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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회복을 다루고 있는 구약성경의 선지서들을 읽으면 드는 의문이 있다. "왜 이렇게 타락을 반복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정말로 그렇게 하나님을 매번 배신하는가?" 같은 것이다. 그건 개인적으로도 참 궁금했던 것이다.


선지서들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타락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을 훼파하고 다른 성전을 짓고 다른 신을 섬긴 것은 아니다. 그들의 타락은 항상 여호와의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을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출애굽 당시에 금송아지를 만들고도 '금송아지'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숭배했던 것이다.


신앙의 타락은 믿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결합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타락이라는 것이다. 맑은 물에 아주 약간의 더러운 물이나 독이 들어가도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타락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습이다. 그것은 골로새교회에도 있었고 지금도 늘 있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좋아 보이는 것이 더해지면 신앙이 더 좋은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을 두는 것이고, 골로새교회처럼 철학과 과학이 겸비되면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교회가 더 좋은 건물을 가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장로가 되는 암묵적 조건으로 사회적 지위가 가미되고, 목회자도 신앙고백 보다 학위나 어떤 경력이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 된 것이 바로 그런 타락의 후손인 것이다. 그런 타락을 일갈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라는 한마디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람들이 이러한 형태를 보이는 것은 노아 홍수 시절에서부터 기원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고 혼인하여 네피림이라는 위대한 자를 낳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사람의 딸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여자(육신의 여자가 아니다.) 즉 사람에게서 난 것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을 골로새교회에서 본다면 과학과 철학이고, 지금의 세대로 보면 세상에서의 성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전에 놓인 우상의 가족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에 어떤 것을 가미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어떤 선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어떤 선의 기준을 가지고 그 선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인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그 마음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스스로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한 것이라는 결정을 하는 것을 먹었다는 것이다. 먹었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기에 그것이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다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어떤 유혹에 이끌린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었다. 즉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에 이끌리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과,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선악과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수천 년 전의 일을 역사처럼 읽으라고 우리에게 있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읽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는 것은 이 육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에 대하여 태초 이전의 상태와 같이 어둡고, 또한 생명의 기준으로 보면 살았다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육신의 한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달라진다는 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이고 기본 법칙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기 전과 후의 아담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벗은 몸으로 살던 아담에게 벗었다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신의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도 않고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태도는 달랐다. 자신이 벗었다는 것,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되어 숨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다.


사람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육신이 벗었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태어난 상태 그대로를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상태 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그렇지 않고 원래 지으신 모습 그대로가 만족스러운 상태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에덴동산이 만족의 동산이라는 의미임을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다.)


사람이 무엇을 어떤 것을 더하는 것은 만족되지 않아서이다. 자동차를 사서 이것저것 치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래 만들어진 그대로의 상태가 만족스러운 사람은 그것에 덧붙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모습, 또한 하나님의 말씀 그것으로 만족이 되는 사람은 세상의 철학이나 과학이나 또는 잘살면 좋다거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더 좋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골로새교회가 신앙에 다른 것을 접목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깊이 새겨야 하는 말씀이다. 사람은 연약하다. 마음에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악한 것이 많이 나온다. 욕심도 그렇고, 성욕도 그렇고, 시기도 그렇고 질투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사람 스스로가 선한 것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사람 안에 두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만족하는 모습이다.


