 취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결혼과 또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생각이 남자와 여자,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녹아 있고, 또 그것을 통하여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늘 아버지로 곧 남자로 기록되었고, 또한 예수님도 육신으로 세상에 오실 때에 남자라는 성별을 가지고 오셨다. 성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 또한 신랑 되신 예수님, 그리고 씨 뿌리시는 농부로서의 하나님과 같은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농부가 땅에 씨를 뿌려서 농부가 얻고자 하는 소산을 얻는 농사의 법과, 남녀가 결혼하여 남자 가문의 자손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표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흙에 씨가 뿌려져서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면 그 열매를 씨앗의 이름을 따고 그 생명이 되듯,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새 생명이 되어 거듭난 생명이 되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또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육신으로 여자인 사람이 자신의 성씨 곧 자신의 생명과 다른 생명을 낳는 것과 같은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의 의와 뜻이 흙으로 지어진 육신으로 표현된 분이시라는 것 역시 그렇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남자, 남편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여자는 남자의 씨를 받아 새 생명을 잉태하고 낳듯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생명을 낼 수 있는, 아니 내어야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는 여자와 같은 것이다. 이는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신부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는 밭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얼핏 보면 남성 우월적 가치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여자와 아이는 사람 세는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그런 생각이 성경 전반에 흐르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육신으로 여자를 무시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로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도 모르면서 남자로서 우월하고 여자는 복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도 모르면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또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씨 곧 말씀을 가진 사람이 남성의 격을 가진 사람이니 육신으로 남녀의 구분 없이 모든 것을 말씀의 계시가 밝은 사람을 기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영지주의 사상에 가깝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남자로 나게 하신 이유가 있고, 또한 여자로 나게 하신 이유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으로 남자로 나게 하셨다면 남자라는 육신을 가지고 표현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고, 여자로 나게 하신 것은 또한 여자라는 육신으로 표현하고자 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인데 사람이 그것을 송두리째 무시할 레벨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복종하라



어떤 일에든지 원리와 뜻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하다못해 운전 하나만 하더라도 여러 명이 모이면 운전을 더 안전하고 잘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누가 운전해도 되는 상황이고 차라면 가급적 그 사람이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단순히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어떤 일에 있어 더 나은 의를 가지고 있거나, 또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맡기라는 것은 결과가 어떠하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으로 맡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복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골로새서를 읽고서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한다고 복종될 것 같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해 봤자 겨우 몇 번 하다 바로 복종은커녕 싸움이 되기 일쑤다. 즉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신의 남편이 되고, 또한 자신의 삶의 내용과 본질이 되지 않은 사람은 그 육신이 남자든 여자든 간에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하는 사람 앞에 복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행여 한다면 그건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본성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본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에게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남편에게 복종도 할 수 없고, 뒤 이어 나오는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건 훈련이나 의지로 되는 세계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과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과 본질을 알려주는 것이듯, 어떤 의가 없는 사람, 어떤 일에 있어서 잘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의와 일의 본질을 알게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먼저는 알지 못하는 괴로운 상태로 두지 말라는 것이고, 알지 못함을 인하여 놀리거나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 있어 원리와 뿌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의와 뜻이 인생의 본질이고 의미라는 것을 모르는 괴로움을 방치하지 말고 또한 그것을 모른다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 바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의 본질은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있는 남편, 곧 생명의 말씀인 씨를 가진 사람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 아내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남을 전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복종이라는 것은 반드시 속마음과 복종하는 것이 일치할 때 복종인 것이다. 속은 복종하고 싶지 않은데 절치부심하듯, 아니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복종하는 것은 복종이 아니라 거짓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육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복종하는 것은 할 수도 없고, 설사 그렇게 하는 듯해도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복종은 아니다.


