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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27-31 두 맹인을 고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2. 15:21 Writer : 김홍덕

성경을 보면서 여자를 자신으로, 남자를 그리스도로 보는 것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자 생명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보는 관점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오늘 나와 상관있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둥병이든 중풍이든 귀신 들린 자의 이야기든 혈루병이나 또 죽어가는 딸이나 장모와 같은 사람들이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있었고 그런 불치환자들을 예수님이 고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는 것은 무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성경을 읽는 우리 자신이 그런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알며, 또한 살면서 그런 병에 걸릴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그런 병 고친 것을 하늘이라도 다 쓸 수 없다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에 기록했겠는가?


문둥병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형상이 망가져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인정이 될 때 그 말씀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귀신 들린 자에 대한 말씀을 대할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부정한 돼지와 같이 하늘을 볼 수도 없고, 구분됨도 없이 바다 같은 세상의 것으로 우리 정체성을 해갈하려 한 사람이라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성경은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맹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맹인이라는 것은 인식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빛이 없기 때문이다. 맹인이 아닌 보통 사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들어가면 맹인이나 한 가지다. 빛이 없으면 누구라도 맹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 없는 사람은 모두 맹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무엇을 할지, 어떻게 살지를 늘 갈등하고 또 그것을 찾아 헤맨다. 그것은 맹인이 지팡이로 더듬으면서 걸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다 지팡이에 뭔가 부딪히면 어떤 인식과 판단이 서고 그것을 가지고 의사 결정을 하듯, 사람들도 살아가다 어떤 문제나 갈등에 부딪히면 인식과 의문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한다. 즉 빛이 없는 중에 부딪힌 물건이 무엇인지 고민하듯 하는 것이다.


만약에 누구라도 성경에 나오는 맹인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면 그는 당연히 삶의 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맹인이라는 것은 삶의 목적과 방향과 의미를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맹인들이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이유는 육신적인 맹인이 빛을 인식하지 못하듯,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이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다 인생의 목적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없는 맹인이라는 것이다, 창세기에 천지창조를 할 때도 흑암이 혼돈하다고 한 것 역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지 않은 인생은 모두 흑암 가운데 있다는 말씀이다.


지금 예수님을 만난 이 두 명의 맹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다. 누구라도 그 삶의 의미를 잃은 것 이상의 불쌍함은 없다. 그들은 스스로가 삶의 목적을 잃은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태의 집에 죄인이라는 손가락질 받을 것을 알면서 모이는 것과 같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이 두 맹인, 두 명이라는 것은 서로가 볼 때 다 맹인이라는 것이다. 너나 나나 같은 소경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하실 때 "주여 그러 하오이다."라고 답했다. 즉 그들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빛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믿음대로 고침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몰라서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불쌍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예수님 앞에서 시인하고, 예수님이 있어야 비로소 맹인이 보게 되듯 삶의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인식하고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를 맞이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인식하고 산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빛 가운데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볼 수 있으며 다스리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늘 사용하는 자기 방이라도 불빛이 하나도 없어서 맹인과 같이 되면 책상이든 의자든 늘 자기가 목적대로 사용하고 다스리든 그 모든 것이 다 걸림이 되고 방해가 되며, 나를 해하는 것이 되지만 빛만 있으면 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그 목적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인생의 목적에 대한 맹인이 빛을 얻고 보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을 고쳐준 예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의 본성은 낭중지추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생명의 본성은 감출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개가 멍멍 짖는 것을 금하게 하겠는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다는 것, 예수님을 만나 살아가는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잉태되고 자신의 삶이 거듭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명이 표현되는 것은 어떻게 감출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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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을 때에 한 직원의 종이 와서 주인의 딸이 지금 당장 죽게 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하여 예수님께서는 요청하신 곳으로 가서 고쳐 주시기로 하신다. 그 직원은 마가와 누가복음에서 회당장 야이로라고 기록하고 있다. (회당장은 지금으로 치면 교회의 사무장 정도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회당장은 당시 예배를 드리는 회당에서 예배를 주관하고, 기도와 설교 할 사람을 선택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식을 정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의 딸이 아파서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정리해 본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들을 낳는 예배가 아니라 죽은 예배가 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예배(제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자신을 불살라 번제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온전히 되었을 때 그 삶은 산제사로 드린 것이고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은 아들을 낳아야 하는 운명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예배의 목적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 예배를 주관하는 회당장의 딸이 아프다는 것은 예배가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딸이 아파서 죽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가진 목적의 소망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딸이 아프면 자라서 아이를 낳을 여자가 되기도 전에 죽는 것인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을 표현하기도 전에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이 부탁의 말을 들으셨다고 했는데, 회당장의 딸이 아프다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 곧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기도 전애 죽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새 포도주가 없다는 것이며, 오직 헌 부대 곧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예배의 존재 목적이 살아 있는 예배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새 포도주가 없는 것이고, 율법을 주신 목적은 알지 못하는 헌 심령에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생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또한 생각해 보면 예배도 형식이요, 옷도 형식이요, 부대도 형식이고, 딸도 형식이다. 이런 모든 것은 다 목적이 표현되는 형식이다. 여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낳아야 하는 인간의 존재 목적을 대변하고, 그렇듯 옷과 부대와 예배는 다 본질이 있으면 결정되고, 본질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가서 고치시려고 길을 가시는데,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는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여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알아채시고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심으로 그 병이 낫게 되는 일이 있게 된다.


