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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하나인 삶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2. 15:38 Writer : 김홍덕

모든 것의 순서와 인간 존재의 목적



많은 신앙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규칙이나 규범처럼 지킴으로 그 공로를 하나님이 평가하셔서 천국에도 가고, 또 천국에 가서 부자로 살 것인지 아닌지도 결정이 나며,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내일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필자의 모친이 나에 대한 꿈을 꾸었는지 전화로 ‘네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복권을 산 적이 있었다. 결국 그 복권은 당첨되지 않았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일확천금이라 생각했구나!’하며 돌아본 적이 있었다. 나의 그런 오류정도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면 살 동안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나고, 죽어서 천국에 가며, 천국에서의 상급도 그 공로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그것과는 방향이 반대이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가 자신에게 생명이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된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삶의 본성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이니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 의에 이르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기에 성경대로 살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고, 모든 신앙인들이 닮기를 원하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그 육신으로 성경에 기록된 삶을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이 순서를 모른다. 모르기도 하고, 설사 그렇게 의가 있으면 삶은 성경대로 살게 된다고 해도 믿지를 않는다. 그것은 아주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이라는 것이 늘 의문스럽고 무엇보다 힘든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되어야 할 일을 신념을 가지고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되었으니 어찌 힘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경우, 어떤 상황, 어떤 말씀과 사람의 일에 있어서도 성경은 분명한 순서가 있다. 항상 하나님이 먼저 시작인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보다 먼저 계셨으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사랑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성경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의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 사람이 성경을 문자로 읽고서 그것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어떤 신앙생활도 헛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더하여 진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성경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그렇게 뇌까리고 설교하고 공부하면 그 순서를 망각하거나, 성경을 지켜 행함으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사고방식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또한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닮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든 삶이 말씀에서 나오는 것,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인데도 왜 먼저 말씀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살다가 버리고 갈 이 육신, 그리고 백년도 살지 못하고, 또 살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이 세상의 일을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기를 그렇게도 바라는 것인지 그 또한 정말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은 존재의 이유가 먼저 있고, 그 목적에 맞게 창조되고 만들어 지는 것이다. 사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이 존재한다면 분명히 존재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를 채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찾았다면 살아가는 모양이나, 성별이나, 학력이나, 국적이나, 빈부의 차이나, 학력의 차이와 같은 그 어떤 사람의 차이와 무관하게 사람이기만 하면 수행할 수 있는 목적이어야 사람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부자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부자의 존재 목적일수는 있지만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니고, 올림픽 금메달은 운동선수의 존재 이유일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은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너무나 많은 삶이 있었음에도 통일된 것이 존재의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삶에 의문으로 남은 것은 언어가 혼돈케 된 바벨의 일과 같은 것이다. 많은 이들이 사람이라는 것이 아닌 사람이 가진 삶의 어떠함을 가지고 삶의 목적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복음이 비밀일지 모른다. 사람들의 눈이 멀고 소경이라고 하시는 것은 너무나 뻔한 것, 너무 가까이, 아니 자기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은 자신의 존재 안에 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무화과 나뭇잎, 즉 공로를 본질로 아는 율법과 같이 사람의 본질이 아닌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할 세상의 것을 본질로 알고 그 본질이 자신을 위대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원래 모습이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시고 만드신 후에 그렇게도 좋아했던 모습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라.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감추고 싶은 모습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높이 달렸는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시지 않는가? 그러니까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이유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부끄러워했던 원래 연약한 사람의 모습을 인정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머리로도 손과 발로 이루는 모든 행동으로도 또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는 옷과 같은 사회적 신분 어느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내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채워지는 빈 그릇이 되는 것이다. 즉 그제야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인생이 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으로 뭐든지 된다면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또 자신의 신분이 자신의 모든 부끄러움을 감출 뿐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살게 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님을 가시관을 쓰심으로, 또 못 박히심으로, 또 발가벗겨짐으로 인간이 자기 생각과 행동과 신분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즉 자신의 생각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 아님을 아는 사람, 손과 발로 대변되는 모든 행동이 자기의 뜻이 아니라 지으신 이의 뜻을 표현해 내는 것임을 아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라는 것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다. 즉 자기 존재의 목적이 그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 곧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 그리고 존재의 이유와 목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생으로 생각이 미치고 삶이 미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있어 하나님의 의가 먼저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존재 목적이자 이유인 것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으로 보임으로 깨달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제 아무리 대단한 종교적 업적이 있어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즉 하나님과 하나인 삶,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과는 반대에 있는 삶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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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 (4)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2. 14:22 Writer : 김홍덕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6-8)


