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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에서부터 마태를 부르시고 또 이어 금식에 대한 말씀까지 계속 보이시고 말씀해 가시는 내용은 주제가 있다. 지금 마태복음이 전개되고 있는 과정을 보면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시고 산상수훈을 하시고 내려오시는 일련의 행적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형식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에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보이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대하는 두 부류, 하나는 심령이 가난한 백성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이 그들 인생의 본질과 의로서 받아들여지고 있고, 또 한 부류인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과 같은 부류는 그들이 가진 가치관, 곧 본질이 아닌 형식과 행위를 중요하게 보는 그 가치관으로 예수님과 대칭점에 서려하기에 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다.


지금 막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곧 육신을 가진 인생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건 북한에서 자유가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고 거리에서 외치는 것 이상으로 정말로 파격적인 것이다. 서기관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마태복음의 진행만 놓고 본다면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또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실 때 까지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저항이 없지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신 중풍병자의 회복에서 부터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고 있다. 즉 그들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와, 선악,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의가 다르다는 것이고, 그 견해의 차이는 결국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이유가 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죄목이 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까지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하고 죽은 것과 같은 것이 무엇이며, 그러한 것과 사람의 정체성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려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음식을 먹었다. 유대인들은 의가 다르면 같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 즉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같은 의를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 앉았다는 것은 그들과 의가 같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였고, 그렇기 때문에,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리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존재였다. 세금이라는 것이 로마에 상납할 분량만 정해져있지 얼마를 거두는지는 전적으로 세리의 몫이었기 때문에 로마에 10원을 내게 되어있다면 100원을 거두든 1,000원을 거두든 상관하지 않았고, 세리는 그것으로 착복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그야말로 매국노와 같은 죄인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죄인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 앞에 모인 세리와 죄인들은 그런 고백이 없는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누구나 그들을 다 매국노 세리와 또 버젓이 성경에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다고 기록된 것은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보고 있음에도 예수님과 식사하러 왔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들 앞에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 것이다. 즉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죄인이라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오기 위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이라 욕하는 것을 인정하고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인인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관점에서 죄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죄인이라 욕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예수님께 나온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이 죄인이 되는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심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 나아가려면 자신을 죄인이라 욕하는 사람들 앞에 자신이 공개되어도 가겠다는 사람들이 지금 마태의 집에 모인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 기준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이 되는 것을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신성모독 죄를 선고함에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 말씀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성경이 사람이 죄를 시인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시인한다는 것은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이라고 하는 것에는 어떤 기준이 있다. 그러니까 어떤 법으로 볼 때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기준은 당연히 율법이다. 즉 율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세리와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이다. 율법이라는 것이 세상의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바라보는 관점, 유대인들이 세리와 창녀를 죄인으로 보는 그 율법적 관점이 세상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 말씀의 내용인 의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율법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은 사람의 행위가 어떠한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죄인이 되고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이 육신을 가진 사람 그 자체로서는 항상 죄인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지금도 성공한 사람이 언론에 보도되고 영광을 받는다. 그건 좋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성공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언론에 보도되는 순간 다 죄인이자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영광을 받는 것은 사람이라는 연약한 본성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성공의 기준은 잠을 자지 않고 무엇을 할수록 성공하고 영광을 얻는다는 법이 승자와 의인을 만든다는 것이 기준이고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면 할수록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흙으로 지어진 사람을 흙을 굽워 단단한 벽돌을 만들 듯 하는 것이고, 그 벽돌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러는 것이기에 그것이 바로 세상의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시인한다는 것은 그런 기준 앞에서 나는 성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의인이 되는 기준에 나는 적합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이 육신이 가진 한계와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늘 자책하면서 어떻게든지 그것을 극복하려 애쓰고 그렇게 되지 않은 스스로를 비판하고 좌절하면서 다시 그렇게 해 보려고 하고 또 다시 실패하고 그러다가 어떻게 세상의 기준 이상의 자리에 오르면 그것이 성공한 삶이라 생각하고, 심지어 교회도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다 세상의 법이다.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은 그런 법에서 볼 때 다 죄인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이 그런 법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 앞에 모임으로 드러내고 인정한 것이다. 요즘말로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볼 때 바리새인은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보고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그 죄로 못 박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이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죄에 대한 개념이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예수님이 보이시기고 갈등이 본격적으로 생기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 9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율법적인 가치관, 곧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판단하여 죄인을 만들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런 기준 앞에 사람이 그것을 육신을 가진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없다고 시인하고 바리새인들의 기준, 세상의 기준 앞에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이 그것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바리새인이 가진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며 보이시고 전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의며. 