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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6. 14:20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지만 소식이 없었다. 아브람의 나이가 이미 80이 넘고 아내 사래가 경수(생리)가 끊어져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래는 여종 하갈을 아브람과 동침하게 하여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하나님께서 들으심)이다. 사람들은 이 이스마엘이 중동에 사는 유대인 외의 많은 족속의 조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중동의 모든 분쟁의 씨앗이 아브람에게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한 것이나, 혹은 사람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든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 일치고 제대로 된 것이 거의 없다. 사울 왕이 제사를 먼저 드린 것이 그것이고,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씨를 받아 아들을 낳은 것도 그렇고, 바벨탑이 그렇다. 그리고 아브람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얻은 것은 어떻게 보면 다른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한 땅에 아브람이 도착했고,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아브람의 신앙 여정이 많이 장성하고 하나님께서 평강의 왕을 보내어 아브람의 신앙이 평안 곧 안식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자기의 의지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브람의 모습은 정말로 사람들의 신앙 여정에서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각오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지 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들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브람의 의가 온전해졌을 때 그 의를 아들로 표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람이 자신의 뜻으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자신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마엘이다. 이 이스마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지만 오늘 신앙의 여정을 가는 신앙들에게 있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여정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의 여정을 가면서 <하나님의 위한 일>을 많이 하려고 한다. 언뜻 그것은 참 대견하게 보이고 또 좋은 신앙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 부족함이 있으신 분도 아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순종적인 형식 그것 하나뿐이다.


어쩌면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인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또 다른 사람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얻게 되기까지의 여정에 있어 가장 마지막의 여정이 바로 ‘하나님의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아내 사래는 이때까지 아들이 없었던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고 난 다음에 기다려 봐도 아들이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몸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뜻을 세우고 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는 단순하지만 눈에 띄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아브람이 사람의 뜻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루어내려고 하는 생각을 아브람의 아내인 사래가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와 내용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의와 내용의 형식이 먼저 그랬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종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내 사래, 곧 여자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내려고 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육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법과 같이 의가 삶으로,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방향이 아니라, 삶이나 행동이 지옥에 갈 사람의 정체성을 천국에 갈 신분으로 바꾸어 내는 것은 모두 이스마엘을 낳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은 널리고 널려있다. 교회를 보면 교회를 잘 지어 놓으면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훌륭한 행사나 모임을 가지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교회는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삶(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자 하는 마음이 서로 연합하여 모인 것이 교회이고, 그런 교회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모임)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 저들과 같이 되고 싶다.’는 성령의 감동을 주므로 또 다시 사람이 모이는 것이 온전한 교회다. 그런데 그 반대 방향으로 해서 얻는 아들 곧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다 뭐다? 다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도 그렇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다. 그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본질이 그 사람 심령에 생명이 된 하나님의 의기 때문이다.(그것을 몰라보는 것은 어두움이다.) 그런데 반대로 자기 심령 안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더라.’며 자기 행동을 성경대로 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 이스마엘과 같은 아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종에게서 아들을 얻었다는 것도 비슷하다. 아들이란 아버지가 있다는 의미고, 종이 있다는 것은 주인이 있다는 것이다. 종은 아들과 다르다. 아들은 어떤 행동을 해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지만, 종은 그 행위가 주인과의 관계가 달라지는 존재다. 종을 주인에게 종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항상 수고해야 하고, 잘하다가도 하나를 잘못하면 혼나는 존재다. 아들은 아버지께 뭐 좀 잘못한다고 혼날 수는 있어도 아들이라는 존재 가치가 달라지지는 않는다.(그래서 율법이 종의 신앙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종에게서 아들을 낳아서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려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공로로 의롭다 인정을 받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신앙인들이 새벽기도회 가는 것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것으로, 또 성가대나 교사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으려 하는 모든 것과 그것으로 인한 영광(그들만의 영광이지만)은 모두 이스마엘과 같은 신앙을 낳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신앙들은 이상하게도 신앙이 좋을수록 더 그렇다. 신앙적인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사실 보통사람이 아니다. 새벽기도회 가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것이 보통신앙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죽겠다는 신앙도 그렇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열정인가? 하지만 그런 시간들, 그런 신앙이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을 얻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마엘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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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생자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일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 영광을 보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증거하고 있다.(요 1:14)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말씀이다. 이 독생자는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생각처럼 예수님께서 독생자라는 것이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그 몸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독생자는 하나 밖에 없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예수라는 이름 되에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몸 자체가 독생자라는 것으로 이것을 본다면 그런 독생자가 있는데 다른 아들이 굳이 그렇게 필요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다른 아들을 얻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생자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믿을 이유가 없다. 예수님의 몸과 같이 될 방법이 다시 있다면 모를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나에게 아들이 있다.’라는 것을 자랑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을 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표상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독생자이신 것이다.