이 복종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땅은 어떤 경우도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땅이 가물다는 이유로 하늘의 비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비는 그냥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땅이 춥다고 자기 맘대로 봄을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땅은 언제나 하늘에 종속된 상태로 대기하는 것이다. 하늘이 바뀌면 비가 오고 땅은 젖고, 하늘이 따뜻해져서 봄이 오면 땅에도 봄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일에든지 복종해야할 상황 앞에서 복종하는 사람이 된다. 어떤 순간 자신이 이 상황과 의 앞에 남편 앞의 아내와 같다는 것만 인지되면 어떤 상황이라도 복종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아내를 사랑하는 것 역시 같은 것이다. 자신이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인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이듯,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3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처럼"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의 의요,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인생의 의미를 알게 하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의에 대하여 아내와 같은 이에게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생명을 낳게 할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랑 역시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본질은 하나님의 의요 인생의 본질을 알 수 있도록 아내와 같은 이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며 헌신하는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이 사랑을 전하려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생의 본질을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이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 늘 그것을 전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마음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전함에 있어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언제나 죄인이 됨으로 그 의를 전하는 사랑을 하게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니까.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만 더 알고 잘하면 그것으로 우쭐대고 그것을 인정받기 원하고 그러려고 노력한다. 즉 자신이 아는 세계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도 동일한 현상이 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에 앞선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심판하며 가르치고 뒷 담화를 하고 좋은 신앙 외의 것은 생선의 뼈를 바르듯 다 발라내려 한다. 그것이 바로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아내를 괴롭게 한다는 것, 신앙 없음을 나무라고 사람 안에서 선한 것을 축출하려 하는 것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과 악으로 나누고 선을 추구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더 안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하나님 알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고 외면하고 심판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할 수 없고 괴롭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며, 선악과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더 밝은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밝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르고 모욕한다고 죽임을 당하심이 사람을 향한 최고의 사랑이 아니었던가? 그 사랑은 아내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주는 남편이 희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온전히 이루어진 관계가 바로 남편과 아내, 곧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과 그 의를 통하여 다시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되는 거듭난 인생으로 사는 삶이 되어 또 다시 아내를 위하여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관계, 그것이 바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 법을 아는 사람은 육신으로 남편과 아내이든 다른 어떤 사람과 세상의 일에 있어서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 본성과 생명이 그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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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많은 가르침들, 특히 사람의 관계에 관한 말씀들은 행동강령이 아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어떤 조건에 관한 것이나 의무가 아니다. 그런 모든 말씀은 다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표현되는 생명의 본성에 관한 것이다.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지침이나 의무가 아니라 열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이라는 생명이 있으면 그 열매로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나오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뭔가 부족한 말이다.


바울 사도도 여러 성경에서 그런 말씀을 많이 하고 있다. 골로새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식과 남편과 아내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이런 말씀도 다 어떤 생명의 열매이거나 그렇게 하는 이유와 원인 인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 없이 이것을 행동으로만 따라하는 것은 노릇이고 거짓된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 종과 상전과 같은 사람들의 관계들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 관계 자체에 대한 도덕규범과 같은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조를 그렇게 만드시고 그 관계들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말씀시고, 또한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표현하는 대상이고 방법이고 육신이 되는 말씀의 실체들이다.


성경에서 남자 혹은 남편은 항상 하나님을 의미하고 여자는 사람을 의미하는 그런 관계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표현되는 것도 이것이지만 이것이 육신으로 남성에 대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 설사 여자라도 남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관계라면 그 역할은 반대가 되는 것이다. 즉 의와 뜻을 가진 존재가 남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남자들이 우월주의에 빠진다면 그것은 말씀을 문자대로 보는 율법저의가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겠다고 생각한 유대인과 같은 생각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또 반대로 육신으로 남녀라는 것은 그저 형식일 뿐 내용만 있으면 되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서, 여자가 먼저 말씀을 깨달았다고 모든 것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과 같이 사는 것은 영지주의적인 발상이고 실제로 그런 신앙은 영지주의라고 볼 수 있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 이미지와 성품과 존재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시고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또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 가지 관계와 세상의 법칙과 사회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과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형식이 어우러져 하나님이 표현되는 법이 하나님의 법인 것이다.


