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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가서 지내다가 포도원의 소득을 받으려고 종을 보내니 세를 준 농부들이 종을 죽이고 돌로 치고 또 다시 종을 더 많이 보내도 그렇게 하니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악한 농부들은 '아들은 상속자니 죽이고 아예 포도원을 차지하자!'며 아들을 죽였다는 비유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이 비유는 당시에 듣는 바리새인들조차 자기들의 이야기인 줄 알 정도로 명확한 내용인데 이 내용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과 이어져 있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언뜻 생각하기에 두 내용은 쉽게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악한 농부에 비유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볼 때는 정말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마치 건축자가 볼 때 전혀 쓸모없을 것 같아서 버린 돌 정도의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사람이었다. 그것을 두고 성경에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건축자가 가진 기준으로 볼 때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돌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준에 관한 것이다. 건축자는 집을 보기 좋게 짓는 사람인데, 그가 가진 건축의 기준으로 볼 때는 버리는 것이 마땅한 돌이지만 집 주인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주 곧 집 주인이 아니면 자기 집에 머릿돌을 정할 사람이 없으므로 건축자가 버린 돌이 머릿돌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집 주인의 뜻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주인과 건축자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같이 하나님도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비단 바리새인 뿐 아니라 지금의 많은 종교지도자들과도 하나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 이렇게 싸잡아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나 예수님 당시나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생각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많은 신앙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려 하고, 같은 맥락에서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선히 여기신 결과라고 보는 것 등은 다 같은 것이다.


예수님을 경건하게 믿는 것 같아도 그 내용이 그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신앙의 성공으로 여겨지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과 같은 것이다. 절대로 다른 것이라고 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엄연히 같은 것이다. 바리새인 눈에 예수님이 보잘 것 없이 보인 것은 당시 가치관을 기준으로 볼 때 세상에서 예수님이 너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도원의 주인과 세를 받은 농부들은 포도원의 소득에 대한 가치관이 달랐다. 농부는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들을 죽여서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 했지만 엄연히 그것은 포도원 주인의 것이다. 그것과 같이 예수님에 대한 관점도 하나님과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전혀 달랐다. 포도 소산에 대한 가치가 달랐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가 달랐다는 것이다. 포도는 그리스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포도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은 다시 포스팅할 예정.)


포도 곧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생각이 포도원의 주인과 세를 받은 농부가 달랐듯이 하나님과 바리새인들과 명확하게 달랐다. 종교적인 경건성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죄인과 창녀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관습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수고를 목숨 걸고 하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볼 때 아무리 양보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꾸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니 그들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포도원에서 세를 받은 농부들은 자신들이 수고하여 포도를 얻었기에 그것이 자기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즉 수고의 결과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적 규례와 관습을 지키는 공로와 행함의 결과로 포도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공로가 그리스도가 되는 근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도원의 포도는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밭을 일으키고 포도를 심었기 때문이지 세를 받은 농부가 수고한 결과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종교적인 규범을 수고하고 지켜내는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라는 의를 가지시고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이 바로 포도원 주인이 포도밭을 일구듯 사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기로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자신들은 수고하며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지키는 종교적, 율법적인 규례를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메시야는 자기들이 목숨을 다해 지켜내고 있는 율법 행위의 공로의 연장선상에 계시는 것이지 예수님과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행위도 공로도 없는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를 받은 농부가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들이 포도 곧 그리스도의 세계를 얻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만연한 가치관이다. 공로와 수고가 없고, 교회에서 또 종교적인 업적이 없으면 천국에 갈 수 없거나 간다고 해도 말석에 갈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행함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지도 못한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생명으로 인하여 표현된 성품이지 행위로 쌓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성품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공로나 업적이나 또 세상에서 유력하지 못한 모양으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 모습은 건축자가 볼 때 아름다운 건축물에 사용할 수 없는 돌과 같이 여기고 버리지만 집주인인 하나님은 그 돌을 모퉁이 머릿돌과 같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달랐듯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 그것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이고 의(義)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를 받은 농부들의 수고나 바리새인들이 쌓은 종교적인 공로나 또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성공했다고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간의 본 모습 그대로에 원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때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인간 그 원래의 모습 그것에 있는 것이다. 포도원의 모든 포도가 포도원 주인이 포도밭을 일굴 때 이미 있었던 것처럼.


