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8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어 행하는 사람, 율법이 완성된 사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그 심령 안에 그 생명에서 비롯된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문자로 읽고, 또 행동 강령처럼 교리나 헌법이나 규칙으로 만들어 체크리스트처럼 실천해가는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삶을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겠는가?' 싶을 수 있다. 또 '정말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만 있으면 성경을 다 지키며 살 수 있다는 말이냐?' 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네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물으니 답하기를 '모든 노래 가사가 이해가 다 된다'라고.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성경도 그 말씀이 자기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생수의 강이 안에 흘러넘칠 것이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누가 기록했는지,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유념해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했다.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모두 자신이 그 기록한 내용을 경험하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안에 있고,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있어서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말씀이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랬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 또한 알았기에 사람들이 읽도록 기록하고 또한 사람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게 될 것입니다."하는 것은 예언이지만, 자기 안에 그런 경험이 있고, 그렇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 증거로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은 말씀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기록하고 전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듣고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보는 아주 중요한 관점이고, 믿음에 있어 절대적인 관점이다. 즉 성경을 기록하고 전한 사람들의 말을 읽고 들어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나도 할 수 있다고, 아니 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능치 못함이 없다니까 암 환자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성경 말씀을 능히 이루고, 행하며 살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다 행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반문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미안하지만 그건 바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기적을 따라했을 때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에 있지 기적을 따라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살고,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나, 주일날 자신을 위하여 돈을 쓰지 않는 것을 평생 지키는 것이나, 평생 욕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인간이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이 평생을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실리 없다. 그건 하나님뿐 아니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럴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성경대로 사는 것은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보고 '참 저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계심을 알겠다.'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나 밥 퍼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밥 퍼주는 사람을 보고 칭찬은 해도 하나님을 알고 싶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 다닌다고 티내고 교회 이름으로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 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나도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일반 관념과 다른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또한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성경대로 살고 말씀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욕하지 않고 살 수 없고, 음란한 생각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면 화가 나는 존재라는 것을 언제나 인정하고, 또한 자신이 사람이라 그럴 수밖에 없음 같이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사는 것에서 시작하는 삶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실존을 바로 인식한 사람은 사람의 능력과 한계를 바로 인정하게 되고, 그렇게 연약한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바로 알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성경을 행위로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자신이 인간이라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으로 남이 나를 십자가로 끌고 가듯 죄인 취급하고 무시하는 것을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듯 감추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되면 율법의 목적이 완성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의 실존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몸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식과 가치관이 바뀐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계가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시작된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태초가 시작된 시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시작되면 온전한 아담이 창조되는 과정이 그 안에서 시작된다. 한 알의 씨가 땅에 심겨져지고 싹이 나서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듯.


그리고 그렇게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고 나면 이전에 생각했던 위대함을 좇아 하나님 가까이 가려는 모든 생각은 다 버린다. 사람의 연약한 육신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짚을 넣고 구워서 벽돌을 만들 듯 인생을 업그레이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실 때 심히 좋았던 모습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상에 절어 있던 사람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 오게 되고, 운전할 때 옆에 가는 사람보다 내가 빨리 가야하는 이유가 자기 안에서 없어지기에 난폭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기적이고, 그것이 성령의 감동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을 사람을 보면 십자가에 달린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 때 그 사람도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품성이며, 산상수훈의 주제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사람의 정체성이고, 사람의 존재 이유고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다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생명의 세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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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란 말 그대로 하면 '먼저 아는(안)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 사이에 들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연관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한 "산상수훈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는 말씀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사이에는 주기도문도 있고 또 유명한 말씀들이 있는데, 이 말씀들을 한번 요약해 본다면 사람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이 애통하여 그것을 구하려는 자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사람 지을 때 주신 인생의 목적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채워지면 그 삶이 반석 위에 지은 것과 같을 것이라는 말씀이라 요약할 수 있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 규범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본질이고 정체성이고, 사람의 모든 삶과 행동의 근간이다. 마치 생명의 모든 본성의 유전자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이 그 가진 본성을 나타내는데 바람이며 홍 수 같은 비가 방해가 될 리가 없는 것이다. 고양이가 홍수 난다고 개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그 집이 무너짐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삶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이 표현되는 사람이 아니라, 선지자 노릇,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척하는 사람은 삶의 상황이 변하면 그 신앙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노릇을 한다는 것은 그 행동과 신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개가 고양이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외식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자, 곧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이 그 안에 없는데 그 모양만 흉내 내듯 노릇을 하는 자는 삶의 상황이 변하면 그 집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아주 분명한 말씀이지만 특히나 신학적 관점에 있어 신앙이나 성경의 해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같은 것이다. 시대가 달라진다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달라진다면 그것이 바로 노릇인 것이다.


