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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16-23 증인(증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8. 23:06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고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잘 생각해보면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에 끌려 가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예수님 때문이듯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말이다.


제자라는 것은 무릇 그 스승과 가치관과 정체성이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의 삶이되기를 바라하는 사람 또한 예수님과 같이,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당할 것이라고 하신 일이 그들에게도 일어나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이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아닌지가 자신의 삶이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핍박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오늘을 사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핍박이라는 것의 정체는 이 말씀과는 좀 다르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교회생활을 하느라 집에 늦게 귀가하면 믿지 않는 가족들은 그것에 대하여 잔소리하기 일쑤다. 바로 그 잔소리나 때로 교회에 대하여 싫은 소리를 하고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조치들을 핍박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핍박이 아니라 당연한 반응인 것이다.


핍박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이나 행동으로 사람을 자극하고서 나타나는 반응을 핍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양이 이리에게 가서 무슨 능동적인 자극을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양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니 이리가 핍박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핍박이라는 것은 능동적인 신앙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양이라서 받는 고통, 먼저 자극하기도 전에 당하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고난이 핍박인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냈더니 예수님 때문에 양들을 이리와 같은 총독들과 왕들이 양을 잡아먹듯이 끌고 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리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이리의 본성대로 양을 대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총독과 왕도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이다. 총독과 왕이 누군가? 그들은 세상의 법에서 이긴 자다. 그들이 자신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세상의 법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핍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 역시 빌라도와 제사장들에게 동일한 대우를 받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들과 이방인, 그러니까 총독과 왕에게 끌려갈 그 시점까지 하나님도, 예수님도,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보내신 자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총독들과 왕들이 그들이 생각할 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관철 시키는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오늘을 사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어떤 삶이 그 증거가 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교회 안에서 설거지를 하는 사람은 설거지 거리가 생기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그릇을 적게 사용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설거지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마음을 모른다. 그러니까 설거지 세계에 있어 이방인이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핍박이라는 것은 설거지 하는 사람이 그릇을 마구 사용하는 사람에게 그릇 좀 대강 사용하라고 잔소리를 했을 때, 그 사람들이 싫은 소리 하는 것이 핍박이 아니라, 설거지를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마구 그릇을 사용하므로 생긴 설거지 거리가 바로 핍박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상황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무엇이냐 하면 그릇 마구 사용한다고 잔소리 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계속 설거지 하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생명인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할 때에 설거지를 해보지 않고, 또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자기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자신들도 설거지를 하거나 돕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릇이라도 아껴 쓰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감동이 성령의 감동이고, 설거지 세계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설거지 세계에 증거와 증인이 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그와 같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설거지를 늘 감당하는 사람과 같이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그 생명도 알지 못하므로 그릇을 마구 사용하듯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마구 대하는 것이다. 마치 이리가 양을 대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더 존귀한 자이지만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고 죄를 받듯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같은 취급을 받고 늘 종과 같이 수고해야 한다. 종은 죄나 빚이 있어 종이 되는 것이다. 즉 설거지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하여 설거지를 계속하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은 죄 지은 종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을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고,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예수님께서 앞에서 말씀하신 외식의 교훈에서 알듯이 그렇게 하고자 맘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 그런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이라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삶이다. 이것이 어려워 보이면 아직 신념으로 사는 삶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생각이 된다면 그 사람은 사람의 자리,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삶이 무엇인지를 아는 예수님의 제자와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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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16-23 핍박과 제자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6. 13:11 Writer : 김홍덕

(이어서)


그러므로 핍박을 받게 되고 공회에 서고 채찍질 당하게 된다는 것이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직접적으로 육신에 그런 위해를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모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겪는 일이라는 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사람 사이에서 어떤 것에 대하여 누가 더 선한가? 이야기할 때 죄인이 되는 것, 그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나 교회와 같은 곳에서 신앙에 관한 신분(목사와 같은 신분을 말하지만 이게 과연 성경적인지는 알 수 없다.)을 가진 사람이나 신앙 좋다는 여론을 형성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신앙 없다고 비난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그런 비난을 한다는 것은 죄인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것은 핍박이 왜 생기는가 하는 문제와 같다. 그리고 이러한 것의 표준 역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여러 가지 송사나 거짓 증거에는 일언반구도 않다가, "네가 찬송 받으실 자의 아들이냐?"하는 그 말에 "네가 말하였도다."하시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했을 때 "내가 그로라."하신 단 두 마디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심판 받으실 때에 송사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성전을 삼일 만에 짓는다고 했다는 등의 증언을 했지만 그런 일로 십자가를 질 정도는 아니다. 오죽하면 빌라도가 봐도 죽일 정도는 아니라고 했겠는가? 그런데 그 와중에서 굳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으로 인하여 어떻게 보면 죽음을 자초하셨는데, 그것은 죽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그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의 본성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성이 바로 그렇게 의인이 죄인에게 죄인 취급을 받아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당연히 그런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성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끌려가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고 복음이 전해졌듯이, 제자들과 오늘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법을 좇아 살아가는 삶, 곧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죄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안에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있고,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그 일이 어떻게 되어야 바른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작은 일, 부부간의 대화, 직장에서의 생활, 길가다 부딪히는 문제, 상담원에게 전화하는 일에 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다 있는 일이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닥쳤을 때,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는 선한 일, 또 일이 바르게 되어야 한다고 자신이 생각한 것들과 일이 다르게 되는 것을 수용하는 것, 그런 상황이 되고,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공회에 잡혀가고 채찍질 당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특히나 이는 신앙에 있어서 더 중요한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적 신념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진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단언하건데 오만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만의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아들도 걱정하지 않으시는데 누가 감히 그런 것을 걱정한단 말인가? 생각해보라.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아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이 죽으면 아무도 없는데도 그 죽음을 받아 들이셨는데, 오늘을 사는 사람이 자기의 신앙적 신념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다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오만한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믿음이 아니라 진정 신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기를 원하는 제자라면 그런 걱정을 할 이유가 없다. 또한 핍박을 받게 되었을 때, 그것을 이기려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고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나타남과 같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그렇게 하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살아가면서 사람들과 무엇이 옳은가 할 때 자신이 죄인이 되고, 특히 신앙에 있어서 그런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이 핍박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틀린 것을 옳다 주장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과 같이 엄청난 일들, 손해, 그리고 피해가 생긴다. 바로 그것을 감수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핍박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를 물려서 죄인이 되어 발생한 수고와 피해와 손해를 감수한 것이 아니라면 핍박 받았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은 핍박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주장함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또 세상이 보이는 반응일 뿐이다.


