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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5. 3. 20. 15:19 Writer : 김홍덕

다른 종교에도 이단 논쟁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특히나 기독교의 경우 이단 논쟁이 많고 그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단이 많이 생기기도 한다. 좋은 제품일수록 짝퉁과 모방제품이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독교의 우월성을 고려해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렇게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자리하지 못하고 비난 받고 또 많은 이단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압도적인 진리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므로 한 마디로 기독교를 뿌리로 하는 이단이 많다는 것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를 뿌리로 하는 이단 종파가 많이 생기는지 교회가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을 가지고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밝힐 것은 이단이라는 기준이 교리에 입각해서 이단을 규정하는 것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접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리라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한 교리는 신앙의 결론을 문장화 한 것으로 그런 교리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과 원인을 포함해야 하지만 함축된 문장으로 그것을 다 밝히기 힘들기 때문이다.



1. "스스로 깨달았다" 라고하기 시작하면 이단이 된다.



많은 기독교의 이단들의 교주들은 어떤 계시에 대하여 스스로 깨달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깨달음의 과정이 남다름을 내세운다. 그러한 주장들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신비한 것을 수반한 사람을 영웅으로, 그리스도로 여기는 마음을 자극하여 숭배를 받기에는 주요한 전략이기는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아주 위험한 발상이고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의 기본 구조 중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는 것이 있다. 사실 이것을 빼 버리면 기독교는 존립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셨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쟁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많은 사도들에게 있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물론이고 요한 사도를 비롯하면 대부분의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전하는 것에 노력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중요한가? 성경의 많은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왕이나 사회적으로 상위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자 우리와 같은 육신과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대상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계시를 전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을 통한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기적이 나타난다고 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그 중심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대단한 계시를 가지고 설교를 한다 해도 그것을 사람을 통해서 전해들은 것이 아니란 자기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장한다면 그 설교의 내용이 어떠하더라도 이미 하나님의 법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천로역정에서 담을 넘어 들어온 사람과 같고, 혼외자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계시를 보이실 때 사람을 통하여 전하신 이유는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학자도 개가 짖는 이유를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 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과 방법을 동원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로부터 오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계시라도 그 사람에게 그 계시가 열리는 과정에 있어 반드시 사람의 역할이 있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 혼자 기도하는 중에 깨달았다는 식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그것은 그 말씀이 온전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보여준 방법이 아닌 것이다. 설사 자신에게 계시를 열어 준 사람이 그 이후에 다른 길로 가서 연관성을 찾기 어려워졌더라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단의 수장이 어느 날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의 계시를 사람을 통하지 않고 깨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디오피아 내시장이 혼자 성경을 읽으며 갈 때 집사 빌립이 '네가 읽고 있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 이디오피아 내시장의 대답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가르쳐 주는 이가 없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오늘날 성경을 전해 듣고 하나님의 대하여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사람이 사람에게 전한 것으로 인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과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전한 그 복음을 듣고 깨달았고, 또 그 제자들을 만난 사람들과 그 제자들이 말과 글로 전한 복음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나 교단의 수장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이단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2.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면 이단이 된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것도 사람 없는 산이나 골짜기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마을에 오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단 이단이 아니라도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세상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짐승처럼 여기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무시하는 성향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존하는 현상이다. 만약에 교회가 그런 모습으로 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을 죽은 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짐승보다 못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긴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죽은 자와 같이 여기시는 것은 그들을 죽은 자로 고착화시키고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할 대상으로 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무시하면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본적인 의를 무시하는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를 두고 성경은 모든 사람이 흑암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즉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만약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다 짐승과 같은 존재로 여기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뿐인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섬기러 왔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 같고 설사 벌레보다 못한 사람 같을지라도 그것을 배척하고 무시하라고 죽은 자와 같다고 하거나 벌레만도 못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섬길 대상으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악뿐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그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죽이는 것에 대하여 자신을 내어주면서까지 사람을 구원하려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 시작했다고, 또 다른 사람보다 더 계시가 밝아졌다고 느낀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없는 교회라고 그들을 벌레나 짐승 같다고 말을 하고 그것에 환호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단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법은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안다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그런 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대하여 더 알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더 잘난 척하고 오히려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결국 그런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렇게까지 당하면서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대하신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대도 그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목숨도 내어주는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이런 모습과 달리 세상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그런 모습에 환호하는 것을 보면 이단이 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사회와 분리되려 하면 이단이 된다.



