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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27-32 간음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30. 16:45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또 간음에 대하여도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보다 더 강도 있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율법이라는 것이 사람의 의지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행위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알게 하는 것이다. 죄를 아는 자는 반드시 그것에서 벗어나려 한다. 죄라는 것이 마치 물에 빠진 것과 같아서 그곳에서 나오려 한다는 것이다. 즉 율법으로 죄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한다는 것이다. 율법이 자신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은 율법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에게서 예수님의 갈릴리로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이 물세례를 베푼 것과 같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물에서 살 수 없어 나오는 것과 같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알게 하는, 곧 죄 중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세례 요한은 율법 세계에 있어 최고봉이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여자가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없는 세계에서 비롯된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출생은 남자가 낳았다고 한다. 그것은 남성 우월주의가 아니라, 의가 육신이 되어 아들이 되는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세례 요한의 세계, 율법의 세계는 세례를 받음으로 가나안의 예수님께로 넘어간다. 즉 한 사람의 신앙의 여정이 율법에서 복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세례 요한이 광야, 곧 법이 없으면 죽는 세계에서 세례를 베푸는 것과 같은 것이다. 광야는 율법의 세계이다.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곳이 광야다. 그곳에는 법이 있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일어서야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세계가 율법의 세계이다.


그 세계의 최고봉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 앞에서 외치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것과 같이 율법도 복음의 길을 예비한 것이다. 광야에서 세례를 받고 가나안, 갈릴리로 가신 예수님처럼, 우리의 신앙 여정도 율법의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의 성품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율법은 바로 그런 것이다. 광야의 물세례가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이듯, 율법도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더 강화시키셨다. 하지만 그것은 율법을 행위로 지키려고 하는 자에게는 더 강화된 것이지만,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께는 율법의 목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불기둥이나 구름기둥 없이 다니시듯, 율법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을 보이시는 삶을 사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간음은 자신의 짝이 아닌 상대와 동침하는 것이다. 동침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와 유전자가 자신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아들을 낳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간음이란 의와 성육신이 정해진 짝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하나님을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사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을 채우는 모든 것이 다 간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라고 하셨다. '그건 남자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여자는 이런 죄에 해당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난센스다. 그러니까 또 이슬람에서는 여자들이 나갈 때는 몸을 가리고 다니라고 한다. 보이지 않아야 남자들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이게 그런 말씀이겠는가? 


이것은 육신의 간음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른쪽 눈이 범죄 한다는 것은 오른쪽 눈으로 음흉하게 여자를 본다는 것이 아니다. 오른손으로 범죄 했다는 것도 오른손으로 성추행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육신의 일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오른 눈과 오른손이겠는가 말이다. 왼쪽 눈에는 여자가 안 보인다는 것인가? 그런 사람 있는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을 말씀하실 때는 늘 오른손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왼손으로'라는 말은 없다. 그것은 오른쪽은 늘 의가 있는 쪽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는 오른쪽을 바른쪽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으로 이해하면 더 쉬울 것이다. 이것이 만약 육신에 관한 것이라면 왼손잡이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오른쪽은 의가 있어야 하는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른쪽 눈이나 오른쪽 손이 죄를 범한다는 것은 의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있는 간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의가 있어야 할 자리가 다른 것과 하나가 되려 하면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이다. 즉 육신의 간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담아야 할 사람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돈이나 세상의 어떤 것을 우상으로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간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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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복음) 5:21-26 먼저 화목하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30. 15:05 Writer : 김홍덕

