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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사는 동안 의롭게 살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뭐 이런 저력 형용사절을 붙일 수 있겠지만 결론은 거의 그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가진 천국의 개념과, 천국과 연관된 신앙의 목적이 보통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 신앙이라는 것의 골격의 메커니즘은 <생명>이다. 즉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생명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모양과 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의 본질, 요즘 말로 DNA가 있으면 그 생명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이 다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생명은 본성이 안에 있어서 그것이 밖으로 표현되고, 가공된 것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만들어 들어간다. 물론 안에서 밖으로 만드는 것도 있지만, 안에서 없던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단순한 구조로 정리를 한다면 아마 <내용과 형식>이라는 표현도 가능할 것이다. 철학적으로는 <존재냐? 소유냐?>에 대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의 유전자라는 내용이 생명의 육체와 본성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이고, 가공된 것은 형식을 만들어서 내용의 의미를 대체하거나 의미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알고 보면 성경은 정말로 모든 것을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조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을 조금 더 고상하게 말하면 <본질과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본질이고 본체이시나 형상이 없으신 하나님이 그 존재를, 능력과 성품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두고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것을 설명하는데 세상의 것이 진화하고 발전해서 또 다른 세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하셨고, 아버지의 의지라는 본질 없이 아들을 낳은 롯의 두 딸의 아들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고, 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창조라는 것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듯 하는 것이 아니라,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과 세상을 이렇게 볼 수 있느냐 아니냐는 신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어쩌면 이 관점 하나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일 수 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LOGOS인데 이 로고스는 계획되고 계산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Lego 장난감도 같은 어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가 육신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아담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그 형상이 바로 image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이미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연상되고 생각나게 하는 그 이미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법을 알면 왜 예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인지, 왜 예수님께서 아담에 비유되었는지, 또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지, 또한 왜 외식하는 것이 옳지 못한지와 무엇이 외식인지, 또 예수님의 세 번째 시험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약속(의와 본질)을 받은 믿음과 증거(표현된 형식)를 받은 믿음이 무엇인지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하고도 중요한 안목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천국은 분명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본질이 있고 그 표현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동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본질이 자동차가 되었고, 시간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시계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은 다 내용이 있고, 그 본질과 목적이라는 내용이 표현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있고, 음양이 있고, 밤과 낮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라는 형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본질도 있는 것이다. 아니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이 이 법에 의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이 법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이 육신을 가진 삶이 부끄러워하거나 더 단련해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의라는 인생의 본질이 표현되는 온전한 표현 양식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마태복음 13장 44절 한 절에 나오는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가 그것이다. 천국이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밭이다. 그리고 밭에 감추인 보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다. 그러니까 밭에 보화가 감춰져 있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라는 보화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밭과 같은 사람,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을 밭을 사들 하나님께서 자기의 세계 안으로 들이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비유의 말씀이다.


천국은 죽어야만 가는 나라가 아니다. 사실 죽어서 천국에 가려면 살 동안 이미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한다. 프로야구 선수로 훈련하고 등록된 일이 없는 사람이 꿈의 무대인 1군에서 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살 동안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밭과 같이 흙으로 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라는 보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물이 있으면 밭을 산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인생이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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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31-58 천국은 마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31. 13:10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13장은 <비유장>이라고 한다. 한 장의 모든 말씀이 다 비유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13장은 비유장이라고 하기 보다는 천국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비유가 다 천국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한다. 굳이 나라가 아니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 있는 상황만 되어도 천국을 운운한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보면 죽어서 가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천국이나 극락이나 다 그런 개념이다. 그리고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 살 동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공적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이 땅에 살 동안 쌓는 공적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라고 생각하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다. 아담이 만들어질 때 아담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이라 할 수 있는 에덴, 곧 만족의 동산에 들어가는데 어떤 공적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기독교 신앙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알고 보면 세상에 기여하고 관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식하는 존재다. 사람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지만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이용하여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든다거나 그 인과관계를 밝히는 범주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돛단배 안에서 부채로 바름을 일으키는 것과 같아서, 사람이 스스로를 존재토록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사람도 창조가 되었든 진화가 되었든 이루어지거나 만들어졌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에 신앙의 근간이 있기도 하다.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팽배하지만, 사실 신앙은 인식이다. 인간이라는 삶이 정말로 100%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인데, 그 주어진 것 안에서 어떤 것도 다 주어짐 안에 있는 것일 뿐, 창조나 기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봤자, 세상을 만든 것은 아닐 뿐이다. 엔진 안에서 수많은 폭발이라는 변화가 일어나고 차가 달리고 기계가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창조가 아닌 것과 같다. 어차피 엔진이 스스로를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이라는 것도 결국은 인식이다. 월드컵 결승전에 오른 두 나라의 국민들에게 결승전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동일한 현상을 보고 천국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지옥이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천국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흔히 말하는 공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어야 죽어서든 언제든 천국에 가는 것이다.


