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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 (추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13. 10:50 Writer : 김홍덕

이렇듯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아니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을 주관하는 것을 반대하고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상관하려고 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어두움에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롯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 것이다.


이 어두움은 다른 어두움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움이다. 또한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어두움이다. 그래서 문을 찾지 못하는 어두움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어두움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육신 곧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 바로 어두움이라고 요한 사도가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한 책이다. 물론 구절구절을 다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록된 시대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주제와 행간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성경이 어려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저자인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독자인 사람의 시각으로 읽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성경은 절대 어려운 책이 아니다. 책이란 모름지기 저자의 생각을 독자가 받아들이기 위하여 읽는 것이다.


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 사람의 존재 의미이다. 사람이 대상이 아니라 만약 개가 대상이라면 개뼈다귀로 나타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먼저 사람의 존재 의미를 이야기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사람도 귀한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 의미를 사람이 져 버려서 사람이 죄인인 것이지, 그냥 사람이 죄인이라서 사는 게 힘들어져서 하나님께서 보급계로 도와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어떤 것을 바꿀 때에는 가치가 같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을 바꾸었다는 것은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벌레만도 못한 인생을 구해주셨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벌레만도 못한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부여한 가치를 버려서 그런 것이지 원래 인간의 가치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과 바꿀 정도로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의 존재 의미를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부끄럽게 여겼던 사람의 본 모습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존재요,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존재며,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두움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소돔의 사람들과 같이 상관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어두움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간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그릇이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고 그것에 자신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밝음이고 그것이 빛을 아는 것이다. 사람을 보노라면 늘 실수하고, 또 화를 내고 이기적이기도 한 이 사람의 모습,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기에 너무 좋은 존재여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하나님의 의도된 모습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모르면 심판을 받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듯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결국 자기 인생의 종말에 또한 이 세상의 끝 날에 망하는 것이다. 사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요 성전이요 아들인 것, 이것을 믿지 않고, 사람의 본성을 절제하고 다스리고 억제시키는 것이 신앙이고 경건이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멸망의 대상이고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사람의 본성을 부인하는 것을 경건이라 하는 사상과 이론과 말씀과 사람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을 늘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롯에게 온 하나님의 사자도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라고 했고, 예수님도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으면 빨리 피하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부인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목사 면허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 사람의 본성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이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빌어야 한다고 하는 것, 그런 모든 것이 다 소돔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상관하려 한 것이고, 또 진정한 신앙과 믿음을 얻고자 한다면 떠나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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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13. 09:32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로 떠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숨길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보러 간다고 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과 악인을 함께 죽이는 것이 합장치 않다면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말 것을 구하면서 의인의 수가 몇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인가를 계속 묻는다. 그 결과 10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아브라함은 돌아간다.


날이 저물어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마침 그것을 성문에서 발견하고는 자기 집으로 청하였는데 이것을 본 소돔 백성들이 롯의 집에 찾아와서 롯의 집에 온 사자들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을 상관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알아야겠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상세히는 그들을 강간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롯은 그들을 만류하면서 자신에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딸이 있어 그들을 내어줄테니 그리하지 말라고 해도 그들의 요구는 거두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상관하려고 하는 이유는 롯의 집에 방문한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들의 법관이 되려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고 쳐도 자신들의 법관이 되려 하는 이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죽이든지 할 것이지, 그들을 강간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사자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요구했던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 이름의 뜻은 분명치 않다. 다만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강간하겠다는 소돔 사람들의 행태를 보고 소돔과 고모라가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육신의 성에 관한 타락을 이유로 심판하셨다면 지금도 뭐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지금은 소돔과 고모라에는 없던 의인들이 있어서 망하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망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있는 것 중에서 망해야 하고 심판하시겠다고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 거했던 아담을 만드셨을 때에 사람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자 말자 바로 유황불로 심판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보여준 일은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닌 것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육신의 성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이것은 육신의 성에 대하여 마구잡이로 성욕을 발산하고 누리는 것이나 동성애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가져야할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의가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다른 의가 있기 때문에 육신의 성이 타락하고 문란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그 안에 있는 것이 몸으로 표현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것은 블로그 <내용과 형식>에서 다루었듯이 남자가 내용이고 여자는 형식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들 낳으면 그 아이의 성이 남자의 성을 따르는 것이다. 아이는 남자의 의(가문의 번성이라는 의)가 몸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결혼하면 여자의 성도 바뀌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남자는 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의는 곧 법이고 모든 형식의 근원이다. 모든 표현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의가 민주주의기 때문에 그 나라의 모든 법과 삶의 방식과 모양이 민주적인 것이 그것이다. 의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가 주인이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뜻과 계획이 표현된 것이 세상이고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딸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은 신랑이요 교회와 우리 사람은 신부가 되는 것이다.


