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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25. 15:42 Writer : 김홍덕

이원론적 관점이 보는 믿음과 행함



또 하나,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이원론적 사고에 있다. 믿음과 행함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온전한 믿음이 있으면 삶은 자연적으로 성경말씀을 지키면서 살게 된다.’고 말을 하면 믿지 않는다면 이원론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가 왜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는가 하면, 믿음이나 행함은 분리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믿음이 중요하냐? 행함이 중요하냐?”>라고 묻고, 답하고, 어느 것일까 고민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철저히 믿음과 행함을 분리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행함은 믿음의 표현이고, 믿음은 행함의 내용이니 그것은 당연히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이신 하나님께서 이원론적인 창조를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 ‘어떻게 세 분(위)이 하나가 될 수 있지?’라는 의문이 잔존하는 것 역시 같은 관점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다른 개체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위로 나타나심은 의와 뜻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참 뜻을 깨닫게 감동케 하시는 영이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 창조하신 목적과 인생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일을 담당하시는 역할에 따라 표현되심이 다른 것을 삼위라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내용이 어떻게 표현되느냐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성경을 보는 전반적인 오류 혹은 착시인데,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팽배한가 살펴보면, 대표적으로 ‘술 마시는 것이 죄인가?’, ‘노래방 가면 안 돼?’와 같은 의문으로 표현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질문은 모든 교회에 숨소리처럼 존재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끝나지 않은 의문이다.(노래방이나 술 문제는 우리 교회에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원한다면 그것 아니라도 그렇게 이원론적인 가치관은 얼마든지 찾아 줄 수 있다.)


왜 그런 문제들, 술 마시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이 이원론적 가치관이냐 하면, 술 마신 것이라는 하나의 행위를 두고 ‘선’하냐? ‘악’하냐 하는 둘 중에서 결정하는 것과, 그 결정이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술 마시는 하나의 행위가 선이 되든지 악이 되든지 두 가지(이원) 중의 하나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 어떤 것이 악한 것인지 양단간에 결정을 해야 제대로 된 신앙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그렇게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술을 마셨다는 행위보다는 왜 마셨는지가 중요하다. 술을 마시도록 한 내용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직업이 소몰리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직업을 가지지 말라고 할 것인가? 그러면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살인은 무조건 죄라고 치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까 사람이 하는 행위 하나를 두고 선이냐 악이냐 판단하고 그 결과 선하다고 인정되는 것만 하는 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이원론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선악과가 끊어 버린 내용과 형식의 연결고리



사람들이 그렇게 사람의 행위 하나를 객관화하고 나서 그 행위가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판별한 후에 선하다고 판정된 것만 하는 것인 신앙이고 선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벗은 자신의 모습은 그저 부끄러운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생각 이후에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동 그 자체, 행동과 행위를 선악의 기준으로 나누고, 선으로 결정되고 동의한 것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스스로 사람의 행동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선과 악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선과 악 어느 하나가 사람 안에 없다면 어떻게 나누겠는가? 모르는데. 그리고 그 선악의 기준에 합당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같은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슬람 국가의 기준으로 보면 서방세계에 대한 테러가 선이고, 서방세계에서는 악이다. 비단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교계의 총회나 노회의 다툼 역시 같은 구조이다. 문제나 사건은 하나인데 어떤 이는 그것을 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결정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한이 아니라면, 자신의 본분이 아니라면 외칠 이유도, 싸울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즉 그 문제에 대하여 자신이 선과 악을 결정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관점,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이라는 하나의 존재가 보이는 행동을 판단하는 관점이 이원론이고 그 관점으로 보면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어 버리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행위가 사람이라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즉 사람의 모든 행동은 아무리 다양해도 한 사람에게서 나오고, 모든 인류가 각각 다양한 삶을 살아도 결국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시장에 사과가 아무리 많아도 다 사과지 그것이 좀 파랗다고 큰 매실이 되지 않지 않는가?