사람이 그것이 만족이 안 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일일이 제어하고 규제하고 어떻게 해야 선하고 어떻게 하면 악한 것인지를 정하고 그렇게 행동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율법도 필요하고 과학도 필요하고 예의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 하나가 만족이 안 되어서 세상이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 목적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성욕이 나쁜 것인가? 그것을 어떤 목적에 사용하는가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닌가? 시기가 나쁜 것인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것을 시기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질투가 나쁜 것인가? 하나님을 더 잘 믿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기 위하여 힘쓰는 것이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날카로운 것은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베이지 않아야 만족하는 것이라 여긴다면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이다. 덮개를 하거나 무디게 만들 것이다. 아니면 버리든지. 하지만 칼에게 날카로움이 없다면 어디에 쓰겠는가? 다만 칼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면 되는 것이다. 그것처럼 사람이 가진 성품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악하고 추해 보이는 것들도 어떤 목적 안에 있으면 다 온전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어진 목적을 알지 못하면 사람이 가진 연약함은 언제나 문제가 있고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조치가 바로 신앙에 또한 사람에게 뭔가를 더하는 것이다. 그 원조는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린 것이고, 시날 광야에서는 흙(사람)을 구워(단련해서) 하늘에 이르게 하려 한 것이고, 골로새교회는 과학과 철학을 더한 것이고, 오늘날의 교회는 세상의 성공과 화려함을 노아의 홍수 때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과 같이 취해서 위대해지고 있는 것이다.


골로새서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앙이 회복된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마지막에 권면처럼 말씀하고 있는 책이다. 바울사도가 먼저 신앙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이어서 삶의 모습을 권면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되다. 그것은 삶의 모습은 신앙의 정체성, 즉 생명에서 비롯되는 본성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를 감사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인생이 만족스럽지 않고,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 앞에 육신을 부끄럽게 또한 죄악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부름 받은 온전한 것임을 아는 마음에서 시작한 신앙은 성경에 기록한 모든 말씀을 행함에 있어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살기만 하면 되는 생명에서 비롯된 본성의 표현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법임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골로새서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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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4:1-6 소금 같은 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5. 17:22 Writer : 김홍덕

은혜 안에 있다는 것



바울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의 마지막의 인사말을 앞에 두고 끝으로 한 권면은 '너희의 말을 은혜 가운데서 소금과 같이 하라'고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사람의 말은 정말로 신기한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유일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점은 제쳐두더라도 말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는 것이다. 이는 권력자가 말로 무엇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 하는 말들이 서로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말은 우선 표현이기 때문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와 생각을 대변한다. 정치적인 말은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그렇듯,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 사람의 안목이 존재론적인지, 아니면 방법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소유에 관심이 있는지도 다 사람의 말로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말이 삶을 대변하는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면 은혜 가운데서 하는 소금과 같은 말은 어떤 말인가? 그러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말이든 어떤 것이든 사람이 구현하거나 또 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활동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예외 없이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 밖의 일은 없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안에 있는 기능의 어떤 것도 사용자로 하여금 스마트한 정보사용의 목적 이외의 기능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사람을 때리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도 사람의 존재 목적 안에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외의 것으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존재 목적이 바로 사람이 은혜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람이 받은 은혜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표현하는 형식으로 낙점을 받았다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어떤 요구에 상관없이 그러니까 이유 없이 거저 주신 것이기 때문에 또한 은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은혜가 되려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태어나지 않음 보다 육신을 가진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다 같은 궤 안에, 같은 세계의 같은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주신 삶이 감사하지 않은데 이 삶이 은혜로울 수 없는 것이다.


어쩌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더 나아졌다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사람에게 은혜로 주신 분이 아니다. 그런 것은 다 부수적인 것이다.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충전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람이 어떻게 모든 순간 모든 말을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성경에 있는 말만 하고 또 사람에게 좋은 말만 할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지 않고 하는 말을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집에 키우는 강아지도 귀여운 짓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데나 똥 싸고 오줌 싸는 것 까지 다 강아지를 키우는 재미 안에 혹은 일로 두지 않으면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의 말이나 모든 행동도 언제나 주를 위하여 해야 한다고 하면 모든 말이 다 성경에 있는 말이어야 하고, 또 사람에게 어떤 상황에 무관하게 좋은 말만 하는 그런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존재론적 관점이 아니라 행위 규범에. 형식에 매몰된 관점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항상 기뻐할 수 도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고,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한 것이 될 수도 없으며,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은혜 안에서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이 먼저 은혜 안에 있는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비유컨대 회를 내어도 은혜로운 말이 될 수 있다. 이는 '화내는 것도 은혜다'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화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왜 화를 내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 생명의 본성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소금 같은 말



