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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

지금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 그것은 ‘다시 이르시되’라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시 이르신다는 것은 앞에서 뭔가를 이야기 하셨다는 것이다. 그 앞에서 이야기 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육신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요 8:15)

즉 육신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갈 수 없고, 자기들의 죄, 곧 육신으로 판단하는 그 죄 안에서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며, 죄 가운데서 죽겠다는 것은 또 무엇이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죄도 우리의 문제고, 사망도 우리의 문제며, 예수님을 찾는 것도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찾은 사람에게는 죄도 사망도 없는 것이기에, ‘오늘 나는 예수님을 찾은 사람인가?’하는 질문에 “Yes!”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나, 예수님께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처음부터 말하여 온 자”라고 하신 것은 아주 의미가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사람으로 인식하고 의문을 가지는 문제가 바로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찾는 것, 처음부터 찾고 말하여 온 것, 그것은 메시아에 관한 것이고 또한 사람의 영원한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하는 그것이다.


이러한 것을 연결하면 의외의 것이 나온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는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자기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 체 살다가 죽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자기 죄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가 자기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 뿌리에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를 모르는 것, 그것이 죄(원죄)이기 때문이다. 모르면 벗어나기 때문이다. 아니 벗어났다는 것이 모르는 것이다. 길이 그렇듯.


이런 모든 것이 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의 일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자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곳은 어떤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정체성의 자리, 곧 외모와 같은 형식적인 자리가 아니니 사람을 외모로 보는 사람은 갈수도 없고, 바리새인들처럼 ‘저가 자결하려는가?’ 같은 소리나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이야기 하면 이는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느냐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본질이고 그것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외모와 형식과 물질세계로 나타난 것이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세상을 그렇게 보는 시각과 인식이 열렸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빛에 관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안목, 그런 세계가 열리면 빛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빛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 법을 모르는 것, 그것이 죄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진 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하나님께 또 예수님께 그런 외모와 눈에 보이는 세상에 얽힌 삶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신앙을 가진 것이 믿음이라 여기는 이 모든 것은 다 아래에서 난 것, 즉 땅에서 난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아래에서 난 것과는 달리 예수님 자체가 빛이시라고 하셨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셨고, 육신을 가진 예수님으로 나타나셨으니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인데, 아래에서 난 자, 곧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리, 예수님의 정체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가는 곳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그곳이 바로 사람의 자리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의 자리이기에 그 자리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죄고 죽음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는 많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항상>이라는 부사를 가벼이 보면 안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시고, 항상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을 하신다고 하신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항상>이라는 부사를 붙일 수 없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어떤 것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 형식과 나타난 것이 본질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형식에 충실하다. 즉 행위로 하는 것이 본질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율법의 조항을 몸으로,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관의 세계에서 항상은 절대 고수의 경지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외모로 판단해 보자. 예수님이 어디 가신다고 하니 그것을 장소로 아는 가치관으로 항상 기뻐하는 것을 지켜내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크로노스적인 시간, 달력의 시간, 시계로 가늠되는 모든 순간에 기뻐해야 비로소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된다. 하지만 하늘 아래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다만 ‘그러면 어떻게 성경을 다 지킬 수 있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으니까 쉬쉬할 뿐인 것일 뿐 육신을 가지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에서 단 1초도 예외 없이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이것을 바로 알려주지 않는 교회의 신앙적 한계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이쯤 되면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가 다른데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메시아를 찾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항상>하는 것인가? 그것은 생명이다. 사람은 언제나 사람인 것이 그것이다. 항상 사람이지 않는가? 하나님께 항상 기쁨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명,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어떤 외모, 어떤 행동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그렇게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생명 그것만이 항상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고,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난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뜻이 땅(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그 목적이 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오는 전등은 산 것이고, 불 들어오지 않는 전등이 죽은 것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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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빛이 광원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창세기의 빛은 광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좀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은 광원이 아니라 안목이고, 가치관이고, 인식이고, 깨달음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뜻을 전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직도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니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온전한 분이 아니다. 미완의 메시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 그것이 어두움이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빛이 세상에 왔으매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3)

