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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4:1-6 항상 기도하는 삶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23. 12:09 Writer : 김홍덕

성경 말씀은 물론이고 어떤 책이나 문화 매체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의도다. 즉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도 같다. 그러므로 세부적인 행동 지침과 같은 말씀이라도 다 의도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성경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런 단편적 이해는 많은 경우 서로 상충되거나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여 이해를 어렵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말씀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지만 또 어떤 말씀은 누가 너의 부모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으라는 말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장 근간을 이해하지 않고 하나씩 분리하여 각개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특히나 교리라는 것이 그렇다. 교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잘 요약한 것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된 것을 잘 연구하여 함축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이야기 한다면 과정이 농축된 결과를 짧게 표현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가 틀리거나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교리가 왜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 자체에 매몰되면 본질을 알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또 다른 서신서에서 어떻게 보면 행동 강령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런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이 표현되는 형태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즉 존재가 늘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만 본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지, 밥도 안 먹고 회사일도 뒷전으로 한 체 기도만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또 이 세상의 모든 것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도 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즉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그것을 위하여 사는 삶이 곧 항상 기도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또한 삶의 모든 요소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 곧 하나님께서 인생의 삶을 통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구하고 갈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결국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마음 안에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성령의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바로 사랑이다. 그런 마음이 들도록 수고하는 삶은 모든 것에 있어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모습을 두고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다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의 본성이 이 모든 것을 표현하고 감당하고 통일시키며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없는 상태에서 성경 말씀을 조각 조각 지켜내려 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와 많은 의문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하고, 그러하기에 큰 신념이 필요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신념을 지키고 관철시키기 위하여 투철하고 사람들 아파에 거저 신앙으로 강직한 사람으로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는 심한 두려움이 바탕으로 깔려 있다. 즉 말씀을 조각으로 지키는 사람은 하나라도 지키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두려움이 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양은 바로 유대인들, 곧 율법으로 행함으로 지키려한 이들의 모습이 바로 그 조상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나,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나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상황 상황에서 또한 단편적인 사건과 일을 그렇게 하려 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것이다. 나도 고등학생 시절에 1,000일 동안 빠트리지 않고 기도해 보겠다고 작정하고 해 봤는데 그만한 중노동이 없었다. 숙제하듯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몰랐던 것이다. 하여간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근간, 곧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주제이자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다. 즉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란 누구신가?>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념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즉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만드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의 주제이자 하나님의 의가 씨와 같이 자기 마음 밭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싹이 나고 생명이 되고 나서 열리는 열매들이 바로 성경의 모든 행위 규범에 관한 말씀이고 사도들의 권면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이 성경 말씀을 지키려 하면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다 행함으로 믿는 신앙, 곧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의 신앙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없는 사람은 자기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 표현하는 세계가 아니기에 그것을 이루어 내는 것에 늘 한계가 있고, 그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이르지 못하는 원인을 말씀을 다 지켜낼 수 없는 육신의 한계에 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 육신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이런 모양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듯 생명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켜내고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듯 성경 말씀을 지켜내는 사람을 가공하고 제조하는 사람들의 안목으로는 모든 것에 신념과 열심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육신으로 부족한 것을 계속 채우려 하는데 초대 교회 당시에는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에 능통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것이 채워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런 것은 잘못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항상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무릎 꿇고 앉아서 밥 달라 돈 달라 배우자 달라 명예를 달라 기도하거나 또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나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금욕적인 신념을 이루는 것에 능통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삶의 모든 요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 관계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또한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자리까지 섬기고,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도 내어주는 그런 사랑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의 행간을 읽는 것이고 기도하기를 계속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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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많이들 알고 있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이 <외모>는 사람의 어떤 부분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쁘고 잘 생겼다고 말하는 생김새에 관한 말씀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사실 여기에 나오는 외모는 영어 단어로는 favoritism라는 단어로 그 의미는 '편애'라는 의미이다. 더 원어적인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번역하는 과정에서 편애의 기반은 외모라는 것이 충분히 반영된 말씀이라 생각이 된다.


