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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있어 생존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입는 것은 절대적인 것들이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이것이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고, 또한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신앙하는 신에게 이것을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종교의 신앙 안에서 이러한 것은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얻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라 비칠 만큼 간절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것이 신앙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것에 욕심을 버린 청렴하고 수도사적인 삶이 좋은 신앙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어떤 종교에도 그런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다 있는 것 같다.


기독교도 오랜 역사 속에서 수도사라는 말로 대변되는 금욕적이고 청렴한 신앙이 늘 있었다. 지금도 신앙이라는 것이 재물과 독립된 것이라는 바탕에서 교회의 재산의 경우 교회가 재산을 가진 것이 아니라, 노회와 총회의 재산으로 등기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그 차이를 알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소유와 신앙은 분명히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특히나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재물과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신앙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의 의미를 바로 알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며 또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받을 것인지에 대한 바른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신앙의 근간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 하나님과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첫째 육신을 가진 인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에 대한 차이고, 두 번째는 사람 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차이이다. 그 차이가 바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갈등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여 하나님처럼 되려하고, 하나님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차이가 사람의 정체성과 사람이 속한 세상, 그 두 가지에서 늘 마찰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갈등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인생과 이 세상을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로 믿는 사람에게 그것은 절대적인 갈등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지 않고 진화되고 우주 빅뱅이론이 인간 실존 문제의 바른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해당되지 않는 문제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사람 안에 채워야 할 것을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행위의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외식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의 일부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으면 성경은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 생명이 가진 본성이 표현되듯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사람의 행동을 절제하고 통제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의 행동, 곧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형식의 목숨(생명이 아니라 목숨)을 유지하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의 본질이라 여긴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심령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하는 거룩한 곳인데, 그곳에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과 같이 육신이라는 형식에 필요한 재화와 때로 용역 그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모양은 성전으로 비유하면 하나님의 성전에, 소유와 공로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 신상이 놓인 것과 같은 것이다. 성전에 이방 신상을 놓는 것과 먹고 마시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다른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것은 같은 것임을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나는 새도, 들에 핀 백합화도 다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입히시는데 어찌하여 사람이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는지 반문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과 존재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만드신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를 이루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육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시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면 그런 것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 그런 것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런 것을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본질적 요소로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 소유를 바라고 공로를 드리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정체성)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는 것에 대한 바른 생각은 그런 것은 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기에 필요한 만큼은 염려하지 않아도 다 주시니,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 그것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일이 본질임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씀이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보물로 여긴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 역시 그것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은 그것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그것이 영광을 얻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나라와 의가 표현되는 것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시기에 자신은 그것에 순종만 하면 그 필요한 것을 다 주실 것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는 것은 단 두 가지 경우뿐이다. 먼저는 인생의 본질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육신이라는 형식에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진 경우다. 그것은 마귀가 시험한 예수님의 시험 중에 세 번째 시험에 완패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한 신앙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에 그 신앙은 이방인의 신앙과 같은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구현하는 것에 있어 어떤 먹을 것, 어떤 마실 것, 어떤 입을 것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의가 표현되는데 소요되는 물품에 대한 예산을 하나님께서 계산도 못하실 분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것은 천부께서 이미 다 아신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나 이 순종이 되지 않는 것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주 위험하고 아찔한 것이다. 더 좋은 교회건물, 더 좋은 수련원이 없으면 교회가 안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들도 그런 생각 때문이다. 교회가 몇 년 앞당겨졌다고 말한다면 이미 그 생각에 중독된 것이다. 교회나 신앙의 여정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이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것이다. 좋은 예배, 좋은 성전이나 수련원 보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믿고 우선 자기가 가진 육신 능력과 교회의 역량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교회가 신앙적 오류를 넘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 특히 목회자나 교회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교회를 하나님보다 더 앞에서 이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교만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과 마찬가지고 그런 것을 이미 세상에 다 주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것을 나누는 문명을 발달시켜 왔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것, 역사까지도 주관하신다고 믿는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시점의 세상에서 정해진 방법으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말로 세상에 있는 법에 따라 그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느 한 구석, 문화나 사람의 모든 생각에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행여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을 구하기 힘들다면 그 때 기도해도 늦지 않다. 그러나 그런 구제를 위하여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즉 구제는 그런 사람을 보살피는 것이 구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살고, 그 삶 안에서 사회적으로도 열심히 살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힘들어서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기력조차 없는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나라와 의를 표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난을 구제해 달라고 구하는 것은 절대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에 필요한 것을 그렇게 많지 않다. 