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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과 에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18. 10:51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여정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인 생명을 얻게 되는(이것을 전도라고 한다.) 여정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의 신앙 여정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표현하신 것이 아브라함의 일생이라 할 수 있다. 그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여긴 유일한 아들 ‘이삭’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뜻과 육신의 능력으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있다. 이것은 앞서 다른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된 삶과 행동이다. 이삭으로 표현된 것이 이것이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낳을 수 없는 아들이 이삭이었다는 것이 그것이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심령의 상태가 그 여정을 거쳐내어서 하나님이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실 때, 곧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서 낳은 아들이 이삭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럴 조짐이 없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 여종을 남편에게 동침하도록 하여 낳은 아들이다. 이는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해서 자신들의 육신의 생각과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낸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늘 있는 일이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지키는 것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이삭의 신앙, 곧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한 사람 안에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성경의 말씀을 자기 힘으로 지켜내지 않는다. 그럼 무엇으로 지켜내느냐?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이 삶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삶을 주관한다는 것은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은 사람의 유전자와 본성에 의한 것이다. 남자로 나서 남자로 사는 것이지, 나서 어떤 노력에 의하여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 생명으로 인함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말씀도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말씀을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키려 하지 않다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지만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끈 것이다.


반대로 자기 안에 성경을 지켜낼 수밖에 없는 생명은 없는데, ‘성경을 지키면서 살아야 천국에 간다.’고 하니 때로는 스스로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야말로 바늘로 허벅지 찔러가면서 의지와 신념으로 지켜내는 사람들의 신앙이 바로 아브라함이 자기 육신의 힘으로 낳은 이스마엘의 신앙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시대에 정통성을 주장하는 어떤 화려한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다. 교회를 이고 천국에 갈 것이 아니라면.


이 이스마엘의 일이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것을 성경에 말씀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한 때는 누구나 다 자신의 의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시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철없는 시절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서 그런 마음을 처리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인정할 때 온전한 신앙의 여정으로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의 여정을 처리해 내었으면 끝났다고 하면 좋을 텐데, 하나님께서 아들로 주신 이삭에게서 쌍둥이 아들이 나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길로 간 것이다. 쌍둥이의 형 에서의 일이 그것이다. 에서는 부모 이삭과 리브가가 걱정하는 결혼을 했는데 바로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이다. 


물론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는 것과 아브라함이 자신의 의지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다르지만, 우리 신앙 여정에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본성이라는 점에서 같고, 또 그것이 우리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우리 신앙의 여정과 상관이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과 왜 반복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먼저 이스마엘과 에서는 전혀 다른 신앙의 모습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존재로 보시기 전에 자기 육신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힘과 육신의 능력을 신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장로는 세울 때에 세상적인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언급한다면,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서 있었던 바벨탑과 같은 일은 하나님의 일을 육신으로 이루어내려는 율법적인 신앙이 아니라, 육신의 능력 자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흙을 굽고 짚을 넣어서 만들고 쌓아서 하늘에 이르려 했다는 것이다. 흙에 짚을 넣어 만들고 흙으로 만든 벽돌을 구웠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단련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한 이삭의 아들 에서는 아브라함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낳은 아들 이삭에게서 난 아들인데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살았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 심령 안에 에서와 같은 본성이 있고, 그것을 처리해내고 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에서는 무엇을 설명하는 존재인가?


에서가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을 산 것은 이방의 여자를 아내로 취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아내를 이방 여인 중에서 취하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혈통의 문제가 아니다. 아내는 남편의 형식이다. 하나님이 의를 가지시고 그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기에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이 여자인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에서는 그 아비와 할아버지의 의와는 다르게 가나안 땅 곧 이방의 여자를 아내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 있어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온전한 생명, 행위나 공로의 신앙이 아닐 존재의 신앙이고, 또한 성경의 말씀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다 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 신앙을 표현함에 있어 이방여자와 같은 형식, 곧 세상의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기성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율법적인 신앙을 넘어선 교회들도 많다. 그러니까 성경을 지켜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속한 생명을 가졌기에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교회들도 제법 있다. 그런데 그 중에 보면 그런 좋은 신앙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앙을 계급화한다거나, 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주장과 같은 것이다.


신앙의 그런 모습은 이스마엘로 표현된 율법주의적인 신앙에 비해서는 더 온전하고 장성한 신앙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복음을 가지고 사람을 심판하고, 복음을 기준으로 사람을 계층화 하는 것은 너무나 세상적인 것이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하면,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신앙으로 본다면 표준이고 최고봉이지만,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좋으면 좋을수록 어떤 모습이 되는가 하면, 더 좋은 신앙을 가졌기에 더 수고하고, 더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단들의 교주가 보여주는 모습이 성경적이지 않은 것도 이것에 비추어 보면 명확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다. 더 좋은 신앙,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 신앙과 믿음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을 모르는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삼고 십자가에 처형하는 자리에 끌려가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법인 것이다. 그것이 어떤 아내를 얻을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한 개인의 신앙 여정을 가다보면 이러한 일들은 명확해진다.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던 때가 있고, 그 신앙을 지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되어서는 어쩌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세상적인 방법을 배필로 삼는 여정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쌍둥이로 낳았다는 것에서 우리의 여정에 그런 일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야곱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을 종살이 하듯 한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마엘과 에서는 전혀 다른 정체성에서 나온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는 두 가지 우리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함은 우리가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우리 모습을 인정하는 것을 위함이다.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정하지 않는데 돌이키는 회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려 한다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 모습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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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21) 구원의 모든 것은 빛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16. 15:36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미지(형상)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과 의가 사람 안에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과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예수님의 육신으로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심이다.