많은 이단들이 종교의 범주를 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려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버리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다. 직장을 버리고 기본적인 사회생활을 소홀이 하면서 종교적인 몰입에 빠지는 것도 그러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이단이 되는 두 번째 현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자신을 지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 시작하는 신앙이 능동적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능동적 의사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 믿음이 능동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무엇을 해야 신앙이라 주장하는 것은 다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앙이 수동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두실 때 조성한 환경에 대하여 순종한다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믿음은 수동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자신을 둘러싼 가정과 사회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듯 벗어나려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실 때 실수했거나 불량을 만드신 신으로 치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예수님도 그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과 법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 중 하나의 귀를 칼로 자르면서 저항하자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하늘의 군사를 불러서 저들을 물리치지 못할 것 같으냐?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라고 하시면서 베드로를 꾸짖고 잡혀가신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 그 당시의 법에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함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니 예수님의 그 행사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고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시려 하는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셨기에 예수님을 살리신 것이다.


그런데 교회 생활하는 것을 반대하는 가족과 또 여러 가지 장애 요소가 있는 직장생활과 같은 것에 있어 교회 생활에 불편을 주는 요소에 대항해서 집을 뛰쳐나오거나 직장이 요구하는 것을 자꾸 외면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법에 의하여 십자가에 끌려가신 도를 전혀 모르는 것임에도, 오히려 교회가 그런 것을 찬양하고 성도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면 이단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말로 신앙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개종을 요구하고, 신앙의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며 대적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는 필요하면 가정을 뛰쳐나올 수 있다. 직장도 그만둘 수 있다. 그런 것은 종교를 떠나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서 귀가가 늦어지고, 또 교회로 인하여 다른 생활에 지장을 주는 것을 염려하는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요구를 종교적 탄압으로 보면 안 된다. 그런 요구는 할 수 있는데 까지 응해야 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자기 신념을 상당히 손해 보는 것이다. 엄청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요구로 인한 자신의 신앙적 즐거움을 조금 손해보고 또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이 충분히 감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다. 사회적인 요구에 목숨을 내어 주신 것이다. 그랬더니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이려 하는데 하늘의 힘을 빌려 그들을 무찌른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그러므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 방해되는 보편적 사회 요구사항을 핍박으로 여기고 대항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으로도 용납되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교회로 올 마음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 이단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4. 사람 없는 곳으로 가고 힘을 내부로 모으면 이단이 된다.



앞에서 말한 2,3번째 현상이 교회에 나타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교회가 사람이 없는 곳에 건물을 짓고 외진 곳으로 떠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자신들의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을 떠나 자신들 만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려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단이 되어가는 필연적 과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많이 알아가고 계시가 밝아지고 사람이 변하기 시작하면 그 결과를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할 때 그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그 에너지와 깨달은 은혜를 전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 속으로 오셨는데,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사람들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 모이고 폐쇄되고 독립적인 공동체 삶을 꾸미려 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는 반대되는 형태를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 까지는 정해진 범주 안에서 자라고 또한 자라기 위하여 자신의 역량과 삶을 소비하지만, 성인이 되면 제약 없이 세상에 나가서 자신의 세계를 펼치는 것이다. 캥거루족이라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어떤 활동을 해야 함에도 부모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듯 신앙이라는 것도 자라고 받은 은혜가 많아지면 그것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즉 에너지를 교회 안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단적 현상이 교회에 나타나기 시작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짐승 취급하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두신 것에 순종하지 않고 사회적 문화와 구조를 신앙의 방해 요소로 여겨 가정과 직장을 외면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모이면 그 안에 생기는 에너지를 결국 자기들 끼리 소비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내부에서 에너지를 소비할 건수를 찾게 되고 그러한 요구는 신앙적인 심판 형태로 나타나서 자기들의 공동체 안에서 규정한 것을 어기는 실수나 잘못을 하는 사람, 그리고 잘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심판하고 교화시키겠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압력과 부담을 주는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그 가지신 모든 힘과 목숨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셨는데, 이것을 모르면 신앙의 모든 에너지를 내부적으로 서로 소비하는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즉 지속적인 캥거루족과 같은 삶과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인민재판과 같은 심판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나도 참 저러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인데, 외진 곳으로 가서 폐쇄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면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차단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또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종 되는 것을 버리고,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는 신앙이 찬양을 받고 있으며, 가정과 직장 동료들을 신앙의 방해자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상황이라면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위치나 관계에 있는 누가 그것을 보고 예수 믿고 싶어지겠는가? 그것이야 말로 정말로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고 상황이 이쯤 되면 이미 이단으로 많이 고착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 마지막 요소는 앞에서 말한 것과는 성경이 좀 다른 요소이다. 이것은 다소 신앙적 교리에 입각한 해석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다섯 번째 요소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 수 있는 요소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이라는 신을 섬기는 말씀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 그 핵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의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는 것에 있어 사람이 무엇을 하면 반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존재로서 관계를 형성하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어떤 봉사를 하고 공로를 쌓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하면 천국에 상금이 쌓여서 죽어서 천국가면 기와집에 살 수 있다는 식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하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창조주와 피조물로, 또한 하나님의 본성이 자신을 통해서 표현되는 아들이라는 관계만 성립이 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자신의 본성이 된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는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공로나 수고나 재물을 드리면 신이 기뻐하고 복을 준다고 하는 종교는 많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도 그렇게 믿는 것은 나름의 신앙일 수는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앙이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도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네 정체성의 자리가 어디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성공하여 많은 것을 교회에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는 것은 나름의 신앙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의 결정체가 바로 교회를 크고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짖고 있는 모습이다. 교회를 그렇게 지어가는 것은 세상적인 위대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믿음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한 교회의 착각들은 당연히 사회적인 외면을 받는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한다는 것은 서울역에서 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삶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어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보다 더 좋은 건물을 짓고, 교회 안에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다니는 것을 내세우면 부러울 수는 있겠지만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모습은 예수님께서 종으로 세상을 섬기러 오신 모습과는 달리 세상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교회로 이끌려는 것일 뿐 참된 복음의 전도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위대한 것을 교회가 보이려고 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며, 그런 사람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많다고 자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위대한 착각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건 이미 사회적으로 증명된 현상이다. 