혈루병이라는 것은, 여자가 늘 생리하듯 하는 병이다. 한마디로 잉태하지 못하는 병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목적을 이룰 수 없는 상ㄷ=태, 곧 존재적 관점에서 보면 시계가 시간을 알리지 못함과 같이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여인의 상태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그 안에 없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며 사는 목적을 이룰 수 없는 죽은 상태와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이 낳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이라는 형식을 고치는 것에 예수님의 옷자락, 곧 예수님의 형식만 있어도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모든 인생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육신의 삶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상심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다. 바로 그런 마음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야겠다는 여인의 마음이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형식인 옷자락이라도 만져야겠다는 것은 자신은 형식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형식이라도 자신의 것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믿음이 구원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원래는 그런 기능을 하는 곳이 회당이다. 그 회당이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 여인의 상태이고, 회당장의 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 곧 목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자기의 집 곧 자기 심령 안으로 부르는 사람은 이런 모든 것이 회복되고 예배도 삶도, 하나님 앞에서 여인으로서의 목적과도 같은 인생의 목적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회당장의 집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시셨을 때는 이미 그 딸이 죽어서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했을 때 다들 조롱했다. 하지만 오시는 길에 이미 혈루병이 회복되는 일을 보이셨다는 것은 소녀도 회당의 기능도 다 회복된 것이라는 의미이기에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회복된 모습을 보이기까지,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대기하는 상태 곧 자고 있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은 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딸, 곧 어린 여자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목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고, 세상의 것, 곧 위대해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바로 그것이 헌 옷에 생베조각을 붙이듯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져가 붙이는 것이고, 또 그것이 혈루병이나 딸이 죽은 것과 같이 여자가 잉태치 못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다. 딸이 자라서 여인이 되고 그 여인이 아들을 낳음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라서 그 심령이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그렇게 아들의 심령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인하여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심령이 그 안에 잉태되는 자리로 가야 한다. 그게 존재의 목적이다.


그런데 이 회당장의 딸은 아파서 죽었다. 그 딸이 죽은 것은 달리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없어서 죽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 안에 없으면 또한 그와 같이 죽은 것이다. 이것은 죽은 것인 것은 예수님이 없기 때문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만나게 되면 그것은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당장의 딸과 예수님이 만나게 되면 그 딸이 사는 것이다. 이 말씀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은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스스로를 인정해야 한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그것을 인정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아들도, 또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가능성도 어린 여자인 딸이 죽은 것과 같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구원할 것이가 말씀하셨고, 어린 딸이 누운 곳에 예수님을 모신 회당장도 그 딸이 회복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헌 옷에 생베 조각을 붙이듯, 자신의 추구하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피라미드 꼭대로 가는 것인데, 그 목적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져다 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또 하나님 믿는다면 적어도 도덕적이어야지 하면서.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죽은 것이다. 그런 마음은 혈루병과 같이, 또 아들을 낳을 여자로 자라지도 못한 체 죽은 딸과 같은 것이다.


그런 마음, 그런 사람들은 모두 회당장과 같이 예수님을 모시고, 또 혈루병을 앓은 여인과 같이 자신이 그러함을 고백하여야 한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마치 남편을 만난 여인과 같아서 우리 안에, 또 우리의 삶을 보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되게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 곧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인이 아들을 낳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고, 그렇게 되었을 대 우리 삶의 의미가 온전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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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고, 정치권이나 스포츠 등에서 수장들이 바뀌거나 시스템이 바뀔 때 자주 등장하는 명언처럼 되어 버린 성경말씀이다. 이것은 이 문장 자체로서 나름의 교훈이 있다는 의미이지만, 단순하게 새 술이라고 하는 것과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뿌리가 좀 다른 표현이다.


그 이유는 포도주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포도주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을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포도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특징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특히 포도주는 포도를 짓이겨서 그 속을 짜내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 안에 있어 육신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나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 옷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낸다. 즉 그것은 포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담는 그릇과 부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특별히 예수님께서 생베 조각을 붙여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신앙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하는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의를 섞어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의나 다른 것을 섞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늘 하나님의 성전에 이방신상을 두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이 땅에서 잘 살고, 축복 받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을 정도로 성공하고, 또 천국에 가서 잘 살겠다는 것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제대로 생베조각을 헌 옷에 붙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옷이 신분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이 먼저고 그 다음이 옷이다. 군인이라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님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옷과 같이 그 믿음을 표현하는 삶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이 되어 그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지, 생베 조각을 붙임 같이 성경 말씀을 조각으로 또 지식으로 알거나, 또 과정이나 뿌리 없이 함축된 교리를 믿는 것이면 족하다고 하는 것이 생베 조각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과 정체성을 헌 옷인 세상적인 삶에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전과는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바로 고후 5:17절의 말씀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포도주 부대와 같고,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육신을 가진 이 인생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전혀 다른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아이폰이 스마트폰이라는 세계 안에 있다는 것과 같은 표현으로 한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라는 생명 세계 안에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아 정체성이 사람의 본성이 되면 그 사람에 포도주 부대와 같은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이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그 삶이 새 부대와 같이 전혀 다른 삶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온전한 것이 있으면 그 삶이 새롭게 된다는 것이고, 포도주가 안에 있다는 것은 혼인잔치에 있어 신랑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있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이며, 사람에게 있어 있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인 그리스도의 품성, 그것이다. 그것이 혼인잔치의 신랑이고, 새 포도주며, 그것이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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