세리와 창녀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았고, 또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세상에 다 노출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마치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 앞에서 감추지 않고 나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앞에 나가는데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달랐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가진 다양한 본성과 마음들을 종교적인 규례를 지켜내는 것으로 감추었다.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모습으로 성전에 나오고 사람들 앞에 나오고 예수님 앞에 선 것이다. 마치 아담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부끄러움을 감춘 것처럼 그랬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이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너무 만연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결국 돌이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지듯 된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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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23-32 포도원의 두 아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7. 15. 16:43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서 왔기에 성전의 상을 엎고 무화과를 저주하느냐며 시비를 거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세례요한의 권세에 대하여 반문하시고 그것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자 그렇다면 예수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답하지 않겠노라 하시고 이어서 포도원의 두 아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어떤 권세를 가지셨는지를 알 수 있는 비유라는 것이다.


이 포도원의 두 아들에 관한 비유는 잘 아는바와 같이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첫 번째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니 첫 번째 아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선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에 '가지 않겠다.'고 한 다음에 가서 일을 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아버지의 말을 들은 사람인지를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이다.


이 비유 자체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중에 '누가 아버지의 말을 들은 것이냐?' 물었을 때 둘째 아들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답이 옳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생각해 볼 것은 누가 첫 번째 아들이며, 누가 둘째 아들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첫째 아들이고 세리와 창기가 둘째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이고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뜻은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왜냐하면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는지, 누가 둘째 아들과 같이 아버지가 원하는 것,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아들이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포도원의 일을 좀 하라는 명령에 답을 한 내용은 표현이다. 그러니까 형식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을 율법을 지키는 행위와 율법을 주신 목적으로 구분하여 본다면 이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 번째 아들과 같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있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는 없기에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이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 아들과 같은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은 비록 아버지에게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을 하듯이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것은 하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원래 바라던 목적인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듯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행위를 지키는 것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라 도와 의로 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본다면 요한의 의와 도는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일하러 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일을 하러 가는 것이듯 율법을 행위와 소유의 드림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도와 의, 곧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예수님의 권세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제사장과 바리새인이 보기에 분하게 여기는 일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의와 도를 전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예로 상을 엎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전하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전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가 멍멍 하는 것은 '내가 개라는 것을 알도록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지만 '멍멍'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개라서 그런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더 상세히는 그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냥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생명으로 살 뿐인데 그것을 보는 이들은 그것에 분개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환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다보니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무슨 권세로 이러냐?'하는 그 모든 행동들이 나왔을 뿐이지 그것이 '나는 이런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보이겠다.'하며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생명이 표현되듯이 사는 삶이 아니라 공장에서 물건을 제조하듯 율법의 의를 행위로 지켜내려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예수님의 행동은 자기들이 율법이라는 기준을 먼저 떠 올리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듯 예수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 행동이 어떤 힘을 믿기에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그러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생명의 법이 없는 자기들의 안목과 가치관으로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자기들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그 방식이라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런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생각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을 때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그런다고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 그들의 행태를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세례 요한은 뭘 믿고 그렇게 했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그들의 사고방식대로 예수님께서 반문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이다. 요한이 하늘의 권세를 믿고 했다면 자기들이 요한을 믿어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요한이 하늘로서 온 선지자로 알고 있는 백성들로 비난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말로 그들 자신의 가치관에 당한 것이다.)


