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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1-4 문둥병을 고치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7. 07:5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하시고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 곧 많은 사람이 좇았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르치실 때는 제자들이 나왔고, 산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사람들이 좇았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비슷한 구조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하신 것,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제 보여주시는 것이다.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걸어가는 것은 다르다.>는 말이 있는데, 산에서는 말씀을 풀어서 가르치셨더니 그것을 배우고 따르겠다는 제자들이 나왔고,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허다한 무리, 그러니까 제자라기 보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더라는 것이다.


천국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르쳐서 깨닫게 하고, 또한 그것이 어떤 삶인지를 낮은 곳, 즉 성경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그것을 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좋은 양복과 가운을 입고 높은 강대상에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작업복, 운동복 입고, 슬리퍼 신고 같이 살아가면서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행하려면 행함의 터전 곧 삶의 자리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을 충분히 치장할 수 있는 모습, 좋은 옷에, 높은 자리에서는 길을 알려 줄 수는 있어도, 같이 걸어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은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는 것이다.


산에서 내려오시니 문둥병자가 나아와 말하기를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면 예수님께 절하였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심으로 문둥병을 깨끗케 하셨다. 


문둥병은 몸의 감각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감각이 없다는 것은, 몸이 어떤 자극, 또한 자신을 향한 신호에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문둥병이다. 그렇게 자신의 몸에 감각이 없다보니 자신의 몸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도 알지 못하고 그 고통을 알지 못하는 병이 문둥병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병자들은 단순히 육신의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병들고 아프고 다쳐서 죽게 되는데 그것을 고쳤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살고 있어야 제대로 고친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즉 그것은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이 구원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다 보니 나타난 기적이고 현상으로서 몸의 질병을 고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셨다는 것은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를 고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함이다. 지금 예수님은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내려오셨다. 그리고 말씀을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제 보이시려 하시는데 처음 만난 것이 문둥병자라는 것이다. 몸이 감각이 없어서 외부의 자극도 느끼지, 못하고 자기 몸이 썩고 있어도 알지 못하는 문둥병자를 만나신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못하고, 또한 몸이 썩고 형상이 일그러진 상태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상태는 몸의 형상이 망가지는, 즉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지고 있는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때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예수님을 만난 문둥병자는 먼저 절하고 병을 고쳐주실 것을 청했다. 절을 한다는 것은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문둥병이라는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예수님이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즉 몸의 형상이 뭉그러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예수님께 주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의미를 잃고 방황하고 또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자신이 꿈꾸던 것, 자신이 의미를 찾고 싶었던 많은 것들이 다 일그러진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그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신을 얼마나 다그치고 노력하는지 모른다. 위대한 것을 좇고, 본질이 아닌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꿈과 의미를 회복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벽돌을 굽는 것이다. 그리고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문둥병을 고치려면 그렇게는 안 된다. 구약 성경에서 원래는 문둥병자는 사람 다니는 곳에 함부로 다니면 안 된다. 성 밖에 있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지금 사람들, 그것도 허다한 무리 앞에 나온 것이다. 그것이 이미 자신이 문둥병자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랑한다는 것이 아니다.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 숨은 아담과는 다른 모습이다.


