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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로 간 야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5. 12. 29. 10:36 Writer : 김홍덕

야곱은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에 모친 리브가의 말에 따라 모친의 고향인 하란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장자의 명분과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은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야곱은 그 형에게 맞설 능력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형이 나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으니 아버지의 축복을 내가 받는 것이 당연하지?’라는 반문조차 하지 않고(못하고) 도망을 가게 된다.


그렇게 도망자가 된 야곱은 14년 넘는 세월을 외삼촌 밑에서 종살이 하듯이 고생하게 된다.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이목 앞에 뭔가 오해 받을 만한 짓을 하고서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 괜찮다고 하는 고르반의 신앙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모습이다. 자신은 분명히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샀기 때문에 장자가 받는 축복을 받는 것이 정당하지만 형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형의 기준에 따라 자신은 도망자가 된 것이다. 즉 형이 가진 선의 기준 앞에서 죄인이 된 것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가진 선의 기준 앞에서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이 모습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생각해 볼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도망자가 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하여 가는 중에서 들에서 유숙하게 되고, 돌 하나를 취하여 베개를 삼아 잠을 청하였다. 그런데 꿈에 사다리가 땅에 서 있고 그 사다리를 타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누운 그 땅을 야곱과 야곱의 자손들에게 주어 그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많아 질 것이라고 축복을 하시는 것을 보고서 깨어서는 그 땅을 ‘벧엘’ 곧 하나님의 전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성경 말씀을 지키려 한다. 이게 참 묘한데, 때로는 연기자가 실재 인물보다 더 연기를 잘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같이, 성경 말씀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그 생명의 본성을 따라 살다보면 나타나는 행동이 어떤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임에도, 때로는 생명 없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 더 훌륭해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돌은 대부분 율법을 의미한다.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행동 강령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돌이 율법을 표현할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돌 판에 새겨서 주신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어쨌거나 당시에 사람들은 돌은 생명은 없고 모양은 있는 우상의 재료로 사용하였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본성이 되어 그 본성으로 사는 것일 뿐인데 성경을 지키면서 살게 되는 것은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모양이 되는 것이지만, 돌로 만든 우상은 생명은 없고 모양만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율법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과 의와 뜻 없이 성경을 지키려 할 때 그 성경은 신약 성경이라도 율법과 같은 것이고, 또 성경을 그렇게 믿고 지키려는 사람은 그 지키는 모양이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답고 훌륭하고 선하여도 억지고 하는 것일 뿐 생명의 본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율법적인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요, 거짓말 하는 것이요,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야곱은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잤다. 광야에서 돌을 가지고 쉬었다는 것이다. 광야도 율법의 세계고 돌도 율법이다. 그러니까 야곱이 율법 안에서 안식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편할 리 없다. 돌 베게로 잠을 자는데 편할 리 없고, 광야에서 노숙하는데 편할 리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서 취한 안식의 모습이 편할 리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의 모습이다.


야곱은 지금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갔던 자리에서 도로 그 고향으로 가고 있다. 그가 그렇게 할아버지에서 시작되어 그 아버지 이삭에게 이어져온 하나님의 의를 장자의 명분으로 여기고 또한 그것을 축복으로 여겼기에 그것을 얻기 위하여 갖은 수를 다해 그 복을 받았는데 오히려 지금 그 이유로 도망자 신세가 되고, 오히려 자기 자리(집)가 아닌 율법의 세계인 광야에서 율법으로 안식 곧 잠을 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곱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신앙의 여정에서 볼 때, 이스마엘과 같이 사람이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이루어보겠다는 마음도 처리되었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제물로 바침으로 하나님의 신뢰를 얻는 과정인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치는 과정도 거쳐 내었고, 또 그렇게 이른 신앙의 자리에서 그 신앙을 이방인의 형식으로 표현 내려 한 형 에서의 모습도 거쳐낸 사람이다.


그런 그가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자리에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모습과 흡사하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신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이다. 그리고 애곱이 종살이 하듯 하여 아내와 아들을 얻었듯,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다.


