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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1-15 부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9. 5. 13:28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되심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것이야 죽었으니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죽으심 자체가 큰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렇기 때문에 장사되심 역시 그렇다. 죄인으로 죽이심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십자가를 보면서 서울을 보듯, 놋 뱀을 보듯 그것이 죄인 된 나의 모습이요, 그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표상이었듯, 주검으로 무덤에 뉘었다는 것 역시,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고 죽임 당한 자와 같은 삶을 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에 대하여 죽은 자들, 또한 사망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신다. 이는 물론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없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표현들이 육신적으로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피조물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가지 않는 멀쩡한 시계를 보고 죽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반대로 육신이 살았다고 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살아있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영원에 관한 것이다.(영원은 지금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고 다음에.) 그런 관점에서 무덤에 장사 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산 생명인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나타내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나타내신 예수님은 그 몸이 설사 무덤에 죽은 자로 누워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 안에 사람의 유전자와 본성이 있어서 육신의 모든 삶과 행동이 사람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정체성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정한 생명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활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시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부활이라는 것이 별게 아닌 것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인생을 부활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기준으로서의 명확성은 분명하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살리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이 살아있다고 하나,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이들이 사는 법 역시 같은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는 것, 곧 구원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거듭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거듭남과 부활은 그 법이 같다. 그래서 죽어서 믿는 자는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거듭남이든, 부활이든 어쨌든 살았다고 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서 믿는 자는 산자와 같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믿어 산 자는 육신을 죽인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정말로 분명하게 짚고 갈 것은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기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정체성이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생명의 주관자이시다. 그것은 어떤 행동이나 공로나 소유의 드림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어떤 생명을 가진 존재인지가 분명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 열심히 하고, 전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 가서 청소하고 봉사하며 또한 세상에서 아주 도덕적으로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것이 중요하나, 그 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생명이 그 안에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산 자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기도도, 봉사도, 도덕적인 삶도 그 생명에서 비롯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인 사람의 정체성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부끄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이고 실패자요 죄인인 인간의 연약한 모습, 사람이라면 다 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감추고 싶은 인간 본연의 모습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는 죄인이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자 중에서 살리실 수밖에 없는 살아 있는 생명이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된 존재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또 하나의 그리스도(a christ)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통하여 그런 생명을 가진 이를 살리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니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십자가와 죽음과 무덤에 장사됨과 그리고 부시 살리시는 부활로 보여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생의 운명이고 그것이 사람을 지은 목적을 아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의며, 인생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고 보이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장사되신 예수님을 무덤에 두고, 예수님을 그렇게 죽인 자들이 돌로 무덤을 막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안에 두실 수 없다는 것이다. 돌로 막았다는 것은 율법으로 막았다는 것이다. 즉 형식으로 의에 이른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가치관으로 막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서 말씀하시기를 그(예수님)는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부활은 정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도 기적이지만, 그것이 이 기적의 본질이 아니다. 이 기적의 진정한 본질은 인간의 정체성을 인정하므로 죄인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고 살리신다는 것, 그것이 기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감출수록 세상에서 성공하고, 심지어 교회나 신앙 안에서도 그렇게 고상해지고 유력해져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인간의 연약함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하고 인정할 때 죄인이 되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죽은 자와 같이 되어 버린바 되고 외면 받는데,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심으로 오히려 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것이 부활의 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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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57-66 무덤에 묻히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9. 4. 15:0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 해서 받아와서 자신이 죽으면 묻히려고 예비했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내었다. 그런데 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이 혹시나 실제로 일어날까 싶어 무덤을 봉하고 그것마저 안심이 안 되어서 병사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까지 줄곧 이 마태복음의 말씀이 오늘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해 왔는데, 그렇다면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오늘 예수님을 믿고, 그의 제자가 되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또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기독교신앙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죄를 시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그 죄로 인한 처우를 인정하고 수용하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안 되면 신앙에 갈등이 생긴다.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자신들이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죄를 시인하면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문자대로 읽고서 스스로 그 말씀으로 자신을 의롭게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죄를 시인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의롭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하게는 의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로워지는 것은 아주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내가 죄를 시인했으니 이제 나는 의롭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것이다. 