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연관 지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잘 없다.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사람이 알고 있다면 그런 것에 대하여 분명히 이야기 해 나가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은 든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는 말씀을 하나의 말씀으로 하고 계신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도 하시는데, 이것은 교회공동체가 정말로 새겨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 그리고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관계,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삶의 목적이 된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사랑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온전함과 연관된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과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다른 종교의 사상과 세상의 학문의 기조에 편성된 흔적이 있으면 그것을 변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창조과학회와 같은 시도,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을 신앙의 타락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냥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이면 누구나 감동할 수 있고,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으면서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했고, 과학적인 이해 능력이 부족해도, 다른 사람이 볼 때 사람으로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사는데, 그 이유가 예수님 때문이면 되는 것이다. 그게 신앙의 전부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신앙의 가치를 대단하게 여긴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2,000년이라는 가마득한 옛날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대단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은 정말로 유일한 신이시고,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구원자이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 대단함은 우월한 자리에 서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은 정말로 대단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닌가? 그런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분이다.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것이고 대단한 것이고, 그것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것이지만, 그 대단함과 자부심은 정작 그것을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종이 되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을 섬기고, 그것을 모르면서 오히려 안다고 소리치며 알고 있는 나를 죄인 취급하는 것에 내어주기 위한 대단함이고 자부심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 모든 믿음과 자부심과 하나님의 영광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 동안 내내 기독교인들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이 정말로 놀라운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고,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타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영광을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온전하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놀라운 믿음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섬기고, 그들을 자신과 같은 자리로 부르기 위하여 그 모르는 사람들, 쉽게 죄인이라 규정하는 그 사람들에게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못 박은 백부장이 오히려 예수님의 그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그 사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복음을 전한다. 오늘도 길에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은 그렇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삶을 보여줌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이 없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가진 세상의 지식과 또한 신앙에 대한 가치관으로 나를 심판하고 규정하는 것에 나를 죄인으로 내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신앙을 가진 것이 하나의 '갑'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과 신앙이 부족하고 잘못되고 없는 것을 훈계하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온전하심도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아니다. 그런 것과 거리가 먼 것이고, 오히려 그것은 신앙이나 믿음이 없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원수가 되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을 기준삼아 세상과 사람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심판하고 판단하여 다른 사람을 그 기준에 따라 악한 것을 제하려 강압하고 스스로 정한 선한 것을 강요하는 그것이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의 모습과 가치관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원수 관계가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 내가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과 같이 나도 죄인이 되어 그들이 옳다는 것에 의해서 나는 죄인이 되어 심판을 받고 죽는 것 그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사람을 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또한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는 알고 돌아서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그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한 인생의 의미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한 사랑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고, 그렇게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바뀌는 가장 온전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어떤 것을 보고 자기 마음 안에서 바뀌어 나오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온전하게 바꾸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에서 밖으로 의가 표현되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의 법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의 가치를 갑의 위치에서 전하려 하는 것에 있어 크게 안타깝게 생각한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과 대적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쳐부수려 한다. 이건 신앙에 있어 엄청난 오류다. 그러나 이것은 만연한 것이다. 교회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크게 지은 것을 비판하면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목사가 실정법을 위한 한 것을 따지고 들면 마귀의 짓이라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신앙이 없으면 목회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


교회나 목사나 신앙에 대하여 도전하고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를 내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에게 자기 아들을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신앙 없이 믿음이나 목회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나를 내어주지 않고, 교회를 지키겠다고 그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원수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돌아가신 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원수들의 가치관에 나를 내어 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온전한 계획이기에 그렇게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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