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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8-25 주께 하듯 사는 삶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18. 09:16 Writer : 김홍덕

신앙생활의 근본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내용과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형식에 관한 말씀이다. 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대로 만드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할 형식으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생의 본질이시고, 인생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한 것도 이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여기서 말씀은 LOGOS : 계획, 계산)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이렇게 나타나신 말씀을 '뤠마'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표준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에 대한 표준을 보이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이 땅에서 사는 모든 사람의 운명이 그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만드신 이유인 것이고,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세계가 열려서 그러한 가치관으로 새롭게 살게 되는 시작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태초이고, 그것이 거듭남이고 그것이 구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세우신 모든 의는 다 육신을 주신 것과 절대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이다. 즉 이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흑암이고 어두운 맹인이며,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을 해 보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시고 그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이라는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만드신 뜻의 일부라는 의미인 것이다. 세상은 죄악 되고 이 죄악 된 세상에 사는 우리는 곤고하므로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인생의 본질과 내용과 의미와 목적이 되고, 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의 삶이 그것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표현하면서 살아갈 때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삶은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게 되듯 그 신앙의 삶을 보고 감동을 받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러한 현상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거나 잘못 믿고 있는 것이라는 방증이 된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이 전도의 감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전하는 성경 말씀이 사실인 것을 믿어라.'고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신앙생활의 표준인 십자가



그렇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라는 인생의 본질이 내용인 삶을 사셨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이 법 외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름을 주신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증거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이나,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 또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신 기적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라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증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든 기적은 십자가에서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것은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생명의 증거이기 때문에 살리심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살리시고 어떤 것을 죽은 것으로 보시는지를 보이신 것이지 기적이 목적은 아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 가운에서 살아나는 기적 때문에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정체성은 죽을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기에 살아나신 기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이 어떤 생명이신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발견하게 한 예수님의 모습은 물 위를 걸으신 모습이나 죽은 자를 살리신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인한 것이다.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을 보고, 또 자신들도 그런 기적을 일으켰던 제자들도 그런 일을 봤음에도 잡혀가는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도망을 갔다. 잡혀가는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도는 정말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다. 이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죽임을 당한 형틀이다. 그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죽어가는 데도 그 많던 기적도, 또 그를 호산나 환호하던 사람들 중에 어떤 이도, 그뿐 아니라 3년간 '주님!'이라며 따르던 제자들도 구해주지도 변론해주지도 않는 자리였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손과 발에는 못이 그리고 옆구리에는 창에 찔리는 벌거벗은 모습으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높이 달린 그런 모습일 뿐이었다.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고, 바로 그 모습이 사람의 정체성이고,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십자가의 도가 육신이 그렇게 비참하고 또 이 시대로 보면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그런 말초적인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통해 보여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형상, 사람의 정체성,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자신의 생각(가시관)으로나 자신의 행위(손과 발이 못 박히심)나, 자신의 신분(벌거벗겨짐)과 같은 것으로는 세상의 법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에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과 같이 묵묵히 죽임을 당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재물이나 공로 뿐 아니라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위에 서서 심판하고 대항하고 이기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세상으로도 비난 받고, 무엇보다 스스로도 신앙으로 인한 행복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 비참해 보인다. 어떻게 사람이 자신이 더 의로운데 그것을 버리고 늘 죄인이 되어 곤고하고 환난을 당하면서 참고 살 수 있겠나 싶은 것이다. 이건 누구라도 다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필자 역시 그런 생각을 떨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본다면 그런 염려를 한다는 것은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다 버리고 어떤 안락함이나 육신의 평안도 없이 고행하는 것이 신앙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는 수도원이나 금욕적인 삶을 사는 괜한 곤고함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 어느 종교에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의 자리에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증거일 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보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뿐 아니라 이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면 세상을 무조건 등지고 거리를 두려하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부모를 통하여 이 땅에 들어오게 하신 것이 부모가 삶의 목적을 주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등지고 나와서 신앙 공동체에 속하여 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이것은 물론 획일적인 상황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경우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수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런 것은 좀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신앙의 모습은 의외로 많다. 즉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의 각종 사회 속에 또 관계 속에 살면서 그들이 신앙과 무관하고 하나님의 의와 반대방향으로 삶을 요구하는 것 앞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겉모습이야 어떠하든 속으로는 그것을 정죄하고 심판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돈 타령만 하는 직장 상사가 성과를 위해서 교회 가는 것을 제재하는 상황에 직면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짓이란?' 과 같은 표현들을 한다는 것이다. 즉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상전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신앙생활의 방점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존재보다 존귀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존귀함은 세상 사람들에게 의인으로서 죄인이 되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지 존경받고 심판하는 자리에 두시기 위함은 아니다. 존귀한 이유가 바로 사람을 구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기적과 같이 남이 가지지 못한 어떤 재능이나 재물이나 지위나 공손함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그것이 없는 사람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죄인 취급하거나 심판한다면 십자가의 도를 아는 것이라 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더 섬기고 종이 되고,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 앞에서 죄인이 되는 삶의 모습이 자기 안에서 나올 수 있어야 십자가의 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보이신 삶을 본받고 십자가를 지고서 따라가는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죽어야 사는 십자가의 도



