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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신앙 여정 요약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30. 17:32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은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의 심령이 변하는 여정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사람의 심령이 세상에 속했다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을 낳을 수 있는 삶에 이르는 여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았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사람의 처한 환경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각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각 과정을 거치는 시간(크로노스적인 시간)의 차이나 과정을 겪는 심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여정을 겪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점점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 여정은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먼저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세상에 대하여 인식한다. 태어나면서, 철이 들면서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태신앙이라도 다를 바 없다. 모태신앙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집에서 태어났다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알게 된 하나님의 인식을 바로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도구요 수단이요 형식인 사람의 육신을 가진 삶이 세상 안에 보내지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신앙의 여정을 세상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아니 어디에 속했다는 것이나, 성경에 많이 나오는 것과 같이 어디 아래에 있다거나 어디 안에 있다는 것은 그것의 법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세상에 속했다면 세상의 법을 따른다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속했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을 따르는 생명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속한 상태로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법대로 사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흑암이 혼돈하고 빛이 없고 어두운 상태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 역시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안식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존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렇다. 그 고향 땅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즉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즉 아브라함 역시 세상의 가치관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정체성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인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의 자리로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뜻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성경을 이렇게 보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냥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떠났다고 바로 하나님의 정한 자리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곤란하다. 떠나라 했으면 단숨에 인도하실 것이지 뭐 그렇게 복잡하고 이래라 저래라는 것이 많으냐는 식의 태클은 다분히 사람의 생각이다. 사람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편하고자 하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여정은 여러 과정을 거쳐 간다. 아브라함이 롯과 함께 다니다가 애굽을 사모하는 롯과의 갈등이 있었듯이 세상의 가치관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가기 시작해도 세상의 것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필자도 처음 이 복음,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안목이 열리고서 마음에 ‘그래도 돈이 있으면 더 복음을 누리는 삶이 더 좋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을 떨치는데 정말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그 시절을 한 마디로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위로함이여 만족이 되라!”라고 했다. 복음을 아는 것이 힘든 삶의 위로가 되기는 하지만 만족이 되지 않았는데 만족이 되기를 소망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정들을 거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것과 같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고자 하는 사람,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으려 하고,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더 알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손자에 때에 이르러 야곱에게서 12아들이 나오고 12지파가 되어 나라가 된 것 같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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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을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26. 15:56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을 논함에 있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에 따른 것을 빼 놓을 수 없다. 이 말씀은 정말로 대단한 순종의 말씀으로 회자되지만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은 참 고약한 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의아한 요구를 했고, 그것에 보통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따랐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이 말씀은 정말로 어떤 말씀인가? 순종에 관한 말씀인 것은 맞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순종하는지 시험(test)해 보시려한 것 그것이 이 말씀의 의도인가 하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고행에서 불러내어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이끌어내신 택한 사람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아들이 나지 않자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보려고 이스마엘을 낳아도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하지 않으시면서 끝내 주신 아들이 이삭이다. 그리고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것이다.


지금 이 블로그에서 아브라함에 관한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누누이 이야기 해 왔다. 그렇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이 위대함을 좇는 가치관으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간의 정체성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는 자리로 이끄심이듯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것 역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반드시 있는 일이라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이며, 그것은 또 오늘 창세기의 말씀을, 또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말씀을 읽고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 이삭과 같은 것이며,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 마저 바치라고 하시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을 바로 보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알기 위하여 먼저 아브라함의 여정을 잠깐 돌아보자. 아브라함의 고향은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았던 땅이다. 땅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 그 자체이다.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있던 땅은, 위대함을 좇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흙으로 벽돌을 만들되 그 안에 짚을 넣고 또 굽기까지 한 것과 같이,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는 하늘에 이르지 못한다고(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서 세상의 지식과 재물과 공로와 고상함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치장하여 하늘에 이르려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고향이고, 또 오늘날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전에 사람들의 삶이고 가치관이다.


그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 인생의 자리,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고향과 같이 사람이 위대하게 되어 하늘에 이르는 자리가 아니다. 아브라함도 롯과 갈등이 있을 때에 그런 위대함을 상징하는 애굽과 같은 땅을 롯이 선택한 다음에 남은 땅을 선택했다. 그랬더니 그 땅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는 위대함을 좇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려 하는 본성을 광야로 보내는 여정을 거친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들이 생기지 않자 자신의 힘으로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는 것이다. 즉 행위로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율법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서 내어 버리는 여정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곧 백세에 아들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심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산에 가서 소나무 뿌리를 뽑는 기도로도 아니고, 성경을 몸을 지켜내기 위하여 새벽기도, 철야기도를 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니고, 1월 한 푼 틀림없는 십일조를 드리려 노력하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닌 자리에서 난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도 아니고, 또 위대함을 좇은 것도 아닌 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것인데 그것을 왜 번제로 달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과정에서 정말로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면 어쩌면 놀랄지도 모른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생각을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관한 것은 양보 못한다.’는 식의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걱정을 한다. ‘세상에 동성애자가 많아지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는 생각, ‘신천지와 같은 이단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니 기독교인들이 막아야 한다.’와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런 생각과 외침을 대할 때 정말로 마음속에 강력하게 드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이 그것도 처리 못해서 네가 걱정하고 돌봐야 하는 분이냐?,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창조주로 믿는 믿음의 본질이냐?’라는 것이다. 어떤가?


