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 두 가지 믿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0. 8. 04:00 Writer : 김홍덕

(요 17장)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두 가지의 명제가 함께 있는 말이다. 먼저는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낮은 자리 십자가로 가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 있고 이어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둘은 연결되어 있어서 둘 중의 하나만 믿는 믿음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지금이야 성경에 권위가 부여되어 있고, 그 성경을 신앙의 경전으로 삼는 사람과 종교가 많은 중에 성경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알고 인정하지만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성경에 있는 문장을 믿는 것, 더 자세히 말하면 자신에게 감흥도 없고, 자기 일로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말하는 믿음이고 문자를 인정하는 수준이다. 물론 그 마저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러나 오늘날도 당시의 예수님처럼 찌질 한 모습을 한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사람들은 하나님 아들이라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최상위의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인들, 창녀들과 먹고 마시는 것이나,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기에 사회적 규범과 동일한 종교적인 계명을 어기는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모습은 한 마디로 사회적으로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오늘날도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사실은 예수님 당시보다 더 심각하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적어도 세상의 가치를 좇는 자기 가치관 앞에 거짓을 행하지는 않았다.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지만 거짓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신앙적 교리와 사회적 명제로서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교회를 좋게 지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고, 세상의 일에서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요 영광스러운 일이라 말한다. 세상 가치를 좇는 본심이 세상의 가장 천한 신분인 사형수로서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는 어이없는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기에 한편으론 더 심각하다.


그런데 가룟 유다를 제외한 베드로와 제자들은 죄인, 창기들과 먹고 마시는(의를 같이 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나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존재가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쉽지 않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이것을 간과하거나 아예 이런 개념조차 없어 보인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존재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이 육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 창조되었고, 이 육신은 그 창조목적과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본질이며 핵심임을 순종하는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베드로에게는 보잘 것 없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며 그리스도였다. 다만 그들에게도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세상의 임금과 같이 높은 존재였다.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므로 지금은 초라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임금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스도는 그런 존재라고 믿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자신이 가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상충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증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치 없는 종의 값을 받고 팔았다. 하지만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은 혼돈에 빠졌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도 확실하고, 그리스도는 로마 황제보다 더 나은 신분이라는 자신들의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하나님의 법과 의, 그리고 그 법과 의가 다스리는 세계 안에서는 상충되는 것이고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들의 혼돈 중에서 기준을 육신으로 오신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이라고 기준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문제 삼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 번 확증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제 곧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임에도 그들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의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주로, 또 하나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심령에 거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빌어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어렵다는 말이다.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과 같은 삶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있다면서 예수님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보고,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은 가룟 유다와 같다.


예수님은 육신 가진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아들, 곧 하나님의 의이자 인생의 목적이 하나가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셨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른 존재로 여기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니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게 된 목적임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며, 예수님이 보이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며 가시고 있는 십자가의 길이 그리스도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그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는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가 자신으로서는 저렇게 매 맞고 있는 예수님을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저 꼴로 있는 예수를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죄인들과 함께 먹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과 낮아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은 맥을 같이 하는 것이고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결국 생명이 되는 것이기에 아기를 얻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혼과 같고, 그리스도가 낮아지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은 결혼한 신부가 남편의 유전자를 받아 잉태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가 잉태되는 것은 사람이 조성한 것이 아닌 생명의 법이 있기에 가능하다. 결혼하여 동침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생명이 되는 법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법이다. 그와 같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리스도는 낮아지는 존재라는 것 사이에는 성령이 계신다. 그래서 성령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예수님이 나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할 것은 결혼하지 않으면 아이를 얻을 수 없듯, 말구유에 오신, 초라한 육신의 신분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당연히 성령이 역사할 이유가 없다. 당연히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것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을 믿을 수 없다.


베드로와 10제자들을 가룟 유다와 구분하신 것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들과 함께 먹고 마시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으며,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예수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무시하고 외면한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했을 때 제자들의 말 속에 있는 사람들의 관점,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은 선지자요, 엘리야였다. 사람들은 자기 병을 고칠 때 예수는 선지자요 능력자로 인정하기도 했지만 하나님 아들로,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모습과 놀랍도록 동일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믿고 그 능력을 의지하지 하나님의 의와 법이 육신이 된 존재로 믿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의와 법이 육신이 된 존재로 믿는다면 육신 가진 자기 자신과 예수님을 다르게 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8)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성령만 오시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셨고, 저희로 인하여 영광을 받았다고 하셨으며,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 저희도 하나가 될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 기도를 마치면 그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 갈 사람인데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10)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요 17:16)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아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 단지 성령이 오셨는지 아닌지의 차이뿐이다. 하지만 먼저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그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놀랍게도 그것이 선행되면 성령이 오시는 것과 성령께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게 하셔서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셔서 낮아지는 본성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본능적으로 이루어진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 믿는 것이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시는 심령에 심긴 말씀의 씨앗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 믿음이 있었기에 목욕한 자였다. 그 믿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아직 분명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아직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면 오실 성령이 오시지 않은 단계의 상황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반대로 그것만 있다면 성령이 오셔서 생명이 되게 하시고 생명으로 거듭나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이 우리 삶을 주관한다. 그게 그리스도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 가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본분임을 보이신 이유다.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에게는 그 믿음이 없었지만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는 그 믿음이 있었다.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자신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믿음이다. 기준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예수님 관점에서 보겠다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심령이다. 그렇게 수동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주로 주관하시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남은 것은 성령이 오시는 것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