이것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나온다. 즉 하나님의 의가 형식을 가진 사람과 세상의 만물로 표현되었을 때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나님과 같은 능력 같은 권세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초등학문적인 생각일 뿐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하나님과 같이 죌 인생도 신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의(義)와 실체들, 그러니까 내용과 형식이 하나 되어 온전해지는 것을 모른다. 그것은 전적으로 선악과의 영향이다. 선과 악을 가려내고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먹어 버린 가치관은 어떤 것이든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 선이라고 생각되는 하나를 축출하고 그것에 매진하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이나 삶에 대한 열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남녀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형식적인 면만 중요하게 보거나 아니면 형식은 버리고 의미만 보게 된다는 것이다. 형식만 보게 되면 남성우월주의가 되고, '왜 하나님이 아버지만 있냐? 어머니 하나님이라 하자'와 같은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고, 반대로 육신으로 남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의미만 알면 되니 말씀이 있으면 삶의 모든 것을 다 그의 뜻대로 따라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영지주의 신앙이 되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여기서 말하는 영지주의적인 신앙은 대체로 이단이라는 사회적인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육신의 기본적인 관계를 부정하고 종교에 몰입한 삶이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세계 안에서 이 사회 속의 구조를 어떻게 수용하고 그것에 순종하고 그것에 죄인이 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은 신앙이라는 것이 전해져야 하는 것이고 전달 받을 곳은 신앙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세상은 복음을 그려내는 캔버스와 같은 것이고, 또한 어떤 면에서는 신앙의 평가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해 가는 것은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내용들이 육신으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에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의미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울 사도의 의도도 그것이 아니고 성경의 기본 골격도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남편들아, '아내들아', '자녀들아', 아비들아', '종들아' 이렇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관계에 관한 지체들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이 과연 골로새교회가 당면한 문제인 세상의 철학과 과학을 신앙에 가미하는 것과 어떤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땅의 것, 세상의 초등학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고 용서하지 않고 오히려 늘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이 과연 그 기준에 적합한지, 기준 이상인지를 늘 심판하는 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기준으로 보면 골로새교회를 세운 에바브라 역시 철학과 과학에 관해서 그것이 있어야 더 좋은 신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비하여 부족했기 때문에 말씀 전하는 것에서 점점 밀려난 형국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고자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철학이나 과학은 세상의 초등학문이고,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땅에 속한 생각이며, 철학이나 과학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이어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가진 사람들, 곧 그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아는 사람들의 실생활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함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좇는 신실한 성도들에게는 권면이 되고, 그렇지 않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삶의 본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3장 후반부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이 블로그를 통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된 사람은 그 생명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방향과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속사람이 바뀌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믿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이 있으면 어떻게 되고, 어떻게 사는지를 말하는 것이지, 성경대로 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말씀하는 책이 아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남편과 아내, 아비와 자녀, 상전과 종과 같은 관계들에도 철학과 과학의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듯이 하면 그 관계가 온전할 수 없다. 특히나 이러한 사람들의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모델이고, 형식이기에 이 형식에 빠지면 율법주의 남성우월주의 권위주의가 되고 또 막무가내로 형식을 무시하면 영지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런 모든 관계는 잘 유지하기 어려운 것으로만 보이지만 바울 사도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피차 서로 용납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 관계, 모든 가족관계와 사회관계에 동일한 하나님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납하심은 사람이 자기가 가진 안목으로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악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심판하는 본성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에 대하여 죄인이 되신 그러한 용납하심이다. 즉 세상의 가치기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았던 그 기준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에 그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그런 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용납하신 법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법이다.