이렇듯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굳이 이단이 되는 과정이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존재의 신, 곧 어떤 관계, 어떤 생명이 되기만 하면 굳이 사람이 능동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생명의 본성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듯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고 그러면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다시 예수를 믿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인 것이다.



이상으로 교회가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과, 교회가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알아 봤다. 이러한 관점은 교회의 교리를 기준으로 이단을 규정하는 방법과 같은 것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사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면 별로 이해할 필요가 없는 그런 논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이야기 하는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은 교리가 아니라 가장 성경적인 관점이고 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쉽게 이단을 구분할 수 있는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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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18-22 제자들을 부르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18. 19:46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잡히시고 난 후 갈릴리 지방에서 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과 연관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시고,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다.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가다가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따라 오라 하니 그들이 난데없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에 매료되어 제자들이 한 순간에 따라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읽어 본다면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에 가셔서 사시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파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들은 바 있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따라 오라고 하실 때에 따라 나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라 나서는 장면이 뭔가 신비롭지 않고 예수님의 능력을 좀 깎아 내리는 것 같아 보일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셔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서 복음을 전하신 것을 흑암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시면서 보여주신 삶이 그 땅의 백성들에게는 흑암 중의 큰 빛과 같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사 9:2)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절대로 '예수님이니까 그렇지'로 보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생들은 희망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이신 행적을 보면서 '예수님이니까 그렇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면 우린 지금 당장 예수 믿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이 더 현명하다.