그것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바리새인과 마태의 집에 모인 세리와 죄인들 중에서 누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인가 할 때,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분명히 자신들을 죄인 취급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여서 예수님과 함께 먹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를 같이 나누는 그들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며, 그들이 율법을 주신 의미와 목적을 알아 완성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들, 바리새인과 세상의 기준에서 죄인이 된 그들에게 의인이 필요한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에 의하여 사회적이고 종교적으로 병든 자와 같은 자가 된 세리와 죄인들에게 예수님이라는 의원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긍휼이라는 것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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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1-8 중풍병자를 고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4. 23:28 Writer : 김홍덕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마가, 누가복음에도 다 나오는 말씀이다. 마가와 누가에서는 천정을 뚫고 병자를 내렸다는 기사가 있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하다. 단순히 중풍을 고쳤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악한 기준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중풍병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싶었으나 예수님께 갈 수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고치셨는데 그 고치시는 말씀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는 서기관들의 생각과 함께 엮여서 복음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서기관들은 매우 놀라고 예수님을 참담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감히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고 하는 것이 참담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절도나 살인과 같은 것을 악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악하다고 생각한 세리나 창녀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은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 악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인 악한 것인가 하는 것에 있어 서기관들은 창녀나 세리와 같은 이들을 악을 범한 죄인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것은 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악한 생각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악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서기관과 예수님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실 때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중풍이라는 것이 죄의 결과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아픈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죄로 인함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소경에 대하여 그가 소경이 된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에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선 생각해 볼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몸이 아픈 것이 죄로 인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서다. 물론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와 같이 죄에 대한 벌로서 병을 얻기도 하지만 그런 것도 교훈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병이라는 것이 죄로 인함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고 하시니 병이라는 것이 죄로 인함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중풍이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중풍이라는 것은 의가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풍이란 것이 사람의 생각은 멀쩡하지만 그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듯,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주관하지 않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만난다는 자체가 중풍이 고쳐져서 머리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는 상태가 되듯이 하나님의 의가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라는 것을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회복되는 것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그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찾아오고 만나서 회복된다는 것이 바로 인생이 목적의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의가 삶을 주관하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동일하게 육신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죄를 사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위하여 오신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만나려고 온 중풍병자의 마음이 예수님을 통한 회복을 소망한 것임을 보시고 회복케 하신 것이 바로 죄를 사하시는 것이기에 죄를 사한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서 가장 쉬운 말은 침상을 들고 일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서기관들에게 죄를 사한다는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가치관에서 사람의 죄는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며 죄를 사하노라고 말씀 하신 것이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과 같이 들렸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 그것도 나사렛의 천한 동네에서 나타난 허름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칭하니 그것이 엄청난 참담함으로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셨다. 그들의 생각이 악한 것은 사람에 대하여 스스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사람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사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스스로 가진 기준이다. 즉 스스로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어떤 것이 악한 것인지 규정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악한 것이라고, 또한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침범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도 불편해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지 못한 어려움을 당하면 '나에게 왜 이런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가 그에게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느냐?' 반문한다면 아마 구구절절 이유를 대거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할 이유 없이 살았다고 항변하겠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자신이 사람이라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런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얼마나 스스로 가치기준을 가지고 사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사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지은 목적을 알고 사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삶은 사람의 죄를 사하는 그 자체이다. 그것은 바로 머리의 생각이 삶을 주관하지 못하는 중풍이 고쳐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풍을 고치신다는 것은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의 가치관 안에서 죄는 다른 것이다. 세리와 창녀가 그들에게 죄인이었다. 즉 사람의 행위가 그들에게 선과 악의 기준이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그 삶을 주관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받은 것이다. 또한 그래서 그들은 중풍을 고치는 것이 죄를 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고, 근본적으로 사람의 본질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머리의 생각이 몸을 정상적으로 주관하듯이 삶을 주관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이 중풍이듯, 사람의 행함으로 사람을 규정하고, 율법의 본질은 모른 체 지켜내기만 하려는 서기관들의 관점은 다 중풍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관점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의 악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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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29-34 군대 귀신 들린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4. 23. 13:0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건너서 가다라(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셨다. 여기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는데, 이 기사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말씀이다. 이 귀신 들린 자는 마태복음에는 두 명으로 나오고 다른 복음서에는 몇 명인지 언급이 없고 그냥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기적을 보이셨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중풍과는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중풍이 머리에 생각은 바로 있지만 몸이 머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머리에 생각이 빼앗겨서 몸이 원래의 목적과 본성이 아닌 행동을 보이는 것이 귀신 들린 사람이다. 다른 성경에서는 이 귀신 들린 자를 사람들이 사슬로 묶어 두었는데도 스스로 끊고 돌아 다녔다고 했다.


