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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13-17 세례를 받으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14. 10:25 Writer : 김홍덕

◯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있는 광야로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라는 것은 하나의 의식으로 보이지만 정확히는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신앙 고백의 증거로 의식에 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그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세례냐 침례냐 하는 것으로 종파가 나뉜다는 것 자체가 세례의 의미를 모른다는 의미가 된다.


세례의 원어는 '밥티스마(물에 잠기다)'라는 말이다. 그 뜻은 물에 잠긴다는 것이다. 이 세례는 노아 홍수의 예표요 상징이다.(벧전 3장) 즉 노아의 홍수가 죄를 멸하는 물을 거치고 나오는 것이듯 세례도 죄를 씻고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례는, 아니 노아 홍수는 어떤 죄에서 사람들을 구원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아의 홍수가 시작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고 위대한 자 네피림을 낳은 것(창 6장)'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홍수는 하늘 위의 물과 땅 속의 물이 합해져서 홍수가 되었다. 즉 한 마디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혼합하는 죄로 인하여 물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목마른 존재인데 물이 넘쳐남으로 오히려 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에 대하여 알기를 원한다. 즉 그것에 대하여 목마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와서 마시면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요 4장)이기도 하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시는 분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어쨌든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채우려 무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곧 하늘 위의 물과, 또 사람이 만든 각종 지식인 땅의 물을 합하여 홍수처럼 넘쳐나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좋다는 것을 계속 유입하고 과학은 또 창조과학회다 뭐다 하면서 과학으로 성경을 풀어보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는 등 사람의 존재 목적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 모든 것을 다 도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노아 홍수 때와 지금이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이 맞는 말이다.


바로 그 물에서 살아 나온 것이 노아의 방주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그 물, 곧 세상에 넘쳐나는 말씀들에서 나오는 것이 세례이다. 그러니까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뒤 섞이고 홍수처럼 범람하는 물  속에서는 나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고, 그러므로 그 안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바로 세례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세례를 아무리 거룩한 예식으로 치르고 세례 증서를 금으로 발급한다 해도 세례를 받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세례는 신앙 고백이다. 어떤 신앙 고백이냐 하면 세상에 홍수처럼 넘쳐나는 지식과 이론과 또 말씀 안에서는 내가 살 수 없고, 또 그것이 내가 마실 물이 아니라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물은 말씀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 십계명을 받은 모세는 모세라는 이름이 '물에서 건진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생수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 물이나 마시지 않고 하수도의 물과 섞이지 않는 상수(上水)(도)의 물을 먹는 것과 같이 세상의 지식(땅에서 나는 물)과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고백을 하는 것이 세례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 이와 같은 고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을 히브리인이라고도 한다. 히브리인이란 '큰물을 건넌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와 요단강이라는 큰물을 두 번 건너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민족이라서 그렇다. 히브리인 즉 하나님의 백성은 두 번의 세례를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 두 번은 물세례와 불세례(성령 세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자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성령이 그 위에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예수님이라서 그렇다!"라는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고, 또 '나를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예수님이라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하는 것이고, 일어날 일이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세례를 받은 사람, 곧 이 세상에 넘치는 물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한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례로 보여주신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세례의 의미를 한 번 더 이야기하고 가는 것이다. 세례는 절대로 의식이 아니다. 이제부터 교인이 되겠다는 증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어떤 것으로 그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물속에서 살 수 없듯이.


사람이 이 세상의 지식과 이 세상의 가치관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은 마치 육신이 물속에 잠긴 것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살 수 없다고 그 밖으로 나오는 것 그것이 세례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과 기뻐하는 자가 되는 신앙 고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살려 둘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십자가에 처형이 되는 것이나, 물속에서 사람이 죽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요 무엇보다 죽을 죄인이 아니라 그 모습이 바로 살았다 할 수 있는 온전한 생명이시기에 살리심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그것과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물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세례는 같은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역시 같은 것이고 같은 법이다.


