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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7:20 율법과 복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8. 13:34 Writer : 김홍덕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과 각각이 한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한국이나 여타 이스라엘이 아닌 나라에서 율법은 생소한 것이다. 기독교나 천주교나 다 율법의 시대로 알고 있는 구약 이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다음에 이스라엘 밖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십계명이나 레위기에 나오는 각종 규례들을 이해한다거나 특히 그것이 자신과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것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율법은 자신이 신앙을 가지기 이전 시대인 구약 성경 시대의 규례이고, 자신은 율법과 무관한 나라에서 신약 시대 이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다. 도올 김영옥 교수가 한번은 강의하면서 '한국 사람이 자기 역사도 모르면서 이스라엘 역사책 같은 성경을 공부한다.'며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정말로 무식한 소리이다. 그 사람이 성경을 얼마나 읽고, 또 얼마나 신학적 역량이 출중한지 몰라도, 그 사람은 심청전을 인신매매가 미화된 소설로 보는 사람처럼 성경을 보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을 시대적으로 구분해서 구약시대는 율법의 시대이고, 달력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신약의 시대라고 생각하는 신앙인들, 기독교인들, 바로 그들이 더 심각한 문제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이 없이는 복음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과정과 교리의 뿌리는 외면하고, 마치 답만 외워서 시험을 치는 사람처럼 신앙의 모양만 가지고 있는 그런 삶을 신앙의 삶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은 성경의 말씀대로 지키고, 어떤 것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서 지키는 것과 같이 변형하고 내용의 일부를 버려서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30대에 접어 들 무렵, 지금은 목사가 된 친구와 율법에 대하여 밤샘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주장은 왔다 갔다 했다. 예를 들어 십일조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수익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십일조로 내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안식일은 시대에 맞게 일요일에 지키는 것이 옳다고 했다. 안식일이나 십일조나 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다.


그래서 묻기를 '그렇다면 십일조는 있는 그대로 지키고, 안식일은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로 지킨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떤 기준에 의해서 안식일은 시대에 맞게 지키는 것으로 분류하고,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으로 분류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질문 이후에는 토론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았다. 대답이 빙빙 돌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옆에서 자던 친구들마저 일어나서는 목사가 된 친구에게, "그 구분점이나 이야기해라, 시끄러워 못자겠다."고 하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명확한 답은 없었다. 


율법과 복음은 하나의 목적으로 연결된 것이지 성경이 기록된 시대나, 그 내용이 구약에 있느냐 아니면 신약에 있느냐 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과 복음은 순서가 있다. 기록된 것으로 보면 율법이 먼저이고 다음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으로 보이지만 실제 순서는 그 반대이다. 복음이 먼저이고 율법이 다음이다. 이것이 한 사람 안에서 명확하게 되지 않으면 율법도 복음도 모르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고 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조상인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고 하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면, 율법과 복음의 관계와 역할을 아는 것이고, 생명을 아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생명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것을 아는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이고, 복음이 율법보다 먼저인가? 이것을 생각해보자. 미래형 자동차를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화석연료도 사용하지 않고, 운전자도 필요 없이 전자동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들기로 하고 오랜 연구 끝에 만들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여기서, 미래형 자동차가 먼저인가, 아니면 그런 자동차에 승차하는 사람 곧 그런 자동차를 만들어야겠다는 필요와 생각과 계획을 가졌던 사람이 먼저인가? 그건 당연히 계획을 가진 사람과 계획이 먼저인 것이다.