또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 곧 제사 드리기 전에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으면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제사를 드리라고 하고, 또 하나는 길에서 송사하는 사람과 함께(만나면) 있으면 그것(송사)부터 해결하라고 하셨다. 하나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고 하나는 세상의 재판관이 재판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먼저 제사를 드릴 때에 형제가 나에 대하여 원망(영어 성경에는 반대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화해하라고 하셨다. 이는 누가 내가 제사를 드리는 것에 반대하면 이를 화해하라는 말씀이다. 즉 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하여 형제가 반대나 원망하는 것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형제가 볼 때 자신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 역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셨다는 말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씀이다. 율법이 자기 안에 완성된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에 합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인 것이다. 누가 봐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이 합당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것을 본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리라 인정했다. 백부장은 당시 로마군에 있어 실세들이다. 즉 적군의 장수까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진정한 제사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예수님의 제사는 그 어떤 사람도 반대하거나 원망할 것이 없는 제사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는데(롬 12장), 산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거나, 아니면 제단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산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제사가 되게 하라는 말씀이다. 즉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인데, 이는 육신을 가진 우리 인생 안에 하나님의 의가 채워져서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이 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제사임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에 있어 형제가 반대할 것이 없도록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그들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삶을 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이 제사고, 그것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목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율법의 목적이 완성된 그런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재판관 앞에서 재판 받을 일 또한 없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색다른 말씀 같지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말씀의 중요도도 중요도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것이라서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지만 신앙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아무렇게나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 비하여 하나님의 안목 안에서 절대적인 존귀함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존귀함은 신앙 없는 사람을 무시하기 위한 자격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사람을 섬기기 위한 존귀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이 이상해지는 것이다.(개인적으로 이것을 모르면 성경을 깊이 알수록 이단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주 이야기 하지만 영화 밀양에서 유괴범은 세상의 법으로 지은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셨다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지금 예수님께서 송사하는 자라고 하신 것이 이런 것이다. 이 송사하는 자는 형제가 아니다. 그냥 길에서 만난 사람이다. 성전이나, 가정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법이 있다. 그 법이 하나님이 보실 때 가치 없는 것이라 해도 그들의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송사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의 법과 율법을 다 지켜야 된다는 것이 아니냐? 반문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송사다. 그냥 세상의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문제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과 관련한 것이다. 신앙과 관련해서 길가는 사람에게 송사를 당한다는 것은 나의 신앙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게 송사당할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은 죽은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것과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어 죽은 자 같은 사람들을 죽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신 아들과 같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송사를 당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안에서 존귀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은 자와 같아서 그 격과 존귀함이 비교할 수 없이 차이가 나지만, 그 차이는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한 차이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괴롭게 하여 송사를 당할만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런 일들이 많다. 교회가 소송을 당하는 일은 고사하고, 목사가 여러 가지로 언론에서 송사를 당하기도 한다. 그런 일들이 버젓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또 교회가 그것을 제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서 왈가왈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격이 다른 일이고, 세상에서 뭐라 해도 하나님의 일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철 없는 행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율법이 완성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이 그 사람 안에 온전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성품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는 죄인이 되어 그들을 섬긴 것, 그것이 아닌가? 바로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송사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을 섬기는 것을 위하여 먼저 알게 하신 것이다.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는데 어떻게 길 가는 사람에게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송사를 당하겠는가? 그들을 섬기는데? 그들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위하여 자신이 죄인이 되고, 종 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데 어떻게 송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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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복음) 5:21-26 노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30. 13:44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예외 없이 화를 낸다. 그 빈도와 이유에 따라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긴 하지만 그 누구라도 마음으로 조차 사람에게 욕하거나 화를 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율법의 조항에 비하여 더 강화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고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살인한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은, 그런 말씀을 하심으로 율법이 완성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구약시대, 예수님 오시긴 전 보다 더 강한 율법의 조문 아래 사람들이 놓이게 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먼저, 사람이 율법을 행위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 조차 화내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없다. 그렇다는 것은 화내는 것을 자신의 의지로 지켜내려 한다면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다 죄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이 완성되는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인생이 되도록 하는 것에 있다. 그 과정에서 율법은 사람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사도가 로마서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롬 5: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조차 행동으로 지켜 내려 한다. 의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지켜내면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같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방향이 반대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지켜지는 것이다. 필연적이고 수동적이다. 생명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지는 것이지, '예수 믿는 사람이니 성경대로 살아야지!'라고 마음 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형제를 보고 화를 내면 살인한 것이라고 하신 것은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의 죄가 더 드러나게 하는 것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셨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한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더한 뜻이 있다. 영어성경(KJV)으로 보면 이유 없이 화를 내는 것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실 때 합당한 이유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노하지 말라고 하시고는 3년 뒤에는 성전에 가셔서 상을 뒤엎고 화를 내셨다. 그것은 모순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유는 한가지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인생이 되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재물을 바치거나, 성전 청소를 하는 봉사나 금식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들로 수 없이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 사람이라는 형식 안에 하나님의 의를 채우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와 목적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 주셨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이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사람은 화내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 화내는 것은 이유 없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합당한 이유 없이 화를 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진노하심과 같이 사람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에 있어 그렇지 않은 것을 볼 때 화가 나야한다. 그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 이유로 화를 낸다는 것은 살인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목적 밖에서 화를 내는 것은 그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어 서로에게 끼치는 불편함과 영향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에 분노케 하는 자신 만의 기준 때문이다. 그런 것은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 살인하지 말라고 한 것은 사람을 죽이고 싶은 모든 것은 화내는 것과 같은 이유이기에 그것을 참아내는 것으로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과 육신으로 보내신 이유를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화를 내지 않으려면 화를 내어야 할 이유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육신에 대하여 자신이 가진 기준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 기준이 없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 만의 기준을 가지고 그것을 어기는 것에 화를 내는 것은 성악과로 인한 것이고,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아담은 화를 낼 기준도 그 안에 없고,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이 서로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이 연약한 육신, 지금은 서로가 육신이라 서로에게 화를 내는 이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로 만족(에덴)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화를 낸다. 그것은 본성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 화를 내는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육신의 것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에 대하여는 참는다고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사람이 서로의 육신으로 인하여 화를 내는 이유가 없어져야 율법이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화를 내면 살인한 것과 같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심으로 행위로, 의지로 화를 참아내려 하는 것이 죄가 되게 하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어떤 이유, 하나님의 이유,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으로 사람을 인도하기 위하여, 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에 있어서 마땅히 할 바를 하지 못하는 성전의 모습과 같은 것에는 또한 화를 내는 것이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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