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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22-33 물 위로 걸으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2. 10:20 Writer : 김홍덕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바다 건너로 가시기로 하고 먼저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가게 하시고 혼자 계시다가 뒤 늦게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로 가셨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건너신 것은 많은 경우 예수님의 대표적인 기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놀라운 기적을 왜 일으키신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은 이 정도 기적은 일으킬 수 있다, 혹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인가?(만약 그렇다면 물 위로 걸을 수 없는 사람은 지금 당장 예수 믿는 것 포기해야 한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언제나 배경처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기적은 그 기적 자체가 본질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이 기적을 일으켜야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그것을 보이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본질을 모르면 기적을 아무리 믿어도 소용없는 것이다.


바다는 늘 세상을 의미한다. 더욱이 밤바다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빛이 없는 세상을 말한다. 그것 외에 특별히 그것의 의미를 찾기도 어렵다. 그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그 바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비늘 없는 물고기, 지느러미 없는 고기를 부정하다고 하는 것도, 비늘로 바다와 구분(거룩이란 구분되다는 뜻)되지 않고, 또 방향성(지느러미)이 없는 것이 부정하다고 하심도 그것 때문이다. 


즉 사람이 세상에 살지만 그 세상과 구분되고, 이 바다 같은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밤바다를 항해하듯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연히 바다, 곧 물 위를 걸으실 수밖에 없는 분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인생은 바다를 밟고 다니듯 세상을 이긴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와~ !! 대단하다."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을 성경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하신 것은 오늘 내가 그것을 읽고 들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해야겠다는 생각과 그 믿음이 있으면 밤바다와 같이 왜 사는지도 모르면 세상을 버티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걷듯이 세상을 이기며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을 믿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서 말하기를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말했던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바다 같은 세상을 이기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것을 믿었을 때 예수님과 같이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또한 그렇게 성경을 보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좀 가다가 예수님이 아닌 바다의 풍랑을 보니 두려워하여 바다에 빠지게 된다. 이건 어쩌면 설명도 필요 없는 당연한 말씀이다. 사람들이 이단 종교나, 종말론과 같은 것에 현혹되는 것이나, 또한 미래를 대비하여 돈을 모으는 것과 같은 본성은 삶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사람이 가진 이 불확실성은 간악한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늘 미끼가 되는 본성이다. 심지어 종교도 많은 부분에서 이것을 미끼로 하고 있다. 사후 세계의 불확실성 그것을 미끼로 한다. 미끼로 삼는 간악한 사람들 자신들조차 모르는 불확실성을 가지고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다.


밤바다에 배를 타고 건너는 모습이야 말로 불확실성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풍랑이 일어 위태하게 된 것은 불확실성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이상한 일들 그리고 위협적인 일들 앞에서 사람들이 가진 불확실성은 두려움이 된다. 그게 바로 지금 제자들이 탄 배의 모습이고 제자들의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배 안에 있거나 또 예수님을 보고 물 위를 걷듯 살다가도 불연 듯 자신을 삼킬 수 있는 두려움이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믿음이 적은 것이라고 하셨다. 또 그것을 의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즉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것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면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돈이 없으면 불안한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돈 있다고 안 죽는다면 돈이 없음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의미가 있겠지만 그건 아니지 않는가?


사람이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분명하면 세상의 풍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두려울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배는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마음 안에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분명해지면 세상은 잠잠해지는 것이다. 세상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듯 하나님 아들의 발아래 있고, 또 마음 안에 하나님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에게는 잠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다. 이건 누려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소름 돋는 기쁨이다. 세상을 이긴 기쁨이 얼마나 대단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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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13-21 오병이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6. 10. 19:27 Writer : 김홍덕

