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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18) 하나님을 본 사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1. 6. 15:42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했다.(출 33:20)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하셨고, 요한 사도 역시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러면 왜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것이며, 예수님을 본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난 것이며,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몸으로 계시지 않는 지금과 같은 시절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볼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법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엘리야가 낙심하여 굴에 숨었다가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내가 지나갈 테니 너는 보라’고 하시고 바위를 쪼개는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로 나타나셨지만 여호와가 계시지 않고 미세한 음성 가운데 계셨다고 했다.(열왕기상 19장)


이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의 한계 곧 특성 안에서 만나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능력과 기능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육신이 영이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육신 너머의 일이므로 이 육신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통하여 만나시려 하시는 방법이 아닌 것으로 만난다는 것은 죽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고 하신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았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는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육신으로 나타난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에 예수님을 보았다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리라고 말씀하시기 바로 전이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하셨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한 백부장의 고백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16절 이후에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시고 모든 것이 기억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성령께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중에 있을 때에 그 분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고, 그 성령이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사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형상과 의를 만난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굉장히 터부시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나,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단들의 교주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도 하고,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실패했고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하는 등의 헛소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두운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 어두움의 이면과 빈틈에 이단이 스며든 것이라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 밖에 두고 믿는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신 피조물이다. 이것을 모르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이라고도 한다. 또 반대로 그것을 모르면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콜라병은 콜라를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콜라가 담기는 병이기 때문에 콜라병인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형상을 만나고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려고 한다면 먼저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인데 그 육신으로 하나님을 표현해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든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뭐가 시작되어도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예쁜 쓰레기[각주:1]와 같은 것일 뿐이다.


오히려 사람은 같은 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신앙도 없고 구원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데 그 육신을 가지신 인자(人子)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본성이 된,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고,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보면 당연히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하고 또 자신을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를 만났는데, 또 내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원인은 단 두 가지일 뿐이다. 하나는 만난 사람이 존재의 하나님,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이 아니거나, 아니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없거나. 그것뿐이다.


  1. ‘블렉베리’라는 스마트폰을 흔히들 <예쁜 쓰레기>라고 한다. 스마트폰으로서의 기능은 그다지 쓸게 없지만 왠지 모양은 갖고 싶은 모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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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온도차이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1. 6. 14:29 Writer : 김홍덕

엄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너를 믿는다!"


그 말에 아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엄마는 내가 뭘하든지 나를 믿어주는구나!"


하지만 엄마 믿음의 본질은 이것이다.

"아들, 너는 엄마가 바라는 것을 해 줄것이라 믿는다!"


어느 때가 되면 아들은 엄마와 자신 사이에 있는 믿음이라는 단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가 바로 사춘기의 시작이다.


그렇게 믿음은 온도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신다.

"내가 저에게 어떤 것을 해도 저가 나를 믿는구나!"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한 믿음의 본질은 이것이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속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하나님은 거짓이라고 하신다. 사람의 죄가 그것이다.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내가 누구를 믿겠다는 것은 그가 나에게 어떤 것을 해도 내가 수용하겠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그 사람이 나를 믿는 믿음의 본질이 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사람은 나는 따르는 것이 나의 운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도차가 없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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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6. 14:20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소식이 없었다. 아브람의 나이가 이미 80이 넘고 아내 사래가 경수(생리)가 끊어져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래는 여종 하갈을 아브람과 동침하게 하여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들으심)이다. 사람들은 이 이스마엘이 중동에 사는 유대인 외의 많은 족속의 조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중동의 모든 분쟁의 씨앗이 아브람에게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한 것이나, 혹은 사람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든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 일치고 제대로 된 것이 거의 없다. 사울 왕이 제사를 먼저 드린 것이 그것이고,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씨를 받아 아들을 낳은 것도 그렇고, 바벨탑이 그렇다. 그리고 아브람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얻은 것은 어떻게 보면 다른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한 땅에 아브람이 도착했고,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아브람의 신앙 여정이 많이 장성하고 하나님께서 평강의 왕을 보내어 아브람의 신앙이 평안 곧 안식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자기의 의지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브람의 모습은 정말로 사람들의 신앙 여정에서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각오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지 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브람의 의가 온전해졌을 때 그 의를 아들로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람이 자신의 뜻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자신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마엘이다. 이 이스마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지만 오늘 신앙의 여정을 가는 신앙들에게 있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여정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의 여정을 가면서 <하나님의 위한 일>을 많이 하려고 한다. 언뜻 그것은 참 대견하게 보이고 또 좋은 신앙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 부족함이 있으신 분도 아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순종적인 형식 그것 하나뿐이다.


어쩌면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또 다른 사람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얻게 되기까지의 여정에 있어 가장 마지막의 여정이 바로 ‘하나님의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아내 사래는 이때까지 아들이 없었던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고 난 다음에 기다려 봐도 아들이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몸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뜻을 세우고 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는 단순하지만 눈에 띄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아브람이 사람의 뜻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루어내려고 하는 생각을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가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와 내용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의와 내용의 형식이 먼저 그랬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종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내 사래, 곧 여자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내려고 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육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법과 같이 의가 삶으로,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방향이 아니라, 삶이나 행동이 지옥에 갈 사람의 정체성을 천국에 갈 신분으로 바꾸어 내는 것은 모두 이스마엘을 낳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은 널리고 널려있다. 교회를 보면 교회를 잘 지어 놓으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훌륭한 행사나 모임을 가지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교회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삶(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자 하는 마음이 서로 연합하여 모인 것이 교회이고, 그런 교회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모임)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 저들과 같이 되고 싶다.’는 성령의 감동을 주므로 또 다시 사람이 모이는 것이 온전한 교회다. 그런데 그 반대 방향으로 해서 얻는 아들 곧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다 뭐다? 다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다. 그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본질이 그 사람 심령에 생명이 된 하나님의 의기 때문이다.(그것을 몰라보는 것은 어두움이다.) 그런데 반대로 자기 심령 안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더라.’며 자기 행동을 성경대로 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 이스마엘과 같은 아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종에게서 아들을 얻었다는 것도 비슷하다. 아들이란 아버지가 있다는 의미고, 종이 있다는 것은 주인이 있다는 것이다. 종은 아들과 다르다. 아들은 어떤 행동을 해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지만, 종은 그 행위가 주인과의 관계가 달라지는 존재다. 종을 주인에게 종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항상 수고해야 하고, 잘하다가도 하나를 잘못하면 혼나는 존재다. 아들은 아버지께 뭐 좀 잘못한다고 혼날 수는 있어도 아들이라는 존재 가치가 달라지지는 않는다.(그래서 율법이 종의 신앙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종에게서 아들을 낳아서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려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공로로 의롭다 인정을 받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신앙인들이 새벽기도회 가는 것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것으로, 또 성가대나 교사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으려 하는 모든 것과 그것으로 인한 영광(그들만의 영광이지만)은 모두 이스마엘과 같은 신앙을 낳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신앙들은 이상하게도 신앙이 좋을수록 더 그렇다. 신앙적인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사실 보통사람이 아니다. 새벽기도회 가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것이 보통신앙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죽겠다는 신앙도 그렇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열정인가? 하지만 그런 시간들, 그런 신앙이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을 얻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마엘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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