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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들이 귀신들려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는 초인적인 일을 보고서 그것은 귀신이라는 초인적인 존재가 개입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귀신 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것,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현상을 보고서 그 안에 있는 내용을 외면하는 외식 가운데서 그것을 귀신의 왕의 힘을 빌어서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성령의 역사로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답을 하시고, 바리새인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일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사건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령의 훼방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내셔서 육신을 가진 이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다는 것이 바로 귀신들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회복되는 일인데, 그것을 보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보고 들을 때 회복이 되도록 성령이 역사하실 여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 못하는 것은 귀신 들린 것과 같다. 머리가 주인이 없이 세상에 빼앗긴 것이나, 사람이 자기 생각이 아니라 귀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이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상실하고 귀신 들린 자와 같이 세상의 것에 정신이 빼앗겨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것이 회복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라고 하는데서야 어떻게 죄를 사함 받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법으로 주신 것이다. 그 방법은 여러 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지으실 때 목적이 그거 하나였기 때문이다.


성령의 훼방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육신을 가진 인생, 더하거나 가공하거나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위대해지지 않은 연약한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가장 보기 좋다는 것을 알아서 그 삶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하듯이 이 연약한 육신으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고, 이 인생에 세상의 성공을 더하고, 교회에 더 드릴 수 있는 재물이 있으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방언하면 더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처럼 인생의 한계를 부인하고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가 바로 성령의 훼방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 안에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우리의 이 육신 그대로를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이 육신의 삶을 갈고 닦아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래 사람이 적어도 저 정도는 되어야 따라하고 싶지!'라는 자리에 이르러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없을 것 같지만,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 것과,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장로가 되는 것과, 목사를 청빙함에 있어 좋은 스펙을 요구하는 것이 다 그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과 반대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적어도 사람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하는 기준을 가진 자들 앞에서 그 기준에 미달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신데, 그것과 반대로 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목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목사든 아니든 상관없이 사람의 삶을 굳이 훼방하지 않기 때문에 목사를 훼방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목사가 교회에 집행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성령 훼방은 아니다. 정말로 웃기는 것은 다툼이 있는 교회마다 하나같이 다투는 상대가 성령을 훼방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 훼방을 논하기 전에 성령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한 것은 초라한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성령이 하신 것이라고 본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듯 오늘날도 '그래도 사람이 적어도 이건 해야지!'하는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기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 같이 세상의 임금들이 요구하는 것이고, 흙을 굽듯이 사람이 가진 것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생각과 가치관과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 안에서는 성령이 역사하실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서 죄인이 되고 실패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보이게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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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이후에 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되면 바알세불이 스스로 분쟁하는 것과 같으니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보면 간과할만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상황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귀신 들른 자를 고치셨는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보고 바알세불 곧 귀신의 왕의 힘을 빌어서 고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 상황이 바리새인이 바알세불의 힘으로 그런다고 주관적으로 보듯이 이 일이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8)

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일을 볼 때 예수님과 같이 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고, 그렇지 않고 예수님과 그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자는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고 바알세불의 힘으로 그런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많은 경우, 그래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가지고 교회에 공간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함께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사고방식은 진정한 이단적 사고방식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행간을 읽듯, 그 의미를 알려고 해야 하는데 이런 말씀을 두고서 공간적으로 또 같은 조직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외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공간적으로 조직적으로 또 어떤 조건이 달라도 같은 의에서 나오는 가치관과 안목과 생각을 가지고 보면 인종이나 삶의 질이나 혈통이 아무리 달라도 다 같게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것으로 보는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나라는 의에 의하여 세워진다.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또 그런 대 집합에서 파생된 세부적인 의에 기초를 두고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간다고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삶의 모양이 어떠해도 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성령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다. 그렇지만 항상 모호하다. 일단 영이시기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하지만 성령은 에너지고 감동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여기고, 또한 자신도 그런 삶이 살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구조의 법은, 영이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의가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의는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형식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나타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고 또한 질그릇이며, 하나님의 말씀 곧 의가 심기는 땅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처음 온전히 표현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에게 온전히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예수님을 통하여 제대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았고 또 살고 살게 될 모든 사람과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 곧 하나님의 의가 그 삶으로 표현되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표현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볼 때, '저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구나!' 깨닫게 되고, 또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거면 그냥 하늘에서 말씀만으로 다 하시면 되지 굳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깨달음, 그 감동 그것이 있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이 자신이 삶이 되는 것을 알게 하는 능력을 보이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일하심이다.