이러한 것은 뒤 이어 4장에서 여러 동역자를 소개하면서 '유스도'라 하는 할례당에 속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에서도 이 외모라는 단어를 바울 사도는 편애와 상당히 연관을 지어서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할례당이라고 하면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이 복음에 대한 바울의 동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을 가지고 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게다가 이 말씀, 외모에 관한 말씀은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는다.'는 말씀에 이어서 하신 말씀으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악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외모로 본다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 안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그 사람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그 사람의 본 모습이 아니라 그를 그렇게 살게 하는 그 사람의 속을 봐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어느 날 지하철에 자기 아이로 보이는 어린 아이 세 명과 함께 탄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지하철에 탄 아이들은 마치 놀이터인양 객차 내에서 떠들고 놀고 있는데도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자, 보다 못한 한 사람이 그 남자에게 아이들이 당신 아이냐고 물었고 그제야 그 남자는 깊은 생각에서 깬 듯 주위를 둘러보고선 아이들을 불러서 조용히 시키고는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방금 이 아이들의 엄마가 병원에서 죽어서 장례 준비하러 집에 가는 길인데 이제 어떻게 살아가나 막막하여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라고.


 이렇듯 사람의 속과 속사정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고 하니 사람의 직업이나 재산의 정도와 같은 것을 보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인 것이다.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그 단편적인 것 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교회에서도 그렇다는 것이 더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런 의미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말씀도 어떤 행동강령을 열거하듯이 하나, 둘 이렇게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고 있는 말씀이다. 그 시작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떠함에서 시작된 말씀이다. 물론 그 보다 더 먼저는 복음에 철학이나 과학과 같은 것이 더해져야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같은 직분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생각을 경계하고자 하는 골로새서의 주제가 있다.


이런 일련의 말씀들은 이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깊은 연관이 있다. 우선은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은 세상의 초등학문이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부분은 사람의 외모에 속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골로새 교회 안에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의 교훈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에 능통하나 복음의 본질을 알지 못해 그것을 혼합하여 화려한 말로 사람을 유혹하는 사람과 그를 따르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보는 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의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는 사람은 필시 사람을 꾸짖으려 하고 교훈하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으로 표현된 것으로 그 사람의 속을 가늠하는 생명과는 반대되는 방향성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외모로 보는 본질적인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49-53)


이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 믿는 것을 가지고 사람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안 믿는 집안에서 신앙 문제로 다투거나, 또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살아가는 모양을 보고 뒤에서 수근 거리면서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는 그런 모습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이유가 있다. 예수도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제어하려 하는 마귀와 같은 짓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안 믿는 사람과 다투는 것이고, 교회에서도 더 우월한 안목을 가지고 목회를 해 가고 있는데 자신 만큼 보지 못하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목회에 방해되고 교회를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거나 잘 몰라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던지신 불이나 칼은 능동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던지신 불과 칼은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것 그것이었다. 십가아에 달리신 그 모습을 볼 때 보는 사람의 마음이 칼에 찢어지는 것 같고, 불타는 것 같아지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너무 귀하고 전해야 하고 놀라운 것이고 대단한 것이라고 해서 능동적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갈등을 조성하는 것이 투철한 신앙이고 순교적인 신앙이고 순수한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울역 앞에서 시끄럽게 전도한다고 난리고, 교회가 사람을 버리고, 사회와 배타적인 관계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법은 오히려 정말로 말할 수 없는 놀랍고 귀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모습을 보이심으로 이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하셨고, 하나님의 뜻도 높이심으로 부할 승천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갈등을 조장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바로 이 예수님의 법으로 아내를, 남편을, 자녀를, 부모를, 상전을, 또 종을 대하면 어떤 관계와 어떤 상황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생명을 가진 사람의 당연한 본능이라는 말씀의 근간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사람은 사람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는 사람은 사람을 심판하고 자신이 복음을 가졌다는 착각으로 자신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을, 사람의 본질과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골로새 교회의 문제와 같은 문제에 빠져들게 된다. 철학과 과학과 같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의 의와 그것을 결합하려 하고, 부부나 부자 관계와 같은 사람 관계 안에서도 어떤 것이라도 더 아는 것을 주장함으로 모르는 사람을 따라오게 하려고 모른다는 것을 심판하고 각성시키려 하며, 사람의 외모를 판단하여 그 속사람을 가늠하는 생명과는 반대방향의 안목을 가지고 사람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학력이나 생김새나 재산의 많고 적음과 같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초보적인 관점에서 시작해서, 사람을 대하고 보는 것에 있어 언제나 더 알기에 죄인이 되고, 모르는 이가 그 속에서부터 밖으로 표현하는 생명의 방향성으로 이끄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죄는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하는 것이고, 참된 교육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알고 더 아는 사람은 자신보다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이 사람의 본질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육신이 있는 것이다. 그 육신으로 살아내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것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감동이 전해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며, 그렇게 살아내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려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고 산제사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십자가의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이 그 속에서부터 밖으로 생명을 표현해내는 그 방향성을 준수하는 것이다. 외모로 본다는 것은 거꾸로 사람의 외모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나 신앙을 가늠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악한 것이다. 악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과 다른 것을 옳다고 시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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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8-25 생활지침의 본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20. 12:05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골로새서를 기록한 이유는 바울 사도에게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가 골로새교회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에 능통한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그런 지식이 있는 사람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온전히 전하는 에바브라에 비하여 더 인정을 받는 문제로 인함이었다.