요즘은 구글어스나 각종 포털에서 지도 뿐 아니라 도로의 사진까지 다 보여주기 때문에 낯선 곳에 가기 전에 그 동네 사진이라도 보고 가면 도착 했을 때 '여기가 맞나?'하는 의심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예전에 그런 것이 없을 때는 주소대로, 또 알려주는 대로 잘 도착해서도 가본 기억이 없다면, 도착한 곳이 그 장소가 맞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사람이 가보지 않은 곳은 잘 모른다. 천국도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이 알고 생각한 하나님의 나라가 다르면 대책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적으로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시는데 열심히 공로를 쌓고 죽었는데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건 다시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바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살 동안, "이것이 바로 천국이구나!"하는 인식이 없다면 죽어서 어디에 데려다 놓은들 천국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어쩌면 그 황망함이 지옥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물론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성경을 제대로 봤다면 이 땅에서 쌓은 업적으로 가는 나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죽은 거지 나사로가 거지 주제에 뭘 할 수 있었겠는가? 에덴동산에 하나님이 데려간 아담이 뭘 한 게 있어서 그 공로로 에덴동산에 들어갔단 말인가? 십일조? 그것도 천국에 상급을 외상처럼 적금 들어 놓겠다는 것은 아니다.


천국은 이 땅에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께서 다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는 그 때를 한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것만이 예수님의 진정한 재림이라면 지금까지 열심히 하나님을 믿어온 사람들은 다 프롤로그에 불과하다. 그냥 서론을 위한 배경을 산 사람이라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육신으로 살 동안 예수님의 재림을 눈으로 보지 못한다면 그렇다.


하지만 예수님 재림의 본질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가 명확해지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재림이다. 사람은 언제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흙으로 만들어진 땅과 같은 존재이기에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심겨서 그것이 생명이 되는 것이 진정한 재림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심령 안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사람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밝아진 상태가 바로 진정한 재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씨를 가지고 비유를 하신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은 씨를 뿌리는 이가 인자 곧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 사람의 마음 안에 심겨서 그것이 싹이 나서 그 열매가 나오면 그것이 재림이고, 그 생명이 주는 안목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알의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는 것이 그것이다. 후~ 불면 날아가 버리는 작은 겨자씨가 심겨서 큰 나무가 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삶이 내 안에 들어와서 큰 나무가 되는 과정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저 예수님의 삶을 보았을 뿐인데, 그 겨자씨만한 사건이 결국은 큰 나무와 같이 자신의 삶 전부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누룩의 비유도 비슷하다.