소돔의 사람들은 롯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들이 자신들의 법 집행관이 되려 한다고 그들을 상관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다스리려 하는 것을 상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관이란 성적인 관계를 말하는데 육신으로 보면 동성강간에 해당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남자에게 자신의 의를 관철시키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자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말씀을 성경을 육신으로 지키면 영혼의 정체성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시각으로 보면 단순하게 성적으로 타락한 성읍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시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안목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지금도 계속적으로 망하는 성읍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시각으로 성경을 본다면 십자가에 직접 못 박혀야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가 성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성읍은 맞다. 하지만 성경은 육신의 문제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형식이고 도구이다. 즉 의를 표현하는 것이지 이 육신이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치관이 몸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왔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을 용납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상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 소돔과 고모라에 온 하나님의 사자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와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어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성품을 나타낸다고 하면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아닌 목사가, 그리고 보통의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의한) 거룩한 성자가 왔을 때는 용납하지만 그냥 이웃과 같은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오히려 자신들의 의를 그들에게 주장하려 하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상관하려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모습과도 같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그 몰골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권력과 화려함으로 교황이 와서 뭐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사는 지역의 천하고 가난한 동네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라고 하면 ‘웃기지 말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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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이 와서 메시야를 만났으니 가 보자고 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했던 나다나엘은 사람을 메시야라고 만나보자는 빌립의 말을 좇아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육신의 어떠함이 선함이라는 가치관이다. 육신의 행실과 모양이 선의 근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은 사람이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사람의 추함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자신의 가치관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런 나다나엘의 모습을 예수님은 ‘간사함이 없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나다나엘)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라고 하신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언제 나를 봤단 말입니까?”라는 식의 의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자 한술 더 떠서 예수님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하시고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셨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47-51)


이 대화는 극적이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은 정말로 대단한 능력을 가지셨나 보다, 그냥 한 마디만 하면 사람이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는구나!’로 읽으면 곤란하다. 물론 예수님의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예수님의 능력이 사람이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굴복하게 하시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보여준 이 대화 속의 반응은 예수님의 능력에 자신의 의지가 제압당한 것이 아니다. 나다나엘의 속에서 무엇인가가 밖으로 표현된 것이다.(신앙이라는 것이 사람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면 예수님의 능력도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제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화과는 율법의 나무, 이스라엘의 나무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고, 아담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사용한 잎이 무화과 나뭇잎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무화과나무는 율법의 나무이다.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내면 육신의 부끄러움이 감추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경을 몸으로 지켜 행하면 인생이 가진 연약함과 추함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것이다.(인생이 추하고 연약한 것은 사람의 기준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고 하신 것은 나다나엘이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그 고백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인식이다.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지창조에 있어 가장 먼저 빛을 만드신 것이다. 빛이 곧 인식이고, 빛이 있어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다나엘은 자신이 무화과나무 곧 율법의 가치관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다. 이것을 성경에서 다른 말로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나다나엘이 도적질과 같은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다. 무화과나무 밑은 인생이 거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하말티아’가 원어인 것이다.


무화과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의 범죄다.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부끄러운 인간의 정체성을 가리려 한 것이다. 율법으로 사람의 연약함을 가리려 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다나엘이 무화과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무화과의 가치관, 곧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스스로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할 때,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하는 그 가치관을 고수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당연히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기 가치관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자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가 아니라 선악의 가치관을 가진 무화과나무 아래, 곧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율법의 기준을 자기 의로 가진 자리에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이 인정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죄를 자복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회개, 돌아섬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는 것은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사람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렛과 같은 천한 동네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은 추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고, 그것도 나사렛 출신에 비슷한 동네인 갈릴리에서 살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은 대단한 반전인 것이다.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싶은 모습을 가진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사람이었다는 것,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모습을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추하고 연약한 것으로 보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 고백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든 믿음은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소유와 공로의 신으로 모독하고 있는 것을 신앙이라 착각하는 사람일 뿐이다.


반면에 그런 고백이 있는 사람은 하늘이 열린다고 하셨다. 이 고백이 바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아들 삼으심을 믿는 고백이다. 그 고백, 그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때와는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시작을 개천절이라고 하듯이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고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앞에서 말한 세상에 비친 빛이 나다나엘에게 또 그 고백이 있는 사람에게 비취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 그것은 주기도문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 하늘의 뜻은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사람을 만났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하늘이 열리는 것이고, 하늘의 뜻이 땅(사람)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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