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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16-26) 네 남편을 데려 오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20. 07:56 Writer : 김홍덕

사마리아 여인 일명 수가성의 여인이라는 여자와 물에 대하여 대화하시던 예수님은 여자가 자신도 다시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게 해 달라고 하니 난데없이 “가서 네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신다. 생각해보면 물을 주는 것과 남편이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요한복음 4장에서 보면 결국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입으로 마시는 물은 주신 적도 없다. 그럴 거면서 남편은 왜 데려 오라는 것인가?


그러자 그 여자는 자신에게 버젓이 남편이 있는데도 예수님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네 말이 옳다 네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고 하고 여자는 한술 더 떠서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라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설교자들은 이 말씀을 두고, 예수님을 점쟁이 취급을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처음 보는 여자인데도 결혼을 몇 번 했는지를 다 아신다.’는 식으로 이 말씀을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은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남편이 없는 사람들이다. 즉 하나님이 자신들의 남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수가성 여인은 우물에서 예수님을 만난 모든 인생의 대변자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갈증, 왜 사는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목마른 사람들이 그 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물을 찾았을 때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인생들의 모습인 것이다. 


특히나 사마리아의 여자라는 것이 그렇다. 사마리아는 앞선 글에서 이야기 했듯이 앗수르가 점령했을 때에 혈통을 섞어 버렸기 때문에 육신의 혈통조차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그 여자는 이전에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음에도 모자라서 지금 또 다른 남편과 함께 있는 그런 여자였다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사람들은 이 여자가 남편을 여럿 두었듯, 자기 정체성을 채워줄 대상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돈이라는 남편을, 어떤 사람은 명예라는 남편을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여자는 육신으로 여자가 아니고, 결혼도 육신의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란 누구나 여자가 남편을 만나 자신의 존재 의미에 행복하고, 남편 혈통의 아들 곧 남편이 가진 의를 육신으로 표현해 내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회복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물을 길으러 온 이 여자가 그 삶에 남편이 여럿 있었다는 것은 상관성이 있는 말씀이다. 즉 남편을 바꾸어 봐도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미가 채워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것이나 물을 길으러 왔다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그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온 것이 바로 야곱의 우물 곧 조상들이 물을 마신 곳, 곧 하나님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갈증을 해갈하던 물이 있는 우물로 왔다는 것이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대화는 마치 암호문과 같다. 나중에 보면 제자들이 와서 이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장면도 그런 이유이다. 입으로 마시는 물과 육신의 남편이라는 것이 대화의 매개체지만 그 안에 깔린 복선을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을 길으러 온 여인, 그것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려는 모습이다. 더욱이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여자에게 예수님은 남편을 데려 오라고 했다. 그러니까 네 정체성의 주인과 의가 무엇인지 나에게 보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지금을 물 뜨러 온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갈증이 아직 해갈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시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용납되는 첫 걸음이 바로 이것이다. 남편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말씀이 그 사람의 것이 되겠는가? 이미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려주는 이가 있다는데 거기에 대고 뭘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리가 없다는 것이다. 돈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조차 다 그렇게 들린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돈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돈이나 명예나 이런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다 자기 남편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께서 ‘옳다.’고 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수가성 여자에게 지금 있는 남편도 남편이 아니었듯이 그런 모든 것은 사람들의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로 자신의 본 남편이면 목마르지 않고 물 길으러 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속에서 생수가 넘쳐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에게 있어 진정한 남편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생명,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기 안에 있을 때 진정한 남편이 있는 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랑인 것이다. 그 신랑이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과 삶과 목적을 이끄는 본성, 곧 생명이 되면, 물을 길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이 자기 안에 있는데 무엇을 더 채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모든 것이 되심이고, 생수가 속에서 넘쳐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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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는 그 지역을 점령했던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겼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남자도 아니고 여자와 물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 물은 사람이 마시는 액체로서의 물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이다. 즉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증은, 육신의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물을 마시듯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물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의 어떠함에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그 존재의 갈증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자신은 쇠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는 것은 육신으로 하는 것은 쇠하여지고, 생명으로 하는 것은 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의 육신이 사마리아인이든, 육신으로 여자든,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신앙관이 쇠하여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토요일에는 목사님이 주일날 설교를 준비해야 하니 목사님을 바쁘시게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급기야 결혼식 주례 같은 것도 삼가자고 말하기도 한다. 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토요일에 설교 준비를 정성들여 하지 않으면 설교를 잘 못하는 목사라면 적어도 그 속에서 말씀이 샘처럼 흘러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어떤 샘이 물을 내기 위하여 준비하겠는가? 그냥 나오는 것이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 나오는 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기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샘물과 같이 흘러넘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준비해야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어딘가 허술한 것이다. 물론 전하는 본문을 보고서 준비하는 준비야 있어야겠지만, 그 준비가 바로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어야지, 인용할 책을 보고 예화 연구를 도입하는 것과 같은 것은 강의지 설교는 아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영생의 샘물이 속에서 넘쳐나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개는 때리면 ‘깨갱’하고, 말하고픈 것이 있으면 ‘멍멍’하고 짖는다. 그것은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도 같다. 