그리고 또 교회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며 사람을 내어 쫓고 서로 다툰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삭을 지키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죽거나 손상당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상처 준다. 이삭을 지키려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걱정하는 것, 하나님의 일을 걱정하고 사람이 나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세상에 외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이삭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렇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말린 제자들은 다 이삭을 지키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보이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그것을 보이시려 하는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하나님을 걱정하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상처주고, 신앙을 지킨다면서 다투고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이삭을 바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창 22:12)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증거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 마저 주관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신앙적으로 귀하면 귀할수록 지키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뜻을 이루심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의와 가치관과 신앙의 귀한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요구 받을 때 내어주는 자리에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나 신앙심이 좋다는 사람들에게 각성을 요하는 말씀이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늘 신앙으로 사람들을 심판하려 한다. 이삭을 바치지 않겠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신앙을 권력으로 삼는 것이다. 교회에서 신앙이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일수록 신앙 없고, 세상적인 사람들이 그를 편하게 여기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에 순종한 삶이다.


하지만 많은 교회와 신앙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 목사나 목자나 자기들끼리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 앞에 가면 왠지 신앙이 없는 것이 들통 날 것 같은 두렵고 긴장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이 좋은 신앙을 지키려고 날이 서 있기 때문이다. 이삭을 바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질 수 없고, 좋은 신앙은 무시당하거나 손상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존재인 이삭을 바치는 것이나, 이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고자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간다는 사람들은 정작 신앙적으로 귀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죄인이 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거룩하고 높은 강대상으로 또 만나기 힘든 자리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삭을 바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안다면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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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이스마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24. 17:20 Writer : 김홍덕

이삭이 태어났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아들을 아브라함이 얻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안에 있는 씨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들로 나타나게 할 만한 의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얻고자하신 뜻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표현될 수 있었기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자신의 의지대로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 그것을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쫓아낼 것을 요구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고민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내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아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날 때 아브라함의 기업을 이어받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재물 중의 어떤 것도 분깃으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겨우 떡 한 덩이와 물 한 가죽부대가 다였다. 그나마 얼마 가지 않아서 다 고갈되어 죽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종 하갈의 눈을 여시므로 샘이 보여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활 쏘는 자가 되었다고 하셨다.


광야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세례 요한이다. 이 세례 요한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여자가 낳았다는 것과 광야에 있었다는 것이나 그의 음식이 메뚜기와 석청과 같이 광야의 소산이었다는 것과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아브라함의 의지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은 다 같은 뿌리다. 같은 것을 말한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의지대로 낳은 아들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능력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 아니라 육신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육신의 씨가 맺은 열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 아들이다. 육신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 낳은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아들은 육신의 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낳은 아들, 아브라함 안에 있는 의가 하나님이 보실 때 아들로 표현되어도 좋겠다고 할 그 때에 낳은 아들인 이삭과는 다르다.


율법도 그렇다. 율법은 육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육신의 씨가 맺은 열매다. 육신의 노력으로 신앙의 의를 나타내는 것, 성경 말씀을 읽고서 말씀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행동과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몸으로 지켜내는 것, 그것이 율법이다. 지켜내려는 말씀이 신약이거나 구약이거나 무관하다. 그런 신앙은 다 율법적인 것이고, 그것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능력으로 낳은 이스마엘과 같은 신앙의 열매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는 것은 여자는 형식이기에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의 최고봉은 세례 요한이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그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은 그 율법적인 세계가 끝나고 예수님으로 신앙의 세계가 넘어가는, 바통을 넘겨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행위로 삶으로 지켜내는 그 어떤 삶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작은 자 보다도 작은 자가 되는 것이다.


십 수 년 전에 고등학생일 때 필자가 고등부 교사로서 성경을 가르친 청년이 되어 나름 성경을 공부하고 선교사가 될 꿈을 가진 열심을 가진 자로 살았는데 내가 전하는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하여 찾아 왔었다. 처음에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다가 그 느낌이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시비를 걸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


“네가 모세보다 크다고 생각하나?” 그러자 머뭇거리면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서 열심히 살다가 네 스스로 모세보다 크다고 생각되거든 다시 찾아 온나(오라).” 했더니 아무 말 없이 가 버렸다.(아직도 안 오는 것을 보면 아직 광야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신앙이 모세가 보여준 것조차 보여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신앙의 세계가 모세와 같이 율법 곧 말씀이 생명이 되어 표현하는 삶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문자대로 지켜내려는 신앙 안에 있었기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모세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례 요한은 어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듯 율법적인 신앙은 세례 요한이 보여준 것과 같이 광야와 같은 신앙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몸으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한 열매인 이스마엘은 광야에 거하는 자가 된 것이다. 광야는 분명한 규율을 가져야만 살 수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를 보면 가는 것도 마음대로 가지 못했다.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없으면 가지도 거하지도 못하는 곳이 광야다. 마치 지금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신앙의 지침을 주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하면 안 되고, 저것은 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율법이고, 광야의 신앙인 것이다. 그리고 이스마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몸으로 이루려하는 신앙인 것이다.


그런 신앙은 늘 나를 찾아 온 청년과 같이 생명이 표현되는 신앙을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듯 희롱하려 한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으로 보이니까 생명이 표현되는 신앙이 작고 가소롭게 보이는 것이다. 마치 포크래인이 볼 때 사람의 손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과 같다. 화려한 교회가 진정한 신앙 공동체를 볼 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는 것도 바로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함과 같은 것이다.


참 신앙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너의 후손이라 한다고 하신 것과 같이, 몸으로 성경을 지켜내고, 세상 사람들이 성공이라 여기는 것을 이룬 신앙을 위대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 아들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아브라함 안에 있는 의가 충분히 하나님이 보실 때 아들로 나타날 수 있다고 여기는 의를 가졌을 때 생명의 법으로 난 아들과 같은 신앙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하는 신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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