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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또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지를 물으셨는데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요 7:19-2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또 병든 자를 고치시면서 ‘죄를 사하노라’ 하시고, 성전에서 가르치면서 유대인들이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니,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이유가 바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이라면 우리가 다 지키고 있으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가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이라면 누가 그러냐고? 즉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가 없다고 반문하고 있다. 오히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면서.


정말로 이런 때는 곤경에 처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확실히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이 스스로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확신했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의 본체이신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기에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 없다고 해 놓고서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사람을 보내었다. 스스로 모든 것을 개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이 땅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지금은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율법을 다 지키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요즈음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대인데, 누가 율법을 지키겠는가?’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 말씀이 구약에 기록되었느냐 아니면 신약에 기록되었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다 복음이다 나누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율법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율법과 복음의 기준은 어떤 것이든 ‘해야 하는 것, 무엇을 바치는 것’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의 말씀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율법이 되는 것이고, 구약의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율법으로 다가간 사람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다. 율법을 다 지키려고 한다고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의 행위로 내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넘어선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서로 말하지 않을 뿐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켜내는 것은 율법이고,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것은 복음이라는 논리도 우스운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에 있지만 지금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노력할 뿐이다.’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지기 유익에 맞게 해석되었을 뿐이다. 종교인들의 이런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과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형성된 시점이 언제인지, 또 누가 가르친 것인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이든, 심지어 설교나, 어떤 사람의 말이나 책이라도, 그것을 지켜야만 어떤 원하는 결과나 기준을 통과하거나, 하나님이나 혹은 어떤 신 앞에서 의로워진다고 생각해서 행동으로 지키려 할 때 율법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율법이나 성경 말씀의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게 율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 보면, 어떤 것이든 사람들에게 같은 결과를 준다. 사람은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도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그 사람의 행위의 어떠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이다. 즉 하나님은 행위나 소유의 드리는 자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분명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율법으로 시험하시는가? 싶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는다고 죽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듯이, 율법이라는 것이 어차피 지키지 못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지만, 살면서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가 있듯이, 율법이라는 것이 어차피 그 형태로는 사람이 지켜낼 수 없지만, 율법이라는 것의 목적이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율법을 어차피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 지키라고 주신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끝내 율법의 목적을 ‘지키는 것(Do)’에 관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즉 그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율법인 것이다. 주신 목적이 아니라, 주신 형상과 형태만 중요하기에 그것을 몸으로 지켜내어서 형상만 유지하려하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이 다 율법인 것이고, 결국 그 율법이 자신을 심판할 뿐이다.