이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판단한 결과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런 가치관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었는가 하는 것에 답하지 않으심을 보시고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권세는 믿는 구석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생명의 본능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능이 바로 권세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들들이 포도원에 가서 일하기를 원했듯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기를 바라시는데 바로 그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것을 굳이 무슨 권세인가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권세, 생명의 능력과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의와 도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가 할 때 둘째 아들과 같이 표현된 것은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 만드신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세리와 창녀 같은 이들은 이미 그들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법리로 인하여 이미 죄인인 자들이다. 그러니까 의와 도는 외면하고 행동이 어떠한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인 바리새인들의 관점으로 보면 그들은 완연한 죄인인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중심만 보시는 분이다.'와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시는 것은 중심에 생명이 있으면 겉과 표현과 행등은 그 생명에 귀속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생명의 법이기 때문이다. 삭개오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만난 다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속에 하나님의 의인 생명은 없으면서 행동만 거룩하게 하는 것은 다 첫 번째 아들의 모습이다. 행동이나 표현은 하나님의 생명이 안에 있어 나타나는 본성과 비하나 결국 향기 없는 꽃그림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은 것이다. 그림 안에 있는 꽃이 모양이 아무리 실물 같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듯, 행동이 아무리 거룩하고 온전해도 그 안에 생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죄인들은 비록 둘째 아들과 같이 그 삶의 이전 표현들은 하나님을 어기는 삶과 같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들의 삶을 바꾸어 내었다. 그들이 삶을 바꾸어 낸 권세는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같이 거룩한 옷을 입고 그 행동과 표현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씨가 땅에 뿌려지듯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인하여 삶의 형식이 바뀐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권세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나 또한 명상이나 또 훈련과 같은 것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려 노력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부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이유와 목적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고, 다이어트의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목적이 먼저인 것이다. 그 목적이 사람 안에서 생명의 DNA와 같이 삶을 주관하지 않는데 방법만 바꾼다고 삶이 바뀌지 않는 것이듯,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없는데 성경을 아무리 지키려 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얼마간은 될 것 같다가 이내 또 실패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배다 성경 공부다 기도회다 모이고 또 나눔이라면서 신앙생활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더 노력해야겠다고 서로 이야기하고 격려하고 또 때론 실패했다고 고백하고 그것을ㄹ 위로하는 것이 계속 반복되지만 문득 돌아보면 바뀐 것은 별로 없고 계속 노력하는 시간과 방법과 실패하고 새로 시작할 때 각오만 바뀔 뿐 본질을 바꾸어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예수님의 권세인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결과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후~ 불면 날아가 버리는 작은 겨자 씨 안에 새가 쉴 수 있는 큰 나무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듯이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다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떠나 이 생명이 먼저 사람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기도고 전도고 성경 공부고 뭐든지 그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다 있는 것이고 그 생명이 표현된 삶의 모습이지 그런 것을 지켜낸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가치관이 바로 성경 공부 열심히 하고 기도 열심히 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가치관이다. 즉 뭔가 어떤 권세를 행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든 헌금이든 봉사든,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은 생명이 안에 있으면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지 그것을 의지를 가지고 행하고 그 행한 근거를 바탕으로 어떤 일을 하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은 수고만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권세는 생명에 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권세와 예수님의 행하심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듯 업적을 쌓은 근거로 인함이 아니다. 바로 이 생명이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그냥 첫 번째 아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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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시장하시므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먹으려 했는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에게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그 나무가 말랐다. 다른 성경에서는 이 사건이 있던 시절이 무화과의 열매가 열리는 시절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아직 제철이 아니라서 열매가 열리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왜 저주하셨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왜 무화과가 말랐는지 물어오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보면 난데없이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답을 하신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을 하시는 것이다. 상황 자체가 뭔가 앞뒤가 잘 맞지 않아 보일 수 있다.