율법은 마치 자동차의 본체와 같은 것이다. 형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있기 전에 먼저 사람이 이동을 편리하고 빠르게 해야겠다는 의도와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목적과 의도가 자동차로 표현된 것이다. 우주로 가겠다는 계획과 꿈이 있었기에 우주선이 만들어지고 발사되어 우주로 가는 것이다. 우주로 가겠다는 것 그것이 당연히 먼저인 것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이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목적은 복음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이루어진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 그 사람의 상태가 바로 복음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말을 하면 복음이고, 그런 사람이 살아가면 복음의 삶이 되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최종적으로 목적하신 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존재가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와 나라가 되게 하고자 하심에 있다. 그것이 먼저 있었고, 그 먼저 된 뜻을 좇아서 천지를 만드시고 또 사람을 만드시고 그 아담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계획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표상이고,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것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인 것이다.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은 결국 그리스도가 나오게 하는 것에 있는 형식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율법의 어떤 것을 다 지켜 행하였다 해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즉 율법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율법보다 복음, 곧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먼저라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만 나오면 율법은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법인 것이다. 사람이기만 하면 말을 하고 도구를 사용하고,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이다. 원숭이가 숟가락으로 밥 먹는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똑똑한 개가 걸레질 한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에 하라고 명한 모든 것들은, 다시 말해서 성경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신 모든 말씀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금하려 하고, 못하게 하려고 아무리 노력하고 협박하고 핍박해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보여주는 모습을 다 기록했더니 성경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지켜 행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셨고, 예수님도 호리라도 남김없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행동으로 지키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을 지켜 행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의 말씀도 다 율법이다. 시대나 신구약 어디에 속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또 누가 말 했느냐?도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행함으로 지켜내려 하면 다 율법인 것이다.


반면에 그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목적과 또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전하시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이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생명과 같이 있어서 그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의 본성만 있으면 노력하지 않아도 삶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을 알고 성경을 그렇게 보면 구약도 아니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천지만물이 다 복음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삶은 율법이 완성된 삶이다. 먼저는 생명이 표현하는 행동은 그 생명에게 있어 온전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듯,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을 위하여, 그것을 목적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의 어떤 말씀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지키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나왔다는 것은 마치 우주선이 제대로 궤도에 올라갔다는 것이기에 율법의 모든 조항이 다 완성된 것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도 하고 반문도 하지만, 율법은 지키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생명이 그 안에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에 지켜야하느냐 안 지켜도 되느냐는 식의 접근은 그런 사고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율법을 행함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율법이 지향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율법이 없으면 복음에 이를 수 없다. 우주선에서 버려지는 1단계 로켓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듯, 율법이 없으면 복음은 없는 것이고, 또 율법의 완성은 복음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율법은 1단계 로켓을 버림같이 버려지지만, 궤도에 올라가는 목적 안에서 율법은 또 완성된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자신의 생명이 되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율법이 완성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삶은 참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또 도망 다니듯 해도 성경을 또한 율법을 다 지키고 이루고 있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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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7-20 율법의 완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7. 17:53 Writer : 김홍덕

어떤 물건, 어떤 이론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가진 가치관에 의하여 그것은 변형된다. 영화 <은교>에서 별이 아름답다고 하는 학생에게 교수는 "누가 자네에게 별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나?"라고 반문하면서 별은 그냥 별일 뿐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의미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보는 관점은 그래서 중요하다. 흔히들 사람들은 율법은 구약성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신약이나 구약이나 다 그 사람에게는 율법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바로 commandments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행동 강령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을 요구하는 명령이고, 법인 것이다. 그것은 그것에 맞는 행동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을 읽고 그것을 행동 강령으로 받아서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신약도 율법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구약 성경이라고 해도 복음과 같이 들릴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성경의 모든 말씀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그것이 한 사람 안에서 삶을 움직이는 생명의 본성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이 표현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성경의 처음과 끝까지 다 이룬 것이고 그 사람에게는 신약 구약성경에 무관하게 다 복음이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도덕을 공부하는 것은 도덕 시험을 잘 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통계학을 공부하는 것은 확률 계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을 잘하기 위한 것이다. 도덕이라는 과목의 의는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에 있고, 통계학의 의는 성공적인 의사결정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도덕적인 사람에게는 도덕시험이 필요 없고, 자신의 의사결정에 항상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통계학이 필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각각의 의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그것이 자신의 생명의 본성이 된 사람은 성경을 행동으로 지킬 이유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믿는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은 그 생명이 표현되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개가 짖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개라는 생명체는 원래 '멍멍' 짖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이것저것 중언부언 기도하는 것이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어 그리스도의 성품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그것 하나면 족한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것은 다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을 가지고 노력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 부자에게 늦게 얻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자신이 죽을 때 아들이 너무 어려서 자신의 재산을 다 빼앗길 것 같아서 그의 모든 재산을 충실한 하인 하나에게 다 주고, 아들이 성인이 되면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딱 하나만 가질 수 있게 유언을 남겼다. 성인이 된 아들은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종, 그 하나를 선택했다.(탈무드에서)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다. 이것을 믿으면서 생명의 법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생명의 법은 어떤 생명이기만 하면 그 생명의 본성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개가 '멍멍' 소리 내려노력하지 않고, 고양이가 '야옹'하려 애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 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의, 주제만 자기 안에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굳이 행동으로 지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살게 되는 생명의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성경은 지켜 행하려 노력하고, 실수할까 긴장하고, 잘못하면 지옥가고 벌 받을까 두려워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게가 앞으로 걸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늘 그리스도를 갈구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의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천하의 어떤 고급 통계도 결과에 순종하고 만족하는 사람보다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심청전을 아무리 문학적으로 잘 알아도 효자보다 못한 것이고, 도덕 시험을 평생 동안 100점 받은 사람보다 도덕적인 사람이 온전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에게도 율법이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것에 의문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내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서 거듭났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지키며 노력할 이유가 없다. 