예수님은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육신을 주신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이다.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이라는 것을 바로 아는 사람이고, 또 이 육신과 세상을 주신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은 육신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세상의 법에 따라 구하여 충족시키는 것도 알고, 더 나아가서 그런 모든 환경을 감사함으로 받는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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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과 그 앞뒤에 나오는 외식에 관한 말씀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과,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씀과 두 주인에 관한 말씀들은 전부 하나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 역시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좀 확장해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궤를 같이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Allegorical한 해석이 아닌가 싶겠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을 기반으로, 또한 주제 중의 주제로 삼고 있고, 그 주제는 생명과 같은 것이기에 그 생명이 보여주는 다양한 본능과 생명에서 비롯된 행동 양식을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고백적이고 간증적인 측면이 아주 강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성경의 주제를 아는 사람(여기서 안다는 것은 체험하고 체휼되어 자신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이 그 생명을 표현하고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수학 교재를 저술한 사람이 수학을 알지 못하고 기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는 관점은 성경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고,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며, 그것을 주제로 삼은 목적은 성경을 읽는 사람, 곧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회복되어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경의 주제와 기록 목적을 알지 못하거나, 그것과 다른 것을 목적으로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게 믿는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 자신이 본질을 왜곡시킨 하나님일 뿐이다. 그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성품과 의도와 다르게 하나님을 대하는 모든 신앙은 다 우상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성경의 주제와 목적을 알게 된 사람에게 성경은 자신의 일기와 같고, 자신의 자서전과 같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심령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싹이 나고 생명이 되어 자신 안에 거듭난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자신의 몸과 행동과 삶을 주관하게 되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 보는 자신의 삶이 성경을 읽을 때 마다 그 안에서 증거를 찾고 확인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 곧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늘 말씀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을 사람의 유전자와 분리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 곧 정체성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떻게 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법은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하는 관점은 늘 이와 같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반대로 살려고 해도 되지 않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생명의 특성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고, 생명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았다는 것, 생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바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생명의 본성이 된 사람이 된,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이미지와 성품을 나타내는 아들이 되는 것이 그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해보면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육신은 영이시기에 육신이 없으신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며, 이 육신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표현되는 도구이며, 그려지는 캔버스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 전부가 그렇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면 바울 사도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살면서 이 육신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이 육신에게 본질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육신으로 행하는 행동이 육신을 주신 주된 목적이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육신은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생명이 표현될 때 사용되는 표현법이고 도구이며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의 어떠함이 먼저가 아니라, 이 육신으로 표현할 그 무엇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람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 사람 안에 채워야할 하나님의 목적과 의가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스스로 그것을 채우고, 그래서 서로를 심판하고, 그것도 모자라 진흙에 짚을 넣어 만들고 구워(사람에게 뭔가를 더하고 단련시켜) 하늘에 이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금식하라고 하고, 내용 없는 육신의 어떤 모양 곧 외식을 금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뜻은 외면하고 말씀을 행동 강령으로만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이다. 즉 사람들이 의는 외면하고 행위로만 하나님께 나아오려 하니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온전하신 하나님의 의가 있어 비롯되는 행동 양식을 법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을 테스트하거나 약 올리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용 없이 형식이 나올 수 없음에도 그렇게 하겠다는 이들에게 내용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을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율법이나 복음이나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나 같은 의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내용은 없이 내용에서 비롯된 형식을 어떻게든 완성해 보려는 인생들에게 내용이자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내용(말씀)이 있어 그것이 표현(육신)되는 온전한 모습으로 오셨기에 율법이 완성된 것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 쉬운 것인데 사람들이 자기 안에 하나님 아닌 것을 채워 놓고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안에 있어야 비로소 행할 수 있는 것들을 내용 곧 하나님의 의는 없이 행동만으로 지키려 하니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성전에 이방 신상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단순한 진리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보니 어느 순간 부끄러워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이 육신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로 규정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처럼 되려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는 어떻게 보면 육신에 대한 관점이 자기 맘대로 보는 상태로 바뀐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 중앙에 두셨는데, 그것은 만족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악과는 어떻게 보면 육신이다. 더 정확히는 육신에 대한 관점인 것이다. 이 육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에 부족한 것으로 보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고, 이것을 하나님이 지으시고 만족하심과 같이 이 육신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셨음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사람은 회복이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선악과의 문제도 율법의 문제도 다 해결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이 육신에게 필요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사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사람이 채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아의 배고픔과 갈증과 정체성을 채우는 온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육신의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으신 육신이 필요한 것을 예비하지 않으셨겠는가?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려면 먹고 마시는 것 보다 교회 생활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냥 당연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계속) - 중요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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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9-34 눈은 몸의 등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9. 17:0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또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도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을 육신의 눈으로 보면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복음의 보편성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복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복음이어야 한다. 맹인이든, 병든 자든, 또 죄인이든 창녀든 그 누구라도 그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 복음이다.