즉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우리 모든 사람은 자신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일그러진 자신의 형상을 예수님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시인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께서 그것을 고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그러진 자신의 꿈과 인생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님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회복을 위하여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 나가는데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사람이 이 육신의 생사화복에 관한 것을 기도하고, 이 땅에서 물질적인 복을 받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회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말씀을 선포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듯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이 인생으로서의 자기 본질을 회복시키실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믿고 필요한 것을 구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라야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절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야 일그러진 자신의 인생이 회복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이다. 그리고 이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고, 이것이 믿음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시면서 깨끗하기를 원한다고 하심으로 이를 회복시키셨다. 즉 문둥병자와 같이 일그러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이 회복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실 때 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회복되는 것이 영적 문둥병, 문둥병으로 예표되는 우리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회복된 문둥병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가 정한 예물(레 14장)을 드리라고 하셨다. 이는 문둥병이라는 것이 의원에 관한 병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그랬다. 문둥병은 제사장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둥병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이고, 그에 맞는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그 예물이라는 것이 결국 자신을 대신하는 것이므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형상이 일그러지는 문둥병이 회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산제사를 드리는 인생이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심으로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이시는 것이 목적이거나, 하나님의 아들은 적어도 문둥병, 그게 아니라면 감기라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된 인생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예수님을 만나야 하나님께서 지으신 원래의 형상이 회복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문둥병을 고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이고, 그것이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자리에서 벗어난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원하셔서 우리에게 산에서 내려오시듯 내려 오셔서 육신의 손으로 만지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의 모습이고, 또한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함을 보이신 것이다. 말씀을 행하심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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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어 행하는 사람, 율법이 완성된 사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그 심령 안에 그 생명에서 비롯된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문자로 읽고, 또 행동 강령처럼 교리나 헌법이나 규칙으로 만들어 체크리스트처럼 실천해가는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삶을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겠는가?' 싶을 수 있다. 또 '정말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만 있으면 성경을 다 지키며 살 수 있다는 말이냐?'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네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물으니 답하기를 '모든 노래 가사가 이해가 다 된다'라고.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성경도 그 말씀이 자기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생수의 강이 안에 흘러넘칠 것이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누가 기록했는지,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유념해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했다.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모두 자신이 그 기록한 내용을 경험하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안에 있고,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말씀이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랬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 또한 알았기에 사람들이 읽도록 기록하고 또한 사람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게 될 것입니다."하는 것은 예언이지만, 자기 안에 그런 경험이 있고, 그렇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 증거로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은 말씀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기록하고 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듣고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보는 아주 중요한 관점이고, 믿음에 있어 절대적인 관점이다. 즉 성경을 기록하고 전한 사람들의 말을 읽고 들어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나도 할 수 있다고, 아니 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능치 못함이 없다니까 암 환자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성경 말씀을 능히 이루고, 행하며 살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다 행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미안하지만 그건 바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기적을 따라했을 때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에 있지 기적을 따라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살고,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나, 주일날 자신을 위하여 돈을 쓰지 않는 것을 평생 지키는 것이나, 평생 욕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인간이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이 평생을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실리 없다. 그건 하나님뿐 아니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럴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성경대로 사는 것은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보고 '참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계심을 알겠다.'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나 밥 퍼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밥 퍼주는 사람을 보고 칭찬은 해도 하나님을 알고 싶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 다닌다고 티내고 교회 이름으로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나도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일반 관념과 다른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또한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성경대로 살고 말씀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욕하지 않고 살 수 없고, 음란한 생각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면 화가 나는 존재라는 것을 언제나 인정하고, 또한 자신이 사람이라 그럴 수밖에 없음 같이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사는 것에서 시작하는 삶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실존을 바로 인식한 사람은 사람의 능력과 한계를 바로 인정하게 되고, 그렇게 연약한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바로 알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성경을 행위로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자신이 인간이라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으로 남이 나를 십자가로 끌고 가듯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는 것을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듯 감추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면 율법의 목적이 완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의 실존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몸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식과 가치관이 바뀐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계가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시작된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태초가 시작된 시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시작되면 온전한 아담이 창조되는 과정이 그 안에서 시작된다. 한 알의 씨가 땅에 심겨져지고 싹이 나서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듯.


그리고 그렇게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고 나면 이전에 생각했던 위대함을 좇아 하나님 가까이 가려는 모든 생각은 다 버린다. 사람의 연약한 육신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짚을 넣고 구워서 벽돌을 만들 듯 인생을 업그레이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실 때 심히 좋았던 모습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상에 절어 있던 사람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오게 되고, 운전할 때 옆에 가는 사람보다 내가 빨리 가야하는 이유가 자기 안에서 없어지기에 난폭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기적이고, 그것이 성령의 감동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을 사람을 보면 십자가에 달린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 때 그 사람도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품성이며, 산상수훈의 주제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사람의 정체성이고, 사람의 존재 이유고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다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생명의 세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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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란 말 그대로 하면 '먼저 아는(안)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 사이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연관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한 "산상수훈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는 말씀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사이에는 주기도문도 있고 또 유명한 말씀들이 있는데, 이 말씀들을 한번 요약해 본다면 사람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이 애통하여 그것을 구하려는 자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사람 지을 때 주신 인생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채워지면 그 삶이 반석 위에 지은 것과 같을 것이라는 말씀이라 요약할 수 있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 규범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본질이고 정체성이고, 사람의 모든 삶과 행동의 근간이다. 마치 생명의 모든 본성의 유전자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이 그 가진 본성을 나타내는데 바람이며 홍 수 같은 비가 방해가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고양이가 홍수 난다고 개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그 집이 무너짐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삶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이 표현되는 사람이 아니라, 선지자 노릇,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척하는 사람은 삶의 상황이 변하면 그 신앙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노릇을 한다는 것은 그 행동과 신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개가 고양이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외식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이 그 안에 없는데 그 모양만 흉내 내듯 노릇을 하는 자는 삶의 상황이 변하면 그 집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아주 분명한 말씀이지만 특히나 신학적 관점에 있어 신앙이나 성경의 해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같은 것이다. 시대가 달라진다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달라진다면 그것이 바로 노릇인 것이다.


생명이란 환경이 바뀐다고 바뀌지 않는다. 개가 바다에 가면 죽을 수는 있지만 물고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삶, 곧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형편이 달라진다고 다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무너지게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는 것은 결국 선지자 노릇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주여, 주여"하며 아무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한다고 주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 한다. 이단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하고, 특히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며 신앙생활 잘 해야 한다고 할 때도 많이 사용한다. 그건 적절한 사용이지만,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면, 선지자가 선지자 노릇 하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지는 기적 중에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본성이 그 사람에게 있어야 주님께서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면 어지간하면 대통령이 누군지는 안다. 하지만 그게 대통령이 자신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아니 내가 대통령을 안다고 대통령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그와 같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가지기 원하셨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삶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게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척, 곧 선지자 노릇하는 것에 대하여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에 비하여 설명하신 것이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아 그 뿌리를 찍어버린다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것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양의 탈을 쓴 이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외식하는 자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같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 사도의 말씀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된 것이 만물이고, 그 생명이 표현될 때 하나님이 표현되는 것이다. 그 생명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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