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2

사로잡힌 롯을 구한 아브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30. 15:58 Writer : 김홍덕

롯은 떠났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그게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에게 롯과 같은 본성이 우리 안에 계속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람이 롯과 함께 있을 때는 기근이 나니 자기 정체성을 채우러 애굽으로 가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 롯의 본성과 같이 행하지 않고 오히려 위대함을 다투는 전쟁을 다스려 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에 있었는데 바벨탑을 쌓은 땅 시날의 왕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과 소돔과 고모라성의 왕들이 연합한 연합군과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먼저는 그 전쟁을 시날 왕의 연합군이 이겨서 결국 롯도 잡혀가 버린다. 즉 위대함을 다투는 전쟁에서 롯이 패한 것이다. 롯은 위대한 애굽이 좋아서 갔는데 그 전쟁에서 진 것이다. 즉 사람이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과 싸우니 항상 더 강한 자가 있어 결국은 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렇게 끌려간 롯을 자기 집에서 기르고 연습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시날 왕 연합군을 물리치고 롯과 그의 모든 소유를 다 찾아온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은 롯과 함께 있을 때에 갈등이 있었다.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가기도 했다. 그것은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롯의 본성으로 해결하려 했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인간의 허전함을 채우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롯의 목자들과 자신의 목자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그 땅이 자신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곳을 떠났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에 도착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도착한 것이다. 이 아브람의 모습과 여정이 우리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이르려면 애굽을 좋아하는 본성과 자신의 본성이 다투는 것을 보면 그 땅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 상태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을 보면 떠나라고 하셨다.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 내용과 형식이 다른 것을 보면 그 땅을 떠나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헤브론에 이르기 전까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었다. 애굽으로 가기 전에도 그곳이었고, 애굽에서 사래를 빼앗길 뻔하고 돌아와서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아브람을 수용할 수 없었다. 즉 하나님도 아니고 세상도 아닌 자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가려는 사람에게 그 땅은 만족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군에 있을 때에 일찍 일어나 기도를 했는지 아닌지에 따라 일과가 달라진다고 느꼈다. 그러면 그냥 ‘열심히 기도하자.’ 이랬을 수도 있었는데 그건 제대로 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유일까?’, ‘다만 산신령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그저 하루 편하게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굿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라고 생각했다. 내 안에 있는 롯의 목자와 아브람의 목자가 다툰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Do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Be에 관한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그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필자의 경험이 모든 사람의 공통분모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보이고 또 어떤 소유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보응하신다는 것이 자신이 믿어야할 하나님인가 생각하거나, 세상에서 위대해지려고만 하는 교회에 자신의 영혼과 정체성을 맡겨도 되는지 고민하지만 아브람이 롯과 갈라서서 헤브론에 이른 것과 같이 그 자리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아브람은 우리 신앙의 여정을 보이고 있다. 아브람은 그런 자리가 자신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떠났다. 그리고 롯의 본성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서 남은 땅으로 갔는데 그곳이 바로 헤브론, 곧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우리 안에 있는 애굽의 본성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본성은 서로 위대해지려는 다툼에 의하여 사로잡혀 가 버리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심과 비슷한 것이다.


롯은 아브람을 떠났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아브람을 떠난 롯이 살아 있듯이 우리 사람 안에는 늘 롯과 같은 본성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싸워 이기려 한다. 하지만 무엇으로 이길 것인가 할 때, 바벨탑을 쌓은 시날 왕을 대적하여 소돔과 고모라가 맞서 싸워봤자 이기지 못하듯,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을 애굽과 같은 물이 흐르는 땅의 사람들의 방법, 곧 애굽의 방법으로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은 행위나 소유를 드림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수녀원에 젊은 수녀가 들어왔는데 남자 생각을 이기기 힘들어서 원장 수녀를 찾아 갔다고 한다. 그러자 원장 수녀는 권총을 한 자루 주면서 남자 생각이 날 때마다 이 총을 쏘면 남자 생각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권총을 받아들고 온 젊은 수녀는 남자 생각이 나자 총을 쏘았다. 그러자 난생 처음 들은 총소리에 놀라서 남자 생각이 싹 가셔 버렸다. 젊은 수녀는 ‘역시 원장님이구나!’ 생각했지만 이내 총소리에 적응이 되고 효과가 없어졌다. 그래서 다시 원장 수녀를 찾아 갔다. 그러자 원장 수녀는 큰 엽총을 주었다. 젊은 수녀는 엽총을 쏘았더니 큰 소리에 놀라서 얼마간 효과가 있었지만 이내 소용없었다. 그러자 다시 원장 수녀를 찾았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지하실에서 총소리가 나서 보니 원장 수녀가 기관총을 쏘고 있었다.


