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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3-14 좁은 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5. 16:16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좁은 문이라는 것,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역발상적 선택이나, 어떤 광고 카피처럼 남들이 다 "예"할 때 "아니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결과론적으로는 그런 모양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이라는 것은 문을 기준으로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기에 단순히 여러 가지 옵션 중에서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문은 공간적으로 보면 다른 두 공간을 분리하는 경계 중에서 두 공간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한 특정한 경계이다. 또한 문은 들어가는 것에 있어 아무나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즉 문이라는 것은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열쇠라고 한다.


물론 이 말씀에는 열쇠라는 말이나 열쇠가 필요하다는 언급은 없다. 하지만 좁은 문을 선택하는 마음이 바로 열쇠이다. 그 열쇠가 없으면 두 세계를 넘어서는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세계인 생명의 길로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았다. 그 때 남을 대접하는 것은 남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한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그러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대접하는 것은 천국의 문을 지나갈 수 있는 열쇠라는 말씀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하셨다. 큰 문,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큰 문으로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그 문은 멸망의 길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단지 크다는 것 그 하나의 이유로 멸망을 당하는 길일까? 그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큰 것을 선택하여 망한 사례가 있다.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롯이 그랬다. 그러나 가장 큰 선택은 역시 네피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로 삼아 네피림 곧 위대한 자를 낳았다는 것이다. 아들은 그 부모의 바램이고, 그 부모의 유전자가 형상화 된 것이다. 즉 네피림을 낳았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고 선택했다는 것이다. 즉 큰 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 멸망했다.


큰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문 너머에 있는 세계가 클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한 문이다. 즉 위대함을 좇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멸망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말씀하시는 큰 문은 사이즈가 큰 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크고 위대한 것을 좇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좁은 문은 위대함이 아니라 낮아지는 자리로 가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말에도 군자 대로행이라는 말이 있는데, 큰 곳으로 가는 것의 의미란 그런 것이고, 반대로 좁은 문으로 간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크지 않다고 고백하는 겸손한 마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 그 가난하고 멸시 받는 동네에서 사시고, 그것도 높다고 생각하셨는지,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자리인 사형수의 자리로 가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좁은 문이고, 이것이 바로 양의 문인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항상 위대함을 좇아간다. 문이라는 것이 다른 세계로의 입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큰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위대함을 좇아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에 거의 유전자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세상에서 크고 위대한 존재가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또한 그것이 위대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다. 양의 문이라는 것은 양의 본성, 그리고 양이 지나가는 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 예수님을 의미하는 양은 구속자로서 예수님을 예표 한다. 즉 다른 사람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성품이 양의 성품에 비유된 것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은 결국 예수님의 성품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라는 것이다.


즉 큰 문이 위대함을 좇는 문이라면 예수님의 문, 양의 문, 좁은 문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들어가는 문이고 좇아가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해지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좁은 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인은 의인으로 인정받기 원하고, 부자는 부자로 인정받기 원하며 높은 사람은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한다. 세상에서 부러운 사람이 되면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타락한 사람인 것은 결국 그 성공한 자리에서 베풀 듯이 복음을 전하려고 하게 되기 때문이다.


목사는 성경에 관해서 절대로 평신도에게 지려 하지 않는다. 부자는 노블리스 오브리제로서 주의 일을 감당하려 하고, 교수가 되면 그 지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 한다. 오죽하면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겠는가? 이런 모습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그것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좁은 문은 남들이 선택하지 않아서 좁은 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위대함을 좇아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기에 좁은 문이 된 것이다.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가려는 마음이 좁은 문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길이 좁겠는가?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마음이 작고 좁아서 좁은 문이다.


