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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18)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26. 17:3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시다가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곳을 지나셨다. 그 연못에는 가끔씩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데, 그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다 낫게 되는데 그곳에 38년간 물이 동하기를 기다린 병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가 이미 오래된 줄 아시고, 병자에게 다가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이에 그 병자는 물이 동할 때에 자신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다른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가므로 자신이 낫지 못하였다고 대답을 한다.


이 말씀은 정말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는데 있어서 남보다 더 빨라야만 하는 세계에 있어 이 38년 된 병자는 늘 죄인이고 패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사가 물을 동하게 했을 때, 육신의 능력으로, 혹은 사회적 능력으로 돕는 사람을 통해서 가장 먼저(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38년 동안 있었지만 들어가지 못해서 병을 고침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병자의 모습은 서로 경쟁해서 이겨야 영광을 얻고 목적을 달성하는 세계에서 패한 모든 인생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이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절대로 자신이 가진 병을 고침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신앙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법, 남들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야 하는 법, 어떤 기준에 있어 남들보다 강한 육신의 능력이나 사회적인 능력이 있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그 법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유대인들의 법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 이 세대의 기본적인 생존 법칙이고, 더 황망한 것은 대부분의 교회가 가진 신앙의 법칙이기도 한 것이다.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 장로가 쉽게 된다는 것은 물이 동하였을 때 먼저 들어갈 돈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그런 경쟁하는 자리에 두고 있었다.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경쟁해서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서 낫고자 하느냐고 물을 때에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고백한다. 남들보다 빨리 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이 법에서 자신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즉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이다.


이 사람의 죄는 두 가지다. 하나는 경쟁해야 이기는 법,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선인 법으로 볼 때 이 사람은 헤어 나올 방법이 없는 죄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심각한 죄는 그런 존재임에도 그 자리에 자신의 자리를 두고 있는 것 그것이다. 이 두 번째 죄가 바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에 ‘다시 죄 짓지 말라(요 5:14)’고 하신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치신다. 그 고치시는 말씀은 병이 나았다고 하심이 아니라,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이었다. 즉 너의 자리를 이곳에 두지 말고 떠나라는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자리(where)는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에게 물으시는 그 자리이기도 하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신 그 자리와 같은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서로 경쟁하여 이긴 것을 선으로 여기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자신의 벌거벗음이 부끄러웠던 것은, 자신의 정체성으로는 이겨서 선에 이르기에 너무 부족해서 부끄럽다고 여긴 것, 그것이었다. 지금 이 병자도 그런 경쟁의 자리에서 죄인으로 자기 자리를 깔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떠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자기 자리를 들고 일어나서 간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고 안식하심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렇게 경쟁해서 이기는 것이 선이라고 여기는 자리에서 떠나면 그 사람에게 진정한 안식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이 안식일인 것이고, 안식이란 또한 사람이 이 죄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안식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은 물이 동했을 때 자신의 능력으로 물에 먼저 들어가서 몸이 낫는 것처럼 육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구원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렇게 육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의 정체성이 육신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구원은 바로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 그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가 육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또한 우리 안에 갈급하고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말씀을 기록하신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의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이것은 또한 예수님을 믿고 그 생명대로 살고자하는 이들의 일이다. 즉 육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떠나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고, 예수님의 일이며, 또한 우리의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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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27-42) 예수님의 양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5. 12. 26. 11:13 Writer : 김홍덕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께서 대화하는 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갔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한 여자와 대화하고 계신 것을 보았고, 이에 자신들이 구해온 음식을 예수님께 권했더니 예수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

