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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5-29 거짓 선지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6. 12:2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확실성이 높은 일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도 크로노스의 시작으로 볼 때 2,000년도 넘은 옛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뭔가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객관적 실체가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곳저곳에서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물론 이 블로그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이런 불확실성을 종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 자신 안에 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주시는 물, 곧 말씀을 마시는 자는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것이라고 하심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있으면 스스로가 속에서부터 말씀이 나오고 믿음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될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결국은 사람은 자신이 인정할 때 그것이 진리나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아무리 보도를 해도 사람들은 다 자기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렇다는 것은 아마 지금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인터넷으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생중계를 해도 자기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믿기 싫은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고, 또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겠지만 그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이것이 주의 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 안에 생수가 흘러넘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통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사람은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결국 신앙이라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한 사람 안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사람은 우주 아니 인공위성에서 내려만 봐도 보이지도 않는 작은 존재지만 그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온 우주를 그 안에 넣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 사람이다. 사람 안에는 어떤 것이라도 넣을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사람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이 표현되며 사는 존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아주 놀라운 것이다. 비행기만 타고 올라가도 보이지도 않는 작은 존재 안에 온 우주를 담을 수 있고, 자기가 만난 사람과 지나온 세월의 모든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이것은 저장 용량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함과 더불어 사람이라는 존재가 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포인트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은 그릇이다. 그릇이라고 하니 우리가 생활 속에서 접하는 음식 같은 것을 담는 것으로 유추하지만 실상은 크기나 위대함이나 형태에 관계없이 어떤 것이라도 담을 수 있는 존재이다. 온 우주라도 담을 수 있다. 사람 속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아주 짧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여럿 있다.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사람이 질 그릇 같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이고, 예수님은 사람이 그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산상수훈의 많은 말씀이 연관되어 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에 접어들어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언급하신다. 성경이 말하는 거짓을 총칭하면 안과 밖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거짓이 아니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 속에 거짓말하는 것이 들어 있으니 그 입과 몸이 거짓을 행하는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존재는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경이 말하는 거짓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그렇다.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수식하신 말씀들을 보면 가장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외식>이다. 속에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없는데 행위만 율법을 지키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이 ㅈ키려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지키지 못한다고 심판하고 정죄한 율법의 모든 관습과 행위가 본질적인 생명과 의는 없이 노릇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짓 선지자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를 말씀하실 때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속에 이리가 있다면 옷이 아무리 양이라도 결국은 이리의 본성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온 우주를 그 안에 품을 수 있는 사람의 본성이고 능력이다. 즉 마음 안에 있는 것은 결국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이 가진 유전자는 결국 그것에 의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 나쁜 나무를 말씀하심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죽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금하게 할 수 없고, 사람 안에 이리와 같은 것이 있으면 노릇은 할 수 있어도 그 또한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이리라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양을 노략질하는 것은 이리라서가 아니라 양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겉과 속이 다른 거짓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리 모습을 하고 있으면 그래도 경계라도 할 수 있지만 양의 탈을 쓰고 있으면 그건 구분이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결국 나무가 그 생명에 맞는 열매를 내듯 사람은 그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는 다른 것이 거짓 선지자가 아니다. 자기 안에 가르치는 것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지식으로나 또한 행위에 대한 정의와 방법만으로 가르치면 그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인 것이다. 누가 목사를 선지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자천타천으로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 할지라도 만약 이 말씀의 본질, 곧 의와 생명 없이 신학적 관점, 그리고 성경에 대한 객관적 고증에 대한 지식, 히브리어, 헬라어에 대한 지식 그리고 신앙생활의 방법론 밖에 없다면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인 것이다.


생명은 생명 그대로 전해진다. 사과 씨는 다시 사과나무가 된다. 사과 씨가 사과나무가 되는데 어떤 과학이나 객관적 고증이나 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과 씨가 사과나무가 되는 것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그러니까 과학이나 객관적 학문이나 방법은 본질에서 비롯되고 종속된 것인데, 오히려 그 형식으로 본질을 유도하려는 것은 땅의 것으로 하늘을 바꾸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다른 사람에게 그 씨를 옮겨 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고 사실 그것뿐이다. 그러면 천부께서 다 기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사람 안에서 싹이 나고 다시 그 열매를 내는데 신학 같은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다. 말씀에 생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그냥 그 생명이 열매를 내는 것이다.