이는 에바브라가 속된 말로 자기 밥그릇이 빼앗겨서 바울에게 고자질하러 갔다는 것이 아니라, 에바브라가 볼 때 그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교회의 정체성이 변질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바브라는 적어도 그런 것이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에바브라의 말을 따를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주제에 가정생활의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들을 함께 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한 부록인가? 그건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 마지막에 이르기를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하려 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부족하다고 하셨는데 불요한 말씀을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바울 사도가 어떻게 보면 가족이나 사회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지침을 주었다는 것은 분명히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이 신앙에 가미되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이다. 생명의 세계라는 것은 어떤 생명이라도 그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그 생명이 가진 유전자와 본능이 표현되는데 그것을 막을 방법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를 죽일 수는 있어도 개를 고양이처럼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철학과 과학과 같은 세상의 초등학문이 신앙에 더해지면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생활지침(?)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의를 혼합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문제이다. 많은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늘 하나님을 떠났다고 책망을 받았는데 그 내용의 상당 부분에는 성전에 우상을 두었다는 내용으로 책망을 받는다. 즉 하나님의 성전 안에 우상을 두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선지자 미가는 이런 말씀을 했다.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미 1:5)

사마리아는 앗수르가 침공한 후 혼혈 정책을 펼쳐서 앗수르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혼인을 하게 함으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과 다른 종족으로 취급한 북쪽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다. 즉 피가 섞인 사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이방과 같은 세상의 지식이나 신앙이 더해지는 것이 바로 구약성경 내내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은 이유였다.


이것은 노아홍수가 발생한 근본 원인이기도 했는데, 홍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고 그 사이에서 위대함이라는 네피림이라는 종족이 태어남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야할 인생들이 형식의 아름다움에 매몰되어 인생의 내용이자 본질인 하나님의 의는 버리고 형식이라는 육신만 남음을 보시고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하시며 그런 존재들을 다 쓸어버리시기로 하신 것이 바로 노아 홍수의 원인이었다.