그래서 그것은 일면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정하셨다. 사람의 존재목적을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목적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심으로 보이셨다. 그렇다는 것은 그 기준에 합당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빛은 인식이라고 했다. 빛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목적대로 인식하고 사용하고 나타내기 때문이다. 빛이 없으면 제 아무리 잘 만든 것도 목적을 나타낼 수 없다. 보이지 않는데 무슨 소용인가? 마치 그것처럼 사람을 아무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아도 빛이 없어서 그 목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냥 살아 있는 고깃덩어리뿐이다. 빛이 없다는 것은 존재의 목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시고자 한 뜻을 알지 못하고 거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진 신으로만 믿고,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객관적 사실로 믿으려고 신념을 가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빛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제대로 모르니 컴퓨터를 앞에 두고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컴맹이라고 하듯, 인생을 살면서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어두운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고 수용하는 것은 여기서 나온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수용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은혜는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주심이 은혜이기에, 사람은 자기가 자신을 지은 것이 아니므로 존재의 목적을 사람 스스로 알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은혜고, 믿음은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즉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그것이 바로 나의 존재의 목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된 사람이 바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과 믿음의 모든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에 있다. 즉 빛을 아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 사람이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자기 맘대로 사는 인생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두운 곳에 빛이 비췸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흑암과 혼돈 가운데서 빛이 있게 된 것이 그것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다. 이것이 인생에게 유일한 진리다. 인생에게 그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 진리가 아니면 뭐가 진리이겠는가? 그래서 정말로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빛, 곧 예수님을 만나려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살면서 겪는 당면한 문제에 매몰되어 그것이 본질로 아는 것은 마치 컴퓨터를 사서 매일 닦고 광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어두움이고 심판을 받은 것이다. 비싼 돈을 주고 산 컴퓨터를 활용도 못하고 오히려 매일 닦느라 종노릇하는 것이니 그것이 심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도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모르고 육신의 일만 신경 쓰는 것은 마치 자동차나 컴퓨터를 사서 타거나 계산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매일 닦고 청소하는 노동의 종노릇 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심판 받은 것이다. 존재의 낭비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정죄, 곧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것인 것이다.


반면에 진리를 좇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러 오게 되어 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니 진정한 진리를 좇았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를 좇는 사람들은 그 진리의 행함을 나타내려 할 수 밖에 없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생명은 그 생명의 본성(DNA)을 표현하기 위하여 자시 생명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다. 


예수님을 좇아 빛으로 온 이들의 행위가 나타난 것이 바로 성경에서 “~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것은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생명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나 항상 쉬지 않고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으로는 항상 할 수 없다. 빛이 비취면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목적대로 쓰는 것이 그것이다. 캄캄한 방에 들어가서 불을 켜면 그 방에 있는 모든 것을 존재의 목적대로 사용하게 되는 것과 같이, 인생이 그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면 육신의 삶의 모든 것을 그 목적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빛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사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뭐가 있겠는가? 이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인생이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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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21) 이름을 믿는다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15. 13:00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 3장 18절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다. 이것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독생자, 곧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그냥 기도할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하니 기도의 끝에 주문처럼 인용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고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막상 ‘뭘 믿는다는 거지?’ 생각해보면 오히려 막막할 정도로 무엇을 믿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지 의아스럽기까지 할 때도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실존하셨다는 것과,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믿음들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핵심적인 모습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셨고, 예수님 닮은 삶을 살라고 하셨고, 또 예수님이 하신 것 보다 더 큰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문제점은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이 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누가 바다 위를 예수님과 같이 걸을 것이며, 또 누가 죽은 사람을 살리겠는가? 설사 그렇게 하는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했으니 구원을 받는다고 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구원을 못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구원은커녕 믿음도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바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더 신앙이 좋다는 인식이야 교회의 암묵적 상식이 아닌가?


만약 정말로 예수님의 실존과 행하심을 객관적으로 신뢰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것이 좋은 믿음이라면, 누군가의 죄를 위하여 객관적으로 십자가를 지고서 대신 죽어야 신앙이 완성될 것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로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일 뿐인 것이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이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시는 것에 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예수님은 실패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다 예수님이 가진 정체성에서 나온 것이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하신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한다는 것,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는 이유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적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다는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생명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의 곧 생명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일과 행적과 말씀과 기적과 십자가를 지심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 안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거하게 되면 예수님의 존재하심과 행하신 모든 일을 객관적으로 믿으려 애쓰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게 믿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가? 바다를 가를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하겠지만, 그러면 나는 먼저는 ‘그럴 것이 아니면 왜 예수 믿느냐?’며 반문할 것이고, 다음으로는 ‘심청전을 읽고 부모님을 잘 모시면 심청전을 쓴 작가나 심청이보다 더 큰 일을 하는 것이지, 꼭 바다에 몸을 던져야 심청전을 기록한 목적을 이행한 것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이름은 생명의 정체성이다. 사자라는 이름으로 사자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고, 사람이라는 이름이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도 그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준 사람의 정체성이 사람인 나의 정체성임을 내가 깨닫고 내가 그 정체성을 순종하므로 나의 존재 의미가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이 못하겠는가? 이건 사람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원래 지어진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사람이 못할 이유나 한계나 어려움이 도무지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그 목적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정체성을 사람으로 오셔서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사람인 자신의 정체성이요, 자신의 존재 목적이요, 삶의 의미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게 된다면, 제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 있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게가 마음먹는다고 바로 걸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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