그러면 모든 일이 잘못될 것 같아 보인다. 남편이 아내에게 주장하는 것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할 때, 아내가 더 밝은 계시가 있어 그것이 하나님의 법과 달라 보인다고 생각이 되면 '그것이 아니라, 이러 이러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만약 그 앞에서 아내가 죄인이 된다면 분명히 보이는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게 죄인이 될 때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승리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도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은커녕 죄인이 되어 심문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고 나라고 다 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 떠나 버린 것이다. 그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죄인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 육신으로 통하셔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 표현되는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법을 모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취하라는 것이다. 아니,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남편, 아내, 아비, 자녀, 종, 상전 누구 할 것 없이 그런 법으로 산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은 이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럽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지 죄인이 되고 내가 잘못했고 내가 십자가를 지는 그런 사람으로 인해서 시끄럽고 갈등이 일어나는 법은 결단코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세상이 자기 맘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법을 벗어나서 절대로 되는 것이 없고, 특히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과 성품과 사랑이 나타나는 것에 있어서는 절대로 예외가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고 하나님 만드신 세상인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나, 아비가 자녀를 또한 자녀가 아비를, 또 종과 상전 그 어떤 관계라도 한 쪽이 세상의 법과 기준으로 다른 이를 대할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죄인이 된다면 어떤 관계가 잘못될 수 있겠는가? 그런 법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그러한 법으로 살아간다면 그 관계 안에는 정말로 예수님과 같이 피차 서로 용납하고 설 용서하는 법이 그 관계의 기초가 되는데, 여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갈등과 분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행위규범으로 받아서 사랑하려는 사람, 남편과 아내를 공경하고 사랑하려 노력하는 것과,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같이 서로 죄인이 되는 용납과 용서가 있는 것, 어느 것이 온전한지는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 주관하는 삶이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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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님을 본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고, 자신도 예수님을 못 박는 세상의 안목, 시대에 무관하게 가지고 있는 그 안목 앞에서는 늘 죄인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의 안목으로 못 박은 예수님을 통해 뉘우치고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을 용서 하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라고 하니, 사람들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손해를 끼치고 열 받게 하는 것들을 용서하라는 것으로 한정하여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누누이 말하지만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 편협한 시각이고, 그 관점은 예수님과 같이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고 가는 안목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다.


예수님의 용서하심은 어떤 행위에 대해서 용서하심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죄인으로 심판하는 안목과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용서하심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해도 무관할 정도로.


바울 사도도 골로새서를 이어가면서 예수님과 같이 서로 용서하고 이것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 가증 큰 사랑은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도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 없이 서로 육체적인 관계만 가지는 것을 성경은 음란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가지신 의와 뜻으로 의미가 있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람이 다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으면 그것이 바로 음란하고 간음한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과 짝하는 존재, 즉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면 그것은 다 음란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냥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찾아야 할 의미를 찾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운 오리새끼에게 백조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한 몸으로 부르심에 감사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에게 서로를 용서하고 이것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면서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 되심을 순종하심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안목을 가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되, 그 용서하심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회복하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법을 알게 하시는 사랑을 보이심으로 모든 것이 온전하게 됨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는 사람을 그와 같은 자리로 부르시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심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이 또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질 수 있게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라고 부르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평강은 단순히 평화(peace)라고 한정 짓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평강을 뜻하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샬롬(shalom), 헬라어로는 에이레네(Eirene)이라고 하는데, 이 에이레네라는 말 안에는 '가까이 부른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즉 한 편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를 주관하게 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라는 말씀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같은 안목을 가진 한 편이고, 함께 하고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아 다툼과 갈등이 없는 동일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한 것 같이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평강이 함께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감사하라가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존재)이 되라는 말씀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은 감사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속으로는 감사하지 않는데, 인생이 날마다 곤고한데 감사하라고 하니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 곧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먼저 어떤 존재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그 존재의 본성과 행함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사이트에 '위로함이여 만족이 되라!'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 주된 내용은 무엇인가 하면, 나 역시 잘 살고 싶고 부유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처지에서 예수님이 나의 위로가 되기는 한데 만족함이라고 하기 에는 마음이 동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너희는 돈 있느냐? 난 예수 있다!>라는 것 이였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는 부자가 되고 싶고 세상 좀 편하게 살고 싶고 이 육신이 원하는 것 좀 맘대로 하고 싶은데 잘 안 되서 슬픈데 다른 대책은 없고 다만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니 죽어서 천국 가서 보자는 마음, 또 나는 내용은 있는데 내용 없이 부유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상대적 비교 우위를 예수의 이름으로 누리려 했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만족이 없고 감사가 없는 삶이었다. 그 당시 나의 마음은 분명히 성경에 대한 관점이 바뀌고 성경에 대한 의문이 풀려가는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생각하면 만족이나 감사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내가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복음을 안다는 것이 부지불식중에 사람들 앞에서 내 맘대로 더 높은 사람이 되었는데 실상은 낮은 모습으로 사니 만족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모순이었다. 복음을 알고 성경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는 것은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에 관한 것으로 볼 때도 모순이고, 내용에 관한 것이 살아가는 형편이라는 형식과 비교되었다는 것도 모순이었다. 즉 제자리가 아닌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또 만족이 없으니 감사도 없고, 그런 감사가 없으니 사람 앞에서 여유도 없고 거저 빡빡한 사람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감사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감사