또한 말은 분명한 번지가 있다. 즉 같은 말이라고 해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말이다. 이것을 보면 말은 분명한 주소가 있는 것이다. 주소를 영어로 addr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toward를 의미하는 ad와 direct인 dress가 결합된 단어이다. 즉 주소란 목적지를 두고 그 방향을 향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이란 것이 바로 그렇다. 말이란 것이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 말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은혜 가운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그런 의미를 알 수 있다.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리에서 자기에게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은혜 안에서 하는 소금 같은 말이다.


알고 보면 사람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사람다운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이 너무 거룩해서 어떤 순간에도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자기 자리에 맞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상태대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자리에 맞게 말을 하는 것의 시작과 모든 것은 사람이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자기에게 적합한 말을 하고, 자기에게 적합한 말을 할 정도로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대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영광스런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말을 소금같이 한다. 소금이라는 것이 맛을 내고,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 안에 감동이라는 맛을 내게 하고, 또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리에서 벗어나는 부패함을 방지하는 것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소금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런 말은 반드시 고운 말이나 부드러운 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엄한 꾸짖음도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욕도 할 수 있을 수 있다.(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듯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말로는 외인들에게 지혜롭게 할 수도 없고, 마치 소금을 너무 많이 쳐서 음식을 버리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말이 얼마나 주소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예를 들어본다면 그것은 죄에 관한 것이다. 죄는 시인하는 것이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죄는 스스로 깨우쳐서 고백하고 시인할 때 주소가 제대로 된 것이지, 죄가 있다고, 또 그것이 보이고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일일이 시시비비를 따지고, 또 교회 안에서 그것을 책망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말의 번지가 잘못된 것이다. 즉 소금과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를 시인하게 하는 것은 어떤 교훈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에게 정치적 해방을 기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아셨고, 또 예수님이 잡히시면 다 도망 갈 것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그것을 나무라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 다만 몸소 십자가를 지심으로 제자들 스스로가 그것에 대한 시인과 고백과 회개가 있게 살아내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말은 참으로 간편한 것이기 때문에 남의 잘못이나 부족한 것을 지적하고 훈계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은 너무 쉬운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시인하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간편하게 말로 그러는 것은 그 말이 아주 좋은 말이라도 소금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말도 감사함이나 기도함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이 소금 같은 생명이면 어떤 말이라도, 또 어떤 톤의 어떤 감정이 실린 말이라도 다 은혜 안에서 소금 같은 말을 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게 한다면 아무 말이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고 결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진 목적을 잘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말이 아니라 사람이 보고 그 마음에 찔림을 받는 사랑의 표현이 동반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 말로만 하는 것은 그냥 소리 나는 꽹과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은혜 안에 있어 소금을 고르게 함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이 삶으로 사랑하고 그와 함께 해 가는 말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바울사도가 권면하는 모든 것은 다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온전히 있으면 일어나고 할 수 있고,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 이외에 어떤 것도 그 안에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이 순전하게 표현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으로 신앙을 훼손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사도가 편지를 하고 있는 것이 이 골로새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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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4:1-6 세월을 아끼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4. 10:37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에게 있어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대상이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은 일정한 것이다. 이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래가 육지에 올라왔다고 코끼리가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고래가 땅 위에 오면 죽을 수는 있어도 그래도 고래일 뿐이다. 생명이란 주어진 상황이 달라졌다고 다른 생명의 본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리스도인은 그런 존재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를 달리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다.