아내나 남편, 아비나 자녀, 상관과 종과 같은 관계 뿐 아니라 어떤 사람과의 만남과 관계에 있어 발생하는 모든 갈등과 마찰은 어떤 것에 관해서든 우위에 있는 사람이 낮아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을 아노라 하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준다고, 아니면 몰라서 하는 것을 고치려 하고 가르치려 하고 심지어 심판하려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해서 모든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죽어야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즉 씨와 갗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는 것은 그 말씀으로 드러내고 아는 것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다스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죽어 없어져야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에 관해서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아는 사람을 두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내고 나타내고 그것으로 영광을 얻으라는 것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없는 사람을 서기라는 말씀인 것이다. 즉 수학선생님이 수학을 배우는 아이들 앞에서 수학을 잘 하는 것을 자랑하고 못하는 학생을 심판하는 것이 수학 선생의 정체성이 아니라 수학을 잘 모르는 학생들을 위해서 수학에 관해서 종이 되고 모르는 아이들을 섬기는 것을 위하여 자신이 아는 수학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권세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하시고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의를 가진 아들이지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으로 사람을 심판하셨다면 제자들은 다 심판을 받아 예수님에게서 떠났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 십자가의 도와 비밀을 모르면 사람을 버리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고 교리를 지키고 성경을 지킨다는 이유로 사람을 심판하고 배척하고 떠나기를 바라고 실제로 떠나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하나도 모르는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바로 알고 있어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으로 인해서 교리가 손상을 당하여 오히려 죄인이 될 때 비로소 교회가 온전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런 십자가의 도가 모든 사람의 관계에 있어야 함을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십자가의 도가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은 부부, 부모와 자녀, 상관과 종과 같은 인간관계는 물론 사회 안에서 어떤 자리에서도 십자가의 도와 같이 자신이 가진 것으로 가지지 않은 이를 위하여 수고하고 죄인이 되는 사랑을 표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리스도의 삶을 보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7-11)


이 비유는 누구나 아는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 앞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고 반문하는 상황에 이어지는 말씀이라는 것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알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그것을 알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지키는 것이 그것을 어기고 사람을 구하는 것 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주장한 것이다. 즉 가진 것으로 죄인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것을 어기면서까지 수고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잔치에서 상석에 가서 앉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 가지게 하신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또한 어떤 규례와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교리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버리는 것은 잔치의 상석에 앉는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교회라는 것을 주신 목적을 모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말씀하시는 비유이기도 하고, 또한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생활지침처럼 말씀하시는 이야기의 본질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을 대할 때 주께 하듯 하는 삶인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제대로 대접하는 것은 그 상대의 격에 맞게 하는 것이기에 십자가의 도를 보이신 예수님께 하듯 하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도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예수님께 맞는 격에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로 그렇게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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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8-25 종과 상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14. 08:21 Writer : 김홍덕