천국이든 어디든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 나라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반대하면서 민주국가에 사는 것은 자신도 피곤하지만 기본적인 정체성이 간첩이다. 그것은 그 영토 안에 산다고 그 나라 백성이 아니다. 천국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교회 아니라 그 어디에 있어도 그것은 천국은커녕 의가 달라서 삶이 가시방석 같은 지옥일 뿐이다. 그러니까 어디에 속했느냐가 쟁점이 아니라, 그 나라에 합당한 의를 가졌는지가 관건인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된 복음서라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적고 대신에 천국이라는 표현이 많지만, 마가복음과 같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것을 분명하게 하나님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아니라도 천국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만이 옳은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준으로 천국을 정의한다. 세속적으로 본다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을 마음껏 쓸 수 있으면 천국이다. 이성을 좋아하면 그 또한 그렇다. 종교인들에게는 이 땅에서 종교적 규례에 따른 공로가 그 기준이다. 그렇게 다 다르지만 하나 공통적인 것이 있다. 자기 눈에 보이는 실체의 객관적 상태가 어떻든 자기가 가진 기준에 부합하면 천국이라 여긴다는 것은 같다. 즉 그렇게 세속적이고, 또 종교적인 기준으로도 천국이란 다 인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준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에 대한 기준이 아니면 제 아무리 큰 공로와 큰 업적을 이루고, 또 자기의 소망이 이루어져도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닌 것이다. 자기가 주인인 나라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 안에 심겨서 그 생명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다. 즉 씨가 육신이 되는 세계의 법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듯이. 또한 씨가 땅에 심기는 것은 땅의 선택이나 공로가 아니듯, 천국은 자신이 기여한 것으로 가는 나라가 아니다. 즉 종교적이든 도덕적이든 그 어떤 기준에 부합하는 공로가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돈은 말할 것도 없다. 즉 천국은 수동적인 삶에 순종하는 법에 기초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 안에 심겨서 그것이 큰 생명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을 주관하여, 그 생명이 천국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인식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 누리고 가는 나라이다. 즉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주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가는 나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심겨져서 그 생명으로 세상을 보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이 힘들기 때문에 천국을 소망한다. 하지만 분명히 알 것은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는 예비고사로 사람을 이 땅에 살게 하신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표현한 세계이다. 이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라고 인식되지 않는데, 어떻게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란 말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파라다이스 같아 보이지 않는다고, 이 땅이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세계임에도 늘 세상은 잘못되었으니 고쳐 달라하고, 또한 자신의 삶 또한 하나님께서 씨를 심듯 말씀을 심어 하나님의 형상을 또 성품을 나타내려하심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주신 육신의 삶은 연약하다며 부끄럽게 여기고 뭔가 자꾸 하나님 주신 사람의 본질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그런 안목으로 보면 이 세상은 지옥과 같고, 어서 하루라도 빨리 여기를 떠나 그런 모든 곤고함이 없는 천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겨자씨가 심겨서 큰 나무가 되면 겨자에게는 세상이 바뀐다. 하지만 정확히는 땅이 바뀌는 것이다. 겨자씨로 인하여 자란 나무의 모든 성분은 거의 땅에서 온 것이다. 즉 땅이 변하여 생명이 된 것이다. 겨자씨 한 알로 인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나무가 아무리 땅의 기운을 많이 차지하고 있어도 씨의 이름을 딴 나무가 되지 땅이 되지는 않는다. 켈리포니아산 오렌지는 있지만, 어떤 과일이나 나무의 생명 자체에 그 땅의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달리 흙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땅과 같이 그냥 생명도 없는 흙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사람 안에 심겨지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바뀐 사람을 거듭난 생명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어떤 땅에 오렌지가 심겨서 열매가 되어도 오렌지라고 하듯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거듭난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을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고 교리를 행동으로 지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본질이고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이다. 생명도 없는 흙이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그 사람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천국의 백성이 된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이 알곡을 창고에 들이듯이 가는 나라가 천국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죽어라 공로를 세워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으로 온전하게 보인다. 즉 그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외국에 간 것과 같은 것이다. 즉 한국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한국의 헌법이 가진 의를 자신의 의로 삼는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나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의가 생명이 되어 사는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천국에 갈 방법이 없다.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여권이 없는 사람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마치>라고 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씨가 흙인 땅에 심겨서 그 씨로 인하여 흙이 생명이 되면 그 알곡이 창고에 들어가듯 천국에 들어가는 것, 이 법을 아는 것이 천국의 비밀이고, 이 법을 아는 것이 바로 비유를 아는 것이다. 이 법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씨가 열매가 되듯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렇게 하신 목적이 우리 인생들이 다 그러해야 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 천국의 비밀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왜 비유인지도 아는 것이다. 이게 아니면 천국은 알지도 들어가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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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24-30 가라지 비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30. 12:04 Writer : 김홍덕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지에 대하여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고 하셨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이에게는 말씀 자체가 본론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지을 것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몰랐던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실 때에 송사거리로 삼기도 한 것을 보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몸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그래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차별하기 위해서나, 바리새인들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두고 마태가 그 모든 것이 비유라고 한 것은, 비유라는 것이 어떤 본질을 두고서 이야기 하는 것이듯,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아는 이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모르면 바리새인처럼 자신들을 희롱하는 것으로 알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송사할 단초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과 행동은 말씀이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그렇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과 행동은 다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든 비유를 알 수 있는 비밀의 열쇠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하셔도 어떤 이는 그것의 본 의미가 열리고 어떤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것을 읽고 공산주의를 만들고, 어떤 이는 성경을 읽고 교회를 만들어서 기업처럼 운영하고, 어떤 이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서 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가르치고, 어떤 이는 이 세상에서 복 받기 위해서 어떤 종교적인 규례를 지켜야 하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이고, 어떤 이는 죽고 난 다음 생에서 잘 살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로 읽는다. 그러니까 같은 성경을 읽고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이 다 자기 안에 어떤 기준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가 아니라 본질로 보인다. 그러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 매몰되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것이라고 줄곧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모든 삶과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의가 비유처럼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안목을 가진 이에게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비유가 열리지만 그렇지 않은 이는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위하여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천국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천국이 달리 천국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나라가 바로 천국이다.