'4복음서에 모두 다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은?' 성경퀴즈대회에 참석해 봤다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문제일지 모른다. 그 답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고도 12 광주리에 남은 예수님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서를 기록한 모든 저자들이 이것을 공통으로 기록했다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전하기 위하여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눈에 이것은 정말로 사람들이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인지 공감하는 것이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마태복음으로만 본다면 13장까지 세례 요한이 살아 있었다. 물론 그가 막바지에는 감옥에 있었고 신앙적인 활동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14장 1-12절에 세례 요한이 죽는 일을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태복음을 둘로 나눈다면 13장까지와 14장부터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것은 한 사람의 신앙 여정에 있어서도 마음 안에 세례 요한의 신앙이 남아 있던 시절과 그것이 죽고 없어진 삶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따로 배를 타고 가셔서 빈들에 계시니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다. 빈 들은 원래 세례 요한이 있던 처소이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야에 세례 요한이 있었는데 죽고 나니 빈 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와 같이 사람들의 마음 안에도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 믿던 신앙으로 살다가 세례 요한의 신앙을 떠나고 나면 그 마음이 빈들과 같이 비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 곧 세례 요한의 신앙이 있던 사람들의 빈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새롭게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빈들로 가셨다고, 또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빈들로 모여들었다고 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는 것이 알레고리칼 할 수 있지만 자기 마음에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은 이 말씀이 그것이라는 것을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말씀이다.


즉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다가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신앙을 떠나게 된다. 그건 필연적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행위로 도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이것이 로마서 3장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세례 요한이 죽고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모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병을 고치셨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모든 증상들, 귀신 들린 것과 같이 머리의 의가 빼앗겨서 신음하는 사람, 중풍병자처럼 하나님의 의를 알지만 그것이 삶이 되지 않는 사람, 또 문둥병과 같이 하나님을 깨닫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고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숫자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경에서 "5"는 늘 회복에 관한 숫자이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7번 돌아오고 그 다음에 오는 50년째 희년에는 모든 종들도 해방되고 또 빚도 다 탕감되며 팔았던 땅도 다 원래 주인의 것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규례이다. 그래서 5는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들에서 먹을 것이 없는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신앙 곧 율법적인 신앙을 떠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양식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숫자 1,000은 유대인들에게 영원성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천년 왕국이다. 영원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양식을 먹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회복, 곧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이 오병이어의 사건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했다. 성경에서 5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2는 항상 보증에 관한 것이다. 즉 너나 나나 같다는 것이고, 너와 내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문둥병이 나음을 받을 때 비둘기 두 마리를 잡아서 하나는 드리고 하나는 놓아 주는 것이다. 놓아주는 것과 드려지는 것은 같은 것이기도 하고, 하나가 놓아졌기에 하나가 드려지고, 하나가 드려졌기에 놓아주는 것이 있는 것을 말한다. 세례 요한이 떠나고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오심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이 와서 먹는 것을 논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고을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면 좋겠다고 예수님께 건의를 했는데, 그것은 날이 저물었고 또 빈들이라 먹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오랫동안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과 전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과 같은 육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수가성 우물가에서도 같은 이유로 그랬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사람들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축사한다는 것은 그것과 축사하는 사람이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제를 드릴 때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번제물의 머리에 축사하듯 손을 대는 것이고, 또 예수님께서 성찬식 때 축사하시고 떡은 예수님의 몸이라고, 또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지금 이 빈들에 모인 사람들에게 먹을 것은 예수님이지 고을에 가서 사 먹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오병이어는 세례 요한의 신앙에서 떠난 사람, 아니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양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리떡과 물고기에게 성찬식과 같이 축사하심으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먹이신 것이고, 그 음식이 바로 회복과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의 양식으로 주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사람이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이 자신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연어가 알래스카로 가서 죽는 것은 바다의 미네랄을 땅으로 옮기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즉 바다의 미네랄이 땅에 사는 짐승들의 몸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사람이 먹는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오병이어는 세례 요한의 신앙에서 떠난 사람들에게는 고을에 가서 먹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보이신 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사람들이 양식으로 먹고 나면 오히려 그 양식이 12광주리에 남는다는 것이다.


