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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30-47) 예수님의 증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14. 09:22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그 구성이 다르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간 순으로 전개한 것이 아닌 것도 그렇지만 예수님의 행적보다는 말씀이 더 많은 성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말씀은 아주 핵심적인 요소들이 많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온전하게 바로 서느냐 아니냐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또한 예수님의 증거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이 5장의 말씀도 그렇다. 예사롭지 않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를 말씀하고 계시지만, 결국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또한 심판이 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증거를 말씀하시는 요한복음 5장 후반부에서 가장 핵심적은 말씀은 39절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한 모든 논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무슨 권세로 그렇게 하느냐 등으로 시비를 걸던 예수님의 정체성, 또한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의 아들인지에 대한 모든 증거는 다 성경이라는 것이다. 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이 증거는 요한의 증거보다 큰 것이라고 하셨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요 5:36)

이것은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시는 증거 그 자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이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증거가 되시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들이 왜 의미가 있는가 하면, 이것이 곧 우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의 대문에 “Bible become MY Story!!”라고 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성경의 모든 것이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 블로그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것이 필자의 의도이기도 한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이 성경이 바로 나에게 증거하는 것”이라는 그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의 목적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은 예수님과 같이 되라는 것,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고 하면 터부시 한다. 그건 경건한 것이 아니라 무식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 죽을 것을 모르신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죽는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구주라는 것, 그것 하나 증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뿐이라면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심이란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 사이에 연결고리, 즉 관계가 없는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과학적인 증명과 같이 믿는 믿음 외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그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되기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보내신 존재라는 것을 믿게 하시려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목적이고, 그 목적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당연히 오늘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 성경의 모든 것이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질 때 비로소 성경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증거하신다는 것, 그 말씀을 말이다.


예수님이 증거를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표준으로 오신 분이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신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증거를 받는 것이 되고, 그렇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증거가 아니라 사람의 증거를 받으신다면 모든 믿음은 다 사람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람들의 증거로 증거하려 한다. 과학적인 입증이나 역사적인 사실과 같은 것으로 성경을 증명하여 입증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만 더 심한 것은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하는 것이 예수 믿는 증거라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은 뭐라 할 말이 없다. 그것은 교회가, 또한 신앙이 타락한 증거다. 그것은 사마리아와 같이 세상과 신앙이 결합된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확신, 그 증거는 결국 사람 안에 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사람 자신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주시기 때문이다. 즉 이 인생이 세상의 법이나 안목이나 가치관으로 볼 때는 보잘 것 없고, 이런 꼬라지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육신을 만드신 이유가 깨달아지고, 그 깨달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신다고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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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30-47) 아버지의 뜻대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12. 10:4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때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주신 것으로 말씀(요 17장)하시기도 하셨는데, 여기서는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다. 성경의 이런 미묘한 차이는 어떨 때는 의문과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의 본질과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면 절대로 혼돈스럽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도 하고, 또한 어떻게 보면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 들은 대로 하신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판은 의롭다고도 하신다. 이런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아들이라는 존재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존재다. 아니 정확히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 때문에 아들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는 존재성 그 자체가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이니 아들의 삶의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단순하게 아버지와 아들을 혈통으로, 생물학적 부자 관계로 보면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생물학적으로 부자 관계에서도 아버지가 하던 일들, 사업들, 유지를 아들이 이어가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것을 아버지가 싫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길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원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감동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가려 하면 소송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옳은 말씀이고, 또 모든 권세를 주신 것도 같은 것이다. 아들이 모든 권세를 가진 것처럼 마음대로 행동해도 아버지의 의가 그 행동과 삶, 어느 하나에서도 빠짐없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들이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들이란 아버지의 뜻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표현과 같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증거하는 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스스로를 증언하면 그 증언이 참되지 않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증언하시므로 참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그 증거가 참된 줄 아신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의 모든 삶이 그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신다는 말씀이다. 이는 마치 수가성 여인에게 속에서 생수가 넘쳐 나리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증거를 자기 밖에서 얻으려고 한다. 자신이 성경의 말씀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학자나, 매체에서 성경에 기록된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면서 자신의 믿음이 참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한계가 있다. 그런 방식으로는 아직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죽기 전에 자기 믿음이 참됨을 모두 알 길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자기 안에 아버지의 의와 뜻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육신적으로도 사람이 나이가 들고 자신도 부모가 되어 살다보면 그 부모의 생각과 뜻과 마음을 이해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되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의를 깨닫고, 스스로 자신이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자신을 증언하는 것이고, 그 증언은 참된 것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알게 된다.