문은 어떤 두 세계를 넘어가는 통로다. 그리고 문이 있다는 것은 그 문을 지나가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양의 문은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고, 큰 문은 위대함을 좇아가는 존재가 들어가는 문이다. 좁은 문은 양의 문이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의 문이다. 그 문은 위대함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볼 때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좁은 문이지 사람이 들어가기 좁은 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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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7-12 황금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4. 11:34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7장 12절은 황금률이라 불린다. 이는 성경뿐 아니라 논어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것을 황금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윤리적 양식으로서 이 말씀을 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행위의 근본 성품이 있으면 된다는 것을 늘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것을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대접한다는 것은 물 한 그릇 밥 한 그릇 대접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존재로서 대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어떤 존재로 대하느냐만 정해지면 대접 받는 모든 행위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고, 바른 대접을 하게 되어 있다. 상대를 대통령이라고 인정하면 그것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남을 내가 어떤 존재로 여기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내가 남을 어떤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결국 나도 그와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스포츠에서도 체급이라는 것이 있는데, 상대를 나의 상대로 인정한다는 것은 나도 그와 같은 체급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좀 전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고 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답 했을 대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도다." 하셨다. 이것이 바로 대접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인정했을 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접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면 그에 따른 대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대접이라는 것은 상대를 어떤 사람으로 인정하느냐에 종속된 것이지, 대접하는 것 그 하나가 독립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사람을 보는 관점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로 보면, 그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또한 그러한 목적 아래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에 맞게 대접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내가 하나님과 같은 관점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므로 당연히 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존재이고 또한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네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다른 사람도 그런 존재로 대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대접은 그에 종속된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 사람을 보는 관점은 절대적인 것이다. 사람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시고 가지셨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타락하기 전의 세계에 사는 것이고, 사람을 부끄럽고 감출 것이 많은 연약한 존재로 보는 사람은 타락한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는지에 대한 기준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관점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생명을 가져야만 가능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남을 어떻게 보고 또한 그 보는 관점에 따라 대접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 '뭐 눈에는 뭐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황금률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에 이어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신 말씀에 이어서 이 말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하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우리 육신을 가진 사람의 인생의 목적이자 내용을 구하라는 말씀이고, 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휘발유은 휘발유로 동력을 발생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졌기에 휘발유가 가장 좋은 것이듯,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 지어졌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는 생명인 그리스도의 성품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인생의 존재 목적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는 것을 구하고, 또한 다른 사람도 그러한 목적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람을 그런 존재로 대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한다는 것이 바로 구한 것을 주신 것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기에 우리가 남을 그렇게 대접한 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을 보다보니 사바나에 떠났던 코끼리가 돌아온다는 것은 곧 우기가 올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우기가 온다는 것과 코끼리가 돌아오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기가 오기 때문에 코끼리가 온 것이기도 하고, 또한 코끼리 안에 있는 본성이 우기가 오는 것을 알아서 회귀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와 같다. 남을 어떻게 대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런 대접을 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남을 대접한다는 것은 이미 내가 어떤 대접을 받을 사람인지가 정해졌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관점이 있다. 성선설도 성악설도 또한 여러 철학적 관점들도 있다. 그리고 성경에도 사람을 보는 관점이 있다. 그것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보시는 관점과, 다른 하나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사람을 보는 관점 그것뿐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보는 관점은 다른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특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기대하시고 그렇게 이끄신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에 진노하시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연약하고 부정한 것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든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보는 것을 악한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심에 격분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사람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책망하셨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권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죄를 사하는 것이 곧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서 보는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며, 그런 관점을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이미 남을 대접하는 대로 대접을 받는, 더 정확히는 그런 존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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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7-12 구하라 주실 것이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4. 08:01 Writer : 김홍덕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마 7:7)


이 말씀은 기도의 기초에 관한 말씀이기도 하고, 심지어 기독교 신앙 밖에서도 어떤 꿈과 희망에 대한 노력을 독려하고 격려하는 말로 사용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목적어가 없다. 그러니까 무엇을 구하라는 것인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이라도 다 구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설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냥 아무거나 구하면 하나님께서 다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에 맞는 것을 구해야 주신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는데, 그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전지전능하시니 뭐든지 구하기만 하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그것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다 주실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르치신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벗어나서 이 말씀들을 맘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특히 말씀 중에 목적어가 없다고 자기 맘대로 아무 것이나 넣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속적으로 경계하라고 하시는 외식하는 것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외식이라는 것이 내용이 없는 형식, 하나님 의는 심령 안에 없으면서 의에서 비롯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은 다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면서 악한 사람도 그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는 말씀을 이어서 하시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가 볼 때 좋은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부모라도 자식이 뭐가 달라고 할 때, 그것이 아버지가 볼 때 좋다고 생각하지 않고 위험하고 아들을 악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도 아들에게 그것을 줄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사람에게 좋은 것이 아닌 것을 구한다고 주실 리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 의는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 곧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모든 인간이 구해야할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으로 사람에게 증거가 되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먼저 육신에 관한 것을 구하는 삶의 포인터가 육신의 삶에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모든 것을 육신의 문제에 두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인생의 숙제요 의미요 목적인양 살아가기 때문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니 육신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6장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시리라고 하는 말씀을 어떤 이들은 육신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하나님이 들어주시기 위한 전초과정이나 조건이나 열쇠쯤으로 생각한다. 마치 금도끼 은도끼의 착한 나무꾼이 아니라 금도끼 은도끼를 목적으로 신령에게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게 통할 리가 없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것이 있으면, 아니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안에 있으면 그것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인생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죽은 사람도 살리시고, 또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시기 위함이라면 한 민족을 멸하는 것, 아니 홍수로 세상을 다 쓸어버리시는 것이라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육신의 필요를 주시는 목적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본질이라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은 것을 보고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아브라함도 엄청난 거부였고, 다윗왕도 그랬으며, 솔로몬은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다. 어디 그 뿐인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 기적을 일으켰는가?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되고, 또 신비한 능력을 행하며, 또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축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 같이 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순종을 감당한 사람이었기에 그것에 필요한 것을 주신 것이다. 즉 먼저 하나님의 의와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목적, 또한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의 목적이 먼저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외면한 체 그 결과인 육신의 필요를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무처럼 생각해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릇으로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순종하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를 청하고, 그 목적 앞에 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고 그것이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제사보다 나은 순종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기에 무엇이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를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피조물이 스스로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좋은지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에게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아버지가 더 잘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왜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면서 아무거나, 육신의 필요에 간절함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오히려 이 육신은 죽을 만하면 죽는 것이 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일 때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하면 주신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의 목적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나라다.


하나님의 의, 사람을 향하신 오직 하나의 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구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 형상이라는 것이다. 예수 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그것이 있으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육신의 필요는 다 들어 주실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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