육신의 상전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생활에 있어 도드라지는 모습들을 보이기 일쑤인데, 특히 주일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입사과정에서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기업에 사람을 소개하면 물어보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에 다니느냐?'를 묻기도 한다. 회사의 형편에 따라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하는 경우가 있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의 사람들, 더 나아가서 기업은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육신의 상전이다. 물론 예전처럼 노비나 종과 같이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돈에 관해서 종속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돈은 세상의 대부분의 가치의 대용 특성이다. 돈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세상을 본질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삶의 목표가 돈에 맞춰져 있다. 아닌 척 해도 두어 가지만 따지면 사람들은 다 그런 면이 다 드러난다. 즉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는 상실한 체 세상이 본질이라고 알고 살다가 나이가 들어 때로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도 삶이 공허해지는 것은 그때가 되면 돈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기 때문이다.


그렇듯 본질이자 존재 목적인 하나님의 의는 없이 세상이 본질로 알고 살아가는 세계를 육신에 관한 세상이라고 한다. 창세기 6장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3)

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즉 사람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홍수를 일으키신 것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기 때문에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하신 것인데, 이는 딸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세상의 아름다움, 세상이라는 형식을 본질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2)


즉 육신, 세상, 육체와 같은 것은 내용이 없는 형식, 곧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그 안에 없는 사회 조직체와 또한 사람을 성경에서 일컬을 때 세상 혹은 육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런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실 이 말씀은 오늘 날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새겨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왜냐하면 신앙이 있다는 이유로 세상을 경시하고 무조건적으로 죄악시 하면서 배척하고 단절하며 분리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렇게 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의 상전들, 그러니까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과 사람의 존재 이유와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사회 안에서 어떤 매개체에 있어 상전으로 섬겨야 할 때 순종하고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것은 신앙인에 있어 가장 완정된 삶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다른 교회와 달리 아주 복음에 대하여 서로 상고함과 나눔이 풍성한 공동체로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를 보았는데, 아쉽게도 이런 점이 잘 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세상은 종살이'라고 하면서 세상일은 대충하고 삶의 모든 역량을 교회 생활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삶의 모든 역량은 교회와 신앙생활에 집중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생명을 가진 생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체제나 형식에 무관하게 모이고 그 삶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교처럼 산 속에 모으신 것이 아니라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실수하심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목적을 바울 사도가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모든 세상, 이 모든 사회가 다 주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세상에서 죄인 되는 것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은 신앙의 방점과도 같은 것이다. 영화 <밀양>에는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한 유괴범이 아이의 엄마가 정말로 큰 용기를 내서 그 죄를 용서해 주려고 교도소에 왔을 때, '나는 이제 용서 받을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정말로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얼마나 잘못 알고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만약에 그 유괴범이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권면하고 있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서 먼저 자신이 살해한 아이의 엄마에게 가서 엄마가 설사 자신을 죽일지라도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하여 그 엄마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사죄하고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고 했다면 그것은 정말로 바른 신앙의 모습인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교회를 세습하기도 한다.(이게 정말로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세습에는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을 것이다. 교회라고 목사의 아들이 목회를 이어 받는 것 자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명분은 세상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만약 얻지 못한다면 그 명분이 교회적으로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들이 신앙과 교회를 위해서 사람을 버린다. 즉 사람의 마음들을 버리고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를 얻지 못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정말로 교회를 얻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용서하신 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세상에서 가장 밝히 아는 분이셨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모독한다고 십자가를 지셨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도고, 위에 것을 생각하는 신앙이고, 그리스도와 같은, 또 본받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늘 죄인이다. 세상적인 기준과 가치관에서 보면 늘 죄인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 일요일에 나와서 일하는데 교회 간다고 회사에 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 회사 동료들에게 죄(빚)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미안해하고 또 월요일이나 다른 날에 더 열심히 해서 동료들이 행여 일요일에 교회에 간다고 빠지더라도 인정해 줄 수 있는 빚 갚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 일요일에 교회 간다고 회사에 오지 않는 것을 비난한다고 속으로라도 '하나님을 모르는 것들'이라면 스스로 위로하고 심판하는 높은 자리에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라는 것을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복음이 펼쳐지고 그려져야 하는 캔버스와 같은 것이고, 형식인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아는 모든 사람들과 세상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와 목적을 채워야 하는 빈 그릇이고, 위에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것을 채워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마음으로 조차차도 멀어지면 안 된다.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은 신앙의 순도를 높이고 신실한 신앙 같지만 그것은 구분되는 거룩함과는 다른 것이다. 거룩함이라 바닷물 속에 사는 고기가 짜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즉 세상 안에 있지만 형식이 전부라고 아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감동을 주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거룩함이다. 그 감동이 바로 성령의 감동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옷 입고, 그리스도를 본받고, 주께 하듯 하는 삶,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않으며, 부모에게 순종하고, 자녀를 낙심시키지 않고, 세상의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는 이 모든 것은 다 훈련이나 신념으로 이루어 내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도만 알면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면 다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도는 생명이고 생명은 그 본성을 표현하는 양식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의가 세상의 의에게 심판을 받고 죄인이 되는 것이지, "예수 천당" 외치는 투철함이나, 세상의 것을 멀리하는 신실함(?)이 아니다. 신앙이란 항상 계시가 밝은 사람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수고하고 희생하고 죄인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즉 이것 없이 교회가 성장한다고 해도 아무 것도 아니요, 큰 교회를 지어놓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도, 남편이나 아내 부모와 자녀 앞에서 더 신앙 있고 더 아는 것을 상대에게 나타내고 드러내고 가르친다 해도 아무 것도 아니요, 세상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규정하는 것도 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이런 말씀, 곧 어떻게 보면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의 지침과 같은 말씀을 하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며 보이신 위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 생명이 나타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그 생명을 가진 사람도 가정과 사회와 신앙에 까지 다른 사람에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는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요 신실한 신앙이요, 성경의 모든 말씀을 표현해 내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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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8-25 아비와 자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13. 10:55 Writer : 김홍덕