그러니까 분명하게 죽었고, 그 죽음이 순종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신 것이 믿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지 말라는 행실의 교훈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이유를 알면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신바 된 것은 사람이 자기의 정체성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닫고 나면 그때까지 자신이 가졌던 신앙이 철저히 죽고 나와야 한다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무덤에 주검을 장사 지낸다는 것은 정말로 확실한 죽음의 결과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지낸바 된 것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의하여 살던 자아와, 또한 그런 가치관 앞에서는 철저히 죄인이 되고 장사지내는 것과 같이 확실한 죽음의 과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죽음은 예수님을 죽인 가치관이 무덤의 입구를 막고 지킬 정도로 확실하게 하고 싶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죽음을 당한 이들을 살리신다. 그런 죽음의 과정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전의 가치관이 아닌 그리스도의 가치관, 하나님의 의, 하나님 나라의 법,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교회의 집사님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돕게 되었는데, 산에 안장하는 것 까지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시아버지는 유교에 속한 분이었는데 살아생전에 다른 이가 죽으면 묘 터를 점지하고, 관을 놓는 방향 등을 봐 주시던 그런 분이었다고 했다. 어쨌든 그런 분이 돌아가셨으니 남아 있는 이들 중에서 또 그렇게 관의 방향을 정하고 묘 터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자 그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아내, 곧 시어머니가 그것을 보면서 한마디 하시는 것을 가까이서 우연히 듣게 되었다.


“영감 살아 있었으면,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 할 텐데, 자기가 죽어 있으니 아무 말도 않네!”라고


그것이 죽음이다. 죽었다는 것은 어떤 시비,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도 무덤에 장사되셨다는 것이 바로 그런 상태다. 유대인과 로마인의 가치관에서 죄인이 되고, 그런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인 우리 모습을 대속하시며 보이신 예수님은 명백히 그들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었고, 또한 그들의 가치관으로 장사될 정도로 분명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을 죄인 만들고 죽인 그 법 앞에서 시체와 같이 아무런 것도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죽어졌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죽은 자로 여기시는 것이다. 그래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의 제자로 또한 그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가치관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 무덤에 장사지내는데 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이 자기를 맘대로 하도록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삶을 포기한 듯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또한 언제나 영원토록 세상을 경영하시고, 또한 실수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경영하는 세상을 살면서 그 안에서 세상이 이러네, 저러네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덤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하여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심판 받아 죄인이 되고 죽임 당하신 분이요, 사람은 그렇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부끄럽고 죄인 같아도 그것을 자신의 모습이라고 들린 놋 뱀과 같이 십자가에 죄인이 되어 달리신 예수님의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도 그 신앙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 되려면 당연히 그 분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과정을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다 거쳐 내어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일점일획도 남김없이 지켜야 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모든 삶이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하라는 것이 아니다. 따라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다 지켜내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자기 안에 본성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본성대로 살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의 옆으로 걷는 걸음처럼.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은 생명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명은 생명이 낳는 것인데, 생명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성경을 믿으면 산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속에 불어 넣어져서 그 생기가 생령이 되고, 사람의 본성이 되면 다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방법이 아니라, 성경을 조각내고 각 부분별로 연구해서 마치 인형이나 마네킹을 만들고 그 안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는 것과 같이 성경을 지켜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세상을 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잘 경영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것을 역행하려 하니 힘든 것이다. 남들처럼 살아야겠다고? 누가 당신은 그래야 한다고 정해 주었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으로 지으신 뜻대로 사는 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그럴 때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창조주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베드로와 같이 세상에 대항하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우리 모습이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런데 신앙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이기려 하고 바로 잡으려 하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고 죽임을 당하면, 그렇게 자신이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수용하고 순종하면 무덤에 장사지낸 자와 같이 될 것이로되, 그 때 하나님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법이 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무슨 권세나 마패쯤으로 알고 세상을 사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굳이 살릴 이유가 없는 존재들이다. 자기 스스로 살았다고 설치며, 더욱이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칼과 성경의 말씀을 조각으로 휘두르면서 사는 사람은 무덤에 있는 이가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살리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이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법 안에서 죽은 자로 보시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살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생명과 연결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요 죽은 자와 같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스스로 죄인이라면 할 말이 없을 것이요, 죽은 자는 반응이 없을 것이다. 능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의 법과 가치관 앞에서 죽은 자요, 무덤에 장사된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을 보이시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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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하늘의 해가 그 빛을 잃었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져서 성소와 지성소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덤이 열리고 많은 성도의 몸이 일어났고 그들이 거룩한 성(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은 다 놀라운 것이지만 그것이 아무리 놀라워도 그런 사건들을 통해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인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놀랍긴 하지만 나에겐 의미가 없는 그냥 사실에 불과한 것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일어난 사건이 나에게 일어나느냐 하니냐 하는 것이 정말로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내가 왜 예수를 믿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과 함께 일어난 일들이 어떤 것인지 볼 필요가 있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치신 것이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가상에서는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마태복음은 하나만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렸나이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것인가? 그리고서 다시 찾으신 것인가?