진정한 감사는 제자리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은 제자리에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사람의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이다. 즉 사람의 모든 연약함이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사람의 올바른 자리인 것이다. 그 자리는 그리스도의 자리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이며 또한 우리 사람들을 부르신 자리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일치하는 사람의 제자리인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 곧 탕자는 진정한 감사를 보여준다. 자기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니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 집에 거하는 제자리에 거하는 것이 바로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인생을 나그네로 표현하는 것은 나그네라는 정체성이 자기의 머물 곳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즉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의와 뜻과 생명이 주인이 되는 정체성의 자리로 돌아오면 나그네의 길이 그치고 방탕한 길고 그치고 아들로 안식하게 되는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는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이 자기 자리는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그리스도의 평강의 자리이고, 그 자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안목 앞에 죄인이 되는 자리이고, 그렇게 십자가로 끌려감으로 다른 사람에게 또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러한 자리에서의 삶은 분명한 감사가 있는 자리이다. 이 감사는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감사이고 진정한 순종이 있는 자리이다. 이것은 밥 얻어먹고 느끼는 감사와는 다른 것이다. 즉 삶 자체를 감사히 여기는 감사이므로 살아가면서 겪는 각양의 어떤 일 앞에도 감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감사는 증거가 있다. 즉 그 감사함은 어떤 것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지혜로 피차 가르치는 것과 서로 권면하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력이고 원인이 바로 감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높은 곳에서 더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을 보임으로 배우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끌어내는 감동을 주는 가르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피차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권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혼내고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의 대 전제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아닌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 되심과 같이 죄인이 되고 용납하고 본을 보여 자기 자리로 부르는 그런 권면을 말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보고 그 마음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알게 됨으로 이 세상의 선과 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과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야 선이 되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십자가와 같이 우리의 연약함과 실체를 인정하는 그 자리에서 발견된 하나님의 생명과 뜻이 자신의 삶과 목적과 의미가 된 생명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도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그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 역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면(되어야) 범사에 감사하는 존재가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감사의 본질적 대상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사람이 웬만하면 태어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물론 돈이 넘쳐나서 자기 맘대로 할 수 있고, 세상의 재밌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조건을 갖추기만 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다 감사하고 태어나길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이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은 그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범사가 어떠하든지 다 감사하게 되고, 태어나지 않음 보다 태어나서 한 평생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이 된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삶이 주어졌기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이론이나 환상적인 일이 아니다. 사람이 그럴 수 없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존재가 되게 하셨는데 감사함은 없고, 그저 이 험한 세상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위로를 삼으려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뜻을 제대로 알면 이 인생은 정말로 감사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도와 믿음의 선진들이 간증으로 증거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이르지 않고, 지금은 괴롭지만 죽어서 천국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아들 시험에 붙게 해 주셔서 감사한 것이 감사의 전부로 하는 것은 본질도 하나님의 뜻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사를 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모든 삶의 동력으로 감사가 없다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에 권면하신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다. 존재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유리잔으로 망치질 하는 것과 같이 존재와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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