천국은 다른 나라가 아니다.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한 나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탕과 초콜릿이 가득한 나라가 아이들의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이다. 즉 그 나라의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의를 좇아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비유에 대하여 제자들은 알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모르는 이야기가 되는 이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동일한 기준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비유가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분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 곧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삶을 사는 사람을 주관하는 그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핵심이 될 것이다. 그것을 가라지 비유에서 한번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 비유를 말씀 하실 때, <천국은 마치>라고 하신다. 물론 다른 비유들도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지금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좋은 밭이 아니라 길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과 같은 곳에 떨어진 씨는 동일하게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의로 보지 못하는 다양한 심령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라지 비유는 어떤 심령이 좋은 밭인지, 또 좋은 밭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가라지 비유와 같은 일이 없는 심령이라면 그것은 천국과 같지 않다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좋은 밭에 씨를 뿌렸더니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심었다는 것이다. 좋은 밭이라면 가라지가 되었든 잡초가 되었든 열매를 맺는 것을 헤치는 다른 것은 없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이 그렇지 않고 좋은 밭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심었다는 것이다.


이 밭은 사람의 심령이다. 사람의 마음에 원수가 심은 가라지는 창세기의 뱀이 심은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렵게 들리겠지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것도 같은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누가 자신이 처한 곤고함과 사망에서 건지겠는가? 탄식하다가 8장으로 넘어가면서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감사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즉 가라지를 뽑지 않았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감사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정말로 천국의 비밀이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악한 것을 늘 뽑아 버리려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신앙 없는 사람을 늘 축출하려 하고 비난한다. 또한 어떤 조직이나 단체라도 다 징계에 대한 규례가 있다. 그러니까 악한 것을, 가라지를 늘 뽑아 버리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좋은 밭이 되는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것을 뽑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는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그런 연약함을 그냥 두시는데 종의 신앙이 그것을 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가라지 비유는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밭으로 표현되는 사람의 심령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밭,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밭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추함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을 뽑아 버릴 것인가 그냥 둘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죄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 탄식했지만 "그러므로" 즉 그 죄의 몸을 인하여 그리스도께 감사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정말 너무 너무 중요한 천국의 비밀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이 어떤 이에게는 허락되었고, 어떤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셨다.


