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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1-8 중풍병자를 고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4. 23:28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마가, 누가복음에도 다 나오는 말씀이다. 마가와 누가에서는 천정을 뚫고 병자를 내렸다는 기사가 있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하다. 단순히 중풍을 고쳤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악한 기준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중풍병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싶었으나 예수님께 갈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치셨는데 그 고치시는 말씀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는 서기관들의 생각과 함께 엮여서 복음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은 매우 놀라고 예수님을 참담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감히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고 하는 것이 참담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절도나 살인과 같은 것을 악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악하다고 생각한 세리나 창녀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은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 악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인 악한 것인가 하는 것에 있어 서기관들은 창녀나 세리와 같은 이들을 악을 범한 죄인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것은 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악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서기관과 예수님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실 때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중풍이라는 것이 죄의 결과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아픈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죄로 인함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소경에 대하여 그가 소경이 된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에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선 생각해 볼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몸이 아픈 것이 죄로 인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다. 물론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와 같이 죄에 대한 벌로서 병을 얻기도 하지만 그런 것도 교훈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병이라는 것이 죄로 인함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고 하시니 병이라는 것이 죄로 인함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중풍이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중풍이라는 것은 의가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풍이란 것이 사람의 생각은 멀쩡하지만 그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듯,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주관하지 않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만난다는 자체가 중풍이 고쳐져서 머리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는 상태가 되듯이 하나님의 의가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라는 것을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회복되는 것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그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찾아오고 만나서 회복된다는 것이 바로 인생이 목적의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의가 삶을 주관하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동일하게 육신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죄를 사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위하여 오신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만나려고 온 중풍병자의 마음이 예수님을 통한 회복을 소망한 것임을 보시고 회복케 하신 것이 바로 죄를 사하시는 것이기에 죄를 사한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서 가장 쉬운 말은 침상을 들고 일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기관들에게 죄를 사한다는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가치관에서 사람의 죄는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며 죄를 사하노라고 말씀 하신 것이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과 같이 들렸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 그것도 나사렛의 천한 동네에서 나타난 허름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칭하니 그것이 엄청난 참담함으로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그들의 생각이 악한 것은 사람에 대하여 스스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사람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사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스스로 가진 기준이다. 즉 스스로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어떤 것이 악한 것인지 규정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악한 것이라고, 또한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침범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도 불편해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지 못한 어려움을 당하면 '나에게 왜 이런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가 그에게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느냐?' 반문한다면 아마 구구절절 이유를 대거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할 이유 없이 살았다고 항변하겠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자신이 사람이라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런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얼마나 스스로 가치기준을 가지고 사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사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지은 목적을 알고 사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삶은 사람의 죄를 사하는 그 자체이다. 그것은 바로 머리의 생각이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중풍이 고쳐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풍을 고치신다는 것은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의 가치관 안에서 죄는 다른 것이다. 세리와 창녀가 그들에게 죄인이었다. 즉 사람의 행위가 그들에게 선과 악의 기준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그 삶을 주관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받은 것이다. 또한 그래서 그들은 중풍을 고치는 것이 죄를 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고, 근본적으로 사람의 본질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머리의 생각이 몸을 정상적으로 주관하듯이 삶을 주관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중풍이듯, 사람의 행함으로 사람을 규정하고, 율법의 본질은 모른 체 지켜내기만 하려는 서기관들의 관점은 다 중풍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관점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의 악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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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29-34 군대 귀신 들린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3. 13:0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건너서 가다라(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셨다. 여기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는데, 이 기사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말씀이다. 이 귀신 들린 자는 마태복음에는 두 명으로 나오고 다른 복음서에는 몇 명인지 언급이 없고 그냥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기적을 보이셨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중풍과는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중풍이 머리에 생각은 바로 있지만 몸이 머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머리에 생각이 빼앗겨서 몸이 원래의 목적과 본성이 아닌 행동을 보이는 것이 귀신 들린 사람이다. 다른 성경에서는 이 귀신 들린 자를 사람들이 사슬로 묶어 두었는데도 스스로 끊고 돌아 다녔다고 했다.