생명이란 환경이 바뀐다고 바뀌지 않는다. 개가 바다에 가면 죽을 수는 있지만 물고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삶, 곧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형편이 달라진다고 다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무너지게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는 것은 결국 선지자 노릇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주여, 주여"하며 아무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한다고 주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 한다. 이단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하고, 특히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며 신앙생활 잘 해야 한다고 할 때도 많이 사용한다. 그건 적절한 사용이지만,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면, 선지자가 선지자 노릇 하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지는 기적 중에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본성이 그 사람에게 있어야 주님께서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면 어지간하면 대통령이 누군지는 안다. 하지만 그게 대통령이 자신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아니 내가 대통령을 안다고 대통령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그와 같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예수님께서 우리가 가지기 원하셨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삶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게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척, 곧 선지자 노릇하는 것에 대하여 열매로 나무를 아는 것에 비하여 설명하신 것이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아 그 뿌리를 찍어버린다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것이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양의 탈을 쓴 이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외식하는 자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같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 사도의 말씀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된 것이 만물이고, 그 생명이 표현될 때 하나님이 표현되는 것이다. 그 생명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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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5-29 거짓 선지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16. 12:2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확실성이 높은 일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도 크로노스의 시작으로 볼 때 2,000년도 넘은 옛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뭔가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객관적 실체가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이곳저곳에서 '이것이 바른 신앙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물론 이 블로그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이런 불확실성을 종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 자신 안에 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주시는 물, 곧 말씀을 마시는 자는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것이라고 하심이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있으면 스스로가 속에서부터 말씀이 나오고 믿음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될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결국은 사람은 자신이 인정할 때 그것이 진리나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아무리 보도를 해도 사람들은 다 자기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그렇다는 것은 아마 지금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인터넷으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생중계를 해도 자기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믿기 싫은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고, 또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겠지만 그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이것이 주의 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 안에 생수가 흘러넘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통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사람은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결국 신앙이라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한 사람 안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사람은 우주 아니 인공위성에서 내려만 봐도 보이지도 않는 작은 존재지만 그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온 우주를 그 안에 넣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 사람이다. 사람 안에는 어떤 것이라도 넣을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한 사람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이 표현되며 사는 존재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아주 놀라운 것이다. 비행기만 타고 올라가도 보이지도 않는 작은 존재 안에 온 우주를 담을 수 있고, 자기가 만난 사람과 지나온 세월의 모든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이것은 저장 용량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함과 더불어 사람이라는 존재가 왜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포인트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은 그릇이다. 그릇이라고 하니 우리가 생활 속에서 접하는 음식 같은 것을 담는 것으로 유추하지만 실상은 크기나 위대함이나 형태에 관계없이 어떤 것이라도 담을 수 있는 존재이다. 온 우주라도 담을 수 있다. 사람 속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아주 짧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여럿 있다.