예수님께서 죽으시게 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정해 놓은 사람의 정체성을 떠나서 살고 있다는 것과, 그런 자리에서 돌아오기를 바라시면서 원래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를 떠난 모든 인생들, 그들의 모습을 보이시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유대인과 로마인의 가치관에서 볼 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세상의 법 앞에서 실패자로 또 죄인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아의 개념에 미치지 못하고 로마인이 가진 왕의 모습을 가지지 않으시듯, 우리도 종교적인 경건을 유지하여 의인에 이르려고 하다가 늘 실패하여 죄인이 되고, 세상의 경쟁력에서 언제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앞에서 패배자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유대인과 로마인은 그런 모습을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처형하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그런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그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인정한다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신 모습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 달려서 부르는 “나의 하나님”, 예수님을 버린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가진 자기 하나님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 하나님이란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듯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을 말한다.(그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나의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신분이 죄인인데, 예수님의 신분을 죄인으로 만든 가치관의 하나님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자기 하나님을 좇는 사람들의 모습을 십자가에서 보이시는 것이다. 그 모습은 죄인이다. 이 죄인이라는 것은 이중성이 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고,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죄인이라는 것이기도 한 동시에 유대인의 가치관과, 정말로 왕이 되리라 기대한 제자들의 가치관과, 능력과 공로에서 이겨야 왕이 되는 로마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인간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이 공존하는 모습이다.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광야에서 들린 놋 뱀에 비유하시면서 자신이 들려야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놋은 거울이고 그 거울의 모양은 뱀이었다. 그것을 보는 이는 살았고, 그것을 보지 않은 자는 죽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뱀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는 살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는 죽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역시 거울이고, 또한 죄인이다.


즉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던 그런 죄인이라는 것을 거울과 같이 비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기준에 예수님이 죄인이었지만, 달리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거울과 같이 비춰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비춰질 때 그 때, 그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 제자들로 치면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이 되리라 믿었던 예수님, 유대인으로 치면 똥도 누지 않을 거룩한 모습을 가진 메시아, 그리고 세상에서 돈이 자기 하나님이었던 사람의 돈, 능력이 최고라며 내 주먹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람의 주먹과 같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외치신 “나의 하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라는 이 외침은 시편 22편 1절의 말씀이기도 하다. 시편 22편의 1-2절은 나의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하고 있고, 3절에 들어가면 영어 성경은 <But>이라고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사람이 스스로 만든 “나의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 곧 구분되는 여호와와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모습은 부끄럽게 여기고 세상적인 것으로 성공하여 인간의 연약함을 감출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스스로 만든 그 하나님, 하지만 그 가치관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또한 그 하나님의 힘의 근원인 머리의 생각이나 손과 발의 행동이나 옷과 같은 신분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나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함을 보여주시는 자리에서 외치신 것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우리 스스로 만든 하나님이요 우상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우리는 놋 뱀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우리 스스로가 만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이 우리를 뱀과 같이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십자가를 볼 때 자신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또한 사람을 규정하고 믿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믿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 로마인의 신과 같은 그 가치관은 오히려 나를 늘 죄인으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십자가가 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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