이라가 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것이 거짓 선지자라는 것은 생명은 없이 종교적인 형식만 양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외식이고, 그것이 거짓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정직하기라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생명이 싹트는 것이다. 그것이 고백이고 그것이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 선지자는 노략질을 한다고 하셨는데, 그 노략질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이다. 인생을 노략질 한다는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이라는 것이 바로 도적질 당한 것이고, 노략 당한 것이다. 이 인생이란 원래 그 안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어 그 생명으로 비롯된 것을 표현하며 살아야 하는데, 내용은 없고 형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만 노력하고 애쓰는 외식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야 말로 이리가 노리는 최대의 노략질인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그 안에 담도록 지어졌다 하신다. 그것만 사람 안에 있으면 사람은 온전해진다. 있어야 할 내용이 있고,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는 형식이 있으면, 그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되는 것을 금할 법이 없는 것이다. 죽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신앙생활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생명체가 그 유전자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지어진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온전히 있으면 수고하지 않아도 되고, 종교적 규례를 지키려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아무리 가만히 있으려 해도 늘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고 그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생명이 되면 그 생명대로 살게 된다. 그게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용과 형식이 같은 것이고, 그것이 외식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양이 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이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 발견해야할 우리의 정체성이고 신앙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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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3-14 좁은 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5. 16:16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좁은 문이라는 것,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역발상적 선택이나, 어떤 광고 카피처럼 남들이 다 "예"할 때 "아니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결과론적으로는 그런 모양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이라는 것은 문을 기준으로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기에 단순히 여러 가지 옵션 중에서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문은 공간적으로 보면 다른 두 공간을 분리하는 경계 중에서 두 공간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한 특정한 경계이다. 또한 문은 들어가는 것에 있어 아무나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즉 문이라는 것은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열쇠라고 한다.


물론 이 말씀에는 열쇠라는 말이나 열쇠가 필요하다는 언급은 없다. 하지만 좁은 문을 선택하는 마음이 바로 열쇠이다. 그 열쇠가 없으면 두 세계를 넘어서는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세계인 생명의 길로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았다. 그 때 남을 대접하는 것은 남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한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그러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대접하는 것은 천국의 문을 지나갈 수 있는 열쇠라는 말씀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하셨다. 큰 문,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큰 문으로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그 문은 멸망의 길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단지 크다는 것 그 하나의 이유로 멸망을 당하는 길일까? 그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큰 것을 선택하여 망한 사례가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롯이 그랬다. 그러나 가장 큰 선택은 역시 네피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로 삼아 네피림 곧 위대한 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아들은 그 부모의 바램이고, 그 부모의 유전자가 형상화 된 것이다. 즉 네피림을 낳았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고 선택했다는 것이다. 즉 큰 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 멸망했다.


큰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문 너머에 있는 세계가 클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한 문이다. 즉 위대함을 좇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멸망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큰 문은 사이즈가 큰 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크고 위대한 것을 좇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좁은 문은 위대함이 아니라 낮아지는 자리로 가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말에도 군자 대로행이라는 말이 있는데, 큰 곳으로 가는 것의 의미란 그런 것이고, 반대로 좁은 문으로 간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크지 않다고 고백하는 겸손한 마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 그 가난하고 멸시 받는 동네에서 사시고, 그것도 높다고 생각하셨는지,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자리인 사형수의 자리로 가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좁은 문이고, 이것이 바로 양의 문인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항상 위대함을 좇아간다. 문이라는 것이 다른 세계로의 입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큰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위대함을 좇아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에 거의 유전자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세상에서 크고 위대한 존재가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또한 그것이 위대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다. 양의 문이라는 것은 양의 본성, 그리고 양이 지나가는 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 예수님을 의미하는 양은 구속자로서 예수님을 예표 한다. 즉 다른 사람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성품이 양의 성품에 비유된 것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은 결국 예수님의 성품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라는 것이다.


즉 큰 문이 위대함을 좇는 문이라면 예수님의 문, 양의 문, 좁은 문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들어가는 문이고 좇아가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해지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좁은 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인은 의인으로 인정받기 원하고, 부자는 부자로 인정받기 원하며 높은 사람은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한다. 세상에서 부러운 사람이 되면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타락한 사람인 것은 결국 그 성공한 자리에서 베풀 듯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게 되기 때문이다.