그 생명대로 살면 그 삶이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보고 믿어서 자기 안에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있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그렇게 살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율법의 완성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슬람이나 유대교는 성경의 주제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 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아직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시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천주교나 기독교 안에 있다 해도,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내야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의 신앙은 이슬람이나 유대교와 큰 차이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때로 율법을 어기심으로 유대인들과 마찰을 일으키시면서 정작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지켜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순이 아니라 바로 이 생명의 법 때문이다. 율법에 대하여 생명의 법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반전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로마서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가 본성이 되는 사람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지 않고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로마서를 설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을 버리고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사실 이 행함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에 사용하는 말이다. 이는 육신이 숨 쉬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고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명으로 보시는 생명이 사람 안에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이지, 성경을 읽고 그것을 행동으로 규범으로 행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도 그 사람에게는 율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나아야 한다고 하셨다. <너희의 행동>이 아니다. 의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목적이다. 도덕을 배우는 목적은 배운 내용을 시험에서 잘 맞추기 위함이 아니라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도덕을 가르치는 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 할 수 있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의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 안에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행함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인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율법의 완성이신 것은 우리가 율법의 조문에서 해방되고 율법을 주신 의가 우리에게 이루어져서 온전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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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마태복음) 5:13-16 소금과 빛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26. 12:54 Writer : 김홍덕

◯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서 말씀하실 때 나아온 제자들을 일컬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곧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그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씀이다.