무엇인가를 찾고 구하고 간절해 하는 것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대한 이해와 안목이 없는 사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을 컴맹이라고 하고, 글을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사람을 문맹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어두움과 빛에 관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며, 또 조명 없는 세상을 말하는 것 또한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세상이 어두워졌다는 것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은 어두운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들이 어두운 것은 육신의 눈에 관한 것이나, 또는 조명이 없어진 상황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 즉 자기 존재의 이유와 의미라 할 수 있는 삶의 목적에 관하여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다. 그 어두움 하나가 세상의 모든 것을 소란스럽게 한다. 서로 모르니, 서로 이것이라 주장하고 외치다 보니 어두운 곳에서 서로 보이지 않아 부딪히고 아파하는 것과 완전히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육신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관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어두움에 비췬 빛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알려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컴맹에게 컴퓨터 박사가 그 사용법을 알려 주어 컴맹이 컴퓨터의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이 자기의 믿음이고, 그것이 순종이 된다면 자신의 존재 목적, 삶의 의미가 빛을 만난 것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생의 존재 목적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정체성 = 사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어떤 세상이 열리는 일은 살아가면서 종종 있는 일이다. 그 어떤 세상이 열린다는 것은 그 세상에 대한 인식이 열렸다는 것이다. 즉 그 세계에 대한 어두움이 밝아지기 시작했을 때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군대라는 곳이 있는 것은 남녀노소가 다 알지만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입대를 앞둔 이들은 들은바가 있지만 알지 못하기에 다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입대하는 순간 군에 대한 인식이 열린다. 그것이 빛이다. 그래서 군에 다녀온 사람은 군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빛이란 그런 것이다. 빛은 모든 것을 밝게 한다. 이것은 조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도 캄캄할 때가 있고, 눈 뻔히 뜨고 살지만 살길이 막막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겪는 모든 어두움의 근본은 자신이 왜 사는지를 모르는 것,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건을 만든 목적을 모르고 그 물건을 사용하면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생이 겪는 모든 문제는 인생의 존재 목적과 연관이 있다. 목적을 알면 삶의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인생의 존재 목적을 모르면 모든 것은 다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이란 것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하려 하고 있다면 그 신앙은, 아니 그 삶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빛이 없는 것이고, 빛이 없다면 천지창조가 없다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세계(천지창조)가 아직 열리지 않은 흑암과 혼돈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인생의 문제를 들고 나가서 울부짖는 것이다. 알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구할 것은 오지기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이 자기 안에서 더 분명해 지는 것, 그것뿐이다 목적을 분명히 아는 이가 그 목적을 드러내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만들어 두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여호와 이레>고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기를 사모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빛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생의 빛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그 사람 만드신 목적이자 뜻과 의를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내셨기 때문에 인생의 빛인 인생의 존재 목적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을 보고서 자기의 존재 목적을 발견하는 모든 사람에게 삶의 근본인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밝아지기에 진정한 빛이신 것이다. 이 법을 알고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이 있고, 그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지만 이것을 모르고 예수님을 만나고 부르짖고 믿는 모든 사람의 믿음과 외침은 어두움에 있는 아우성뿐인 것이다.


그 ‘어두움의 외침’의 모든 것이 바로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사람이라는 존재의 목적을 모르고 아는 것이라고는 존재의 행동과 모양뿐이다 보니 그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보고서 예수님께서 어디서(나사렛) 왔는지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기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알지도 못했고 말씀을 하셔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리새인이 달리 바리새인이 아니라, 육신이 부정하니 이 육신을 경건하게 절제하고 수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육신 나사렛에서 왔음을 아는 그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전혀 경건하지 않은 동네 출신이 그리스도라는 것도 인정할 수 없고, 그런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인생의 빛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부인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 항상, 그리고 진리로 있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라며 믿는 믿음의 내용을 보면 모든 것이 육신이 살아가는 것에 관한 것뿐이다. 육신의 건강과 성공, 자녀의 성공, 그리고 교회 외형의 확장이 성장이라고 판단하고 바라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믿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일의 증거는 육신으로 증명 되어야 한다. 즉 외모, 형식에 관한 것으로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안목과 가치관은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세계를 모른다. 세상에서, 즉 형식이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 곧 내용이 바뀐다고 믿는 가치관이 생명이 속에 있어 그것이 밖으로 형식으로 나타나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두움이고, 그것이 죽음 가운데 있는 것이다. 생명의 법을 모르니 그것이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으로 표현된 그 생명의 법을 볼 수 없다. 율법을 지켜내면 생명이 될 것이라고,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고 믿고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의 의와 뜻이 생명이 되어 육신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컴퓨터의 사용법을 모르면 컴맹이듯 하나님의 빛과 법에 대하여 어두운 것이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리고 오늘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두움이기에 예수님께서 빛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 생명이 안에 있어 그것이 표현되는 것, 즉 사람 만드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사람 안에 두심으로 그 목적과 뜻이 사람의 삶과 의미가 되어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셨기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과 깨달음이고,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기에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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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경우 돌로 치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할 것이냐며 물었다. 이 상황은 성경을 조금만 대했어도 알 수 있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다. 특히나 예수님의 말씀인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는 말씀은 아주 우명하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아주 의문스러운 것이 있다. 분명히 여자는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혔는데 왜 여자만 잡혀왔는가 하는 문제이다. 간음하는 현장이라면 남자가 있었어야 할 것인데 말이다. 간음이라는 것이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돌에 맞아야 하는 율법 조항에 걸렸다면 남자도 동일한 상황일 것인데, 남자는 어디가고 여자만 혼자 잡혀 와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위기에 쳐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간음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고자 하심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정해진 짝이 아닌데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한정하여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남녀 간의 간음은 하나님과 사람 관계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설명하시는 것이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정해진 짝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을 간음이라 하듯이, 빈 그릇과 같은 사람도 자기 안에 채워야 할 것이 아닌 것을 채우면 하나님 앞에서 간음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십계명이다.