사람들이 <독생자>라는 말을 들을 때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유일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수님은 유일하시다. 다른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적은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실패하지 않았는데 왜 다시 오시겠는가? 하지만 그 때 그 예수님의 몸과 삶을 독생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시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의 몸을 독생자로 보느냐? 아니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이유가 유일한 것이냐? 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믿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a christ)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했다는 것은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을 얻기 위하심인데, 예수님만이 독생자면 나머지는 뭐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아니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니까 사람이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 단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복음을 읽고서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독생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고, 그 목적이 요한사도 안에서 생명이 되어 쓴 책이 요한복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그러니까 오늘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영광

그것이 또한 영광이라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영광이다. 영광은 ‘나타나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 역시 그렇게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광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경쟁해서 이긴 것을 이야기하거나,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나타나면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경쟁하여 이겨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타락(구약의 모든 선지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타락이 바로 이것이다.)이다. 또한 기도하여 이루어진 것이 영광이라는 것은 맞지만 기도란 바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 기도지, 세상의 일을 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영광이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말씀과 성품과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지, 사람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 아닌데 나타났다면 그것이 바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것에 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를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유일한 방법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난 것, 그것이다. 오히려 사람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사람의 유일한 존재 목적, 그것이 온전히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은혜

그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다.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을 기도하여 얻은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아니시면 누가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겠는가? 그럼으로 존재 자체가 은혜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적어도 태어나지 않은 것 보다 자신이 사람으로 나서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한 일이라는 마음이 없는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흔히들 시상대 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수상소감을 할 수 있게 된 것과 같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아는 것은 큰 함정이 있다. 바로 경쟁에서 진다는 것은 은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기지 못한 삶은 실패한 삶이라는 전제가 깔린 감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태어나 보니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안 되겠다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태어났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나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시겠다는 뜻을 시행하셨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사람만이 아는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이 아니라 자기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것은 자기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언뜻 사람에게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기 어려울 수 있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가 본질이라고 알면서 살다보면 도저치 태어났다는 것 그것이 은혜와 영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를 통하여 표현하시겠다는 것이 나의 존재 목적이 된다면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의 감사는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은혜다. 요한 사도가 전하는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그 뜻을 자신을 통해서 나타내시려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은혜가 충만했던 것이다.


진리

그리고 또한 은혜 뿐 아니라 진리도 충만하다고 했다. 그것 역시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통하여 알게 된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을 때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사람에게 진리라는 것이다.


진리라는 정의는 굳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진리에 반대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거짓’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을 싫어하신다는 것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거짓은 다름 아닌 존재의 목적과 행위가 다른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망치로 사과를 깎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사람의 삶이 다른 것, 그것이 바로 <거짓>이다.