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사람이 질 그릇 같다는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이고, 예수님은 사람이 그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산상수훈의 많은 말씀이 연관되어 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에 접어들어서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언급하신다. 성경이 말하는 거짓을 총칭하면 안과 밖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거짓이 아니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 속에 거짓말하는 것이 들어 있으니 그 입과 몸이 거짓을 행하는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존재는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경이 말하는 거짓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그렇다.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수식하신 말씀들을 보면 가장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외식>이다. 속에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없는데 행위만 율법을 지키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였다. 그들이 ㅈ키려 하고 또 다른 사람이 지키지 못한다고 심판하고 정죄한 율법의 모든 관습과 행위가 본질적인 생명과 의는 없이 노릇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짓 선지자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를 말씀하실 때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속에 이리가 있다면 옷이 아무리 양이라도 결국은 이리의 본성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온 우주를 그 안에 품을 수 있는 사람의 본성이고 능력이다. 즉 마음 안에 있는 것은 결국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이 가진 유전자는 결국 그것에 의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 나쁜 나무를 말씀하심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죽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금하게 할 수 없고, 사람 안에 이리와 같은 것이 있으면 노릇은 할 수 있어도 그 또한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이리라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양을 노략질하는 것은 이리라서가 아니라 양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겉과 속이 다른 거짓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리 모습을 하고 있으면 그래도 경계라도 할 수 있지만 양의 탈을 쓰고 있으면 그건 구분이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결국 나무가 그 생명에 맞는 열매를 내듯 사람은 그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는 다른 것이 거짓 선지자가 아니다. 자기 안에 가르치는 것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지식으로나 또한 행위에 대한 정의와 방법만으로 가르치면 그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인 것이다. 누가 목사를 선지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 자천타천으로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 할지라도 만약 이 말씀의 본질, 곧 의와 생명 없이 신학적 관점, 그리고 성경에 대한 객관적 고증에 대한 지식, 히브리어, 헬라어에 대한 지식 그리고 신앙생활의 방법론 밖에 없다면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인 것이다.


생명은 생명 그대로 전해진다. 사과 씨는 다시 사과나무가 된다. 사과 씨가 사과나무가 되는데 어떤 과학이나 객관적 고증이나 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과 씨가 사과나무가 되는 것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그러니까 과학이나 객관적 학문이나 방법은 본질에서 비롯되고 종속된 것인데, 오히려 그 형식으로 본질을 유도하려는 것은 땅의 것으로 하늘을 바꾸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다른 사람에게 그 씨를 옮겨 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면 족하고 사실 그것뿐이다. 그러면 천부께서 다 기르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사람 안에서 싹이 나고 다시 그 열매를 내는데 신학 같은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다. 말씀에 생명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그냥 그 생명이 열매를 내는 것이다.


이라가 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것이 거짓 선지자라는 것은 생명은 없이 종교적인 형식만 양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외식이고, 그것이 거짓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정직하기라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생명이 싹트는 것이다. 그것이 고백이고 그것이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 선지자는 노략질을 한다고 하셨는데, 그 노략질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이다. 인생을 노략질 한다는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이라는 것이 바로 도적질 당한 것이고, 노략 당한 것이다. 이 인생이란 원래 그 안에 있어야 할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어 그 생명으로 비롯된 것을 표현하며 살아야 하는데, 내용은 없고 형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만 노력하고 애쓰는 외식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야 말로 이리가 노리는 최대의 노략질인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그 안에 담도록 지어졌다 하신다. 그것만 사람 안에 있으면 사람은 온전해진다. 있어야 할 내용이 있고, 육신을 가진 인생이라는 형식이 있으면, 그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되는 것을 금할 법이 없는 것이다. 죽일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신앙생활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생명체가 그 유전자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지어진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온전히 있으면 수고하지 않아도 되고, 종교적 규례를 지키려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아무리 가만히 있으려 해도 늘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고 그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생명이 되면 그 생명대로 살게 된다. 그게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용과 형식이 같은 것이고, 그것이 외식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양이 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이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 발견해야할 우리의 정체성이고 신앙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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