무화과는 유대인을 상징하는 나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실 때 잎사귀 밖에 얻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 무화과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무화과의 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


무화과에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시려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나무의 열매와 같은 하나님은 없고 잎사귀와 같은 형식만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제사 드리는 사람 안에는 하나님이 없으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며 성전에서 제물을 사서라도 제사를 드리는 것이나, 또한 당시의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모른 체 율법의 형식만 지키고 있으므로 그런 신앙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회복한 열매와 같은 사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이렇듯 하나님의 의는 없으면서 의가 표현된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하여 공생애 내내 말씀을 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나 '바리새인의 누룩'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외식에 대하여 경계하시는 모든 것의 방점이 바로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오래된 문제이고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은 시대적으로 아담이 범죄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을 자신이 익히고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인생을 지으시고 너무 기뻐하셨는데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모양을 감추려 한 것이다. 이유는 이런 모양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신앙과 관련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하나님과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는 모습이 달라진 것 그것에서 신앙이라는 것도 성경이라는 것도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지창조 또한 그렇다. 다른 것이 천지창조가 아니라 육신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세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시작이 바로 하나님 세계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 전에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도저히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이 육신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생긴다. 하나는 부족한 육신을 보완하기 위하여 육신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적인 신앙이다. 율법이라고 한다고 하니 십계명이나 유대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이라도 그것을 지켜 행하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려 한다고 생각하고 말씀을 행동규범으로, 또 부자 청년과 같이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 지로 접근하는 모든 생각이 다 율법죽의적인 신앙이다.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은 영지주의다. 즉 율법주의가 내용은 무시하고 형식만 취하려 하였다면, 영지주의는 내용만 취하고 형식은 버린 것이다. 이 영지주의는 예수님 부활 이후에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게 된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면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의 정체성을 발견한 사람들의 육신의 모습을 수용할 수 없자, 육신에 대한 가치를 저 버린 것이 영지주의다. 즉 영지주의는 시대적으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만연한 생각이다.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나 다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내용이자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라는 형식 안에 거하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즉 그렇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러 이 땅에 오셨기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오신 것이다. 그 중에 어떤 하나씩을 부정하는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는 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꼭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행위로만 지키려고 하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외식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외식의 상징인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시장한데 열매도 제공 못하니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주림은 육신의 주림이 아니라, 열매, 곧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인 사람을 보는 것에 주리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는 그런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하다는 것은, 아담이 사람의 모습이 부끄러워 무화과 나뭇잎으로 사람을 가리듯 스스로의 기준으로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온갖 율법을 지켜내는 것으로 신앙의 전부를 삼는 이들 뿐인 것이 바로 잎만 무성한 나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화과를 마르게 하시는 것을 본 제자들이 '왜 그러셨나요?' 묻는 것은 당연히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믿음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므로 그 사람이 열매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수동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또한 하나님의 생명을 먹을 수 있는 상태로 결실을 맺는 열매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잎만 무성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하니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없으면서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것만 잎이 무성하듯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고, 외식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것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명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않으면 산을 뽑아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하셨다. 물론 믿음이 있고 산을 뽑아서 바다에 던지는 것을 보이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상황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말씀은 더 깊은 뜻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은 율법이 선포된 곳이다. 또 산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러므로 산을 뽑아 바다에 던진다는 것은 율법을 자기 안에서 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율법을 세상과 같은 바다에 던져 버린다는 것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율법이 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있으면 믿고 구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하신 것도 결국은 사람에게 모든 것, 또 다 이루어진다는 것은 사람으로 사는 존재의 의미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돈 필요할 때 기도하면 돈 생기고, 시험에 붙을 것을 믿으면 시험에 붙는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돈이 필요하고 시험에 합격해야 하고, 좋은 배우자가 필요한 상황 자체가 이미 불완전한 상태고 다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은 믿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일이 아무리 반복되어도 늘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어 사람에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육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열매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시장하심을 채울 수 있는 열매고 양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에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존재의 이유가 이루어졌다면, 그 존재는 무엇을 해도 다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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