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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 8. 13:37 Writer : 김홍덕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이라는 단서를 붙이시고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고 하셔서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먼저 엄청난 사건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지신 십자가’라는 것도 그렇고, 십자가의 형틀이 가진 형벌로서의 공포와 고통은 육신을 가지고 바늘에라도 찔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끔찍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한 사람이 그 고통을 대신 감수했다는 것이 그렇다.


그런 탓인지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스케일이 자못 크다. 마치 인류를 구하는 영웅과 같이 신앙적인 큰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고, 할 상황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행운 같은 은혜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만, 문제는 누구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복음이라는 것이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인데,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어서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십자가를 생각하는 시작점의 하나여야 한다. ‘너는 질 수 있는데, 나는 질 수 없는 십자가다’ 라면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한 복음을 전하러 오신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있고, 그 기준 이상의 사람에게는 질 수 있는 십자가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하여 오신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세상도 공감하는 위대한 헌신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보잘 것 없고 미약한 사람 역시 질 수 있는 십자가이어야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이다. 그래야 모든 인류를 위한 십자가고,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이 공의의 십자가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질 수 있다는 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는 죄인의 형들이다. 죄인을 벌하는 기구라는 것이다. 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졌다는 것은 예수님은 그 형틀을 적용하는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을 죄인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형을 집행하는 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은 죄인이 된 죄목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했다. 즉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죽을 죄인이라는 것이다. 정확히는 유대인의 왕이 아닌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세부적인 내용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정치적으로 본 반역의 죄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 그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더니 죽어야 한다며 죽인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죄목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이기실 능력이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자도 살리신 분께서 정작 자신이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는 그 능력이 다 어디 가고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돌아가셨는가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시려 했는데, 정작 당사자이자,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는 아들 본인이 죽어 버리면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전할 것이냐 하는 것도 생각지 않고, 그 많은 능력들을 뒤로 하고 그냥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하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는가?


바로 이 의문이 해결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절대로 그 본연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의문이 바로 십자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의문을 가진 채로 십자가를 지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 그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 그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는 것, 그래서 죽을 죄인이 되어 자신의 육신을 그 죄의 값으로 내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뜻의 본질인 것이다. 그것도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이 되어서 죽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죽으실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일반적인 가치관이나 상식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죽으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이심으로 자신을 믿게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 계획과 법은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죽임을 당하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법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 법이 바로 십자가의 도고,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육신이 운명적으로 십자가를 질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은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가 있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르게 표현해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죄인이 의인이 되게 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온전한 의인이신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이 의인인 예수님을 죄인이라 하는 것을 감당하시고 죄인이 되셔서 돌아가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서 죄인이 예수님과 같은 의인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십자가는 진정으로 죽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죽음은 육신의 죽음은 아니다. 이 죽음은 의에 대한 죽음이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의, 즉 ‘이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온전한 의를 가지신 분이지만 그것을 나타내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르고 모욕했다고 하는 죄목을 순종하신 것이 그것이다.