물론 예수님이 보이신 기적이나, 능력이나 십자가를 직접 지는 것과 같은 것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가? 왜 기적을 보이시고,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알게 하시려 한 것을 우리가 할 수 없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의 목적은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재로 그러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생면부지의 사람을 갑자기 따라 오라고 했는데 따라 왔다? 제자들을 그렇게 부르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에서 사시면서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제자들을 불렀을 때 제자로서 따라 나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의 삶, 십자가의 삶의 기본 본성이다. 예수님의 삶은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 삶이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심판하신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시면서 보이신 모습,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모습이 사람에게 심판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헤집는 말을 하러 오셨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게 하신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의 삶이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라고 했을 때 그 마음에 예수님을 따라갈 마음이 동하여 따라 나선 것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롯 유다를 제외한 대부분의 제자들이 갈릴리와 나사렛 인근에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난데없이 예수님이 지나가다 부르니까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 마음이 동할 정도로 예수님의 삶이 그 마음에 이미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라고 하니 말로만 전하는 그런 삶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서울역에서 예수 믿으라고 외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그냥 소리일 뿐이다. 그것도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소리일 뿐이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커녕 욕하면서 빨리 그 자리를 피하려 하는 것은 예수 믿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삶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본 것이라고는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외침 밖에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삶이 수반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행동으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과 다르다. 그러니까 성경을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도하라니까 서울역에 가서 시끄럽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담당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것이기는 하나 능동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어떤 것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에 제자로 부를 사람들에게 서울역에서 전도하는 사람처럼 가서 '나를 따라 오너라 그러지 않으면 지옥 간다.' 뭐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볼 때 정말로 예수님을 따라 가고 싶은 삶을 사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라 나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예수님을 믿고서 그것을 전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교훈을 주고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는 방식에 관한 말씀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도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시고 부르신 것이다. 제자로 부른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이 있었고 그것이 부르시는 음성에 소리굽쇠가 공명을 일으키듯 그들로 하여금 생업을 뒤로 하고 따라 나서게 했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또 성도 간에 교훈을 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감당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 뭔가 말씀 안에서 그 생각을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어 복음과 교훈을 전하려 한다면 뭔가를 감당해야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깨닫기까지의 세월과 그 세월을 살아내는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 없이 말로만 가서 전하고, 교훈하고 심지어 심판하듯 비난하고 패를 지어 수근그린다면 그건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아닌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서울역에서 복음 전하는 사람이 서울역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이 지옥 간다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이 아무리 아련하다 한들 예수님의 그 마음 만 하겠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비난하거나 겁주시지 않고 오히려 묵묵히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당하시면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니 용서해 주십시오.'기도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또 그것을 교회에서 나눈다면서 그것을 모르고 또 때로 죄 짓는 사람을 보고서 그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을 감당하지 않고 말로서 그 사람을 가르치려 하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듯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진정 계시가 밝거나 십자가의 도를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겠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미 그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삶을 감당하신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따라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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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시험을 이기신 다음에 세례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 나셨다가 가버나움에서 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고, 예수님께서 믿음을 칭찬한 두 사람 중 하나인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마을이고, 또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메고 와서 고치신 마을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시는데 그 시작이 되는 시점이 이상하게도 세례 요한이 잡혀 간 이후부터 복음을 전하셨다고 했다. 세례 요한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율법 세계의 최고봉이다.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 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다는 것이 율법 세계, 광야의 세계, 뭔가를 하면 괜찮고 하지 않으면 뭔가 잘못한 것 같은 마음을 느끼는 신앙 세계의 최고봉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례 요한이 잡혀가는 것과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은 어떤 상관이 있기에 이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우리에게 전하셨을까? 이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과 예수님의 역학관계나 예수님의 특수성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이 세례 요한이 물러가고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겪어가기 때문인 것이다.


세례 요한의 과정이란 한 개인의 신앙에 있어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하여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말한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걸을 때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을 때만 진행하는 것과 같이 성경 말씀을 휘슬 소리처럼 신앙생활의 어떤 신호와 기준으로 알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삶을 사는 시절과 과정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동일하다. 그 과정에서 겪는 각각의 일은 다르지만 개론은 동일하다. 누구나 애굽과 같은 세상의 법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든 시절이 있다. 그 안에서 이기려는 것은 각각 다르지만 그런 시절은 누구나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영광을 좇는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가는 것이 선이고 이기고 성공이라고 믿는 시절이 다 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 까지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듯 애굽의 가치관을 벗어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애굽에 속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것에 만족하는데 그곳에서 나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면 광야와 같은 세월을 보낸다. 뭔가를 하면 마음이 편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을 거친다. 공부로 보면 공부를 하지 않고 있던 시절을 애굽의 시절이라 한다면, 공식을 외우고 의미는 모르면서 외우는 시절을 광야와 같은 시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에 있어 그런 시절은 어떤 시절인가 하면,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가?'하는 의문에 쌓여 살아가면서 겪는 일과 결정 앞에서 어떤 해답을 찾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몰입한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 시절의 최고봉이고 그 세계에서 가장 큰 자가 세례 요한이다.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청년(그가 고등학생일 때 내가 고등부 교사였던)이 내게 와서 자유로운 신앙의 모습을 보인 나에게 이것저것 따져 물은 일이 있었다. 하나씩 대답을 하다 보니 이 청년의 의도가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함이 아니라 따지고 드는 것이 목적이기에 이렇게 물었다.