이러한 간음은 만물에 다 적용될 수 있다. 창조와 존재의 목적이 아닌 것을 수용하면 다 간음인 것이다. 망치로 사과를 깎겠다고 하면 그것은 망치에게 간음이 된다. 부엌칼이 음식 만드는데 사용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하는데 사용되면 그것 역시 간음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자기 삶을 드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육신의 일이 풍요로워지기를 하나님께 바라고 또 그것을 위하여 삶을 소진하는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 간음하는 것이다. 즉 간음이나 우상 숭배나 그것이 그것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의 짝이 아닌 것을 남편으로 삼듯이 삶의 목적 삼아 살아가지만 정작 자기가 좇고 있는 자기 삶의 남편과 같은 것의 실체를 잘 모른다. 이는 수가성의 여인에게서도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남편이 다섯이 있었지만 너의 남편이 아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남편이 여럿 있었지만 정작 자기의 진정한 남편이 누구인지 몰랐듯이, 지금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의 경우에도, 그녀가 간음한 남편이 정확히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처절하듯 살아가지만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알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살아내듯, 견뎌내듯, 버티듯, 죽지 못해서, 살 수 밖에 없어서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왜 그렇게 사는지를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자기 사는 목적이 이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이 사는 목적은 사람을 만드신 이에게 있는 것이지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심령 안에 생명이 되는 씨를 심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기가 생각하는 삶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수가성 여인의 다섯 명, 아니 여섯 명의 남편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사람들의 그런 삶을 창세기의 시작에서 “흑암과 혼돈” 이라고 하셨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왜 사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면 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그런 사람들은 다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자기 삶의 의미 곧 남편으로 여기면서 산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아무리 고상하고 위대해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생수와 같이 넘치지 않는다면 그가 사모하고 의미를 부여한 모든 것은 다 간음한 남편과 같은 것이다. 한 마디로 누구와 간음하는지 조차 모르는 흑암과 혼돈 가운데 사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에 관해서 모세의 율법으로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고 예수님의 반응을 살핀다. 성경에서 율법을 어기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한 것은 율법이 돌에 새겨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율법으로 죽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율법은 돌에 새겨진 문자가 율법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그 문장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율법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마귀가 금식한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사람이신 예수님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었다. 그것이 말씀으로 사는 것이었다. 즉 돌에 새겨진 율법이 사람이 사는 목적이 아니라, 율법으로 또한 세상 만물로 표현하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의 본질이 되고 또 삶의 의미가 되어 사는 것이 바로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다. 그 의도는 사람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라.”라고 하는 것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을 먹게 만드는, 즉 율법이 자기의 것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돌로도 표현되고, 세상으로도 표현되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사람으로 표현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늘 “모세를 알았다면 예수님도 알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이 모세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모세만 알았지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몰랐던 것이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한답시며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즉 모세를 알았다면 진정 남편이 있는 삶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신랑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이 신랑이신 것은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이 일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즉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은 “너의 삶에 진정한 남편이 있는 자,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바로 알고 있는 자가 있으면 돌로 치라.”는 의미이다. 물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그렇게 듣지 않았다. 그들이 이 여자를 송사한 것은 여자의 행위, 눈에 보이는 행동 곧 형식에 관해서였다. 그리고 그 형식에 관해서 자신들도 결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의 양심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정체성이 그런 자들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선하지 않으므로 이를 경건하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일을 경건하게 하고, 고행하고 수도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행위에 관해서 자신들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정체성 자체가 먼저 사람의 형식이란 깨끗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위에 자신이 있으면 돌로 치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돌아 볼 때 자신들의 행위에도 결함이 있다는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돌로 친다면 자신들의 신앙의 근간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깨끗지 않으므로 그 행위를 경건하게 해야 한다는 자들이니 자신들이 돌을 던질 만큼 깨끗하다면 그들이 율법을 지킬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단순하게 자기들도 행동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이 양심에 찔려서인지 다들 떠나갔다. 그러고 나니 남은 사람은 여자와 예수님뿐이었다. 율법을 지켜야한다는 것이 없어지고 여자 혼자만 남았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사람, 그 자체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물었다.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갔느냐?”라고. 


여자를 정죄하던 자들은 다 떠났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이 사라졌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사람을 정죄하던 율법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사함 받는 상황이고 자리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소할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모세니라(요 5:45)


여자를 데리고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으로 여자를 고소했다.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떠났다. 즉 모세가 떠난 것이다. 모세의 율법, 우리 사람을 송사하던 그 율법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법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어야만 예수님만 보이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는 변화산의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보니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여자를 고소하던 자들이 떠난 때, 모세의 율법이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 끝났을 때, 즉 사람이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이 다 사라지고 나니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가 용서되는 법과 상황인 것이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모세가 정죄하는 죄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이때껏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람의 육신의 행위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다시 여자에게 가서 행위로 죄를 짓지 말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다시 가서 모세가 송사할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남편을 찾는 자가 되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벗어난 그 죄를 다시 짓지 말라는 것, 즉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으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남편이 없는 삶, 간음하는 삶, 삶의 목적과 의미가 없는 흑암과 혼돈의 삶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예수님께서 빛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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