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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성경 창세기, 요한복음, 요한1서는 <태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 외에도 마태, 마가, 누가 역시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와 같은 말씀의 시작들 역시 어떤 새로운 시작이 있고, 그 시작에 대하여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요한사도는 그 세계의 시작이 바로 <태초> 곧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시작을 하는 것이다.


이 시작은 하나님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태초’라고 하면 이 물리적인 세상을 먼저 생각한다. 이 물리적인 세상은 어떤 때에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으려 한다. 그러나 과학과 상식의 벽에 부딪히곤 한다. 때론 그런 의심이 믿음 없는 것이라 심판하거나 받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계가 자기 안에 열린 사람은 이 물리적인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로 보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의 안목이기 때문이다.


요한사도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으로 인하여 다른 세계가 시작되는 것, 즉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있는데 그 태초는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풀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에게 이 세상은 이전과 다르게 하나님의 세계로 인식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요한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말씀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이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계임을 볼 수 있는 세계가 열린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시작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을 아주 쉽게 말한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더 간략하게 말하면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세계,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세계이며, 그 세계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초에 계신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세계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시작하는 하나님의 세계라는 말씀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 곧 the Christ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이미지가 자기 심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잉태되고 생명이 된 또 하나의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인이라고도 하는 a christ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또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정말로 왜 믿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 땅에서 살 동안 육신이 겪는 일들에 대한 안위를 얻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바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는 본질인가 하는 것이다. 그 보다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것과 같은 일은 또 어떤가? 한 평생 남을 위하여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은 어떤가? 그런 것 중에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사람에게,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일에 자신이 순종하겠다는 믿음 그 하나뿐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순교하거나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자기 삶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다 보니 보이는 삶의 한 모습들이지 그 모습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순교나 기도하는 일이나 봉사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도구이지 그것이 믿음 자체는 아닌 것이다.(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예수 믿어서 일신상의 안위를 보장 받겠다는 것은 예수 미신일 뿐 그런 것은 신앙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삶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 보이는 그런 세계를 사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세계를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삶이 시작되는 시점 그때가 태초이고, 그런 삶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사도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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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과 아이 사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26. 14:39 Writer : 김홍덕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매우 의롭고 선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유대인들에게는 믿음의 조상이니 더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생각되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이다. 그 이전, 특히 아브람은 기독교인들이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아브라함과는 다른 사람이다. 이는 아브라함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브람, 아브라함의 정체성의 여정, 그리고 그 삶의 여정은 우리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즉 누구라도 신앙을 처음 시작하는 시점의 정체성과 그 신앙이 장성한 다음의 정체성은 다르다. 특히 신앙에 있어 큰 마디를 지난 다음에는 그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너기 전과 건넌 후, 요단강을 건너기 전과 후는 전혀 다른 민족이고, 할레를 받기 전의 아브람과 받은 후의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이듯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역시 그 신앙이 생명이 자기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사람과, 그 자리에 이르기 전에 행함으로 의에 이르려고 하는 시절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니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아브람의 여정을 성경으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신지 얼마 되지 않은 아브람의 여정은 마치 처음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는 여정과 흡사하다. 누구나 이 아브람의 여정을 거쳐서 가나안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땅이 그 소산을 풍족하게 내듯이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족하게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성경의 장절로 본다면 금방 부르신 것이다. 