"너는 모세 보다 크냐?" 그러자 별 말이 없었다. 그래서 "가서 생각해 보고 네가 모세보다 크다고 생각하면 다시 오너라."라고 말을 했더니 아무 말 않고 있다가 가 버렸다. 그리고 15년이 넘었지만 아직 오지 않고 있다. 그는 아직 자신이 모세보다 크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질문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 믿는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앙이 아무리 어려도 세례 요한 보다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세례 요한은 고사하고 모세보다 크다고 느낄 수 없는 것은 모세의 업적과 자신의 업적을 비교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의 업적이라는 것이 아무리 위대해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게 되는 것을 알도록 하는 과정에 쓰인 업적이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모세와 같은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모르면 그 세계 안에서 아무리 수고하고 목숨을 버려 교회에 충성을 해도 광야의 세계에서 충성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가나안을 누리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명을 누리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충성과 신념에 충만하면 제사장과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나에게 따지러 온 그 청년과 같이.


광야의 세계, 세례 요한의 세계는 그런 것이다. 그런 세계는 항상 마찰이 있다. 어떤 것을 행동으로 지켜 내려면 규범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율법이다. 율법의 특징은 이분법적 논리라는 것이다. 율법을 기준으로 지키든지 아니면 범하든지. 그와 같은 이분법적 가치관은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 없다. 이분법적 논리에 접하게 되면 어느 누군가는 악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두 이기는 경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교회가 사회와 늘 마찰을 일으키는 것도 많은 교회의 신앙이 광야와 같은 율법적인 신앙 세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무엇을 해야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는 행위 규범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그 증거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헌금하면 천국에 상급을 쌓아 주신다.'와 같은 것이 다 행위 규범이다. 마치 불기둥과 구름기둥 같은 것들이다. 이는 신약을 전한다 해도 율법적인 신앙일 뿐이다.


기도는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 자체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기도를 흔히 영적 호흡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호흡을 노력이나 신념이나 의지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냥 살아 있으니 하는 것이 아닌가? 찬양도 그렇다 찬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찬송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찬양도 기도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 있는 신앙이다. 기도나 찬양이나 또 다른 신앙의 모습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이기 때문이다. 개가 짖듯이.


그런 가치관, 그러니까 뭔가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분법적이고 율법적인 광야의 가치관, 그것이 사로 잡혀가지 않으면 천국의 복음이 전파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잡히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했다는 말씀의 의미인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신앙의 여정을 가는 한 사람의 마음 안이고, 한 사람의 인생이다. 그 사람 마음 안에서 광야와 같은 가치관이 있다가 세례를 받음과 같이 그것에서 만족이 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나라를 이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어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그런 삶을 꿈꾸고 그곳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광야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즉 광야와 같은 가치관, 이분법적 가치관, 무엇을 해야 온전해진다고 생각하는 종과 율법의 가치관이 세례 요한이 잡혀가듯 없어져야 비로소 그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삶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하나씩 채워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잡혀가고 또 죽고 난 다음에야 복음 전파를 시작하신 것은 세례 요한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안목과 가치관과 믿음이 세례 요한과 같은 율법적인 가치관이 사로잡혀가고 나야 비로소 그 마음 안에 복음이 온전히 자리하기 시작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지 세례 요한 때문에 예수님이 하실 일을 못하시는 분은 아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잡혀 갔다. 즉 세상의 권세에 잡혀갔다는 것이다. 이것도 큰 의미가 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율법적인 신앙 가치관은 세상의 권세에 잡혀가기 마련이다. 즉 율법적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지 않으려 하면 회사 생활에 부담이 되고 직장 동료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져야 한다. 그래야 율법의 목적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이 죄인으로 발견되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율법을 지키려 해도 결국은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발견되도록 하신 것이 율법의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하여 음욕을 품는 것 그것으로 이미 간음이라 했다. 


즉 율법을 더 엄하게 적용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그것을 행함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이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광야와 가나안 사이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다. 즉 광야와 같은, 율법적인 가치관으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좇아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을 살기 원한다면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정을 거쳐야 한다. 즉 세상의 법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여기고 살다가 그것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서 규례를 행함으로 지키는 삶을 살다 보니 인생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잡혀간 것이다. 헤롯에게 잡혀간 것이다. 즉 율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율법을 몸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세상에 지고 율법적인 가치관은 옥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세례 요한이 잡히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록하신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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