의가 죽는다는 것은 그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 아니 사람이 가진 삶의 모든 영역에 의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은 자기 삶의 모든 부분에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 모든 곳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의의 죽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의의 죽음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고 가는 모든 인류의 모든 삶의 영역 그 이상의 범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신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그 오신 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본체임에도 그 의를 주장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모르는 죄인들의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의가 죽으신 것이다. 사람은 그 어떤 인생도 이와 같은 범위를 넘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생의 의가 죽는 것 이상이기에, 인생의 모든 허물을 덮으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의의 죽음 그 이상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자신의 의를 죽이고, 분명히 자신이 가진 의가 더 온전함에도, 그 의를 모르는 이들의 의 앞에 온전히 죄인이 되는 삶을 육신으로 살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람이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의의 충돌 앞에서 죄인이 되어 자신의 육신으로 수고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삶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소금에 찍어 먹자는 아내(남편)의 뜻에 따라 주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런 작은 삶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의 시작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십자가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의아하게 생각한다. 먼저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렇게 작은 일이겠는가 싶은 생각부터 한다. 그러나 이 글의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할 수 없는 일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1+1을 계산할 수 없는 사람이 미적분을 할 수 없듯이 삶의 그런 작은 부분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있어 가장 핵심은 남을 위하여 그렇게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고 헌신하는 것이 가진 방향성이다. 즉 사람 안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있어서 그렇게 산다면 그것은 온전한 십자가의 삶이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십자가의 삶이라고 하니 자기 안에 그렇게 살 이유나 생명도 없으면서 그렇게 사는 것은 바로 외식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떻게 사람 안에 있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성령의 잉태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잉태되듯 심겨지고 그것이 자라서 육신이 되는, 즉 자기 육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되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없는데 아무리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삶,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양을 보인다 해도 그것은 모두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면 온전한 의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가진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의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심과 같이 자기 의를 죽이고 자신의 육신의 수고를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사람의 헌신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질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성경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겠는가? 세상은 고사하고 자기 속도 시끄럽지 않다. 자기 생명이 그래서 그런데 왜 억지로 하며 속이 시끄럽겠는가? 고양이가 ‘야옹’하는 것이 짜증나겠는가?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서 남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육신의 삶은 자신에게도 힘들지 않고, 세상도 혼란스럽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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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육신과 삶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이다. 그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아들이거나, 능력으로 아들이 된 것이라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심으로 아들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에 대한 착각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생으로 오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걷는 그런 능력은 육신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냉 말씀으로만 해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굳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셨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십자가를 질 수도 없지만, 설사 그렇게 하셨다고 해도 우리는 그렇게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는 육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십자가라는 형틀을 지기 위하여 육신이 필요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십자가를 지려면 육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실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육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그 존재의 목적을 십자가로 보여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려고 하니 가정에서 반대가 심하여서 따로 독립해서 살기로 했다. 그렇게 살아보니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부모님이 챙겨주다가 혼자서 알아서 하려하니 힘들었다. 그래서 그런 삶을 교회에 가서 이야기 했더니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라면 위로했고, 그 사람도 교회도 그것을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반만 맞다. 진정으로 육신을 잘 사용하는 것은 그 육신으로 수고하여 모든 가족이 그 수고에 감동(이것이 성령의 감동)하여 같은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때 정말로 그 육신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산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십자가는 위대한 것을 위하여 감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위대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하지 않는 하찮아 보이는 수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그 수고를 감당하기 위하여 육신을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을 본 백부장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게 하는 감동을 주었듯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가족도 등지는 위대한(?) 결단이 십자가가 아니라, 가족을 감동시키는 수고, 그것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심판이 있다. 예수님의 심판이 바로 이것이다. 육신의 존재 목적과 사용법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바른 표준을 제시하심으로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이들이 그릇된 길에 있다는 것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심판은 사람을 세워 놓고, ‘넌 언제 이런 일(do)을 했으니 어떻게 처분한다.’라든가, ‘넌 언제 나에게 이런 것을 바쳤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벌을 주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법과 의미를 온전히 보이심으로 스스로 그 표준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는 심판이 바로 예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심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그 육신을 가지신 삶으로 보이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람의 존재 목적과,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의를 벗어나게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잘못된 것임을 드러나게 하심이 심판이니 당연히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심판의 권한을 위임 받으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과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오해한다. 특히 교회가 그렇다.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그 가치관으로 심판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람의 행위를 법정에서 재판하듯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아마 마르크스일지도 모른다.


심판이라는 것은 ‘넌 이런 것을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평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모습이 창조주가 주신 삶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는 삶을 육신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에 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깨달으라고 그렇게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기에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잔을 물려주시기를 기도하시고도 그냥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과 같이 끌려가신 것은 마음에 도망가고자 하는 마음을 참고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 육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에 본능,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본성이 예수님을 이끈 것이듯, 사람이 나를 보고 스스로 삶이 심판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하나님의 생명대로 살 뿐인데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게 생명의 법이다.