먼저 이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것을 보면, 무덤 사이에 거하고 매우 사납고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갈 수 없다고 했다. 앞에서 세례 요한을 이야기 할 때 사람이 자기 거하는 곳이 자기 정체성을 설명한다고 했는데, 율법의 최고봉인 세례 요한이 율법의 상징인 장소인 광야에 머물렀듯, 귀신 들린 자는 무덤 사이, 곧 죽음과 죽은 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머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다른 존재에게 빼앗기면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귀신이라는 것이 영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것만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 머리에 그러니까 의와 목적을 귀신에게 빼앗긴 것이듯, 사람이 본연의 존재 목적이 아닌 돈이나 권력과 같은 것이 몸과 삶을 주장하는 것도 다 머리를 빼앗겼다는 것, 의와 목적이 다른 것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귀신 들린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실재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돈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귀신 들린 자가 사슬을 끊을 정도의 놀라운 힘을 가졌듯, 돈으로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 앞으로는 사람들이 잘 지나가지 않는다. 귀신 들린 자에게 사슬을 끊는 힘이 있듯, 돈에게 머리를 빼앗긴 사람은 보통의 사람들이 경제적인 굴레를 사슬처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그것을 끊을 힘이 있고,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산다. 그리고 그것이 죽은 것인 줄 모르고 특권이고 성공인줄로 알고 살아간다. 그런 모습이나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나 같은 것이다. 그게 돈이 아니라 권력이나 명예나 도덕이면 그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런 유추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문둥병이나 귀신 들린 사람이나 중풍이 열병이나 감기와 같은 것 보다 흔한 병은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병들이 많이 나온다. 그것은 이런 병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잘못된 것을 설명하는 증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문둥병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지 못하여 자신의 형상이 일그러지는 병이고, 중풍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삶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며, 귀신 들린 것은 의도 없이 오히려 삶을 다른 것에 빼앗겨 버린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귀신 들린 자 하나를 고치시려고 거라사 지방에 가셨는지도 모른다.(마가복음 기준으로) 


사람이 가져야할 온전한 정신이 아닌 다른 것이 그 머리를 지배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정신 나갔다고 하거나 귀신이 들렸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머리의 내용이 아닌 다른 것이 채워져 있으면 그것은 다 무덤 사이에 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죽은 자와 같은 것이다.


원래 사람의 머리, 그 생각과 정신은 그리스도가 주인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인생이라는 정체성과 생명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신 것이 그것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머리와 정신, 곧 무엇인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를 돈이나 명예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삶은 무덤 사이에 거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며, 그런 삶은 육신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 하며, 그런 모습 때문에 사람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귀신 들린 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도 뭔가에 미친 사람을 위대하다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친하게 지내려 하지는 않는다. 그건 다 귀신 들린 사람 같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서로 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서로 봐도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가 머리에 온전히 있으면 사람이 피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는 순종하는 모습을 가지신 분이다. 그리스도는 배 밖에서 일어나는 풍랑에 두려워하고 죽을 것처럼 여기지 않는 분이다. 그러니까 배 밖의 것의 위협이 되지 않고 평안한데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되고 무서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사람을 누가 무서워하겠는가? 바로 그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으면 다 귀신 들린 사람과 같은 삶이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삶이다.