소금은 모든 요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소금이 없으면 맛을 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금은 그 짠맛으로 인해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한다. 그런데 소금이 짠 맛을 내기 위해서는 소금이 가진 형태가 없어져야 한다. 그것이 소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소금이 가진 하얀 결정체로서의 모양은 소금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소금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소금이 소금인 것은 소금이 가진 짠 맛 때문이다. 그 짠맛은 소금이 결정 상태로 있어서는 절대로 낼 수 없다. 녹아서 그 형태가 없어질 때 그 때 비로소 소금이 소금다워 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들의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삶이고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짠맛을 내지 못하면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소금이 짠맛은 없고 그 결정체인 모양만 가지고 있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는 없이 신앙의 형태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세상에서 형식은 녹아 없어지지만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이 육신의 삶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잘 아는 이야기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소금이 녹는 것과 같은 육신의 소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따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말씀하신 <착한 행실>과 연관이 있다. 소금이 녹아서 맛을 내는 것은 삶을 투자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비와 투자가 착한 행실이 되었을 때 소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착한 행실은 공통된 가치관이 아니다. 그러니까 같은 행동이라도 어떤 가치관에서 볼 때는 착한 행실이고 어떤 가치관으로 볼 때는 극악무도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살폭탄 테러는 시도하는 가치관에서 보면 순교지만, 당하는 쪽에서 보면 극악무도한 테러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착한 행실은 누구의 관점에서 볼 때 착한 행실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게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행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착하다고 여기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착한 행실로 여기시는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즉 그리스도와 같은 삶이라야 하나님이 보실 때 착한 행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밥 퍼주고 심부름 잘하는 그런 착한 행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그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소금의 맛인 것이다. 그 맛, 즉 소금이 녹아서 형태가 없어지듯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맛이고, 또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부패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밥 퍼주고, 심부름 잘하는 것을 착한 것이라 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맛으로 여기는 것, 즉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자신을 소비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삶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삶의 표본이시기에 그 삶을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를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소금이 가진 그 결정의 모양이 짠 맛을 가진 것이 아니듯, 사람이 보여주는 삶의 모양과 방법과 형태가 하나님 의의 본질이 아니다. 소금은 그 모양이 어떠해도 짠 맛을 내듯, 사람의 삶도 생긴 것이 어떻던, 어떤 행함으로 공로를 세우든 그런 것 때문에 짠맛이 나듯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기신 존재 목적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소금의 짠 성분인 염화나트륨과 같은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삶이 무미건조하고, 또 부패하는 이유가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포함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소금과 같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라는 맛을 찾기 원하시고,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부패하지 않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 또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등불을 감추지 않고 등경위에 둔다고 하셨다.(영어성경에서는 촛불을 감추지 않고 촛대에 꽂는다고 함) 이것은 복음이라는 것이 어떤 모양으로 전해지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소금과 같은 기능, 빛과 같은 본성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지는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 능동적이다.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사명감이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능동적 형태를 한정하는 말들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히 간과하거나 부족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의 근간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와 또 말씀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이야기 해 보자. 서울역에 가서 전하는 것은 너무 뻔한 것이라 빼 놓더라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너무 능동적인 열심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냥 길가는 사람, 하나님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 마구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택적으로 전하라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들으려 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복음을 듣고 싶고, 또 필요로 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보았고, 어떤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자신을 보고, 또 상관이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볼 때, 정말 저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려 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등불을 등경 위에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빛을 높이는 것이 빛이 높이 서서 복음을 능동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이 볼 때 저렇게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방향만 바꾸면 누구나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다. 피라미드의 꼭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낮은 땅, 사람들이 무시하는 그런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이건 겸손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거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서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기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애굽의 가치관이다. 그것이 인생의 의미를 두는 사람은 애굽의 종살이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은 그러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출애굽이고, 그것이 인간의 자리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 인간의 자리가 바로 나사렛이라는 천한 동네로 가는 것이다. 즉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천한 동네, 그리고 사람의 낮은 자리가 바로 인간의 자리라는 것을 알고 회복하는 것, 제 자리를 찾아 가는 것, 그것이 자리를 벗어난 죄에서 회개하는 것이다.


자리가 낮다고 하는 것은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야 성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볼 때 낮은 자리이지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 자리가 영광스럽고, 죽음 가운데서도 살려낼 정도로 존귀한 자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치관은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에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귀함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낮은 자리에서는 외칠 것이 없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렛과 갈릴리에서 사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있었기에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이니 병을 고치신 것이다. 이는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등불이 스스로 등경 위로 올라가듯 능동적인 성과를 내려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며 소란을 떠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는 말씀으로 무조건 전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그런 사람은 시미청전을 문학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사람이 때와 관계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내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라는 것이지, 시간 정해서 전도하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든 내라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능동적이고 주입식이 아니라, 보고 배울 것이 있게 하므로 교인들이 그렇게 살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NCIS라는 미드를 아주 좋아한다. 그 안에 주인공인 '깁스'라는 보스가 보여주는 모습이 그렇다. 극중에서 그는 부하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냥 보고 배우게 한다. 또 실수를 지적질도 하지 않는다. 알고 고칠 때까지 자신이 대신 수고한다. 바로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해서 그 미드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는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을 보고 그것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빛은 인식이라 했다. 즉 자신에게 무엇을 인식하게 하는 것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삶의 의미를 인식하게 되었다면 그 본이 된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빛, 자신에게 어떤 것을 인식하게 해서 어떤 세계를 알게 한 그 빛, 그 사람의 삶을 모든 집을 밝히듯이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고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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