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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민감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세례 요한의 말로 미루어 본다면, 물세례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세례요,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인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것이나, 아니면 사람들이 생각할 때 신비한 기적 같은 현상을 경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어떤 정체성을 그리스도라고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빛이고, 그것이 태초이기도 한 것이다.


물세례의 기원은 노아의 홍수와 방주다. 방주가 홍수에서 살아남은 것은 세례를 받고 나온 것과 같은 것이다. 홍수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합해져서 홍수가 되었다고 했다. 궁창 위의 물은 상수(도)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존재 목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궁창 위의 물이다. 반대로 궁창 아래의 물은 하수와 같다. 그것은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가 하수도의 물을 먹겠는가? 그런데 그 두 물이 합쳐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아 홍수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다(합쳐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노아의 홍수 (4) - 하늘의 물과 땅의 샘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노아의 홍수 (5) - 홍수의 원인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노아의 홍수 (15) - 홍수의 핵심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 (마태복음) 3:13-17 세례를 받으심.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앙에 세상의 법을 더한 것이 바로 홍수고, 그 홍수에서 남은 것이 방주이듯이, 사람은 하나님의 의 이외의 것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인 것이다. 궁창 아래의 물, 사람의 딸의 아름다움은 바로 세상의 법칙, 곧 소유와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을 두고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이것은 율법의 최고봉이라는 것이다.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형식과 같은 존재이고, 그 형식의 최고봉이라는 의미는 곧 형식인 육신의 삶의 공로로 의롭게 되는 율법의 최고인 것이다. 그 요한이 물세례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세례를 준다는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이라는 것이다.


그 세례 요한은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신앙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면 그 다음에 오시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아는 자, 곧 그리스도를 만난 이는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오신 이가 바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가 인지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 바로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이 바로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의 창조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 자신도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의 성품이 바로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아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시고 나면 성령이 오셔서 그 동안 자신들이 본 예수님의 정체성이 바로 자신들이 되어야 할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령 세례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것,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로 사는 것은 절대로 사람의 노력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스스로 기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령의 감동은 난데없이 벼락 맞듯이 임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사람이 육신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고백 곧 물세례를 받고 나야 이어서 오는 것이라는 것이다.(교회에서 물을 머리에 뿌리든, 아니면 침례를 하든 그런 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예식으로 교단이 나뉘었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뒤를 이어서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다. 즉 성령의 감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삶으로 표현되는 이를 만나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성령의 임재이다. 산에 가서 소나무 뽑아야 만나는 것이 성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된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낸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만나는 분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이를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만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만남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온 것이다. 이것이 성령 세례인 것이다. 이것은 생명이 잉태된 것과 같아서 한 생명이 두 번 잉태되지 않듯이 단 한번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세례인 것이다.


세례는 예식이 아니라 고백이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세례는 사람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법을 혼합하면 더 나은 것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이 죄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고백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만남이 바로 성령의 세례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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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18) 하나님을 본 사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1. 6. 15:42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했다.(출 33:20)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하셨고, 요한 사도 역시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러면 왜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것이며, 예수님을 본 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난 것이며,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몸으로 계시지 않는 지금과 같은 시절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볼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법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엘리야가 낙심하여 굴에 숨었다가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내가 지나갈 테니 너는 보라’고 하시고 바위를 쪼개는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로 나타나셨지만 여호와가 계시지 않고 미세한 음성 가운데 계셨다고 했다.(열왕기상 19장)


이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의 한계 곧 특성 안에서 만나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는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능력과 기능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육신이 영이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육신 너머의 일이므로 이 육신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통하여 만나시려 하시는 방법이 아닌 것으로 만난다는 것은 죽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고 하신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았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는 방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육신으로 나타난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에 예수님을 보았다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리라고 말씀하시기 바로 전이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하셨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한 백부장의 고백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16절 이후에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하시고 모든 것이 기억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성령께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중에 있을 때에 그 분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고, 그 성령이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사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형상과 의를 만난다는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굉장히 터부시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나,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단들의 교주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도 하고,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실패했고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하는 등의 헛소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두운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 어두움의 이면과 빈틈에 이단이 스며든 것이라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 밖에 두고 믿는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신 피조물이다. 이것을 모르면 자신이 하나님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이라고도 한다. 또 반대로 그것을 모르면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콜라병은 콜라를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콜라가 담기는 병이기 때문에 콜라병인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형상을 만나고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려고 한다면 먼저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인데 그 육신으로 하나님을 표현해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든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뭐가 시작되어도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예쁜 쓰레기[각주:1]와 같은 것일 뿐이다.


오히려 사람은 같은 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것은 신앙도 없고 구원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데 그 육신을 가지신 인자(人子)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본성이 된, 그러니까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고,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보면 당연히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하고 또 자신을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를 만났는데, 또 내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원인은 단 두 가지일 뿐이다. 하나는 만난 사람이 존재의 하나님,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이 아니거나, 아니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없거나. 그것뿐이다.


  1. ‘블렉베리’라는 스마트폰을 흔히들 <예쁜 쓰레기>라고 한다. 스마트폰으로서의 기능은 그다지 쓸게 없지만 왠지 모양은 갖고 싶은 모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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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온도차이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1. 6. 14:29 Writer : 김홍덕

엄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너를 믿는다!"


그 말에 아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엄마는 내가 뭘하든지 나를 믿어주는구나!"


하지만 엄마 믿음의 본질은 이것이다.

"아들, 너는 엄마가 바라는 것을 해 줄것이라 믿는다!"


어느 때가 되면 아들은 엄마와 자신 사이에 있는 믿음이라는 단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가 바로 사춘기의 시작이다.


그렇게 믿음은 온도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신다.

"내가 저에게 어떤 것을 해도 저가 나를 믿는구나!"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한 믿음의 본질은 이것이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속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하나님은 거짓이라고 하신다. 사람의 죄가 그것이다.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내가 누구를 믿겠다는 것은 그가 나에게 어떤 것을 해도 내가 수용하겠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그 사람이 나를 믿는 믿음의 본질이 되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사람은 나는 따르는 것이 나의 운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도차가 없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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