위의 글은 언젠가 유머 책인가 어디서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은 사람의 행위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애굽의 땅과 같은 땅을 좋아하는 롯이 거하는 땅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은 시날왕을 이길 수 없었다. 이는 사람을 연단해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마음을 육신의 방법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육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아니면 소유를 드림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위대함을 추구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어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 이김은 그냥 다 죽이고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이 이김은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는 이김이다. 즉 평강의 왕, 정의의 왕이 나와서 대적을 이기는 자라는 축복을 하는 이김이다. 이것은 사람이 위대해지려는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자리가 이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김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할 때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람이 롯을 구하러 갈 때 자기 집에서 연습하고 자란 이들이 가서 구했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할까?’가 아니라, 어떤 땅에 있는 사람의 집에서 자란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이 어떤 자리,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정체성이 가진 생명이 자람서 위대해지려는 다툼을 이긴다는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람과의 언약  (0) 2015.11.03
멜기세덱  (0) 2015.11.02
롯과 갈라선 아브람  (0) 2015.10.29
애굽으로 간 아브람  (0) 2015.10.28
벧엘과 아이 사이  (2) 2015.10.26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롯과 갈라선 아브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29. 16:12 Writer : 김홍덕

애굽에서 나온 아브람에게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카 롯도 함께 있었고 롯에게도 많은 재산이 있었다. 그들의 재산은 금과 은 외에도 많은 육축이 있었다. 그런데 육축이 많다보니 목자들끼리 다투게 되었다. 창세기 13장 10절에서 롯이 물이 넉넉하다고 소돔과 고모라 쪽으로 간 것을 보면 물 때문에 많이 다투었던 것으로 보인다. 뭐 굳이 그것이 아니라도 목자가 서로 자신들의 소와 양을 먹이려는 이유가 아니면 싸울 일이 없을 테니 결국은 먹을 것으로 인하여 다툼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그 땅이 그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 즉 그 땅이 그들의 먹을 것을 공급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지금 머물고 있는 땅은 애굽에서 다시 돌아왔지만 역시 벧엘과 아이 사이다. 그곳이 아브람과 롯에게 먹을 공급해주기에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라는 것이 단순히 육신이나 육축이 먹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정체성의 허전함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불러서 나온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집이라는 벧엘이 아니라 벧엘과 황폐함이라는 아이 사이에 있었으니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르심의 뜻이 아브람을 채워주지 못함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신앙의 여정이 그렇다. 신앙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수용하는 것인데, 자신의 정체성이 어중간한 자리에 있으면 그 허전함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또 교회에 다니면서도 불안하고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죄에 대하여 그렇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살다가 자신의 죄 스스로 인지하는 순간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회개하면 또 나아지고, 그러다 죄 지으면 또 회개하고, 그러다 그것이 반복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져도 그나마 그 반복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안식 아닌 자기만족이라도 있다 보니 그곳에 안주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은 자기 땅, 자신의 육신의 삶이 자신을 수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다툼이 있다. 그러면서 마음에 선과 악이 싸운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론은 나지 않는다. 그냥 그러고 사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라며, 그래서 더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 빠지면 안 되며, 늘 아니 자주 회개해야 한다고 하는 말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람은 그런 자리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브람이 그랬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뭐한다고 아브람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읽고 앉았는가 하는 것이다. 아브람이 자기가 있는 땅이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 땅에서 계속 다툼이 있어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오늘 아브람의 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듣는 사람도 자기 땅, 곧 자기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갈등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것이 아니면 성경 덮고 그냥 애굽으로 가는 것이 장담컨대 더 현명한 것이다.


그래서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땅을 선택하면 롯이 선택하지 않은 땅으로 자신이 가겠다고 하며 롯에게 자기가 갈 땅을 정하라고 한다. 그러자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소알 땅을 선택했다. 소알은 ‘속이 좁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롯은 ‘가리웠다’라는 이름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 앞에서 멸망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패역한 땅이다. 그 땅이 롯이 보기에 좋아 보였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애굽과 같아 보였다는 것이다.