목사는 성경에 관해서 절대로 평신도에게 지려 하지 않는다. 부자는 노블리스 오브리제로서 주의 일을 감당하려 하고, 교수가 되면 그 지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 한다. 오죽하면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겠는가? 이런 모습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그것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좁은 문은 남들이 선택하지 않아서 좁은 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위대함을 좇아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기에 좁은 문이 된 것이다.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가려는 마음이 좁은 문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길이 좁겠는가?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마음이 작고 좁아서 좁은 문이다.


문은 어떤 두 세계를 넘어가는 통로다. 그리고 문이 있다는 것은 그 문을 지나가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양의 문은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고, 큰 문은 위대함을 좇아가는 존재가 들어가는 문이다. 좁은 문은 양의 문이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의 문이다. 그 문은 위대함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볼 때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좁은 문이지 사람이 들어가기 좁은 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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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7-12 황금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4. 11:34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7장 12절은 황금률이라 불린다. 이는 성경뿐 아니라 논어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것을 황금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윤리적 양식으로서 이 말씀을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행위의 근본 성품이 있으면 된다는 것을 늘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것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대접한다는 것은 물 한 그릇 밥 한 그릇 대접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존재로서 대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어떤 존재로 대하느냐만 정해지면 대접 받는 모든 행위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고, 바른 대접을 하게 되어 있다. 상대를 대통령이라고 인정하면 그것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남을 내가 어떤 존재로 여기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내가 남을 어떤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결국 나도 그와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스포츠에서도 체급이라는 것이 있는데, 상대를 나의 상대로 인정한다는 것은 나도 그와 같은 체급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좀 전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답 했을 대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도다." 하셨다. 이것이 바로 대접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인정했을 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접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그에 따른 대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대접이라는 것은 상대를 어떤 사람으로 인정하느냐에 종속된 것이지, 대접하는 것 그 하나가 독립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사람을 보는 관점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로 보면, 그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또한 그러한 목적 아래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에 맞게 대접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내가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므로 당연히 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존재이고 또한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네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다른 사람도 그런 존재로 대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대접은 그에 종속된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 사람을 보는 관점은 절대적인 것이다. 사람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시고 가지셨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타락하기 전의 세계에 사는 것이고, 사람을 부끄럽고 감출 것이 많은 연약한 존재로 보는 사람은 타락한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는지에 대한 기준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생명을 가져야만 가능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남을 어떻게 보고 또한 그 보는 관점에 따라 대접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 '뭐 눈에는 뭐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황금률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에 이어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신 말씀에 이어서 이 말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하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우리 육신을 가진 사람의 인생의 목적이자 내용을 구하라는 말씀이고, 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휘발유은 휘발유로 동력을 발생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졌기에 휘발유가 가장 좋은 것이듯,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 지어졌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는 생명인 그리스도의 성품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인생의 존재 목적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는 것을 구하고, 또한 다른 사람도 그러한 목적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람을 그런 존재로 대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한다는 것이 바로 구한 것을 주신 것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기에 우리가 남을 그렇게 대접한 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을 보다보니 사바나에 떠났던 코끼리가 돌아온다는 것은 곧 우기가 올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우기가 온다는 것과 코끼리가 돌아오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기가 오기 때문에 코끼리가 온 것이기도 하고, 또한 코끼리 안에 있는 본성이 우기가 오는 것을 알아서 회귀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와 같다. 남을 어떻게 대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런 대접을 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남을 대접한다는 것은 이미 내가 어떤 대접을 받을 사람인지가 정해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관점이 있다. 성선설도 성악설도 또한 여러 철학적 관점들도 있다. 그리고 성경에도 사람을 보는 관점이 있다. 그것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보시는 관점과, 다른 하나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사람을 보는 관점 그것뿐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보는 관점은 다른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특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기대하시고 그렇게 이끄신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에 진노하시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연약하고 부정한 것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든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보는 것을 악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심에 격분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사람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책망하셨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권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죄를 사하는 것이 곧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서 보는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며, 그런 관점을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이미 남을 대접하는 대로 대접을 받는, 더 정확히는 그런 존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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