그 아브람의 신앙 여정의 시작은 벧엘과 아이성의 사이에서 시작한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아이는 ‘폐허, 절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렀고, 아브람이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서 시작하는 믿음을 보여주었지만, 처음에는 하나님의 집과 절망 사이에 자기의 자리를 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브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말씀이 오늘 나와 상관이 없다면 이 말씀을 읽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성경을 지키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이 한 성경인데, 구약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고, 신약은 오늘 우리의 행동 가이드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어느 부분을 보고 그것이 나의 이야기, 설사 신앙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면서 살아내는 신앙이라 해도, 그렇게 성경의 한 부분을 보고 있다면 이 아브람의 여정은 오늘 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그대로 살기 원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이후에 하나님의 집도 또한 세상의 절망과 폐허도 아닌 중간에 자기의 장막을 쳤다는 것은 그 자리가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생명이 아브람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브람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모든 사람들도 그와 같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신앙과 세상 그 사이에 자기의 장막 곧 자기의 자리를 둔다는 의미인 것이다. 자리는 곧 자기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다고 바로 베드로나 바울 사도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러하며 아주 계시가 밝은 사람도 그러했고, 지금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사람도 그렇다는 것이다. 신앙은 여정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도 여정인 것이다. 어디를 향하는 여정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여정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시대에서는 신앙이 교회로 가는 여정인 것이다. 즉 교회에 적합한 사람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여정인 것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과 같이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그때 사람들의 모습은 성경에서 많이 나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고 했을 때 따라 나섰지만 자기 생업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이중적인 삶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같이 우리 모든 사람들이 신앙의 여정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세상에서의 자기 삶, 그 사이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말씀일 수 있다. 그냥 접속어처럼 성경 말씀을 써 가면서 연결고리 역할로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성경일 수 있는데, 아이라는 지명의 뜻이 ‘황폐’한 것이라는 것을 도입해서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의 상태라며 그것이 오늘날 사람들 역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비약이 심한 견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그 어느 하나 버릴 말이 없다는 것을 도입하지 않더라도 이 말씀은 정말로 우리를 안식하게 하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도 스스로 그렇게 자책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상하거나 신앙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그런 연약한 모습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브람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신의 장막을 치는 것에서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그곳에서 아내 사래는 누이라 거짓말하면서 까지 자신을 살려고 하다 빼앗길 뻔도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방식으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다. 그런 아브람이 결국 하나님 백성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렇듯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저런 모습들, 감추고 싶은 것들을 행하면서 신앙의 여정을 가는 것이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여정의 어느 한 시점을 그 사람 혹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긴다거나, 아니면 그런 여정을 가는 중에 보이는 이런 저런 모습을 가지고 그 사람을 선악 간에 판단한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저런 모양의 실수를 한 아브람이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아브람의 실수들을 아브라함의 본질로 보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여정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는 과정에서 아브람이 보여주는 모습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래도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이런 모습이 우리 신앙을 위로한다는 것이다. 즉 이런 모습을 아담이 벗은 몸을 부끄러워했듯이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 가는 과정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말씀이 나와 상관있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각양의 사건들은 그 말씀 자체로서 주는 교훈이 있다.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기 장막을 쳤다는 것을 읽으면, 우리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우리의 정체성을 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훈으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래! 그럼 나는 안 그래야지?’ 그래봤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안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어느새 ‘나는 그러지 않아야지!’ 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연약함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사람인 나도 그렇다는 것이고, 사람의 본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브람도 그랬다. 재밌는 것은 아브람과 이삭은 부자가 둘 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자기는 살려고 했다는 것이다. 2대에 걸쳐서. 그런 집안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보고 ‘저렇게 예수 믿으면 안 되지’라든가 심지어 ‘저렇게 하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그것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면 그 사람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신앙의 사람이 될 것이고, ‘나는 저렇게 하지 않아야지.’하면 다른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 차이는 사람의 연약함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이다.


인생이 연약한 것은 자랑할 일은 아니다. ‘나는 그렇다 왜? 어쩔래?’ 이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아브람과 같이 어중간한 삶의 모습을 얼마든지 보일 수 있다. 그때 ‘이것이 사람의 모습이구나!’ 이렇게 아는 것이 제대로 본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의 일을 제대로 본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연약한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되는 사람은 먼저 겸손하며, 믿음이 수동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이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아브람이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자기 장막을 친 것이 오늘 자신의 이야기가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가 그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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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퓨 굿맨(A Few Good Man)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0. 23. 21:15 Writer : 김홍덕