이렇듯 율법을 그 행위로, 그 말씀의 모양을 행동으로 이루어내려는 사람들은 결국 율법을 범하게 된다. 율법이라는 것이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게 주신 것인데, 그것을 버리고 지키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런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이 결국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얻도록 하게 하심인데, 그 목적을 져 버리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지 2,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늘리고 늘렸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하나님이 아들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기도할 때 예수님을 내가 죽였다고 말하곤 한다. 또 오늘날도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낸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미 2,000년도 더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셔서 부관참시조차 불가능한데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어떤 마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마음과 같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도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한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지금의 서기 몇 년이라 할지라도 오늘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엇인가를 자꾸 하려 한다. 목숨도 내어 놓겠다. 바다 끝이라도 가겠다. 험한 산이라도 가겠다. 등등.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금의 자리에서 할 일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존재의 신으로서 어떤 생명을 가졌는가 하는 것에 있는데, 어떤 존재가 되기도 전에 자꾸 무엇을 하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경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성경이 생명이라 여기는 것이 자기 생명이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 생명으로 살다보니 바다 끝에 가야할 일이 생기면 그 때가면 되고, 험한 산에 가야할 일이 생기면 그 때 가면 되고, 목숨을 바쳐야 할 일이 생기면 연어처럼 목숨을 걸고서 자기 생명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는 그 나라와 그 의가 자기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부터 해야 한다. 그것을 하지 않고서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 말씀을 자기 몸의 행동으로 지켜 내려는 사람들은 율법을 주신 목적을 버린 것이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따라 해야 할 어떤 행동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가 아니다. 그런 사소한 것 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는 것,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을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아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이것은 아주 핵심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이 있으면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적으로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삶의 모양과 행동양식으로 나타나는 존재로 지어졌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어떤 것을 생명으로 여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삶의 모양과 행동과 의로움이 표현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의 오신 뜻,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사람의 행동을 근본으로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의도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인 것이다. 못을 박기 위하여 산 망치로 사과를 깎으려고 하는 것은 (목적 안에서) 망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듯, 예수님을 오신 목적대로 보지 않고, 자기 육신의 일을 해결하는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 역시 주님을 오신 목적이란 관점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율법에 관해서 본다면, 율법을 주신 목적을 버리고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야구의 타자에게 공을 쳐서 1루로 나가라는 것은 경기를 이기기 위한 하나의 행동이지, 타자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타자라는 이름에 무색하게 번트를 대기도 하고, 때로는 헛스윙도 하는 것이다. 타격의 목적이 타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듯 율법도 지키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이라 이름 붙은 것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경이든 그렇게 행동으로 지키려 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율법을 어긴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 군대는 구타 자체가 교육일 때도 있었다. 어떤 훈련병 내무반에 보안과 선임하사와 사병들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보안 교육을 실시하겠다. 알겠나?” 그리고는 갑자기 불을 끄고 보안과 사병들이 훈련병들 구타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때린 후에 다시 불을 켜고 선임하사가 물었다. “지금 혹시 구타당한 사람 있습니까?”라고 묻자, 많은 훈련병들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또 불을 끄고는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번 하자, 대부분의 훈련병들은 구타당한 뒤에도 “구타당한 사람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또 손을 들려고 하자 다른 사병들이 만류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보안 교육이기 때문이다. 군에서 있었던 일을 밖에서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즉 무엇이 본질인지를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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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명절에 성전에 가셨다는 것은 명절을 완성시키시는 것이다. 모든 명절, 절기, 그리고 율법의 모든 말씀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시면 성전이 완성되고, 명절을 지키러 가시면 명절이 온전케 되며,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야기하시면 율법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심도, 절기를 또 율법과 성전을 사람에게 주심은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하심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지으셨기에,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게 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성전과 율법과 절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신 것이기에 결국 그것 역시 예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전이 동물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일부 짐승들에게는 제물이 되는 곳일 뿐이고, 율법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이니 사람이 아니면 성전도 율법도 절기도 의미가 없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도 결국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다. 사람 밖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먹은 음식이 자기 것이 되듯 자기의 것이 되지는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밖에 있으니까. 반면에 밖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 안에 어떤 의미와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명절과 절기, 율법과 성전을 보면서 그것이 사람 안에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전과 율법과 절기와 명절을 보고 지키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표현하신 하나님의 성품, 결국은 음식이 사람과 하나가 되듯이 사람 안에서 의미와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이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과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위하여 성전과 율법과 절기와 명절이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온 세상이 모두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생명 가진 존재가 되기를 바라셔서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즉 그런 모든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 안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교훈과 말씀이 생명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그 모든 것은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한 로켓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로켓을 지구 밖으로 쏘아 올리는 것이 로켓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것이 가진 그 모든 첨단 과학의 목적은 오직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것, 그것에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글을 배우지 않아도 율법을 다 아시는 것이기에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다른 것을 말씀하실 이유가 없다. 현재의 설교자들처럼 성경의 신학적 배경이 이러니저러니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 안에 생각나는 것, 그것만 말씀하시면 성경을 다 말씀하시는 것이고, 사람이라면 그 말씀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오신 분이니 그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많은 교회가 있지만 사람들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교회에 회의를 느끼면 떠나고 가나안 교인이 되는 것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생명이 된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성전의 규격과 율법의 구조를 설명하듯이 설교하는 것 그 둘 뿐이다. 전자는 밭이 자갈과 가시밭인 것이고, 후자는 씨가 없는 말씀을 가진 자가 시험 쳐서 면허를 얻어 배타적 자리를 확보하고 설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교훈은 지금의 그런 설교와는 다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행위와 소유의 세계, 육신의 어떠함에 관한 것, 외모에 관한 것이 아님을 깨달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사람의 말과 뜻과 글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교훈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함에 있어 글을 예수님께서 배우지 않아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구원하셨듯이, 지금도 신학교를 졸업할 이유도, 목사 면허도 필요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심령, 그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교훈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모든 주권을 가진 듯이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런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 사람이라는 유전자가 시키는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의 유전자를 가지지 않았다면 사람처럼 말할 수 없고, 사람과 같은 생리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사람이라는 생명이 시키는 대로, 그 생명의 교훈대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또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생명이 삶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삶은 마치 사람의 유전자가 사람을 이끌 듯, 예수님의 모든 삶은 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 모든 사람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부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성경을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유전자를 스스로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생명이 삶이 된 사람은 아무리 자기 자랑을 해도 그 삶은 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이 열심히 해서 우주를 정복한다고 하면 인류의 위대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 the Man이라는 영광이 점점 드러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굳이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해달라고 시끄럽게 소리치지 않아도, 또 목숨도 내어 놓겠으니 어디라도 보내 달라고 울부짖지 않아도 된다. 보내긴 또 어딜 보낸단 말인가? 이미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셨는데, 자기 사는 자리에서 자기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삶으로 사는 것부터 해야지.


