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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을 부르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0. 23. 10:39 Writer : 김홍덕

창세기는 어떻게 보면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다. 천지창조에서 바벨탑까지, 그리고 아브라함, 마지막으로 야곱 이렇게. 이 블로그에서는 창세기 1부에 해당하는 바벨탑까지 다루었다. 그리고 이제 2부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에서 야곱 이전까지의 말씀을 나누어볼까 한다.


창세기 2부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에 관한 말씀은 12장에서 시작한다. 물론 11장 마지막에 아브라함에 대한 족보가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는 12장부터이다. 그리고 12장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람’이다. 물론 이는 같은 육신, 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위대함의 아버지’라는 의미이고, 아브라함(17장 이후)은 ‘생명의 아버지’라는 뜻도 그렇고, 할례를 받았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또한 명확한 구분이 있다.


아브람을 부르시는 사건은 모두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 살던 곳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부르심에서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람이 살던 곳은 갈대아 우르라는 곳인데 그 뜻은 ‘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의미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음.) 그 곳은 당시에 우상숭배가 많았던 곳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동네가 나빠서 그곳을 떠나라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지역이 우상숭배가 많아서 아브람을 그곳에서 불러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서는 아브람을 복 주실 수 없기 때문에 불러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이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고향 땅에서 잘 살고 있는 아브람을 떠나게 하신 것인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되는 가나안 땅이 사실 그렇게 비옥한 땅도 아니고 토질로만 보면 오히려 아브람의 고향 땅이 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신 것일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과 아브람의 이름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답을 알고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아브람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실 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다. 이 본토, 아브람의 고향은 아브람에게 ‘위대함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준 곳이다. 그리고 더 위로 가면 그 고향은 바로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고향이다. 그렇게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아브람에게 ‘위대함의 아비’가 되라고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붙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한 곳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명을 가진 땅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위대함을 좇는 너의 본 바탕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아브람에게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이 아브람의 이야기가 오늘 나와 상관이 없다면 뭐 하러 성경을 읽고 있겠는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 잘 들으면 부자가 되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면 도무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설사 그렇다고 쳐도 아브람이 나중에 아브라함으로서 부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은 그 육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그 삶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행동에 보상을 하신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브람의 말씀(아니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오늘 나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이 책으로 만들어지고 또 여러 말로 번역되어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본토이자 아비의 집이 다 위대함을 좇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또 자기들의 믿음을 통하여 흩어짐을 면하려고 바벨탑을 쌓은 것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런 자리에서 떠나라는 말씀을 아브람을 통하여 표현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있는 위대함을 좇는 본토는 어디인가? 이것 또한 지번(地番)이 있는 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바로 흙으로 지어진 땅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아브람의 본토 아비집이라고 하신 사람들이 있는 땅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아브람의 본토이자 사람들이 떠나야 할 자리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위대해지려는 마음,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이 뭐 위대한 것을 좇았는가 싶겠지만, 사람 마음에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스스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결정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의 일인데 사람들이 지금 그러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시작된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고, 그 마음이 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바벨탑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선과 악에 대하여 판단하는 마음은 일상이다. 하루를 살면서 어떤 일에 화가 난 것을 돌아보면 그 어느 하나 예외 없이 ‘그것이 이렇게 되어야 옳은 것이지, 그렇게 돼서는 안 되지’ 하는 것과 ‘그래서 되겠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둘 다 어떻게 되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기준이 사람 안에 있어서 생긴 마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사람이 사람과 겪는 모든 갈등의 원인이고, 세상이 시끄러운 유일한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스스로 선과 악을 가지고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는 자리, 그리고 그렇게 남과 세상을 판단함으로 스스로 높아지고 위대해지는 자리, 그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그 정체성, 그 가치관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사람의 자리로 가라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위대함의 아비라는 이름을 위대함을 좇는 부모들로부터 받은 아브람을 부르셔서 하나님께서 땅 곧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의 자리로 이끄심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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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시작하는 신앙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22. 15:52 Writer : 김홍덕