특히 교회나 신앙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신앙 좋은 사람들에게 더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더 좋은 신앙이라고 인정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신앙이 복된 소식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좋은 신앙을 주셨으면 주셨지, 그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신앙이라는 조건으로 대접 받는 것을 위하여 주신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라도 모든 사람에게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한다. 신앙 좋은 사람에게는 복된 소식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저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앙 좋은 사람을 보고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고, 더 좋은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마음에 불 일 듯 소망이 일어나면 되는 것이지 신앙이 좋다고 신앙 없는 사람을 심판하면 그건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잠깐 딴 곳으로 간 것 같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생각이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분명히 여기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육신의 눈으로 볼 것이라 생각이 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눈이 육신의 눈이라면 맹인은 예수 믿을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즉 그렇다는 것은 이것은 육신의 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렇다는 것은 복음은 사람의 형편이 어떠하더라도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흔히들 사람이 가진 눈은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육안이고, 두 번째는 식안(識眼)이고 다음으로는 혜안(慧眼)이고 가장 높은 수준의 안목을 목안(目眼)이라고 한다. 육신의 눈과, 지식의 눈, 그리고 지혜로운 안목, 그리고 그 모든 것 보다 더 나은 안목은 목적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은 가치관이다. 즉 사람의 가치관과 안목이 어떤 안목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것은 목적을 아는 안목과 가치관은 몸에게 등불을 비취듯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목적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몸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그 사람의 가치관과 안목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며, 그 가치관과 안목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향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성경을 흐르는 기본적인 흐름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안목과 가치관이 사람의 삶을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몸을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를 바로 알고 있는 안목이 있어야 몸이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육신과 삶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으로 이끌 때에 안목이 온전한 것이며, 그럴 때에 삶이 상하지 않고 온전해 진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어진 말씀과 같이 몸은 하나이기에 하나의 안목을 좇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을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목적은, 존재의 목적은 당연히 주인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몸이 어디로 가는지와 주인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몸을 가진 인생이 두 가지 가치관을 좇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친관은 결국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한다면 신앙의 타락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 보다 하나님과 다른 것을 혼합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전에 이방신상을 가져다 놓는 것이고, 영지주의가 또한 그것에 뿌리를 두고 타협한 것이다. 타협이라는 것이 결국 신앙에 있어 두 가지를 함께 섬기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앞에서는 보물에 대하여 그리고 이 말씀 다음에는 먹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런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육신에 관한 것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물을 땅에 두지 말라고 하시고, 의가 육신보다 중요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아는 눈, 곧 가치관과 안목이 있어야 사람이 몸으로 살아내는 삶이 땅에서 오는 것을 함께 섬기지 않고 온전해 진다는 것이다. 이 말씀들은 생각해보면 오묘한 말씀이다. 하나로 흐르는 연결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을 본질로 여기고, 인생이 어디를 보아야 하고,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또한 그 구조, 그 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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