그렇게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괴롭다. 그것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거짓된 것이라는 것임이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상관이 없으니 괴롭게 말아 달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아닌 귀신, 돈, 명예와 같은 것이 삶을 주관하여 무덤 사이에 사는 인생들은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함(구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귀신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쫓아내시려면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돼지는 구분이 없는 동물이다. 굽이 갈라지지 않아서 구분 곧 거룩함이 없는 존재이고, 먹는 것 또한 구분 없이 먹고 되새김질도 없는 동물이다. 이러한 돼지의 본성이나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  들이는 바다는 같은 것이다. 즉 돼지의 본성이 거하는 자리가 바로 바다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방금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건너셨다. 그 바다를 건너실 때에 바다는 광풍이 일어났었다. 바로 그 바다로 지금 귀신들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도 거룩하지 않는 돼지의 몸을 빌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바다가 어디인가? 세상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물, 곧 사람이 삶의 의미에 목말라서 마시고 또 그것이 아니라 배설한 모든 물이 다 모인 곳이 바다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가진 존재의 갈증을 해갈하도 남을 것 같이 많은 물이 모였지만 정작 마실 수 없는 것이 바닷물이고, 세상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다에서 일어나는 광풍 앞에 그리스도의 평안과 믿음이 없으면 불안한 것이 인생이다. 그 인생이나 돼지 속에 들어가서 바다로 들어간 귀신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머리에 있지 않고 머리를 세상의 온갖 향락과 돈과 명예와 과학과 철학에 빼앗긴 사람들 그들이 있는 곳이 바다고, 그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람을 두렵게 하듯이 귀신 들린 자가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고치셨다. 또한 귀신들이 들어간 바다에 풍랑이 일어도 배 안에서 편안히 주무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머리를 귀신이나 바다와 같은 세상의 것에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과 하나님의 의가 주관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평안하며, 또한 귀신 들린 자와는 달리 사람이 그 앞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인생은 귀신 들린 것이 들어가 있는 바다와 같은 세상을 항해하는 작은 배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바다가 어떤 모양이든 무관하게 평안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또한 귀신 들린 자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이며, 무엇보다 우린 인생들이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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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23-28 바다를 잔잔케 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2. 22:50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흔히 세상을 바다에 비유한다. 그리고 인생을 항해한다고 말을 한다. 성경도 세상을 바다에 비유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다는 늘 세상이다. 땅에서 온갖 물들이 모여들어서 모든 것이 혼합되어서 바다이기도 하고, 또 넘치는 물이지만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바다는, 세상의 모든 것이 모여서 큰물이 모였지만, 정작 사람이 인생의 정체성과 의미와 삶의 목적에 대한 갈증은 그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또한 인생을 그리고 세상을 바다와 같다고 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시는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 위험하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그러니까 세상은 요란한데 예수님은 평안하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정말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사람은 평안하다는 말씀이시다. 바다를 꾸짖으셨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다를 꾸짖어 풍랑을 잠잠케 한 예수님의 기사를 보고 예수님께서 바다를 다스리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주목할지 모르지만, 이 말씀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어떤 풍파에서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평안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상실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 역시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세상이 바다의 풍랑과 같이 험악하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 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람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이든 이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보고 정상이니 아니니 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위에 서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세상을 탓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대하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을 만든 하나님을 나무라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신앙에 대한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해도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은 나무라고 책망하고 심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고 책망하여 돌이키는 본을 십자가에서 보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화를 내는 모든 일의 이유를 하나로 정리하면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두 사람이 약속을 했는데 한 사람은 시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시간관념이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면 보통 시간관념이 부족한 사람이 시간 약속을 어긴다. 그러면 시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화가 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시간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간관념이 부족한 사람은 상대가 화를 내는 것이 또 못 마땅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늦을 수 있는 거지 그것까지고 뭐 그러냐? 는 식이다. 그것 역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시간관념이 철저한 사람이 어쩌다 시간에 늦으면 정말로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 적어도 변명이라도 한다. 그것은 자신도 시간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 생각을 제외한 모든 상황은 다 세상의 풍파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괴롭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뜻대로 된다면 그것은 절대로 세상의 풍파가 아니라 은혜고 행운이고 축복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과 다르게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떠 있는 조각배 같은 나의 인생에게는 다 풍파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배 안에서 평안히 주무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어떤 풍파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 그것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능력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문자로 성경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생각이 어떠해도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알려고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 성품과 의와 뜻으로 세상을 펼치고 창조하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것을 다 말씀하셨는데 다시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부족한 신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은 나의 생각을 제외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그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면,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의 말까지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쁜 것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냐?' 할 수 있는 오해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창조의 목적, 그리고 사람에게 두신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두신 통치의 일환이라고 봐야지 나를 괴롭게 하는 그 단편을 분리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것도 만드셨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과 자신이 생각할 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다 보니 그 모든 것이 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고, 세상이 잘못된 것이고, 그 모든 것을 세상의 풍파로 여기는 것이지, 하나님은 실수나 오류나 악함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마귀에 대한 생각이 대표적이다. 하나님이 마귀와 싸운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속된 말로 마귀와 싸울 군번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마귀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에 사용되는 것을 위하여 예비 되고 사용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져야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싸우고, 마귀와 싸우고 하는 그런 계급 낮은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이 옳다고 동의하는 것과는 다르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경륜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살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죽임당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그 어떤 것도 다 순종할 수 있는 분이셨다.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고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가져가려 하는데 그것을 내어주는 사람보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순종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은 세상의 풍파가 잠자는 것을 깨울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을 바꾸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이 만든 세상도 경영 못하는 신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정말로 성난 바다와 같은 곳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희망처럼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다. 만약 그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들이 세상을 바꾸려는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서 내려오거나, 천군천사들이 로마를 무찔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난 바다에서도 주무실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풍파를 이길 힘은 자기 안에 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내 생각과 다른 것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은 평안하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이다. 즉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고, 그런 믿음이 있으면 풍랑 이는 바다 같은 세상에서 평안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배는 거친 풍파 속에 살아가는 사람 자신이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도 있고, 또 한편에는 제자들처럼 세상이 자신의 생각처럼 되지 않아 무서워 떠는 마음이 사람 안에 늘 함께 있다. 그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세상을 볼 때는 평안하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없을 때는 불안하다. 그때는 예수님을 깨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고, 세상의 풍파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법으로.


사람들은 사람이 이 세상에 순종하고, 또한 이 바다 같은 세상에서 평안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했을 때 기이하게 여겼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예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그 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평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긴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자기가 해 보지 않은 것은 언제나 생소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세상을 이기고, 풍랑 이는 바다 같은 세상을 살지만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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