그와 같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람의 갈등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발생한 것 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사람의 생각을 더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사실 알고 보면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뿌리이기도 하다. 사람이 자신이 어떤 물건을 샀다고 하자. 그 물건의 기능이 자신을 만족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구매할 당시의 모습 그대로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뭔가를 바꾸고 수정한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정체성이나,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인생이 가진 그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부족함이 없고,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을 신앙에 더하지 않는 것에 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과 세상에서 비롯된 것을 그 만드신 이를 믿는 신앙에 더한다는 것은 개가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 곧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믿는 것 이외에 세상에서 비롯된 철학이나 과학을 더하는 것은 개가 자신이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은 것임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나 과학이나 사람이 만든 모든 경제적 도덕적 가치라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 모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인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을 자신의 정체성의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하는 음식으로 먹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과, 하늘의 물을 먹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의와 내용을 자신의 본질과 내용으로 삼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지 자신이 세상에서 살면서 내어 놓은 것을 자신의 정체성을 해갈하는 음식과 내용과 본질로 삼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모든 갈등이다. 사람이 자신이 선악 간에 판단하고서 자신이 생각할 때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선악과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선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이외에 사람이 생각할 때 하나님과 같이 되려면 이런 저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골로새교회의 문제이자 현안 역시 바로 그런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구약성경의 구조로 본다면 타락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전에 우상을 가져다 놓은 것과 같은 것이고, 바울 사도는 선지자와 같이 그것을 책망하고 바로잡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삶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삶이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그런 본성, 곧 하나님과 사람의 것을 더해야 위대한 신앙이 된다고 생각하여 복음에 철학과 과학을 더하는 그런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남편을 공경하지도 않고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아비와 자녀, 종과 상전이라는 모든 관계에 있어 다 잘못된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설사 행동이 아주 도덕적이고 선할지라도 그것은 간첩의 선행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 가장 본질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위하여 수고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으면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은 것일 뿐 아니라 설사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있다. 하지만 사람은 슬플 때도 있는 아니 아주 많은 존재이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말인가 싶어서 이런 저런 해석을 내 놓지만 그 말씀은 기뻐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에게 일어나는 희노애락에 감사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나 그 어떤 사람 관계 안에서의 모습 안에서도 자신이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억지고 참고 하는 사랑의 모습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의미 있어지는 그런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사랑에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은 그렇지 않은데 꾹 참고 견딘 다음에 천국에 가서 보자는 식의 신념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믿음도 사랑도 아니다.


그런 사람의 모습은 다 거짓된 것이다. 자신의 본성에는 없는 것인데 성경에 나오는 것을 지켜 행하면 그 본성을 가진 존재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초등학문적인 발상일 뿐이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본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 안에 사랑할 수 있는 본성이 없으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차라리 낫다. 솔직하기라도 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본성은 죄악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행동은 그렇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진 문제는 먼저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악하다고 여기는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을 주신 분이고, 그런 본성으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을 무시하는 것이라는데 있다.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뭔가가 더해지면 더 좋은 신앙이 된다고 생각하고 신앙에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고상함을 더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그것을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신앙으로 흡수하는 것은 개가 토한 것을 먹는 것과 같은 꼴이 되는 것이고, 그런 것으로 아무리 삶을 치장하고 신앙에 그것을 더해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쳐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죄만 더 가중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본질과 정체성의 내용으로 주신 하나님의 의를 무시하고 자신이 정한 선한 기준으로 사람의 정체성을 삼으려 하는 것이고, 골로새 교회의 사람들은 신앙에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을 더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 주신 것을 가감하지 않는 것에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바로 골로새서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삶의 지침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악하다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도구로서 그런 것을 두셨다는 것을 아는 것과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겠는가 하겠지만,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위의 것을 생각하고 아는 것이다.


사람이 연약하고,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내용이 없는 빈 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의 본질이고 내용인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자신에게 그 의를 전해준 부모와 같은 사람을 당연히 그 의(義)안에서 공경할 것이고, 자신으로 하여금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남편과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이에게 복종할 것이며, 또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낳은 아들과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삶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또한 그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정체성과 살아가는 목적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권능과 지위와 능력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보여주시는 모든 권능과 능력과 지위는 오직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되는 것 그것이 전부이고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옷 입고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과 본질이 하나님의 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남편이고 또한 부모이고 진정한 상전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가진 육신의 삶의 모든 것에 대한 의미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고,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그 생명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기에 그 생명의 본성으로 비롯된 삶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생활 지침이고 그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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