예수님의 기도문 중의 일부이다. 이 기도에는 우리가 왜 하나님과 하나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냥 성경을 읽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아니다. 이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비판하듯 하는 것 보다, 무엇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칼을 다룰 때 칼이 장수의 뜻대로 움직이면 하나가 된다고 하고, 타고 있는 말이 기마병의 뜻대로 움직이면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가진 육신과, 그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형식으로 도구로 잘 사용되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제사보다 사람의 순종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아는 믿음은 믿음의 근간이 다른 믿음이다. 육신의 삶을 살면서 겪을지 모르는 불행을 하나님께서 막아주고, 또 이 세상에서 영화를 누림으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도왔다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 믿음은 선후가 바뀐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잘 살게 되고 영광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형태지 그것이 믿음의 증거는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난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일 뿐이다. 즉 다른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삶이나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 없다. 오직 예수 외에는 구원 얻을 이름(정체성, 생명)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같은 삶이 아니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없고,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삶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아버지(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삶과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므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준 사람들,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도움이 나에게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가 삶의 모든 것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지으신, 또 세상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것이기에 결국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조종사(훈이)가 없는 로봇태권브이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닌 그냥 죽은 사람일 뿐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a christ)가 된다는 것, 십자가를 진다는 것, 제자가 된다는 것 등등 이 모든 성경의 말씀은 분명한 순서로 하나님의 의가 먼저 사람 안에 있어서 그것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먼저 보여주신 예수님은 그래서 말씀(하나님의 의와 계획과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사람이라는 형식의 내용이 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중 중요한 구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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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1. 08:05 Writer : 김홍덕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



성경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찌로다(창 2:24)

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보면 둘이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한 성경의 처음 말씀일지도 모른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과 같이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같은 개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녀가 결혼하여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을 두 사람이 같은 기능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듯,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두고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바보 같은 생각인데 우습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가 되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남녀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을 가지고 생각하면 언뜻 쉽게 <하나가 된다는 것 =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하여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 이 의미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면 그렇다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남자와 여자라는 주제를 이야기 했다. 그때,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한 예표요, 그런 법을 가지신 하나님의 법이 사람의 삶으로 나타난 것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는 것을 이야기 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 역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 같은 하나님의 법에서 비롯된 말씀인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후손을 얻는 이 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와 법이 사람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으로 아이를 얻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신바 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 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라고 한 답의 질문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즉 베드로에게 <“너와 나는 어떤 관계이냐?”>, <“너에게 나는 어떤 의미이냐?”>라는 물음인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베드로가 <예수님은 주(主)님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답변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이다. 반면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는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했다. 예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저렇게 매 맞고 심문 받고 있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도망갔던 것이다.


이처럼 사람과 하나님, 또한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수님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관계인지 그것이 정립되는 것이 바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듯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과 의미를 가진 주(主)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과 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서 자신에게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신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의미가 있는 관계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또 예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형식에게 온전한 내용이 결합하는 것, 곧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미와 목적이 사람에게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인 것이다.



온전한 내용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는 존재이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고, 의미가 없다는 것은 곧 죽은 것과 같은 것이다. 유리로 된 망치는 못을 박고자 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이고, 또한 의미 없는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못을 박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많은 의미를 가진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도 이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믿음이 아닌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께 뭔가를 바쳐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잘못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나를 아프리카로 보내주시면 내가 선교사로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와 같이 어떤 조건을 사람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자신의 존재목적이 되면 아프리카에 살든 한국에 살든 아무 문제없이 하나님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이 사람은 어디에서만 나의 뜻을 나타낼 수 있다.’라고 지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게 하실 때 그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아들의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이다.


즉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의미가 있어야지, 사람이 어디에 있을 때만, 어떤 능력이나 사회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나님께 의미가 있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어떤 것을 이루어주시면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다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육신의 삶이라는 이 형식이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께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형식으로 내용을 바꾸어내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먹고 나니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이라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그 모습 그대로가 원래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인 모습이었는데,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어떤 조건을 달았더니 죄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담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넣으셔서 생령이 된 모습,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모습인 것을 버린 것이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부인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여기는 오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즉 신앙이라는 것이 인간이 가지니 연약한 모습을 이겨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버리고 싶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온전한 내용, 즉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그 모습 그대로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그런 순종, 그런 수동적인 본연의 믿음이 없으면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주술사나 도깨비 방망이 이상의 의미는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기 모습을 부인하면서, 그것을 부인하기 위하여 가진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달라고 떼쓰는 것을 믿음이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온전한 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육신으로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 그 삶을 추구하는 것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시고, 반대로 그 일에 방해가 되는 불행한 것들은 막아주시는 신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사랑하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씨를 훔치듯 아들을 얻는 것과 같을 뿐 전혀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자기 삶의 의미인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의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된 것이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특히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쉬운 말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무슨 권력으로 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신앙이 있다는 이유로 신앙이 없는 이들을 그렇게 하대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닐 것 같지만,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 자체가 그렇다. 그것은 진정한 오만이다. 십자가의 도가 아닌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그렇게 도도하고 오만한 자세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의를 전하기 위하여 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진 세상의 법으로 자신을 심판할 때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교회에 가자고 하는데 놀러 가는 것을 보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있기까지 종이 된 모습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의고, 육신을 가진 이유이다. 육신은 그런데 쓰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과 같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사람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육신을 수고 중에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수고의 최고봉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임을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다. 육신을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육신을 가진 삶에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온전하게 의미가 있어지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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