언제나 개의 본성이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니까 그런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신문을 주면 신문으로 하나님의 뜻을 풀어내고, 소설을 주면 소설로 풀어낼 것이고, TV로 뉴스를 보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는 세상이니, 자기 안에 하나님 생명이 본성으로 있다면 그게 안 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의 본성이 되고, 속에서 영생의 샘물이 영원히 흘러넘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요 4:10) 이러한 말씀은 요한복음에 자주 나오는데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도마에게 ‘나를 알았더라면?’이라고 하시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미는 예수님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하신 말씀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안다면 그것이 바로 영생이고, 그것이 속에서 영생의 샘물이 영원히 흘러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르는가? 예수님은 어지간하면 다 안다. 하지만 예수님 정체성의 본질을 아느냐는 다른 문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장)’고 묻기도 하셨고,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을 받는 예수님에 대하여 베드로는 ‘저가 누군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 이 땅에 오신 목적, 그것을 바로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서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가 보면, 많은 경우 육신이 살아가는 문제에 대하여 간구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새벽 일찍 교회에 가서 자식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본질과는 괴리가 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식들이 시험에 붙고, 부자가 되는 것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교회는 목사들이 설교 준비하는 시간을 방해 받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안다면 그 안에서 생수가 흘러넘칠 것인데 뭔 준비를 그리스도인들을 배제한 체 해야 한단 말인가? 이는 예수님을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구주로 설교를 하려 하니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설교를 하다 보니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 본 사람은 어쩌면 십자가 밑의 백부장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아기 예수를 알아본 시몬과 같은 사람도 있고, 세례 요한도 있지만, 십자가에 달린 초라한 모습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세상에서 시험에 붙고 부자 되고 성공하는 것을 예수님의 일로 아는 사람이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상상이 되겠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의 믿음이고, 그런 믿음은 생수가 흘러넘치기는커녕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가리지 않고 마셔대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생수의 강이 속에서 넘쳐 난다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삶의 본성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본성은 어느 곳에서나 그 생명을 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의 생수가 속에서 샘물과 같이 넘쳐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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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22-30) 그는 흥하여 하겠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19. 16:34 Writer : 김홍덕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강 건너편에서 세례를 베푸시니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걱정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고했을 때에 세례 요한은 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세례 요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할 이들이 바로 지금 세례 요한을 걱정하는 제자들이고 말하면서 결국은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세례 요한도 사람인데 그런 상황이 섭섭하지 않았겠는가 싶기도 한데 세례 요한은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체념적이라는 것은 자신도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말함이고, 운명적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서부터 인정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생명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단순히 한 사람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모든 하나님의 아들의 대명사인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은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대명사다.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으로 삶으로 표현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듯 세례 요한은 육신으로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내려는 율법적인 신앙의 대표고 대명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생명이 삶으로 표현되는 이들을 그리스도인(a christ)이라 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첫 열매요 표준이요 대명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을 the Christ로 표현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속에 있는 생명의 본성으로 인하여 지켜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과 의지와 육신의 힘으로 지켜내려는 율법적인 모든 신앙인들의 대표가 세례 요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이를테면 세례 요한은 <the 율법신앙>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자신은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의 신앙이 율법적인 신앙이 쇠하여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의 생명과 삶 안에서 흥하여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말한 것은 자신이라는 한 사람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지금 자신과 대화하는 제자들이 증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인생에 세례 요한을 따르던 율법적인 신앙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가진 삶으로 바뀌어서 그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는 사람은 이 성경을 읽는 연대나 시대에 무관하게, 자신의 신앙이 몸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신앙은 점점 쇠하여지고 반대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의 본성이 되어서 그 생명의 본성이 행함과 삶으로 나타나는 삶이 흥하여지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뭐한다고 우리가 이 시대에 2,000년 전에 두 사람이 누가 세례를 더 주느냐 하는 것과 관련한 말씀을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지켜내려고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지혜 있는 사람은 ‘이게 아닐 텐데?’하는 생각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더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분명히 몸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신앙은 쇠하여져야 한다고 율법의 최고봉인 세례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자. 정말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사고 멀쩡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면서도 교회에 가면 잊을 만하면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또 그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또 노력하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그 정도가 되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로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맞는가?’ 같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면 이런 괴리가 있는 것을 하라고 시키신 것은 심술인가 오류인가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야 사람을 또 만들면 되지만, 나는 한번 뿐인 인생을 살고 있는 일회용 삶을 살고 있는데, 지키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는데 당연히 염려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행동을 지켜내는 것은 결국 쇠하여야 하는 것이다. 즉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정이 되어야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이 그렇게 행동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행동의 상징인 손과 발이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몸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은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은 흥하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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