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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 vs. 영지주의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3. 13:54 Writer : 김홍덕

두 가지 관점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조로 볼 수 있다. 결국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이 표현된 존재라는 것이다.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다. 이 모든 세상이 다 하나님이 표현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성품과 계획이 나타난 것이다. 그 하나님의 법을 쉽게 설명하면 <내용과 형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 곧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면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는 것이 있다. 먼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성>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어떤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무엇을 믿을 것인지,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와 같은 모든 신앙의 좌표를 정리해 주는 나침판과 같은 것이다. 그 다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 정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리된다는 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정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 하나님이 신앙의 본질이요 내용이며,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표현하는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무엇보다 기본적인 것이다. 이 틀이 형성되지 않으면 성경을 읽을수록 의문스러운 책이 되고, 결국에는 안 보고 믿어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믿거나 아니면 때려치울 것(교회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이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조를 모른 체 신앙생활을 하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와 영지주의[각주:1]다.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를 내용과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율법주의는 형식만 있고, 영지주의는 내용만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는데, 율법을 행위로만 지키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자기 안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와 다르게 영지주의는 일반적인 신앙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앙은 마음이 중요하지 육신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관심이 없으시다는 식의 신앙관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옛날에 예수님이 계시던 시절과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절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엄연히 오늘날도 기독교 신앙이라는 외형 안에 실존하는 것들이다. 즉 지금도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많이 있다는 것이다.


율법적인 신앙, 율법주의는 다른 게 아니다. 행동으로 말씀을 지켜내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 율법주의다. 생명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훈련하므로 삶을 바꾸면 생명이 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반면에 영지주의는 신앙만 있다면 살아가는 삶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가치관은 성경에 대해서 더 알면 알수록 많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교회에서 이단이라고 하는 종파들이 그 내용의 맞고 아니고의 여부를 빼고 보면 성경을 알려고 하는 마음이나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앙의 큰 두 문제적인 관점인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는 사람을 보는 관점의 차이이다. 율법주의는 육신이 본질이고 주된 것이므로 육신을 단련하면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개념이고, 영지주의는 사람의 영혼, 심령이 본질이며 육신은 어차피 천국에 갈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육신의 삶, 곧 행동은 아무렇게 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관점인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주의는 형식을 본질로, 영지주의는 내용을 본질로 본다는 것이다. 영지주의가 내용을 본질로 본다는 것은 어쩌면 괜찮은 접근이었지만 내용만 취하고 형식은 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형식이 필요하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실 것 없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의 마음만 능력으로 변화시키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천지창조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율법주의



율법주의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형식을 본질로 아는 것이다. 문제는 내용과 형식은 내용을 본질로 하여 형식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것인데 이것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율법적인 관점은 본질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니 심각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어떻게 한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  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게 나타나게 한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것이 바뀌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대하는 자세가 그랬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이, 인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율법의 목적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다. 다시 이야기 하면 율법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안에 있으면 밖으로 나타나고 보이는 특성이고 정체성인데 그것을 모르고 지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회칠한 무덤이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의 많은 신앙인들이 시대적으로 신약 시대라는 착각에 빠져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반면교사로 삼기는 하지만 정작 많은 부분에서 그들과 같은 신앙적 안목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말의 의미가 다른 것이 아니라, ‘행동을 바꾸면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영혼으로 바뀐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행동을 바꾸면 본질이 바뀐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선은 성경의 신약과 구약은 달력의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성경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 기준이다. 즉 성경을 보는 사람이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듯, 성경을 읽고 그대로 행동하면 영혼이 바뀐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서기 3,000년에 산다 해도 구약시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과 같이, 또 성경을 읽고서 그 말씀대로 지켜내면서 살아가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영혼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면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성경을 죽을 때까지 단 하나의 행동도 어기지 않고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십일조 철저히 하는가? 오늘 당신이 누군가에게 커피를 한잔 얻어 마신 것까지 다 철저히 내었는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서 행동으로 지켜내면 영혼이 바뀌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는 것은 다 율법주의다. 그런 가치관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거짓말하고 도적질한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것이 율법주의다. 즉 하나님의 의와 생명인 말씀의 내용을 알지 못하고, 형식만 보는 시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율법주의라는 것이다.