이것은 신앙이 개인에서 머무는 것과 교회로 가는 것에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 사람의 신앙 여정이 자기 개인의 구원과 자신의 거듭남에서 그친다고 하면 야곱과 같이 다시 고향으로 갈 이유도 없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다. 하나님께 아들이 예수님 한 분이면 족하고, 단지 아들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만이 명제라면 세상을 만들 이유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것처럼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여정이 그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끄신 이유라면 야곱은 필요도 없고, 야곱이 그 죽을 고생을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야곱에서 난 아들들로 인하여 민족이 되고, 나라가 되는 뿌리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야곱의 여정은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가 되고, 교회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본성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성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보다 깊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사람이 세상 살면서 겪는 문제나 해결하는 다른 잡신과 구분 없이 가르치고 믿는 것 이상의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경우 은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또 더러는 그 신앙의 모습의 일부만 노출이 되어 이단과 같이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따지고 들면 목사를 시험 쳐서 뽑고 가르치며 이력을 보고 청빙하고, 돈 있는 사람이 먼저 장로가 되는 그런 교회들과 비교하면 훨씬 더 의로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많은 앞선 신앙의 안목들이 온전하게 자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야곱과 같은 여정은 생략하고, 자신의 안목, 자신에게 열린 계시를 가지고 바로 교회를 만들고, 신앙 공동체를 만들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계시가 밝아지면 그 밝아진 계시로 사람을 섬기는 모습, 오히려 광야와 같은 신앙의 여정을 보내서 레아와 라헬을 얻듯이 수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자신의 계시를 가지고 바로 신앙적으로 군림하고 교주가 되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 신천지의 경우도 이만희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성경에 대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가르치기는 하는 모양인데, 모든 것을 떠나 성경에 대한 그 안목을 가지고 자신이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신앙의 안목을 제도로 만들어 신천지 안에 신앙을 기반으로 한 계급(예를 들면 반장)을 형성했다는 것이 신앙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높임을 받으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 하나 만으로 이미 어긋난 신앙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때 온 국민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감옥에 갇힌 JMS 역시 그렇다. 많은 젊은 여자들에게 뭐랄까 성상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마치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하나가 되듯,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비밀에 대하여 좀 알긴 알았던 모양인데, 그것도 오판 했거니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람들의 신랑이 되신 것은 몰랐거나 자기 맘대로 자기 유익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참… 뭐라 말하기 힘든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한 것이다.


이렇듯 신앙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밝아진 사람이 야곱과 같은 여정을 거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거하신 하나님의 의가 아들이 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언뜻 보면 야비한 것 같지만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샀기에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을 뿐인데, 게다가 그것이 어디 육신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한 것도 아니라 조부와 아버지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되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가 도망자가 되고, 오히려 형 에서보다 더 율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그야말로 사서 고생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신앙이 교회의 신앙, 하나님 나라의 신앙으로 가려하고, 또 이 땅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야곱의 여정을 피할 수 없다. 사람(아내)을 얻기 위하여 속아 가면서 14년을 종과 같이 일하여 아들을 얻는 삶의 여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략하고 신앙으로, 성경적인 계시를 권력 삼아 공동체를 이루려 하면 다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야곱의 여정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날도,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신앙의 여정을 가려한다면 이 여정이 자신의 삶의 한 마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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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할 때 강함 되시네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2. 28. 17:33 Writer : 김홍덕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는 것은 CCM으로도 유명할 뿐 아니라 신앙에 있어 기초적인 룰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약할 때 어떻게 강함이 되시고, 우리는 또 어떻게 강하게 되는지는 분명하게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기도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자신이 강해지는 것을 <약할 때 강함 되심>이라고 생각하는듯 하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하게 아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것이 맞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한 없이 약한 상태였는데,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는가?' 하는 문제를 풀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약한 것으로 보면 그렇다. 그런 관점은 또 십자가에서 내려 오는 강력한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 또한 강함이라고 생각하는 안목인 것이다. 그러니까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는 것을 온전히 알고자 한다면 무엇이 약함이고 무엇이 강함인지를 바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약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람이 자신이 가진 생각에 육신이 미치지 못함' 그것이 사람이 생각하는 약함의 총칭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함은 그런 사람의 한계를 극복하는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이라고 여긴다. 물론 하나님은 그런 능력이 있고, 그것은 분명히 강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런 강함을 가지기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그런 강함, 곧 자기 생각대로 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 보실 때 좋은 것이라면 사람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드시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강하다고 하시기도 했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의 강함이라는 것은 무력이나 초능력이 아님이 분명하다. 단적으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기 모습이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하여 몸을 가렸다고 했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마음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먹고 보니 선악과로 인하여 밝아진 안목으로 보니 자신이 가진 몸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즉 자신은 하나님과 같은 강함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의 강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인생을 볼 때 그렇게 연약해 보이는 그 육신을 가진 삶 그 자체가 바로 강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세상을 만드는 신적 능력과는 비교도 안 되고, 물 위를 걷는 능력도 없으며, 하늘도 날지 못하고, 바닷 속에서 숨도 쉬지 못하며, 수고하지 않으면 밥 먹을 돈도 얻을 수 없는 그런 인간의 연약한 모습, 그것이 바로 사람이 가진 강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강함도 그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한계와 무능을 다 드러내고 벌거벗겨져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린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는데, 그것을 본 사람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고,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임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그야말로 강하고도 강한 능력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이 연약한 존재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을 내용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할 때 강함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더할나위 없는 초라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 그 마저도 죄인으로 사형을 당하는 그런 연약한 그 모습을 보이실 때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놀라운 강함의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할 때 강함이 되신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이 사람이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볼 때 그지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그 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 그것이다.