즉 사람의 모든 행동은 결국 사람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다. 그것을 알면 사람의 행동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정체성 자체가 온전한가 하는 것이 쟁점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일원론이다. 즉 사람이 존재의 목적에 맞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선함과 악함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존재 목적에 맞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맞는 시계와 시간을 알려 줄 수 없는 시계는 모양이 같아도 다른 존재인 것이다. 하나는 시계고 하나는 고물일 뿐이다. 이것은 같은 하나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선한지 아닌지의 문제인 것이다. 목적에 맞는 존재, 그렇지 않은 존재 이 둘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원론은 같은 것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들이 믿음과 행함을 다른 것으로 보는 관점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술 마시는 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지고 있다면 반드시 믿음이냐 행함이냐를 따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같은 생명이 다른 모습을 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급하다고 ‘멍멍’하지 않듯이, 사람이 하는 하나의 행동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사람은 반드시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해내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믿음과 행함은 같은 것이다. XY염색체와 남자가 같은 것인 것과 같은 것이다. 강아지의 DNA와 사람을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개의 DNA가 믿음이라면 개가 사람을 따르는 행동이 믿음의 행함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나눠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야고보 사도께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영혼의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사람 안에 내용과 같이 본질로 자리하고 있으면 생명이 행동으로 표현되듯이 자연스럽게 지켜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 ‘어떻게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다 되겠느냐? 실천하는 것이 있어야지’ 한다면 신앙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단언컨대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처럼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생명으로 인하여 본성처럼 살아본 순간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 결국은 율법주의 아니면 영지주의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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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24. 16:59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본성이 표현되는 사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서 그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육신의 의지를 가지고 지켜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미묘한 차이로 보이고 어떻게 보면 그게 그것 아닌가 싶겠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기본적으로 말씀을 지켜내는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 그 말씀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된 사람은 안에 있는 생명이 밖으로 표현되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면, 말씀을 지켜 행하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육신을 변화 시키면 생명이 바뀌어서 천국에 가는 정체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향이 밖에서 안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감동이 심령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이라는 것은 사람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을 보았을 때 자기 안에 자신이 본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내는 생명이 되게 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되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고, 그 모습을 보고 내 안에 예수님과 동일한 의가 생명이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놋 뱀을 본 백성들이 본 것은 뱀 모양의 거울(당시 청동은 거울의 재료)이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뱀의 모양으로 비쳐지는 것을 본 것이다. 바로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뱀에게 물려서 죽게 된 자리에서 치유가 되었었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들려야 하리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 물려 죽게 되었듯,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에 빠져서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같이 되어 있는데, 뱀 곧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그것이 바로 죄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잘 되지 않지만 성경의 말씀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삶을 보니 그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의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행동과 삶의 모양을 주관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말씀을 지키려는 사람은 안 되는 것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반대로 안에 생명이 있어서 그 생명이 나타나고 표현되는 사람은 성경을 지키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차원이 다른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행함은 믿음이 표현되는 것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성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기도 안 해도 된단 말인가?’라든가, 아니면 ‘그게 어떻게 되는가?’ 라든가, ‘그럼 마음으로만 믿으면 행동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사실 그런 답을 들을 때 마다 ‘어떻게 이렇게 짜 맞춘 듯 같은 생각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이미 성경에서 말씀하신바 된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약 2:18-19)


사실 이는 놀라운 것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믿음과 행함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함은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면 이상하게도 행함과 믿음(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신앙의 행함은 심령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는데도 듣는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데 어떻게 믿음이라 할 수 있느냐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도 영혼이 있어야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듯이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말씀을 전했는데 동일하게 행함과 믿음을 분리해서 반문했기 때문에 야고보서를 기록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본성이 행함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하나를 두 개로 나누어서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라고 하시는 것이다. 믿음이나 행함이나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나누어서 행함이 있고 믿음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이러한 논제가 아니어도 경험이 없는 사람은 믿지 않고 오히려 말이 많은 것이다. 즉 자기 안에 행함으로 또한 삶으로 표현될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있다면 자기 안에서 삶으로 표현되어지는 그 본성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진 식욕이 훈련에 의하여, 참고 버티듯 철야기도 하듯이 익힌 것이 아니듯이, 심령에 성령의 감동으로 거듭난 생명이 있으면 그것은 자기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자신의 삶이 그 의의, 믿음의, 말씀의, 생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땅에 씨가 심기듯 심겨져서 그것이 빛과 물로 싹이 나듯 성령의 감동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게 되어 행동과 삶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생명과 삶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삶이 그리스도인(a christ)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본성이 같은, 유전자가 같은 생명을 가진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같은 본성 안에 있는 삶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손에 쥔 사과가 사과(라는 세계) 안에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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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란?