부모에게 순종하라



성경에서는 부모와 자녀에 관한 이야기와 비유 그리고 말씀이 있다. 그 중의 핵심은 뭐라 해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을 보이심으로 그와 같은 육신과 인생을 가진 우리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육신으로 낳은 자녀를 말한다. 아들이라 해서 '딸은 자녀가 아니냐?' 하는 논쟁은 없는 것으로 하자. 그 이유는 지금 이것이 육신의 아들과 딸에 대한 정의와 차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대표하여 아들이라 하고 아들이란 부모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성경을 볼 때 봐야 하는 행간이고 관점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몸속에 있다가 어머니에게서 난 사람을 말한다. 이는 아버지의 속에 있는 뜻이 아버지와 같은 이미지 곧 형상으로 성육신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는 법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에 그 뜻을 표현할 형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표현하신 것이다. 이것은 농사의 개념으로 보면 농부가 땅에 씨를 심는 것과 같고, 사람으로 보면 남편의 씨(아버지의 형상이요 이미지)가 아내의 몸속에서 아버지와 동일한 생명으로 성육신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흙으로 지어진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씨와 같이 들어와서 그것이 생명이 되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세계이다. 땅이 어떠해도 그 땅에 씨가 심기어져 열매가 나면 그 씨의 이름을 따고 그 씨의 열매가 된다. 그러니까 사과 씨를 심어서 사과가 열리면 그 나무의 모든 성분이 다 땅에 왔을지라도 그 나무는 땅의 이름을 따지 않고 사과나무와 사과가 되듯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서 거듭난 생명이 나면 그 삶이 아무리 육신으로 살고 육신의 수고로 인하여도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심령에 받고 그 말씀이 속 심령 안에서 싹이 나고 열매가 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무가 열매를 맺을 지경이 되어도 땅은 그대로 있지만 그 땅은 다른 땅이다. 사과가 열렸다면 사과 밭이나 그게 아니라도 흙이 사과나무가 되는 역사를 가지게 되는 것이듯,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면 그 사람이 여상하여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을 보고 또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는 생명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버지는 자녀의 근본이다. 이는 언뜻 보면 유교의 사상 같지만 그것은 오해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에 한정된 말씀이 아니다. 육신으로는 그 부모에게도 또 부모가 있고, 그 부모에게도 또 부모가 있기에 자신의 부모가 자신의 근본은 아니다. 물론 근본에 이어진 고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타고 올라가면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본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자신의 근본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존재하게 한 이유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과 의에 관하여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의 정체성에 순종하는 사람, 순종하는 생명의 본성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육신이든 또 다른 일에라도 자신보다 근본과 의 앞에 순종하는 본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육신의 삶을 주신 부모에게 순종하고, 지식의 근본이 된 스승을 공경하는 것과 같은 것은 신념이나 각오가 아니라 하나님을 근본으로 인정하는 그 본성이 표현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다.