비밀은 그것을 푸는 열쇠가 있어야 한다. 천국의 열쇠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삶이 비유라는 것을 아는 안목이 바로 그 열쇠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비유라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눈에 보이는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 진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므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 비밀의 열쇠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정체성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다른 것이 아니다. 결국은 사람에 관한 말씀이다. 즉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바로 말씀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도 결국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서 사람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사람이 바로 천국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좋은 밭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다는 것은 마치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즉 선과 악을 함께 먹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과 악하게 여기시는 것이 함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기준을 가질 때 선하게도 보이고 악하게도 보이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이다. 즉 인생의 모습 안에는 사람이 볼 때는 뽑아 버려야 할 것 같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려 하니 이 육신은 늘 부족하다. 금식기도 해야 하는데 먹지 않으면 안 되고, 좀 경건하고 싶은데 여자를 보면 생각이 달라지는 이 육신이 가진 본성은 도무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아서 그것을 뽑아 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옛날 수도사들이 그런 생각이 나는 육신을 스스로 채찍으로 때리고 한 것이다. 그런 신앙의 모습들이 다 가라지를 뽑아 버려야하지 않겠느냐 생각한 종의 신앙인 것이다.


원수가 가라지를 심었다는 비유는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을 보는 안목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이다. 즉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심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라지다. 그래서 아담은 이 육신을 부끄러워했지만 예수님은 그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의 모든 정체를 십자가에서 보이심으로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존재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셨고, 바울 사도는 그 죄의 몸이 있어 그리스도께 감사한다고 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알곡에 치명적인 장애를 주는 가라지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밭은 사람을 의미하고 그 밭에 심긴 씨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씨로 인한 열매는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과 본성이다. 그래서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밀 심은 밭에 밀이 열리면 밀밭이 되듯, 하나님의 말씀을 심은 심령에 그 말씀이 생명이 되면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밭에는 가라지가 있다. 즉 원수가 심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원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한다는 생각을 준 존재다. 그 생각이 들어가서 사람은 이 육신을 부끄러워하고, 이 육신을 괴롭히면서까지 절제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의 육신의 연약함은 버릴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때가 되면 알곡은 곡간에 가라지는 또한 다 태워서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추수한다는 것은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진 모든 연약함은 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연약함에 대하여 원수가 심은 모든 생각은 밀밭에 심긴 밀이 추수함과 같이 사람이 육신을 가진 존재의 목적이 달성이 될 때에 그 모든 원수의 생각이 다 불사르듯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특히나 이 가라지 비유는 교회에 많은 교훈을 준다. 사람들은 신앙에 방해가 되는 생각이나, 또한 신앙적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건 이 주인의 생각과 다르다. 그것은 종의 신앙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교회와 또 소위 말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것을 모른다. 가라지를 보면 다 뽑으려 한다. 교인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 다 지적질하고, 비난하고 책망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 종의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진정한 신앙, 정말로 천국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사람 안에 있는 각양의 연약함을 탓하지 않는다. 그것을 탓한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고 그것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한 아담과 생각이 같은 것이다. 아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기에 감추려 했고, 사람 안에 있는 연약함을 보고 뽑아 버리려는 사람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진 연약함, 또한 신앙적인 관점에서 잘못하고 죄 지은 것을 뽑아내려 하는 것은 다 선악과를 먹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 생각이다.


주인, 곧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열매가 되어 추수할 때가 되면 다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는 것임을 아시는 분이시다. 가라지를 뽑으면 오히려 알곡이 다친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도 있다. 그러니까 이 가라지, 원수가 주고 간 사람의 연약함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감사할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원수가 준 가라지와 같은 생각의 대상이 되는 이 육신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비밀 중의 비밀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연약함을 버릴 것으로 보는 생각이 있는 사람은 종과 같은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육신으로 인하여 늘 곤고하다. 그리고 이 육인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은 다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가진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생각이 바로 원수인 마귀가 주는 생각이고, 그것을 뽑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신앙이 종의 신앙이다.


천국의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인생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연약함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 연약한 육신 가운데 두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육신이 정말로 사망 같은데, 이 사망의 몸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몸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사망의 몸에 있는 그것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비밀이다. 바로 사람이 가진 육신을 가진 이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여주러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모든 비유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로 자신을 속하게 하는 천국의 비밀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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