그런 성령의 능력은 사람이 죄를 사함 받는 유일한 길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이 외에는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보고, 또한 예수님의 삶을 보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사람인 자신에게 주신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아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구원 받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일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고, 예수님의 삶을 보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보고서 자신도 그렇게 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신데, 이 성령의 일을 훼방하는데 어떻게 죄 사함이 있을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성령이 감동하시면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심겨져서 이제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또한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일을 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삶을 보고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할 방법은 없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의 방법을 방해하는데서야 구원을 얻을 방법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을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나 심지어 목사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공간적으로 조직적으로 함께 하는 것과 교회가 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적으로 말하는 것들은 성령도 하나님의 의도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생각과 말이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 유일한 방법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육신을 가진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지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 그것뿐이기에 그것을 방해하면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려 하고, 피라미드가 있는 애굽과 같고 풍랑 이는 바다 같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오히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여주신 것을 보고도 성령의 감동 곧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자신의 일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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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고는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 이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송사 곧 책잡으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는지 시험하듯이 질문을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건져내는데 사람이 양보다 귀하다고 하시면서 그 병든 손을 고치셨다.


이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에 대하여 의논을 했다고 한다. 사실 출애굽기 31장에 나오는 말씀에는 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양을 구하는 것은 엄연히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용인하는 해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양도 구하는데 사람이랴?'는 반문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안식일에 대하여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은 여러 신학적인 고증이 있는 내용으로 알고 있음.) 하지만 단순히 안식일에 양을 구하는 것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시비를 거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외면하고서 그것을 지키려는 어떤 노력도 사실은 다 자의적인 해석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모르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치 해적이 자기들끼리의 치안 유지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자체적인 원칙을 만들어 다들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해적은 해적이라는 신분으로 숨 쉬는 것 그것 자체가 위법인데 그 안에서 법을 아무리 잘 지켜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상태에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되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안식하는 날이 되도록 하나님이 자신을 볼 때 안식하는 마음이 드는 상태가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질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안식하고 만족하시는 사람의 상태는 손이 마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손이 온전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만족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은 육신의 손을 한정하는 것으로 보면 그것도 유대인의 시각과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성전이다. 성전이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하는 집과 같은 곳이라는 의미이다. 그 성전에 손 마른 사람 곧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안식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손 마른 사람의 손이 오른손이라고 상세히 말씀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의로운 손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표현하심에 있어 하나님의 왼손으로라는 표현은 없다. 언제나 의로운 오른손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오른손은 의를 표현하는 손이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오른손으로 하는 것이 의롭다거나, 선하게 여기는 것을 오른손으로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밥은 오른손으로 먹고 화장실에서는 왼손을 사용하는 것이 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왼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의로운 오른손이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오른손, 왼손의 일을 구분하라고 하시거나, 오른손으로 하는 일만 의롭게 여기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나가다보니 사람들이 외식하듯, 즉 내용은 모르고 형식만 지키려 하는 것이 삶의 저변에 폭넓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들이 각종 미신과 징크스와 같은 것을 낳는다. 그런 모든 생각들이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시고, 안식일에 양을 구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지금도 다 해당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손은 사람이 가진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사람의 신체이다. 손과 발이라는 것은 사람의 행동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히신 것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의 행위나 행동으로 죄인 된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손이 말랐다는 것은 행동이 말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손이 말랐다는 것은 손으로 표현할 의가 말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손에 공급해줄 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에 의를 표현할 행동이 메말랐다는 말씀인 것이다. 한마디로 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상태가 바로 손 마른 자와 같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이 성전에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성전에 하나님의 의가 없어서 표현할 것이 없어 메마른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따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많은 교회에서 주일날 돈 쓰고 일하는 문제에 대하여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은 다 손 마른 사람의 상태와 그 신앙 상태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그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오른손 마른 자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것이 없는 사람이고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안식일의 목적도 의미도 모르니까 그런 것을 고민하고 또 나름 신학적인 견해라며 가르치기도 하지만 정작 가르치는대로 자신도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어떤 날을 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면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그런 상태가 되라는 말씀이다. 즉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성품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은 사람으로서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식하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창조의 과정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시고 나니 하나님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으셔서 안식하신 것이다. 프로스포츠 리그에서 우승을 했는데 그때는 쉴 뿐 더 이상 일(경기)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향한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또 안식에 대하여 정확한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토요일인지 주일인지, 아니면 그날 어떤 행동까지 가능한지를 따진다는 것은 다 성전에 있는 오른손 마른 사람과 같을 뿐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가 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오른손 마른 자가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듯, 우리도 그렇게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의가 없어 행동이 마른 사람의 회복,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안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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