사람이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영광은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이어야 한다. 한 나라의 장수가 전쟁에 이긴 영광은 패전국에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일이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일이면 일이지 그런 것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영광이란 화려한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것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이 있어야, 외국 선교도 있고, 군 선교도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생명,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그 사람의 정체성은 외면 한 체 위대한 일만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사랑장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것은 다 소용 없는 것이라고.


사람은 뭐 다른 것 할 것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지금 그 상태 그대로 만드시고, 그 삶의 자리로 보내신 것이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간의 정체성,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먼저 구하는 그 나라의 의(義)이기 때문이다. 이것 없이 하는 모든 것은 다 간첩이 침투한 나라에서 위대하고 착하며 선행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나, 해적들이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우정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렇게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늘 불의하다고 책망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여기면서 그것을 극복하려 그렇게 경건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고, 그렇게 부인한 자기 정체성을 만회하려고 하듯이 세상에서, 또 신앙으로 위대한 일을 하려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교훈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불의하게 여기고 도전하는 것이며,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이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자기 본성과 생명이 되는 일에 자신을 순종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며,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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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10-24) 명절을 지키러 가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9. 11:0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셔서 그 육신의 형제들과 나름의 갈등을 겪던 그 때는 유대인의 질기 곧 초막절이라는 명절이었다. 초막절은 유대인들의 출애굽 과정에서의 광야의 삶을 기념하기 위한 것인데, 시기적으로 추수하는 시절이라 지금으로 치면 어쩌면 감사절과 비슷하게 절기를 지키는 것 같았다고 할 수도 있다. 초막절은 결국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지키심과, 그 광야의 삶을 지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풍족함을 기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들이 명절을 지키러 가면 좋겠다는 권유에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가시지 않았다가 몰래 성전에 가셔서는 유대인들과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논쟁을 하신다. 논쟁의 시작은 글도 배우지 않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교훈을 말씀하심에서 시작되어 예수님 교훈의 정통성,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자격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과정에서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셔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시므로 유대인의 공분이 극에 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성전에 가시지 않았는데, 자신의 말씀을 뒤집고 몰래 성전에 가셔서는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본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사람들의 삶의 의미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들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는 것을 위하여 오셨는데, 아직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명절이 초막절 즉 감사절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꼭 감사절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또한 가나안 땅에서 풍요로움을 주시므로 그 시절을 기념하는 절기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절기를 주시고 그것을 기념하게 하심은 하나님께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 초막절 그 열매를 가지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된 사람들을 즐거워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그것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땅에 씨를 심어 얻는 것이 열매이기에,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싹이 나고)되고, 자라서 그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요 형상이 된 존재는 하나님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에,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직 없는 때에 초막절을 지키러 가라는 말에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성전에 가서는 사람들에게 열매가 아직 맺히지 않은 것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정체성과 말씀과,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삶을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글도 배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놀라는 교훈을 전하시고는 그 교훈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 것이라고 하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6-17)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의 존재 목적을 깨닫고 삶의 의미를 누리는 것에 이르지 못함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예수님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대부분의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고 창조주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사화복을 지원하시기 위한 신으로서 그 능력을 입증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그 일만 보기 때문이다. 


즉 존재의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시고자 보내신 예수님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초인간적인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고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쟁쟁거리며 하나님의 뜻을 더 알고자 한다. 물론 그들이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일 뿐, 하나님의 본뜻과는 거리가 멀다.


글을 배우지 않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놀랄만한 교훈을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글을 배운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봐야 하는데, 그것을 보지 못한 유대인이나,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려면 목사가 되어야 하고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 같은 부류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전혀 모르는 족속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성경과 신학은 목사나 신학자의 하나님일 수는 있어도 사람의 하나님은 아님을 왜 모르는지 오히려 그것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고, 또 명절이 외식에 그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초막절의 열매, 감사절의 열매는 사람이 먹을 양식이 풍년이 드는 것이 아니다. 즉 풍년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열매를 보면서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열매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이유이지, 땅의 소산을 하나님이 어디 쓰시려고 그것을 바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심과 같이,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열매가 되고, 그런 열매가 나오는 때가 바로 예수님의 때이며,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나 자신이나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왔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데, 그 깨달음의 표상인 예수님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때가 아니라며 명절을 지키러 바로 가시지 않으신 것은 아직 사람들 중에 그런 세계가 열린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기에, 명절이 명절다운 것이 전혀 없으니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도 않았고, 명절도 모양만 있을 뿐 기념할 것이 빠진, 알맹이가 없는 껍질뿐인 명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명절에 가신 것은 그런 명절, 그런 사람들의 상태, 그런 가치관, 그 빈 껍데기 뿐인 사람들의 삶과 명절과 절기의 본질이신 예수님께서 명절 안으로 들어가심으로 명절을 명절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하시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일을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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