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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3-22) 성전을 깨끗케 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1. 17. 10:11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한 시간적 순서가 맞지 않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일과 오병이어 사건은 4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말씀인데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오병이어가 먼저 나오지만 요한복음은 그와는 다르다. 이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순차적으로 따라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에게 밝아지는 과정을 따라 예수님의 일을 요한 사도가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 (마태복음) 21:12-17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



가나 혼인잔치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첫 기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맞아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이 이어졌다는 것은 생각해볼 의미가 있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알지 못했다.”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모른다고 하고서 세례 요한과 나다나엘과 가나 혼인잔치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요한 사도에게 있어 당시의 세상을 볼 때(지금도 마차가지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몸으로 율법(성경) 지켜내는 것이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어두움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일이라는 것은 당시에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이라도 제사를 온전하게 드릴 수 있도록 성전에서 제물을 팔고 사는 것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라는 것의 형식만 남고 본질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신이 성전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자리다. 그러므로 결국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 본체이자 표상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성전을 깨끗케 하심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육신으로 율법(성경)을 지켜내는 것이 빛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정리한다면 그것은 <‘이 육신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육신을 가진 삶이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는 것, 아니 그것에 대한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고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육신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바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빛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초점은 육신의 문제 해결에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본질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한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하는 것을 성경대로 사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본질을 모르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엎으신 것은 장사하는 사람들의 판매물품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고 있는 가치관을 엎은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장사를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을 엎으신 것이다. 살면서 흉한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려는 것, 그것이 바로 장사다.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 이런 것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것을 주실 것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샤머니즘적인 신앙이다.


예를 들어 헌금을 떼어 먹었더니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보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헌금을 잘 드려야 한다고 한다. 정말로 그것이 신앙이고 교회에서 할 소리인가 귀가 의심스럽다. 미친 짓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헌금이라는 것은 경제적 보상을 담보하기 위하여 드리는 복채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경제적인 손실을 입지 않기 위하여 헌금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고, 성전에서 비둘기를 파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신앙은 모두 예수님께서 뒤엎으시는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 시험 치면 떨어질 것 같아서 기도하고 시험 친다거나, 시험 잘 치려면 꼭 기도하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도가 목적인가? 아니면 합격이 목적인가? 정말로 사람이 세상의 시험에서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협박이다.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화를 내실만 것이다.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니다. 다 미신이다.


사람과 사람의 일과 세상은 모두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일과 세상이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고 경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이 세상을 살면서 먹고 자고 일어나는 것과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렇게 삶이 평안하기 위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을 지키려 한다. 지키지 않으면 자기 삶이 평안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것이 바로 성전에서 비둘기를 파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으로 육신을 위하여 하나님과 장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차에 기름 넣어주고, 세차해 주고 정비해 주기 위하여 차를 사는 사람이 있는가? 천하의 바보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에게 밥 주고, 돈 주고, 평안해지는 것을 위하여 사람을 만들고 일하시는 바보로 알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 모든 소산을 가지셔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기쁨이 됨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인 것이다. 사람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 곧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 되는 것을 위하여야 한다. 그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런 빈도부사를 지켜내려면 그런 생명이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로봇이 사람처럼 움직일 수는 있어도 항상 사람일 수는 없지만, 사람이라는 생명은 자거나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사람인 것이 그것이다.


사람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신앙도 믿음도 아니다. 성경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감사할 것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일에 쓰였다는 것,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사용되었다는 것, 그것이 영광스럽고 감사하여 감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삶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제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신다는데 당연히 그 격이 하나님과 같지 않겠는가? 그것이 진정한 사람의 가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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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종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16. 16:36 Writer : 김홍덕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롯은 여기서 그 여정이 끝난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두 이방족속의 조상이 된다. 그리고 그 아내는 소돔에서 떠날 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소금은 기둥이 되거나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어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소금은 녹아서 없어질 때 존재하는 목적이 이루어지는 물질이다.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것은 사뭇 의미가 있다.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위대함을 좇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나섰지만, 결국은 애굽과 같아 보이는 땅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 의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본성과 생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그의 아내는 소금기동이 되었다. 소금은 녹아서 없어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냥 기둥이 된 것이다. 롯이 세상을 본질로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의를 표현해 낼 아내 역시 소금의 존재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기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즉 이 사건은 의가 없는 형식의 종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존재의 목적이 생명이 되어 사람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이라는 형식은 소금기둥과 같이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소금은 정말로 귀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둥으로나 자기 모양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롯이 가진 의는 목적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의를 표현하는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애굽을 좋아하는 심령이라는 것은 결국 존재의 본질이 아닌 존재의 형식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귀해 보이지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애굽을 좋아하고 세상을 본질로 아는 의의 종말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짠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셨다. 소금은 녹아서 형체가 없어지면서 짠 맛을 내는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신앙이 그렇다. 하나님의 의와 말씀은 소금기둥과 같이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금물 안의 소금과 같은 것이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있으면 겉으로 보기에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있어, 그 생명이 삶(맛)으로 표현되는 것이 사람(소금)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롯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애굽과 같은 땅 소돔과 고모라로 갔다. 롯 안에 있는 의와 생명이 그것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것이 그의 생명이고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를 소돔으로 가게 했고, 그 의가 표현되는 아내는 소금기둥이 된 것이다.


그리고 롯에게는 아들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다. 그것은 그 생명은 의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형식인 여자만 낳은 것이다.(이것은 육신으로 여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이 가진 의와 생명은 대를 이어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딸들은 하나님과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육신으로 아들을 얻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롯의 딸이 아닌가?