먼저 이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것을 보면, 무덤 사이에 거하고 매우 사납고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갈 수 없다고 했다. 앞에서 세례 요한을 이야기 할 때 사람이 자기 거하는 곳이 자기 정체성을 설명한다고 했는데, 율법의 최고봉인 세례 요한이 율법의 상징인 장소인 광야에 머물렀듯, 귀신 들린 자는 무덤 사이, 곧 죽음과 죽은 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머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다른 존재에게 빼앗기면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물론 귀신이라는 것이 영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것만을 설명하시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 머리에 그러니까 의와 목적을 귀신에게 빼앗긴 것이듯, 사람이 본연의 존재 목적이 아닌 돈이나 권력과 같은 것이 몸과 삶을 주장하는 것도 다 머리를 빼앗겼다는 것, 의와 목적이 다른 것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귀신 들린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실재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돈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귀신 들린 자가 사슬을 끊을 정도의 놀라운 힘을 가졌듯, 돈으로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 앞으로는 사람들이 잘 지나가지 않는다. 귀신 들린 자에게 사슬을 끊는 힘이 있듯, 돈에게 머리를 빼앗긴 사람은 보통의 사람들이 경제적인 굴레를 사슬처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그것을 끊을 힘이 있고,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산다. 그리고 그것이 죽은 것인 줄 모르고 특권이고 성공인줄로 알고 살아간다. 그런 모습이나 이 군대 귀신 들린 자나 같은 것이다. 그게 돈이 아니라 권력이나 명예나 도덕이면 그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런 유추가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문둥병이나 귀신 들린 사람이나 중풍이 열병이나 감기와 같은 것 보다 흔한 병은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병들이 많이 나온다. 그것은 이런 병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잘못된 것을 설명하는 증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문둥병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지 못하여 자신의 형상이 일그러지는 병이고, 중풍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삶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며, 귀신 들린 것은 의도 없이 오히려 삶을 다른 것에 빼앗겨 버린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귀신 들린 자 하나를 고치시려고 거라사 지방에 가셨는지도 모른다.(마가복음 기준으로) 


사람이 가져야할 온전한 정신이 아닌 다른 것이 그 머리를 지배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정신 나갔다고 하거나 귀신이 들렸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머리의 내용이 아닌 다른 것이 채워져 있으면 그것은 다 무덤 사이에 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죽은 자와 같은 것이다.


원래 사람의 머리, 그 생각과 정신은 그리스도가 주인이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인생이라는 정체성과 생명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신 것이 그것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머리와 정신, 곧 무엇인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를 돈이나 명예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삶은 무덤 사이에 거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며, 그런 삶은 육신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려 하며, 그런 모습 때문에 사람이 무서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귀신 들린 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도 뭔가에 미친 사람을 위대하다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친하게 지내려 하지는 않는다. 그건 다 귀신 들린 사람 같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람들은 서로 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서로 봐도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가 머리에 온전히 있으면 사람이 피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는 순종하는 모습을 가지신 분이다. 그리스도는 배 밖에서 일어나는 풍랑에 두려워하고 죽을 것처럼 여기지 않는 분이다. 그러니까 배 밖의 것의 위협이 되지 않고 평안한데 다른 사람에게 위협이 되고 무서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는 사람을 누가 무서워하겠는가? 바로 그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으면 다 귀신 들린 사람과 같은 삶이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삶이다.


그렇게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괴롭다. 그것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거짓된 것이라는 것임이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상관이 없으니 괴롭게 말아 달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아닌 귀신, 돈, 명예와 같은 것이 삶을 주관하여 무덤 사이에 사는 인생들은 그리스도와 전혀 다른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함(구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귀신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쫓아내시려면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돼지는 구분이 없는 동물이다. 굽이 갈라지지 않아서 구분 곧 거룩함이 없는 존재이고, 먹는 것 또한 구분 없이 먹고 되새김질도 없는 동물이다. 이러한 돼지의 본성이나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  들이는 바다는 같은 것이다. 즉 돼지의 본성이 거하는 자리가 바로 바다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방금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건너셨다. 그 바다를 건너실 때에 바다는 광풍이 일어났었다. 바로 그 바다로 지금 귀신들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도 거룩하지 않는 돼지의 몸을 빌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바다가 어디인가? 세상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물, 곧 사람이 삶의 의미에 목말라서 마시고 또 그것이 아니라 배설한 모든 물이 다 모인 곳이 바다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가진 존재의 갈증을 해갈하도 남을 것 같이 많은 물이 모였지만 정작 마실 수 없는 것이 바닷물이고, 세상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바다에서 일어나는 광풍 앞에 그리스도의 평안과 믿음이 없으면 불안한 것이 인생이다. 그 인생이나 돼지 속에 들어가서 바다로 들어간 귀신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머리에 있지 않고 머리를 세상의 온갖 향락과 돈과 명예와 과학과 철학에 빼앗긴 사람들 그들이 있는 곳이 바다고, 그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람을 두렵게 하듯이 귀신 들린 자가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고치셨다. 또한 귀신들이 들어간 바다에 풍랑이 일어도 배 안에서 편안히 주무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머리를 귀신이나 바다와 같은 세상의 것에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과 하나님의 의가 주관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평안하며, 또한 귀신 들린 자와는 달리 사람이 그 앞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인생은 귀신 들린 것이 들어가 있는 바다와 같은 세상을 항해하는 작은 배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바다가 어떤 모양이든 무관하게 평안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또한 귀신 들린 자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이며, 무엇보다 우린 인생들이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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