◯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세례를 보는 관점이 되어야 한다. 세례가 물에 들어갔다 오는 침례가 온전한 것이냐 아니면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하여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이면 되느냐 하는 것으로 다투고 급기야 종파가 나뉘는 것과 같은 그런 시각으로 세례를 보는 것이 아니다. 즉 세례의 가치가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으로 세례를 천 번 받아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이 세상에 넘쳐나는 가치관에서는 나는 살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고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것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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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과정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으로, 또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과정으로, 또 예수님의 출생과 공생에의 과정으로 설명이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들은 그것을 읽고 듣는 사람에게 주관적인 의미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핵심이고 성경의 목적이고 본질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성경의 말씀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자신에게 의미 있고, 자신의 이야기로 듣는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자신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심청전을 읽고 그것에 대한 문학적 분석과 고찰을 하는 사람과 효자가 된 사람 중에 누가 더 심청전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애굽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다. 모든 사람이 다 애굽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인지한 사람만이 자신이 그 안에 속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그것에 속한 자신을 인정하는 것과 자신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은 항상 애굽이라는 세상의 가치관에서 출발한다. 애굽은 피라미드가 있는 나라다. 즉 위로 갈수록 성공한 나라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낮아지고 내려오는 나라다. 이것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경쟁이다. 이런 경쟁은 항상 상대는 패자요 악한 자로 만들고 나는 승자와 선한 자가 되어야 하는 구조이다. 이때 승자와 패자,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그 나라의 의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세상의 기준이다. 이것은 나중에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기준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인간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선함과 악함을 나누는 기준인 곳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진 인생이 되려면 자신이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 출발을 벗어난 것은 없다. 천지창조 이전의 흑암이 그렇고, 이스라엘 백성이 400여년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종살이 같은 것이다. 오리 무리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백조, 즉 미운 오리 새끼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면 다음은 성경의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여정을 거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가나안에 들어가서야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신앙 고백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게 될 때 그 여정의 연장선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신앙은 결국은 떠나야 할 자리지만 중요한 자리이다. 애굽의 여정이 '여기서 살 수 없구나!'를 깨닫는 것이라면, 광야와 같은 율법의 여정,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 내려하는 여정은 '내 힘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구나!'를 알게 하는 여정이다. 이 두 전환점 사이에는 홍해와 요단강이 있다. 즉 두 번의 세례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물세례와 불세례라 할 수 있다.


애굽의 여정에서 사람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기준이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기준과 피라미드였다면, 광야와 율법의 여정, 행함으로 신앙을 지키려는 여정의 기준은 형식이다. 즉 어떤 기준에 맞는 행함의 유무가 선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어야 진행할 수 있었듯, 술을 마시지 않아야 선이 되는 것이다. 즉 어떤 행함의 증거가 있어야 선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바로 그 광야에 세례 요한이 있었다. 즉 행함을 신앙의 선으로 보는 신앙은 광야에 속한 신앙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많은 교회들의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선하고 장로가 되려면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건 거의 불문율과 같은 것이 되었다. 어떤 교회가 운영하는 카페의 이름이 '도시의 광야'인데 그 이름을 명명한 것이 그들의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광야는 분명한 규범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구름 기둥이 있어야 낮을 견딜 수 있고, 먹는 것도 반드시 만나와 메추라기 그것뿐이다. 어떤 경우도 광야가 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례 요한의 의복과 음식이 다 광야에서 나는 것이듯이 말이다. 광야는 또한 일렬로 걸어야 한다. 지금의 교회가 그렇지 않은가? 자세히 물으면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정해진 길로만 오라고 한다.


신앙의 표현도 획일적이고 어떤 기준 그것 하나여야 한다. 하지만 가나안에 가면 구름기둥도 불기둥도 만나와 메추라기도 없어지고 다니는 것도 일렬로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땅에서 자기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을 때 나라가 된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작은 소자가 세례 요한 보다 낫다고 하신 것이다. 즉 광야와 같은 신앙, 행함으로 선을 규정하는 신앙의 극단도 가나안과 같은 신앙의 갓난아기 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렇게나 아무거나 다 믿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그렇게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된다. 즉 애굽과 광야의 여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 시작을 물세례와 그리고 성령이 하늘로서 내려오시는 성령의 세례(불세례)가 함께하는 것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신 것은 당연히 우리의 여정도 그러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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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예수님 보다 앞서 복음을 전파한 선지자다. 다른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마지막 선지자인 셈이다. 모든 선지자의 예언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선지자의 예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예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세례 요한은 직접 예수님을 보고 바통을 터치하듯 예언의 현현으로 이어진 선지자라 할 수 있다.


모든 선지자의 예언이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자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언은 예수님께서 흙으로 지어진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 그것으로 모두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결국 흙으로 지어진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성품이 자신의 삶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보이시고 전하러 오셨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지어진 존재라는 말씀이기에 그것이 모든 인생의 존재와 삶의 목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여간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 회개의 복음을 전한 선지자다. 누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과 친척관계이고 6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다는 것도 전하고 있다. 그런 세례 요한은 우리 신앙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기록할 만큼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내용이 빈약한 것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모든 말씀은 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말씀으로 나에게 주관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기본적으로 광야에 살았다. 그의 의복이나 음식이 다 하나 같이 광야에서 나는 것이다. 무엇이라도 자기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와 자신의 정체성은 같은 것이다. 뭐랄까 신토불이처럼. 그가 광야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여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말씀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아가는지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과 또 예수님의 생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개인의 신앙을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으로 본다면, 피라미드와 같은 세상, 그러니까 세상의 경쟁의 법에서 승리하고 선악의 기준을 스스로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이겨가며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에서 출발한다.