육신적으로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그런 일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육신의 모든 삶은 어떤 의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육신으로 살면서 그 육신의 부모의 마음과 뜻을 알게 되는 참된 증언을 알게 된다는 것은 the Man이라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아버지의 증언이라는 것이 있고, 그 아버지의 뜻과 의가 인간의 삶을 증언하심을 알게 되며, 그것을 알게 된 인간은 그것이 참된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아버지의 증언을 알고, 그것이 참된 것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또한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그 깨달음(요 14:26)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아버지가 자신을 증언하고, 그렇기에 자신의 심판이 모두 참된 것이며, 그런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참된 것으로 안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높이는 말이나 자랑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 아니 모든 인생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과 같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자아 밖의 객관적인 증명에 의지하는 것이나, 기도원에 가서 뱀소리 내는 기도자들에게서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그 아들의 속사람 안에서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존재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이고, 그 생명으로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이다. 그런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 아닌 것으로 행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의 뜻이 참된 것이라는 것을 모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정체성이 같은 것이 아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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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얻기 위해 수고하는 야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 11. 16:48 Writer : 김홍덕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한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외삼촌 라반이 그 일의 값을 쳐주겠다고 하면서 ‘무엇을 줄까?’ 물었을 때에 야곱은 외삼촌의 둘째 딸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하고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일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을 수일처럼 여겨질 정도로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였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과의 약속을 깨고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를 혼인한 날 밤에 들여서 야곱을 속이고 또 다시 7년을 수고한 다음에야 야곱이 사랑한 라헬을 얻는다. 사람이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삶의 모양을 갖추고, 후사를 얻으며, 자기의 의를 표현할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를 얻는다는 것은 자기 의의 형식을 취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내가 네게 장가들어(호 2:19)’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말씀 역시 하나님의 의를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야곱도 아내를 얻고자 했다. 즉 그렇게 자신이 사모하고 얻기 원한 장자의 명분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니 7년이라는 세월을 수고해야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음은 어떤 행동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믿는 마음이나, 입술의 고백이면 된다는 것을 큰 착각을 한다. 야고보서와 로마서가 서로 상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그 오판과 착각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절대로 상충되지 않는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은 같은 말씀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고, 생명은 그 생명의 본성을 표현하는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없는 물체는 죽은 것이듯, 행함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기에 행함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같은 말이다.


이것을 왜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결과적으로 14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이야기를 할 때 말 하는가 하면, 야곱이 아내들을 얻기 위하여 종과 같이 수고했다는 점이 바로 믿음의 행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교회에 있는 독자인 청년 하나가 그 교회 안에서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 한 후 몇 개월이 되어도 아버지 집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신앙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참 어이없어 보인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런 삶을 산다. 신앙만 있으면 선하고, 신앙이 없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시간 낭비며, 하나님 앞에 송구한 일이라고, 더 나아가서 그런 것은 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즉 육신이 속한 사회와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형식을 신앙과 분리해 버리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영지주의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대하여 아주 잘못된 견해이다.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종과 같이 수고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섬기는 삶을 살아 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믿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에 따라 종이 되어 섬김으로 아들을 낳은 여자(아내)를 얻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야곱이 라반의 법에 따라 종살이 하듯 수고한 것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권력이나 권세로 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 어떤 것보다 권세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권세를 가졌다는 것이지, 자기가 하나님과 다른 정체성의 신앙을 가졌는데 그 권세가 자신의 것이 될 리는 없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그 믿음과 신앙으로 그 신앙이 없는 사람(하나님 앞에 여자)들의 법에 따라 종과 같이 수고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얻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이니 복 받으려면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생각은 오만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고, 그 의가 또 다른 사람에게 의(義)가 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의 의가 없는 이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가진 법 앞에 죄인 같이 종이 되어 그가 옳다고 여기는 법에 따라 육신으로 수고하는 삶을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기가 믿는 신앙이 너무 옳기에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다 죄인이며, 그 따르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죄인이며, 그 사람이 부모든 은사든 누구라도 다 그렇게 죄인으로 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사탄의 일이지 신앙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런 모습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수고하는 야곱의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며,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것이며, 십자가를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모독하는 것이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표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며, 자신과 같은 의를 가진 사람을 얻으려면, 형식을 취하여야 한다. 아내 없이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을 간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고, 또는 누린다고 하는 것은 다 사상누각일 뿐이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을 수고했다는 것을 성경에 기록한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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