롯이 그 땅이 마음에 들고 그 땅으로 가기로 했다는 것은 그 땅이 자기에게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롯이 애굽과 같은 땅이 자신에게 맞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롯 안에 내용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롯은 또한 아브람의 혈육이라는 것이다. 롯은 아브람의 사촌인데, 어떻게 보면 롯은 아브람이 떠난 본토 친척 아비의 유산인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아비의 땅을 떠났는데, 그 아비 형제의 아들이 지금껏 따라 왔으니 몸은 본토 친척 아비의 땅을 떠났지만 아브람의 정체성은 아직 그곳을 다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남은 롯이 이제 떠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롯이 떠남으로 진정으로 아브람이 아비 본토 친척을 떠난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아브람에게서 애굽을 흠모한 본성이 롯이 떠남으로 이제 처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롯이 떠난 사건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신앙 여정도 그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개인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그 마음에서 애굽의 법을 사모하는 것이 처리된 것이 아니라, 애굽을 거쳐내고 그 안에서 애굽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좇는 법과 다투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롯과 아브람의 목자들이 다툼과 같이, 또 그래서 롯이 아브람을 떠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과정이 없으면 아브람이 헤브론에 들어가지 못함과 같이 한 개인의 신앙도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조카 롯이 떠난 아브람,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떠나라고 한 아비의 본성 안에 있던 애굽을 흠모하여 기근이 들면 애굽으로 가던 그 본성이 롯이 떠남으로 아브람에게서 처리되고서야 아브람이 할례를 받고 또한 묻히는 (헤브론에 막벨라 굴이 있음) 땅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제야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가 서 있는 땅을 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 13: 14-18)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멜기세덱  (0) 2015.11.02
사로잡힌 롯을 구한 아브람  (0) 2015.10.30
애굽으로 간 아브람  (0) 2015.10.28
벧엘과 아이 사이  (2) 2015.10.26
아브람을 부르심  (0) 2015.10.23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복음 1:1-5) 빛과 생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0. 29. 14:11 Writer : 김홍덕

빛은 인식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가장 먼저 만드신 것이 <빛>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중에서 임의로 빛을 처음 선택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빛이 있어야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는 생명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있어야 생명에게 어떤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빛은 그런 의미에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것, 깨닫는 것 그것이 시작이고 그것이 빛이다. 생명도 생명이 되어야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태초다.


글을 모르면 문맹이라고 한다. 문자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자의 존재 목적이 자신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문자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과 뜻을 전하는 문자의 존재 목적이 글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두움이다. 즉 어두움은 존재 목적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빛이 세상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려 하나 문맹이 글자를 읽지 못하듯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육신으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사람에게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두움인 것이다.


빛이 있다는 것은 어떤 시작이 있다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어떤 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즉 인식과 깨달음이 없이 어떤 세계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률에 대한 인식이 없는데 통계학을 시작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 곧 사람의 존재 목적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이 없다면 시작되지 않는다. 즉 태초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빛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게 하시는 인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첫째 날 - 빛이 있으라(1)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첫째 날 - 빛이 있으라(2)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 (마태복음) 5:13-16 소금과 빛



목적이 있어야 살아 있는 생명


요한 사도는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다(요 1:4) 사실 이런 말씀들을 대할 때에 빛과 생명은 엄청나게 좋은 것이고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볼 것이 아니다. 왜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이 왜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지, 그것이 궁금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궁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은혜일 수 있다.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은 적어도 예수 믿어서 이 땅을 사는 육신의 삶에 육신을 평안하게 하는 복 받고자 하는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목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아마 왜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는지, 그리고 그 생명이 왜 빛이 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싶기도 하다.


생명에 대한 정의는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있지만 일정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는 것, 곧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정의는 너무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있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산에 있는 바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표현하고 있으면 산 것이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면 펄펄 날아도 죽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람이 필요해서다. 괜스레 사람 만들어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 들어주면서 ‘나는 니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어!’라는 만족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알 수 없다. 보이지도 않고 그림자도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능력,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표현할 형식을 만드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도 절실한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의 그 필요와 목적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 그것을 벗어나면 다 죄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즉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라는 또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세상과 사람의 존재 이전부터 있었던 계획이다. 태초 이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도 사람도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이고, 아브라함 보다 먼저 계신 분이신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다는 그 뜻이 모든 것 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므로 생명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 그 생명이 사람 안에 있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육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신이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자기 원하는 것을 잘 얻어내는 것이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들의 빛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들의 빛인 것이다. 빛이 비취므로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인식하고, 또한 각양의 물건들의 존재 목적이 이해되고 또 목적대로 사용되어서 사람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 빛이 비췸과 같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모르는 어두움에서 어떻게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될 것인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먼저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야 자신이 육신을 입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이 육신이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라는 것을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내심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육신을 가졌다면 누구라도 예수님과 같이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존재,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는 존재,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형식이 된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으로 사람들에게 빛을 비취신 것이다.


위에서 어두움은 목적과 의미를 인식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 삶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의 어두움이고 죽은 인생이라는 의미다. 사람이 그런 어두움에 있었던 것은 자신이 그런 상태라는 것을 비춰줄 빛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것이다. 이 육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되면, 빛이 비취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당연히 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다가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회복이고 구원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세상의 빛인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초에 빛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그 빛이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산의 바위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아는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로 보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바위도 산 것이 되는 것이다. 존재의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 목적 안에서 의미가 있어지는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곧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회복한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만물의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모든 만물의 목적인데 그 목적을 회복시켜 주는 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안목과 생명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회복되기 때문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 사람과 같은 육신으로 오심으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신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