  1. 여기서는 영지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이 글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이 관심을 가지는 영지주의의 특징은 신앙을 육신의 삶과 별개로 본다고 하는 일반적인 견해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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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10)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2. 13:53 Writer : 김홍덕

약속과 증거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이렇게 이야기 하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믿음이라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다. 무엇을 신앙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믿음은 신념과는 다른 것이다. 이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수용적인 것이며, 순종적인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없는 것, 가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의 본질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은 결국 자기 정체성이다. 자신의 정체성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원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이는 운동을 하고, 돈에서 삶의 의미 곧 자신의 정체성의 의미를 찾는 이는 돈을 벌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지 않기도 한다. 메달에 삶의 의미를 둔다는 것이 바로 자기 정체성을 그것에 둔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사람은 어떤 것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바라는 궁극적인 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의미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랑을 할 때, 사랑하는 상대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어쩌면 “네가 나의 존재 이유”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이 바라는 최고는 역시 자기의 존재의 의미와 이유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세상의 것 역시 결국은 그것이다. 돈을 구하면 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겠다는 것이고, 취업을 원하면 일하는 자아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서로에게 의미가 없어지면 이별하고, 직장에서 자기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사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의 실상은 자아 정체성이다. 그렇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라는 것은 결국 자아 정체성의 실현이라는 것이고, 그것의 실상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성경의 골격을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이 말씀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 바란다는 말씀인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고대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사람 역시 바라는 바 믿음의 실상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와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을 같이 보면 결국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사람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바라는 것이요, 믿음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조상들이 증거를 받았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증거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증거는 믿음이 나타난 것, 곧 믿음이 표현된 형식이라는 것이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에서 비롯된, 믿음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벨 뿐 아니라,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 등이 보여준 믿음의 삶들이 믿음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 모든 선진들의 증거는 믿음이 있었기에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조상들은 증거는 받았는데 약속은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선진들에게 나타난 믿음의 증거의 실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들이 받은 증거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즉 믿음의 실체이고, 증거의 본질인 약속이라는 것이다. 증거는 약속의 증빙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든 믿음의 증거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실상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선진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우리>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이가 나오지 않으면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받은 증거가 온전한 약속의 이행으로 마감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모든 믿음의 증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나올 때 약속이 이행되는 온전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모든 믿음의 증거들이 약속의 이행으로 온전케 되는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본질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하게 <우리>라고 하고, 그 <우리>가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믿음의 증거들을 온전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히브리서 기자와 함께 하는 교회의 지체들이 믿음의 본질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들과 같이 선진들이 받은 믿음의 증거를 온전케 하는 약속인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삶의 본질이요 내용이요 생명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그것을 수칙처럼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증거는 있지만 온전케 하는 약속이 아직 없는 것이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 성경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은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순종적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행함인 제사보다 순종이 나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믿음은 능동적으로 신념을 실현해가는 것 역시 아닌 것이다. 믿음은 또한 행함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 생명이 모든 행함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면 굳이 따지지 않아도 모든 행동이 성경을 지키는 삶이 되는 것이다. 생수의 강이 속에서 계속 넘쳐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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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 (9)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1. 13:45 Writer : 김홍덕

믿음과 행함



믿음과 행함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이 같으심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표현되고,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나타나심과 같은 것이다. 즉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믿는 사람으로서 이러면 안 되지!’ 라며 자신을 제어하거나, ‘예수 믿고 천국에 가려면 이렇게 살아야지.’하면서 의지를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어릴 적에 1,000일을 작정하고 기도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이어리에 했는지를 체크했었다. 어떤 날은 12시 자정을 넘기기 전에 가까스로 마치 ‘하나님 땡큐!’라는 식사기도 같이 기도하곤 스스로 ‘오늘도 기도를 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코미디인가? 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면 살아 숨 쉬며 움직이는 모든 순간이 기도가 된다. 기도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구함일진데,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눈에 보이고, 귀로 듣고, 만지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를,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그 성품을 표현하신 세상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이 자기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안에서 생수와 같이 넘쳐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애를 써도 힘들기만 했던 일도 하나씩 되어 간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다. 어제는 질 수 없었던 십자가를 오늘은 지게 된다. 어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로 행함으로 내 눈에 거슬리고, 내가 손해 보는 것을 참지 못하던 것이, 오늘은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심 같이 내가 손해보고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의에 대하여 반박하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섬기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삶이고 행함이 있는 삶이 이것이다.


성령의 열매도 그렇다. 열매는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다.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신념을 가지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니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야 한다며 마음에서 동의는 되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과나무는 뭐라 하지 않아도 배 아닌 사과를 내듯, 성령이 안에 있으면 특별히 노력하거나 의지를 가지지 않아도 성령의 열매를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려 하면서 이렇듯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법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서 그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려 한다. 생명의 법은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에서 열매가 나오든 본성으로 인한 행함이 나오든지 하는 것이 생명의 법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기신 존재의 목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을 믿는 이를 생명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 생명이 있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사람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믿음이 있어 행함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행함이 있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방향성이다. 하나님이 계심으로 우리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본질이신 내용이시며, 또한 사람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어기려 해도 어길 수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있으면 모든 행함은 생명이 자기 본성에 의하여 행동이 나타나듯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이란 그렇게 하나님이라는 인생의 내용이자 본질이 행함 있는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육신이 있고, 육신 가진 삶이 있고,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이것이 믿음과 행함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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