라고 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께 음식을 드렸는가?’ 궁금해 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양식을 알지 못하는 것과 수가성 여인과 대화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양식이 보내신 이의 일을 행하며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에 이견은 전혀 없지만,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는 것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라고 하셨다면,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설명하고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양식은 바로 예수님의 양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양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양식, 주기도문에 나오는 양식과 사람이 먹어야 하는 모든 양식에 관한 말씀의 목적과 본질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먹어야 하는 양식이라는 것,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그의 일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 육신을 가진 삶으로 나게 하시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려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일에 관한 말씀을 보아야 한다. 즉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의 양식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영광은 ‘나타내다’라는 의미이고, 양식은 채우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사람이 가진 자아 정체성의 공허함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로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시면, 사람의 양식도 존재의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하고, 만약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공로나 소유를 드림으로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고 상급을 정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일을 해야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원부터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을 가지신 신이다. 이름은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체성은 공로나 소유의 드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이 사람이 무엇을 드리고, 무엇을 행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너는 누구냐?”> 하는 것, <“너는 나와 어떤 상관이 있는 존재냐?”>에 대한 답을 바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드리는 제물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시다. 성경에 어떤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말씀하시는 것들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본성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당연히 그 생명이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고, 사람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이 없는데 행동만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거짓을 행하는 자, 외식하는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돈을 모아서 좋은 소와 양을 사서 예배드리게 하려 하심이 아니다. 또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매일 청소하라고 시키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심이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자꾸 하려하고 자꾸 드리려 한다. 좋은 교회를 지어서 바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 것이다. 서울은 누가 하나님께 바치지 않아도 원래 하나님의 것이다. 온 우주와 세상이 하나님의 것인데 새삼스럽게 하나님께 바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좋은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바쳐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일 뿐,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노방 전도를 하고, 청소하고 봉사하는 것과 같은 수고를 할 이유도 없다. 자기 안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생각으로 할 값이면 가만히 있음만 못하다. 가만히 있으면 적어도 하나님을 기만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그것이 아닌데, 그것을 원하신다며 다른 사람까지 불편하게 하면서 설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나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고, 성전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너무 열심이었지만 하나님은 백성들이 와서 제사 지내지 못하게 누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시기까지 하셨다(말 1:10)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사마라아 여인에게 속에서 넘쳐나는 샘물을 얻으려면 내게 먹을 것을 내어 놓아라 혹은 돈을 내어 놓아라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 하나였다. “네게 말하는 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그것 하나다. 즉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 그것 하나면 영생의 샘물을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양식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양식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듯이 우리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보이셨듯이, 우리의 모든 삶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단 하나다. 사람을 만드시는 것,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안식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그것에서 끝났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예수님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사람이 자기 안에 채워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양식, 하나님이 사람 보내신 뜻을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온전하게 하는 것을 크게 착각하고 있다. 사람이 몸으로 또한 사람이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자신이 규정하고, 세상과 결탁한 교회가 규정한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자꾸 뭔가 일을 벌이고 또 뭐라도 자꾸 하나님께 바치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 하나다. 


그것은 바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너는 누구냐? 어디에 있느냐?”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시니 자리에 있느냐 하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또 우리 모든 인생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이고, 그 뜻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져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온전한 아들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양식이고, 빈 그릇인 우리 모든 인생이 채워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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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수가성 여인의 대화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들에게 사마리안 여인과 대화를 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상했지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먹을 것을 권할 때에 ‘나의 양식이 있다.’고 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전하러 간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아직 예수님이 랍비(선생, 요 4:31)였지만 수가성 여인에게는 그리스도였기에 제자들에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이 대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냥 처음 본 남자인데 자신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런 것일까? 물론 그렇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단순하게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을 예수님이 먼저 알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가 찾고자 했던 모든 것을 예수님이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나의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요 4:39)


이것은 단순히 여자가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를 예수님께서 아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자가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를 말하였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중심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증거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가 물을 긷고 또한 남편을 바꾸어가면서 무엇인가를 채우려한 자신의 모은 것을 예수님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자기가 찾고자 했던 자아 정체성,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분이시고, 자신이 그런 것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 주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이 진정한 자신의 그리스도(메시아, 영웅)이고 또 절대로 배반할 수 없는 구주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을 사람들도 똑같이 증거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 4:42)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고, 또 죽은 사람을 살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일을 직접 가까이서 보고, 또한 자신들이 그런 경험이 있었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잡혀갈 때 다 도망갔다. 그러니까 그런 믿음은 예수님을 바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끊임없이 육신이 살아가는 것에 관한 것을 하나님께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기 위하여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보고 새벽에 까지 가서 기도하는 것이 온전한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먼저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그런 모든 것은 다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삶으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지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산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기 위함이다.


흔히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한다. 그것은 오늘 내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를 아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 물론 모르실리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나에게 그리스도가 되시는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삶의 요소들을 예수님이 도 하나님이 아시는 것은 나의 창조주이시기에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내가 너희의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시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은 안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이 끊임없이 물을 기르러 갔던 것과 같이, 모든 인생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물을 기르듯 수고하는 이라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다. 또 여자가 남편을 바꾸어가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채우려 한 것과 같이 모든 인생이 자신의 주인을 돈에서 여자에게로 또 권력이나 돈으로 바꾸어가는 삶을 사는 이유를 예수님이 아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찾고자하고 그렇게 갈급해하는 인생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인 하나님의 말씀의 본체이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아시는 것은 우리가 한 일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몸이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이유를 알게 하셨듯이 예수님을 보고서 그것을 깨달은 사람의 삶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예수님을 보고서 깨달은 것을 깨닫게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까지 아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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