12는 왕국과 나라를 상징한다. 열두 진주문, 열두 사도, 열두 지파가 다 그렇다. 즉 세례 요한의 신앙을 떠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양식으로 삼아서 회복되고 보증하게 되면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모였을 때 비로소 교회가 된다는 것이고, 그것만이 교회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병이어 사건은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나 적은 것을 기적적으로 널려서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하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여정에서 세례 요한의 때를 지나서 날이 저물 듯 신앙의 안목이 어두워지고 또 주리듯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들이 먹을 것, 곧 자기 정체성으로 삼을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는 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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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비유를 마치시고 고향에 가셔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쳤더니 사람들이 놀라기는 하나 그 말씀의 지혜가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런 것을 물었다는 것에 대하여 선지자가 자기 집과 고향 외는 존경을 받지 못하는 곳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고향이나 자기 집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두고 흔히들 목사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가족들 앞에서 목사라는 것을 잘 인정받지 못할 경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또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일면 맞는 말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말씀이 단순히 목사라는 신분이 자신의 출신 고향이나 가족들 앞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좀 부족하기 때문이다. 목사라는 직분이 사도나 제자에 비할 것이 못되기도 하지만(특히 현 시대에서는 더더욱)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지자는 천국의 제자, 곧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모든 이들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부모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해서 아브람이 떠났지만 정작 그 아버지인 데라는 함께 갔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떠난 것은 무엇일까? 그것과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고향이나 자기 집과는 같은 개념이다. 즉 이것은 육신으로 가족을 말하거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보는 가치관을 말하는 것이다. 고향과 집은 하나님의 의를 받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식인 육신을 받은 곳이다.


고향 사람이나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 일원 중의 한명에 대해서 볼 때 언제나 보아온 고정적인 겉모습을 기준으로 본다. 그런 것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것인데, 바로 그 보편적인 안목으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선지자든 아니든 다 자신이 보는 그 보편적 안목을 벗어나기 힘들다. 지금 예수님을 보는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늘 함께하던 사람의 일원으로 보기 때문에 그 형제와 자매가 자기들과 같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안목은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신 지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자라고, 예수님의 육신이 자라온 과정을 보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이다. 자신들과 함께 있던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듣기에 놀라운 지혜의 말씀을 하면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도 그런 지혜의 말씀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놀라운 지혜를 들었지만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자신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놀라기는 하나 지혜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도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지신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시는 것을 들으면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겉모습이 초라하다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죄로 여긴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향 사람들도 자신들과 함께 있던 사람이 놀라운 지혜를 내는 것은 이상하고 격이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와 비슷하다. 예수님의 고향은 육신으로 갈릴리 지방이나 나사렛이겠지만 영적인 고향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고향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듣고 놀랍기는 하나 예수님의 육신을 보니 그 말씀과 상관이 없고 오히려 그 육신의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을 논한다고 배척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지금도 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고향은 교회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초라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 교회의 대표로 내세울 수 있는 그런 신분이나 재력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우선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교회를 소개할 때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 중에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거론하는 것이 바로 그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있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모양이 초라하고, 또 그 성장과정이나 사회적 역량을 잘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면, '저런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나오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 꼴로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난리냐?'라는 반응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배척을 받으신 것과 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교회에 목사라는 절대 권력을 낳는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목사를 청빙함에 있어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는 행여 초라할지라도 그 말씀과 신앙고백을 듣고서 그 신앙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자 청빙한 것이 아니라, 목사가 되는 과정에서 어디서 공부를 했고, 또 사회적으로 어떤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고, 그 일차적 기준을 서류 심사로 한 다음에 몇 편의 설교만 듣고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세울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고향 사람들이나 또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볼 때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또 세리와 창녀들과 밥을 같이 먹는 사람으로 오시고 사신 것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런 사람 아니 사람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알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다. 이 예수님께서 오신 뜻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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