핍박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당하는 괴롭힘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살면서 받는 손해와 어려움을 감수하는 수고와 희생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가지고 있는 본성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손해에 관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구분(거룩함)되는 삶이다. 그 구분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 


만약 이것이 사람이 당하는 손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것은 아직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 삶은 살아보기 전에는 손해와 같지만, 살기 시작하면,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서 잉태되고 자라나서 자신의 삶을 주관하기 시작하면 금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운명이고 그 영광스러움을 가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산다는 자부심과 같은 것은 아니다. 핍박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수고의 삶은 사람으로서 자신이 제 자리에 있다는 안식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핍박이고,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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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16-23 핍박과 제자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5. 6. 13:10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보내시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다. 이 말씀, 마태복음 10장에서 16에서 25절까지에 대하여 많은 성경들이 소제목을 부여했는데 대부분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소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는 그 내용이 제자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핍박이 따를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쩌면 이 말씀의 의도와는 좀 다르다. 그러니까 사람들 특히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는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핍박이 있으면 예수님께서 핍박이 있다고 하신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 까지는 되는데, 그 다음에 핍박을 받는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잘 읽고 들었다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핍박을 받는 자리까지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을 공회 곧 재판에 세우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은 그런 상태까지 가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에게 이루어진 것이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한다고 시쳇말로 '마귀야 물러가라!'라며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이고, 또한 중요한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또 열심히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인하여 가족이나 주변인들과 갈등을 빚게 되고, 또 그 관계의 역학에 따라 손해를 보거나 그야말로 핍박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그 어디에도, 사람들이 핍박할 조짐이 보이면 기도하여 그것을 이기라고 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냥 사람들이 핍박을 하게 되면 너희는 공회 곧 공론 앞에 죄인이 되고, 또 채찍질 당하듯 이로 인한 피해를 볼 것이라고 하시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자리에 까지 갔을 때 비로소 핍박을 받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로서 살 때 일어나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핍박의 조짐이나 실제적인 핍박 앞에 항거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군병들에게 항거하는 베드로를 만류하시고 오히려 베드로를 책망하셨다. 만약 이것만 무슨 의미인지 알아도 조용기 목사나 전병욱 목사와 같은 태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설사 실정법상 아무런 죄가 없는데 누군가 목사라는 이유로 그렇게 모함을 하고 있다고 치자. 그런 상황에서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냥 끌려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 교회가 풍비박산이 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죽고자 할 때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가는 일까지 일어나고 순종했을 때 비로소 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말씀처럼 된 것이라는 것이다.(하지만 이들은 실정법조차 어긴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은 이 일이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이리에게 희생당한 어린 양의 모습이시기 때문이고, 제자라는 것이 스승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은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끌려 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성품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간다는 것은 아주 수동적인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수동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송사를 당하여 죽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과 같이 끌려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할 줄 아는데 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 그리스도의 정체성,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이 가진 본성이 그런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외치듯 부르면서 하나님을 믿는 이유로 핍박을 받을 때, '예수님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시더니 정말이구만! 그러니 믿음으로 이겨내야지!' 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일 뿐 믿음도 신앙도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법은 어떻게 보면 정아로 단순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앞에 나는 틀린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다. 이것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앙을 가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신앙이, 하나님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라고 항거하면서 그것을 숭고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건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다.


한 교회에 목사님과 재정담당 장로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는데 재정을 아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장로님은 교회의 재정이 여유가 없으니 돈을 규모 있게 잘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것이 핍박이고, 어떤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일까? 그것은 목사님이 장로에게 지는 것이다. 그것이 목사님이 핍박을 받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모른다고, 또 모욕한다고 처형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때까지 그 많던 기적은 어디로 가고 그냥 끌려가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신념을 가지고 참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곧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의 생명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십자가도 모르는 것이다.


핍박이라는 것이 달리 핍박이 아니다. 내가 더 온전히 아는 것을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만약 신념을 가지고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것이고, 자신의 운명이 그것이라는 것을 알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이 그 안에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들끼리 모여서 '내가 요즘 어디가 아파서…'라고 운만 띄워도 이사람 저사람 할 것 없이 그것은 어떻게 해라, 병원에 가라 등등 훈수를 놓고 자신이 그런 것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이 더 아프다며 떠벌이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작은 일 앞에서도 죄인이 되기 싫어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러는 것의 유일한 원인은 선악과다. 선악과는 다른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기준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와 같은 작은 일에도 자신이 생각할 때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작은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아도 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심령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생명의 세계이고,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세계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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