예수님이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육신의 존재 목적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셨으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삶이 하나이니 온전한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요한 사도의 심령 안에 예수님이 보여준 삶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삶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요한 사도 마음에 예수님의 삶이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일치한다는 것임을 알았고, 그것이 참 진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진리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 하나 하나를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사람의 삶이 일치가 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씀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인데(개인적일 수 있음) 그것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무엇이라도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그 용도대로 사용되어지는 것이 바로 자유다.(그래서 물고기가 물 속에 있는 것이 자유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을 보이신 분이시고, 그 보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에 사람에게 은혜이며, 그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온전히 이루어져서 사람의 삶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일치가 된 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독생자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같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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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과의 언약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1. 3. 14:54 Writer : 김홍덕

민족에 대한 언약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온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 한 개인과의 언약이라 할 수 있다면, 자손들, 모래 보다 많은 자손들도 이 땅을 얻을 것이라는 언약을 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역시 같은 언약이고, 또한 순종해야할 말씀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아브람이 애굽을 거쳤듯이 그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을 거친다. 더욱이 예수님도 애굽을 거친다. 그 기간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 여정, 그리고 교회의 신앙 여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간에 의미를 둔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종살이에, 40년 광야를 거쳤다는 점인데, “4”라는 숫자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면 아브람의 고향 갈대아 우르의 본성, 곧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사람의 가치관이 처리되는 여정을 거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을 거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려면 세상에서 한 번 놀아봐야 한다는 식의 관점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안에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람도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갔고, 야곱과 그의 가족들도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갔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공허함이 들 때 먼저 세상에서 그것을 채우려 하는 본성이 있는데 그것이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이든 나라와 민족이든 다 같다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은 다름이 아니라 신앙공동체 곧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람의 자손은 아브람의 정체성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들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브람의 신앙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것이다. 아브람이 그렇게 자손을 얻었다는 것은 아브람의 씨에서 비롯된 자손이란, 아브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씨)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된 또 다른 사람들이 바로 아브람의 자손이요 믿음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오늘날 전도라고 한다. 하지만 보통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교회에 데려다 놓는 것을 전도라고 한다. (물론 신앙의 좋은 점을 이야기해서 그 사람의 동의를 얻어서 함께 오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진정한 전도는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다시 들어와서 생명이 되어 다시 그도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잉태하심이고, 그것이 전도고, 거듭남이다.


아브람의 자손들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아브람을 통해서 표현되고, 아브람을 통해서 표현된 하나님의 의를 듣고 본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다시 생명이 된 사람들이 바로 아브람의 자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21세기를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브람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다시 자기 생명이 되어서 아브람이 그랬던 것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애굽을 사랑하는 가치관이 처리되고 롯을 위대함을 추구하는 자들에게서 구해내듯이 위대함을 좇는 세상을 다스려내는 생명이 된 사람은 누구라도 아브람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아브람보다 먼저 이 생명이 있으신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람)보다 먼저 계신 것이다. 아브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그 계획(LOGOS)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설계도고 아브람은 그 설계도로 먼저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아브람과 같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해내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누구라도 다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아들들,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이들을 보고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브람의 자손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바로 교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육신을 통해서 이삭이라는 아들을, 그리고 그 이삭이 야곱을 통해서 열두 아들이 나오고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도들이 그것을 삶으로 전하였고 그들의 삶과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심령 안에 그들이 본 사도들의 삶과 들은 말씀이 다시 생명이 되어 그들의 삶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삶이 된 것이다.


그것이 전도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요 생명 공동체인 것이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보다, 바닷가의 모래보다 더 많은 자손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아브람의 자손이기에 그들의 삶도 아브람과 같이 애굽을 거치고 나오는 것이다. 애굽을 거치고 나온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증거요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브람과 같이 애굽이 처리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는 당연히 애굽이 처리되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 모인 생명이 애굽과 같은 세상을 사모하고 그것을 본질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던 사람들이 모였으니 당연히 그 공동체 안에는 애굽을 처리하는 과정이 역사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처리해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브람에게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약속이 아니라 생명의 본성이라 할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낸 아브람에게서 나오는 자손이니 당연히 아브람이 애굽을 거쳐낸 속에 있는 생명이 표현된 자손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차츰 해 나가기로 합니다. 창세기로만 본다면 야곱의 때부터 교회에 관한 이야기 구체화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블로그의 글을 읽으면서 완성되지 않는 부분을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자리일 것입니다. 신앙에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삶 안에 있을 때에 채워지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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