바울사도는 이어서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란 것은 아끼려 한다고 아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세월을 시간을 집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집행하지 않는 것을 아낄 방법은 주어진 것에 온전하게 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니까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내가 집행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나의 운명과 존재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자동차가 세월을 아끼는 것은 고장 나지 않고 운행이 잘 되는 것을 말한다. 자동차의 주인의 시간 계산에 보통은 고장이 나서 수리하는 시간은 포함되지 않는데, 운행 중에 고장이 나서 시간을 소비하면 주인의 목적을 그 만큼 수행하지 못하므로 시간을 낭비한 것이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시간 관리를 잘 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목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시간에 종속되었기에 시간을 집행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떤 일에서 시간을 아끼는 것은 그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하는 것뿐인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에게 있어 시간을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주어진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수험생이라는 신분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 목적이 분명해야 시간이 잘 관리가 되고, 목적에 시간을 잘 소비하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저축을 하거나 아님 다른 것에 돌려서 사용하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 안에서 시간을 아끼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순종하며 사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시간을 아끼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삶의 목적을 잘 준행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 외에 사람이 세월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는 사람은 자신이 외인을 대할 때나, 또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형제를 대할 때나 동일하게 지혜롭게, 그러니까 사람의 운명과 목적을 보여주어 의문을 해결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것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또 그리스도인들끼리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있을 때 사람이 살아가는 생각과 모습이 다르다면 이는 세월을 아끼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지만, 교회 밖의 생활을 누가 보더라도 교회생활을 위한 재화마련의 수단으로 비치게 살아가는 것 이상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그러니까 외인에게 무심하고 벽을 쌓은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세월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골로새서를 바울사도가 기록한 목적이 교회 안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조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철학과 과학에 능통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 더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야 말로 외인을 잘 대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앞에서 외인들에게 지혜롭게 행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가장 큰 의문인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도록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만 알지 못함 취급 받아 죄인이 되어도,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을 그리스도인의 사는 모양을 보고 그 마음 안에서 깨달을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삶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학교에서는 도덕과 윤리로, 교회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교훈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자를 구제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하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이것은 언뜻 성경 말씀을 지켜내는 것과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다른 문제이다. 보이는 것이 같다고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밥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 자체가 선함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가난한 사람이든 아니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도록 수고하는 한 방법으로서 밥을 지어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밥을 지어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하나는 그 사람에게 지혜로 대하여 그리스도가 그 사람에게 복음이 되도록 수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두 가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선행 자체가 목적이고, 후자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니 후자는 어떤 목적이라기보다 그것이 본성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행이 목적이니 사람은 그것이 선하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고, 생명으로 표현되는 사람은 금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자기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어쩔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을 이런 저런 이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교회에 다니니까?, 성경에 그렇게 하면 복 준다고 했으니까?, 천국 가면 상급을 준다니까? 하는 것들과 같은 목적을 두고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과,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 마디로 가공품과 생명체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세월을 아끼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같은 일이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의지와 신념과 나름의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육신을 가졌기에 그 한계로 인하여 세월도 놓칠 때가 있고, 잊어버릴 수 도 있고, 때로 몸이 아프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말씀은 어떤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임을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와 같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고,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깨닫는다면 말씀이 마음 안에 심겨진 것이고 그 씨가 자라서 열매가 맺혀서 성령의 9가지 열매도, 또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도, 그리고 세월도 절대 놓치는 것 없고, 또 자나 깨나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며,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세월은 사람이 집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통제하고 아끼고 할 수 없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주어진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자동차가 시간을 아끼는 것은 잘 달리는 것이고, 사람이 세월을 아끼는 것은 인생이 주어진 목적대로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은 생명이 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의지를 가지고 살아보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안다. 그러다보니 그런 삶이 자연스럽게 된다고 하면 잘 믿지 않는다. 그렇게 노력해도 말씀대로 살기 어려운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쉽게 여겨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밀이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 믿는 것이 정말 어려운데 왜 예수님께서는 쉽다고 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개가 개로 사는 것이 어렵겠는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어렵지 않고, 그 그리스도를 보고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하며 사는 것이니 이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개가 개로 사는 데는 죽는 날 까지 단 1초도 허비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에 있어 단 1초도 누락됨이 없는 것이다. 이보다 더 온전하게 세월을 아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아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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