모태신앙이라고 한다 해도 그런 가치관을 거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몸이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간다고 그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늘 말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지 형식과 같은 몸이 어떤 모양이나 습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애굽의 가치관을 자신의 의로 삼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거짓말 하는 사람이고, 천로역정에서 담 넘어 온 사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애굽에 가셨다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과정의 출발은 애굽이다. 더 정확히는 자신이 애굽의 가치관을 가졌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 다음으로는 광야를 거치게 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다. 그들이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고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거닐게 되듯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자신의 삶이 나아가는 것 역시 광야 같은 시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광야에 바로 세례 요한이 있고, 그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이 다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나는 것이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여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치관이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야는 어떤 곳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는 한 줄로 서서 모세와 언약궤를 앞세워 걸었다. 구름기둥이 일어나면 걷고 그렇지 않으면 머물렀으며, 불기둥이 일어나면 걸었고 그렇지 않으면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마치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다. 어떤 분명한 기준이 있어서 그것에 맞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신앙생활의 여정이 광야의 여정이다. 뭔가를 하면 괜찮고 하지 않으면 불안한 신앙, 그리고 그런 신앙의 가치관 그것이 바로 광야의 여정이고 율법의 여정이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술을 마셔도 되나?', '노래방은?'과 같은 질문을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행동을 해도 되느냐 아니냐를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줄로 걷고 자기 맘대로 하지 못하듯 어떤 제약이 따른다. 술 마시는 것이 죄라고 치자, 그러면 소믈리에(sommelier : 포도주 전문가)와 같은 직업군 안에는 복음이 전파될 수 없다. 술 마시는 것 자체가 죄인데 그런 직업을 가져서 되겠는가? 포도주는 괜찮다고? 그건 타협이다. 이렇게 되면 땅 끝까지 복음 전하기는 그른 일이 되는 것이다.


율법적인 가치관의 시절은 누구나 거친다. 아마도 종교 여하를 불문하고 그런 과정은 다 거칠 것이라고 생각된다. 심지어 공부도 그렇다. 이차방정식을 공식으로 푸는 사람과 이차방정식 공식 자체를 유도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세계인 것이다. 이렇듯 율법적이고 형식을 지킴으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모든 세계 안에 다 있다. 특히나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정이 필수적이기도 한데, 문제는 그것이 전부라고 알고 머무르고 그 안에서 신념으로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다. 


바로 그런 문제가 현실화 되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바로 이슬람과 한 때 기독교를 국교처럼 여겼던 서구세계와의 마찰이 그렇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보면 형식적인 신앙, 신념으로 믿는 신앙의 극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응점에 있는 서구사회 역시 같은 레벨에서 적이기에 같은 링에 올라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적인 신앙은 오늘날 교회 신앙의 근간이 되어 있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의 행사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방향과 개념과 생명과 법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교회를 크게 지어 놓으면 사람이 모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형식과 신념으로 뭉친 광야의 신앙인지를 자백과 같은 것이다.


광야는 가나안과 완연히 다르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다고 했다. 소리와 복음은 전혀 다른 것이다. 소리는 어떤 룰을 알리는 휘슬 소리 같은 것이다. 그야말로 광야의 소리이다. 어떤 것을 지키면 안전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세계, 그 세계에는 사람이 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 소리다. 그냥 신호음과 같은 것이다. 


교회의 설교라고 다를 바 없다. 그 안에 어떤 현란한 문구가 있어도 그 주제가 '하라', '하지마라'와 같은 행위(Do)와 드림으로 세상의 경제적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소유(Have)의 신앙을 말하는 것은 다 휘슬 소리와 같은 것일 뿐이다.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하면 나중에 천국 가서 복 받는다는 것과 심판의 휘슬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는 신호음과 뭐가 다르겠는가?


세례 요한의 외침도 그래서 소리다. 광야에서 나는 외침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진 세계의 모든 외침은 다 소리다. 그것이 성경을 읽는 소리라 해도 복음이 아니라 소리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누구나 다 예외 없이 거치는 과정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로 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것에서 머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님과 같이 세례를 받고 가나안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한 땅, 땅에 있는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육신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과 의가 지시된 자리로 가는 것이다. 바로 여기까지 가야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여정이고, 이 여정에서 우리의 모습이 어디인지를 알게 하는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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