그러므로 아들에게 심판이 위임된 것은 아버지가 홀(권위를 상징하는 막대기)이나 반지를 아들에게 주어 권한을 위임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의가 아들로 나타나서 아들이고, 그 아들로 나타난 삶 그 자체가 아버지의 의와 다르게 살고 있는 아들이 아닌 모든 인생들에게 심판이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들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은 모든 인생에게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삶 지으신 그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삶을 살던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것 자체로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 예수님의 심판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돌이키는 사람은 생명의 부활이 되고, 예수님의 삶을 보고도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조각하고 그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죽음의 부활과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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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1-23)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님께서, 아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심과 같이 아들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리며, 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아들에게 심판의 권한을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먼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에 관한 말씀에서 중요하게 봐야할 것은 무엇이 죽은 것이며, 또 예수님께서 살리신다는 원하시는 자는 또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죽은 자는 살다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죽음에 정관사 the를 붙이고 있는데, the가 붙어 있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상태와 개념 전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죽음과 같은 하나하나의 죽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상태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육신이 죽었는데 그것에서 살린다는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상태,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것인 상태에서 살리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죽은 자라 하는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서 살리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육신의 죽음보다 더 크고 근본 된 개념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은 하나의 피조물이다. 물론 다른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유일한 존재인 것이 그렇다. 그렇다고 육신의 목숨, 그것이 ‘사람이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가늠하는 기준은 아니다. 피조물이기에 그 만드신 목적 안에 있다면 산 것이고, 목적 밖에 있으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정도로 훌륭한 육신을 가지고 있어도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신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밖에 있어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로 일으키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겉은 멀쩡하지만 시간이 맞지 않는 시계를 고쳐서 시각을 정확히 알려주게 되어 주인이 그 시계에 대하여 가진 목적이 이루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 죽음과 이 살리심의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죽음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법이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과정과 법,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의가 사람에게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살리심이기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예수님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서 살게 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와 사람 지으신 뜻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아버지가 가진 의고, 그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아들인 것이다. 육신으로 한 남자가 자신의 가문을 이어갈 아들을 얻겠다는 의를 가지고 혼인하여 가문을 잇겠다는 그 의를 육신을 가진 아들로 얻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렇게 얻은 아들은 온 가문의 의도하는 의도가 육신으로 태어난 존재이듯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표현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이야기 되고 어떤 삶의 주제가 되기를 바라시며, 또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나타내고자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나타내라고, 그래서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이미지가 떠오르라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만드셨다는 말씀의 본질이다.


한 사람, a man이 존재한다면 어떤 예외 없이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그 사람을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즉 아버지를 증거하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가 흑인인지 백인인지와 같은 혈통도 드러나고, 또한 그 성품도 드러난다. 그것이 아들이다. 그것이 아들이 아버지를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육신으로 그런 법을 알고 있다는 것은 a man을 통해서 그 아버지가 존재함을 알듯이 육신을 가지고 살면서 이 ‘사람’이라는 존재, 곧 the Man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라는 존재를 있게 하신 아버지,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부여하시고 주신 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으면 산 것이고, 그것을 모르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와 같은 인생들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은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이 육신의 삶이 자기 존재의 본질로 알고 살아가는 것, 그 차이 뿐이다.


그 망각의 상태,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는 혼돈과 흑암 중에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하는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유가 바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죽은 인생들에게 구원이고 빛이고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가 아들에게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않고서는 사람이 자기의 존재가 예수님과 다르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육신이 된 삶과,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흑암에서 살아가는 자기 삶의 차이를 알 수 없기에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자라는 것은 홍길동은 되고 일지매는 안 된다는 식의 개체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즉 육신으로 누구는 원하시고, 누구는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쓸 이유가 없다. 그런 개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은 들린 놋뱀과 같은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신 예수님의 뜻,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이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그 예수님의 원하심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예수님의 원하심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 살리시기로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살거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곧 죽은 자 중에서 살리심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아들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인데, the Man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하니 아들도 아닐뿐더러 죽은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사람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존재 목적을 그 분을 통해서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형상대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이루어지신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고 나타낸 것이다. 그 형상 곧 이미지가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아버지가 있다는 것, 곧 자신을 지으신 이가 있고, 그 분께 자신의 존재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영생이고 생명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이기에 그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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