순종은 모든 믿음의 근본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온전히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존재 이유의 근원이신 온전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가지거나 택한 사람이 없다. 한 마디로 자신의 발로 인생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주신 이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온전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어떤 것에 순종하려고 한다면 그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그 존재와 자신과의 관계가 명확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천하의 모든 만물들을 얻기 위하여 마귀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경배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사람이 자신이 순종해야 할 대상을 분명히 알아야 하나는 것이다.


사람이 순종해야할 것은 결국 자신의 운명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이 가진 운명의 하나이다. 이것에 순종하지 않을 사람이 없듯이 사람은 자신을 그런 운명에 두신 이를 찾고 그 분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운명과 목적을 부여하신 분이 바로 자신의 진정한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종을 아는 사람은 육신의 부모에게, 또한 어떤 의와 세계에 대하여 자신에게 목적과 그 의의 실체를 알게 하는 이에게 순종하게 되는 생명의 순리와 같은 것이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아들이라 했다.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들이 있을 리가 없는데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바울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의가 디모데를 통하여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같은 법이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도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또한 자신도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인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듭나게 되었다면 예수님이 아버지가 되니,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은 관계가 좀 이상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다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어머니 하나님' 같은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자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로 오셔서 사람들에게 보이신 분이시다. 사람이 어떤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관계가 되었다면 그 두 사람 사이에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 있는 관계가 되는데 이러한 것을 두고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나 디모데나 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들이요 또한 서로 형제이고, 또한 서로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법이 전해진 낳아지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정의 관계에 있어 낳았다고 하고 또 아들이라 하는 것이지 그것이 정말로 영적인 자신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들이란 자신의 생각과 의가 성육신된 존재를 말한다. 그러한 존재가 화가 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은 의를 안다고 하면서 알지 못한다고 나무라고 심판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녀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들고 화나고 곤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미운 오래새끼라는 동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육신으로 자녀를 낳았는데 그 존재의 정체성을 알려주지 못한다면 이 보다 더 낙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으로 아비라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자녀에게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의안에서 온전히 알려주지 못하는 아비가 되지 말라는 것이 바로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많은 교역자들이 성경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에게 결국은 하는 말 중에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 이라며 돌려보내는 것이다. 지금 의문이 있어 답을 얻고자 왔는데 보지 않고 믿어야 한다고 돌려보내면 그 사람이 돌아가서 과연 평안하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아비가 되지 말라는 말씀을 바울 사도가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과 아비와 자녀의 관계가 되는 그 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육신으로도 부모와 자녀라는 법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아비와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또 하나의 형식인 것이다. 그런데 육신으로 아비가 자녀에게 인생의 목적을 알려주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자녀를 낙심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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