어퓨굿맨 이라는 영화가 있다. 1992년 영화로서 법정 드라마다. 특히나 이 영화는 미션임파서블로 잘 알려진 톰 크루즈, 데비 무어, 잭 니콜슨, 케빈 베이컨 등 대단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의 연기 향연도 볼만하고, 그 스토리의 전개가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아마 이만한 법정 드라마 영화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좋은 것은 마지막에 죠셉 대령(잭 니콜슨)을 심문하는 과정과, 재판이 끝나면서 피고였던 도슨 일병(볼브강 보디슨 분)의 몇마디 대사에 함축된 주제, 곧 이 영화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의 본질 자체가 아주 훌륭하다는 것이다.(물론 영화의 주제는 사람마다 받아 들이는 차이가 있기도 하다. 다만 필자의 입장에서 정리해 보는 것이다.)





(영화의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생략)


이 글에서는 도슨 일병이 그 부하가 일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에 억울해 하는 후임 사병에게 하는 말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명령을 따르다 사람이 죽게 되었으므로 살인은 무죄지만 해병으로서의 직무 유기는 유죄라는 판결로 명예를 위하여 목숨도 바친다는 그들에게 불명예 제대가 선고되자 도슨 일병의 후임 사병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대령이 명령을 내린 것을 자백했는데 왜 유죄냐?' 억울해 하자 도슨 일병이 이렇게 말한다.

아니 유죄가 맞아,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싸울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싸우지 않았어. 라고


이 말을 의미 있게 새겨보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한 번 비춰 보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그리고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법 이상의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마치 이 영화에서 조셉 대령 혹은 해병의 신념과 같은. 그래서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안 하는) 사람들을 마구 심판하기도 한다. 신앙이 없는사람,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그래서 사회에서 개독교라 비판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도슨 일병은 해병의 명예를 위해서 명령에 따라 코드레드를 훈련을 따라 오지 못하는 사병에게 행했고 그 결과 그 사병이 죽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이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죄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치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이 당연하고 오히려 그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군인은 군인 아닌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있는 존재들이다. 그것을 위하여 군대에 신념이 명예가 그리고 명령이 있는 것이다. 그런 군인이 약한 사병을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 유죄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 도슨 일병은 평소에 연약한 동료들을 생각하는 사병으로 나온다. 벌을 받고 있는 사병에게 명령을 어기고 음식물을 주었다가 진급에 누락되고 근무 평점을 최저로 받기도 했다. 바로 그런 희생이 진정한 희생이다.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인들이 사람을 외면한다? 그것도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그런 모습이 바로 이 영화가 말하는 "유죄"인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은 국민보다 강하기 때문에 나라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안전한 사람이 군인이라고 하기고 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도 그 신앙 안에서 신앙생활, 남들이 하지 못하는 영적체험, 혹은 남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계시를 알고 누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 자신보다 신앙이 여린 사람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고 수고하는 것이 그런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신앙이 없는 이들을 위하여 수고하다 손해를 입게 되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도슨 일병이 벌 받아 굶주린 사병에게 음식을 준 죄로 진급하지 못한 손해를 본 것과 같이 말이다.


많은 신앙인들 그리고 교회가 이것을 모른다. 그래서 교회만 크게 짓고, 또 모여서 자기들끼리 신앙 생활 하면서 사람 없는 곳에 모여서는 신앙 없는 이들과 자신들의 삶이 다르다는 것에서 자부심 썩인 감사를 나누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줘도 못 알아 듣는 걸 어떻 하라고?'. ' 이 복음을 모르면 벌레 같다'고 말한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묻는다. 

그렇게 당신들보다 신앙이 없는 이들을 위하여 당신이 손해보면서, 또 죄인이 되기 까지 그들을 위하여 일흔번씩 일곱번씩 수고해 본 적이 있느냐?

라고, 

그게 아니라면 제 아무리 계시에 밝고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신앙의 모습이 있다해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에서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한 바리새인과 뭐가 다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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