이 글의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주관자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가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인생을 주관하신다고 할 때, ‘과연 인생의 무엇을 주관하시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신앙이 흐트러진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주관하시는 주권의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주관하시는 주권의 가장 본질은 창조에 있다.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왜 만드셨는가?”하는 그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여기에 본질이 있는 것이다. 즉 만든 이유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목적이 있어 만드셨다면 그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동을 위하여 사람이 자동차를 만들었기 때문에 자동차에 연료를 채워주는 것이지, 자동차에 연료를 채우기 위하여 자동차를 만든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느냐? 아니냐? 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새 생명이 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창세기가 시작되는 것이고, 그 생명이 장성하여 삶을 주관하므로 나타나는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살아가는 모양과 생각과 말이 어떠한지를 기록한 것이 성경인 것이다. 즉 내용인 하나님의 의가 형식인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 외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향성은 없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순간까지 신앙이라는 것은 어렵고, 성경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사는 것이 힘들다고 여겼다면 그것은 방향이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성경을 읽고서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아무 문제가 없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신앙적 가치관과 안목은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치관은 늘 ‘이렇게 해도 괜찮은가?’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성경은 생명의 말씀인데, 생명이 ‘숨 쉬어도 되는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숨 안 쉬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숨을 참아보려 해도 스스로 숨을 참아서 죽을 수도 없는 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그런 것은 생명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 생명이 몸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과 같이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말씀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적어도 스스로 그것을 그치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죽일 수는 있어도 주님을 부인하게는 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고서 정말로 말씀대로 살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말로 믿음을 체험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면 성경의 모든 것이 내 삶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가장 크다. 죽은 사람 살려 본들 다 죽었지 않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의가 내 생명이 되어 그것 삶으로 나타나면, 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도 그 속에 있던 의는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 의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이고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의가 육신을 입고 살 동안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니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작에 대하여 의심할 필요는 없다. 모든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 사람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마치 땅에 씨가 심기는 것과 같다. 땅에 씨를 심은 농부가 그 씨가 열매 맺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돌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이 되기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그 말씀이 생명이 되기까지 뿌린 이도 기르는 이도 다 최선을 다한다. 뿌린 이나 기르는 이가 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것이다. 농부가 씨 뿌린 이유가 그 씨가 열매를 맺는 것뿐임과 같은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자꾸 하려 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면 살아 있는 생명이 그 생명을 끊임없이 표현하듯 쉬지 않고 하나님을 나타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당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해야겠다고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외식하는 신앙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 예레미야와 같이 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이 견딜 수 없다면 당신 안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보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것이다. 최면 걸듯이 속이지 않는다면.


인생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고 도구다. 그러니까 육신의 삶과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뜻이 본질이고 내용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문제에 관하여 기도하고, 살아가면서 화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세상에서 성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결과에 대한 부러움을 사기 원했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살아온 것이다. 그러한 것은 어떤 모양이라도 될 수 있다. 내용이 표현되는 것은 너무 다양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동을 위한 자동차의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른 것이 그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의가 인생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말씀에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은 그 행동 자체를 원하심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는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착각하거나 외면하면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진정한 신앙을 원한다면, 그런데 오늘까지 성경을 지켜 행함으로 내 영혼의 정체성을 죽음에서 천국으로 바꾸려 했다면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내 영혼이 먼저 은총을 입고 하나님 아들의 생명으로 거듭나면 성경의 모든 말씀도, 삶의 모든 필요도, 그리고 삶의 목적과 의미도 다 이루어질 것이다. 아니 그것을 금할 방법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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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신앙의 내용, 그리고 형식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21. 10:46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은 아주 핵심적인 말씀이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에 관한 것일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의 많은 본성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법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법과 성품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에 많이 베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난 것 같다.’고 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빌립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7)

이 말씀은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정말로 더 이상 말하기 입 아플 정도로 명확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 예수님을 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본 것임이 당연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이라는 것인가?’ 하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보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깨닫게 되는 과정에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즉 성부께서 가지신 의가 육신이 되어 나타나니 그분이 아들이시고 그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를 본 것 같이 아버지의 존재와 성품과 뜻을 알게 되는 감동을 주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이다.(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이 가진 정말로 놀라운 의미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 그 삶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핵심 중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각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것도 우리 사람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모든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았듯이 다른 사람이 자기 삶을 볼 때 하나님을 알고 깨닫고 만날 수 있게 되는 그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그야말로 내용이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되어 예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할 것이라고 하셨다. 즉 우리의 삶으로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이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그 영광스러움이 소름 돋을 정도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 것이지 세상에서 상 받고 성공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광이 오염된 것은 정말로 통탄할 일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로 감동스러운 일이고 몸 둘 바를 알 수 없는 그런 일이다.(이런 말씀을 생각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할 때면 가슴 벅찬 감동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가 또 내가 지어졌고, 이를 위하여 부르셨고, 또한 불러서 이렇게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정말로 이 인생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은혜이기 때문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러므로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식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이신 하나님이 실존하심을 증거하는 증거가 사람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는 존재가 또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서의 삶을 눈에 보이는 형식을 본질로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인생을 사용하지 않고, 내용 없는 인생의 겉모양에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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