그러므로 약할 때 강함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약해지면 태권브이나 아이언맨이 나타나듯 하나님께서 우리 약함을 메우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기준으로 정말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강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약할 때 강함이 되는>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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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다. 안식일에 유대인들은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지켰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니까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무엇이 안식인가?’ 하는 것과 ‘안식일은 어떤 요일이나 날짜인가?’하는 것을 알아야 안식일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 의미적인 해석을 알레고리컬한 해석이라며 경계한다. 예를 들면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서 토요일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가 안식인 사람이 보내는 날이 안식일이라고 하면 그것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야 자기 마음이지만, 그렇다면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을 때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안식일은 언제인지를 제시해야 마땅하겠지만, 현대의 기독교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다. 그러니까 이런 해석 역시 알레고리컬한 해석의 부류인 것이다. 즉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해석이 맞는 것인가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설명하시고, 예수님의 관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에 유대인들과 안식일에 대하여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것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렇다는 것을 보이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도 예수님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심으로 병자를 고치셨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일이라고 보았다.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들고서 걸어가는 것이 본질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노동, 곧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몸이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 돌아가는 것이 안식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있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하실 일을 다 하셨기 때문에 안식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안식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육신의 힘으로 자신을 회복하는 자리에서 늘 죄인으로 있던 병자에게 그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로 돌아가라고 하심은 진정한 안식이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해야 할 온전한 일을 하신 것이다.


안식은 목적이 달성된 것이 안식이다. 집에 있는 부엌칼은 시간을 정해놓고서 쉬는 것이 아니다. 칼이 쉬는 안식일은 자기가 자를 것을 다 자르고 나서 맞이하는 시간이 바로 안식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에 사람을 만드시고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천지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의 일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나오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날을 맞이한 사람이 사는 날은 모두 안식일인 것이다. 그래야 천국에서 영원히 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천국은 일하는 것이 없으니,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존재 자체가 안식을 맞이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안식일은 달력에 표시된 크로노스적인, 객관적인 시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보내는 시간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목적 안에 들어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의 상태, 그것이 바로 안식의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에게 육신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는 자리는 너의 자리가 아니니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 그 본질로 네 자리를 옮기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안식이기에 안식일에 그런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 창조하신 목적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가 되는 그 안식의 자리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것이 바로 창조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하는 생명의 세계에 속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경쟁의 세계,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그 세계가 자신의 존재 목적이나 존재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원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자리로 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고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것이 또한 예수님의 일인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은 아버지의 일과 같은 것이고, 예수님이 자신의 뜻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일하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또한 하나님과 동등 되게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과 안식일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달력에 표시된 날 교회에 가는 것을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안다. 그리고 그렇게 안식일을, 주일을 지키러 가서는 그렇게 오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대책을 강구하고 심지어 심판도 한다. 무엇이 본질인지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그런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온전히 회복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의 사람이 보내는 모든 날이 안식일이다. 안식일이 언제냐며 교파가 갈라질 일도 아니고, 주일날 11시 예배에 가지 않으면 주일 성수가 아니라고 할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지 아닌지, 그것을 아는 것이 안식일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런 안식에 들도록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러 오셨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것이 안식이고 하나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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