그들은 아버지의 씨를 훔쳐서 아들을 낳았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근친상간의 일이니 지금 시대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겠지만, 하나님의 의와 무관하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은 다 롯의 두 딸이 아버지를 취하게 하여 동침하여 얻은 아들과 같은 신앙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니 사람에게 원하시는 의는 하나님 앞에 사람이 누구인가? 어떤 관계인가? 어떤 생명인가 하는 것으로 아들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람(여자, 딸)의 의지대로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다른 신들보다 더 잘 해결해 주시는 신으로 믿어서 그 성과(아들)를 얻는 모든 신앙의 결과(사람들은 이것을 영광이라 오판하기도 한다.)들은 전부 모압과 암몬과 같이 딸이 자기의 의지대로 아버지의 씨(이름)를 훔쳐서 낳은 아들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해서 신학교 간 것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다 롯의 딸들의 일과 같은 것이다. 자기 공로와 의지로 신앙을 학문으로 만든 곳에 들어간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그 결과를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씨를 훔쳐서 아들을 낳은 딸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신앙 안에 깊이 뿌리박힌 신앙의 타락이다. 즉 소돔과 고모라의 일이 신앙 안에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렇게 롯이 종말을 맞이했다. 이는 롯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으로 표현된 신앙의 여정에서 아브라함과 친족인 롯의 신앙이 망한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서 롯과 같은 본성이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함께 나왔던 롯은 아브라함의 친족이다. 그것은 아브라함 안에 롯과 같은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신앙인,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그런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이라는 약속받은 아들을 얻는다는 것(얻기 전에) 그런 신앙의 본성은 심판을 받아서 제거된다는 것을 롯의 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소금기둥과 같이 의의 모양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멸망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소금이 녹지 않고 기둥이 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목적이 사람 안에서 녹아서 생명이 되지 않고,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는 신앙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심판 받아 멸망하는 신앙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고,


롯의 두 딸이 보여준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아닌 자기의 유익,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세상을 편하게, 다른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은 다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씨를 훔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와 영광이라 칭하는 모든 것은 다, 이방의 조상이요 이방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롯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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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2) 가나 혼인잔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1. 15. 16:5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나다나엘과의 대화를 하신 후 삼일 되던 날에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어 예수님께서 참석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일을 요한 사도가 기록하고 있다. 먼저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에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이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럴 것이 아니면 요한 사도가 이것을 기록할 이유도 없고, 또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이유도 없다.


나다나엘과 가나 혼인잔치는 내용상으로 보면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 그냥 삼일이 지났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연관성이 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에는 무화과, 곧 율법에 대한 말씀이 깊이 베여 있는데, 혼인잔치에서는 돌 항아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율법은 돌에 새긴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빈 항아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혼인이라는 것은 <내용과 형식>에서 다룬 바와 같이 의와 육신이 하나가 되는 것의 예표다. 의를 가진 남자와 형식과 모양을 중요하게 여기고 남자의 의(성씨)를 육신으로 표현해내는 여자가 만나서 의와 형식이 하나가 되는 아들을 얻게 되는 것이 혼인이다.


그리고 그 혼인잔치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포도주다. 포도주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신 분이고,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해내신 온전한 아들이시다. 즉 온전한 혼인잔치의 목적이고 주인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진 가나 혼인잔치에도 포도주가 있었다. 하지만 모자랐다. 이것은 단순히 혼인잔치를 치르기에 양이 모자랐다는 것이 아니다. 혼인잔치의 목적을 이루기에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결례에 따라 준비한 항아리의 포도주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의 율례, 곧 율법으로는 온전한 혼인잔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심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없으면 유대인의 율법으로는 온전한 혼인잔치, 곧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아들을 얻는 혼인과 같은 하나 됨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온전해 지려면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은 순종이다. 다시 말해서 시키는 자의 의를 시킴을 받는 자가 몸으로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돌 항아리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안에 있던 포도주로는 혼인잔치를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포도주가 모자란 것이다. 그러나 혼인잔치가 있다는 것은 그 혼인잔치가 온전히 마쳐야하고 신랑신부를 통하여 아들을 얻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지음 바 되었다는 것이 바로 혼인잔치에 참여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온전한 잔치가 되게 포도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있어야(나와야)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돌 항아리와 같은 우리 인생들은 마치 밭에 농부가 씨를 뿌림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채워져서 그것이 포도주와 같은 그리스도로 표현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아들이 바로 아버지의 성품을 표현하고 대변하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 항아리에 예수님의 지시한 대로 물을 채우고서 그것을 다시 잔치에 내어 놓았더니 포도주가 되었다고 하셨다. 그것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차면 그 삶이 포도주와 같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찬 사람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을,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무화과 아래에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하는 것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일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랬더니 사람들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이 이전의 포도주 보다 더 좋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율례대로 준비한 포도주, 곧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서 표현한 그리스도의 성품보다, 사람 안에 말씀이 가득차서 그것이 표현된 그리스도의 성품이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꽃그림이나 사진과 살아 있는 꽃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으냐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연회장은 잔치를 주관했으나 알지 못하지만 종들 곧 물을 항아리에 채운 자들, 곧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규례대로 포도주를 준비한 연회장은 그것을 모르지만 포도주 곧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먼저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운 자들에게서 그것이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날 때 더 온전한 포도주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혼인잔치가 온전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광은 나타내는 것이다. 화려하게 시상식에서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으로, 사람의 육신과 삶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영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이 표현되는 삶, 그것이 더 좋은 포도주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혼인을 온전케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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