책이나 드라마 또는 영화와 같은 것의 의도(본질)은 무엇일까? 심심치 않게 심청전 이야기를 해보는데 심청전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누구나 알듯이 <효(孝)>다. 하지만 심청전의 내용에 ‘효’라는 말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누구나 심청전을 읽고 나면 그 주제가 ‘효’라는 것을 다 안다. 심청전은 ‘효’를 전하고자 쓴 글이자 책인 것이다. 즉 심청전이라는 책과 그 책을 구성하고 있는 글자와 종이는 형식이고 그 내용은 바로 ‘효’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인 ‘효’는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 내용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고자 했다는 것은 심청전을 읽은 사람들이 그 부모에게 효도하기를 바라는 의도가 있었고 그것을 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사람이 자신을 바꾸어내는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설명한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의도를 전하는 것이고,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작가의 의도에 동의하므로 자기 안에 있는 마음들이 작가가 의도한 것을 삶으로 표현해내기 위한 시도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심청전을 읽은 사람은 부모님께 효도하고자 하는 행동을 시도하고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용을 형식으로 표현하고, 형식을 인지하는 사람이 형식을 통하여 내용을 자기 안에 땅에 씨를 심듯 받아들이고 그 씨가 싹이 나고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듯 형식을 통해 받아들인 내용이 다시 자신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아니 영이신 하나님, 내용이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시는 그 본성과 법 안에서 창조된 사람과 세상이기에 이 하나님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이치가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는 그 생기를 사람에게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했고, 타락한 사울을 보고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고 하셨고, 예수님은 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내용을 받아서 자신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하므로 그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다시 내용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삶으로 표현되어 다른 사람이 내용이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을 깨닫게 되는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내용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듯 의가 형식으로 표현된 것을 보고 자기 안에 형식으로 표현된 의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시고, 예수님께서 삶과 십자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심을 보고 자기 마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뜻이 깨달아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삶으로 십자가로 보이신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표현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것을 인지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가 예수님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비쳐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비쳐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의와 말씀, 곧 내용이 제대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 안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도 작가와 독자가 있고, 놋 뱀도 보는 이에게 의미가 있었듯,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나타낸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그것을 온전한 하나님의 의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 아니 받아들여지는 일이 있어야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은 성령으로 그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잉태되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표현되었다는 것은 인지되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을 <의미>라고 한다. 꽃이라 불렀을 때 꽃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깨닫는 일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요한 사도가 고백했다는 것은 요한 사도 심령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즉 요한 사도 심령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고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 안에 성령이 계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 모든 세상의 법이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사람과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를 모르면 다른 것도 모르는 것이므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본질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을 본질로 알아서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얻고,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교회고 그것을 구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본질은 모르고 형식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the Christ)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a christ)가 된다는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이가 그리스도이시듯,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자기 안에 그 생명이 자신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사람 역시 그리스도(a christ)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라며.


하지만 이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같이 되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본질로 알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곧 의가 육신이 되신 그러니까 삶으로 표현하신 분이심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도 예수님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본질 곧 자기 삶의 내용이자 생명으로 여기며 살게 된다는 것을 알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 하나의 작은 예수 곧 그리스도인(christian=a christ)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것이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자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의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사람이다. 즉 삶의 내용이 하나님의 의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본질이자 내용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라는 형식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표현된 것을 보고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을 가진,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또 낳고 하는 것이 영원하듯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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