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1장 1-4절) 나타나신 생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8. 27. 06:36 Writer : 김홍덕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은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물학적 혹은 의학적인 개념만으로 한정된 의미가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와 목적에 부합되게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가 그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는 죽었다고 한다. 반면에 기계라 할지라도 의도대로 작동이 되면 무의식적으로 살아 있다고 말하곤 한다.


생명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즉 의학적으로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생명이 있고,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목적에 맞는 모습을 보여 주는지 아닌지가 생명이고 살아 있다는 정의라는 것이다. 그 일부로서 의학적 생명이 있는 것이다.


생명이 그렇다고 하는 것은 목적에 맞는지의 여부가 곧 죄와 사망의 정체성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죄와 사망은 늘 동일한 개념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즉 ‘죽었다’는 것과 ‘죄’는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죄와 사망이 동일한 것은 목적이 상실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역시 존재하는 목적을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생물학적으로 멀쩡해도 사람은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하여 탐구하고 고뇌한다. 그것을 고뇌하고 탐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살아 숨 쉬면서 영위하고 있는 각양의 삶의 모습과 추구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다’ 할 수 있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주인에게 있다. ‘이동’이라는 목적을 원하는 주인에게 고장 나고 오래된 자동차는 죽은 것이다. 하지만 고철 자체가 목적인 고물장수에게는 살아 있는 것이다. 주인에게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삶에 대한 주권이 있지 않다. 주권이 있다는 것은 시작과 끝을 주관한다는 것이다. 자동차의 주인이라는 것은 자동차를 사는 시점과 팔거나 폐차하는 시점을 정할 수 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시작도 또한 끝도 스스로 정할 수 없다. 자살이 끝을 스스로 정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살만하고 자기 원하는 것이 있는데 스스로 죽는 사람은 없다. 즉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삶의 여건을 스스로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존재 목적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분명히 신에게 있다. 그리고 <존재>의 목적이라면 오직 <존재>의 정체성을 가진 신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있다.


사람들에게는 많은 신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술의 신도 있고, 우리나라에는 화장실에도 귀신도 있다 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신은 다 행위와 소유의 신이다. 사람들이 그 신을 대하는 것이 그 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풍요와 다산’ 그것이 사람들에게 신에게 바라는 전부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존재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삶의 목적과 무관하게 그저 육신이 살아가는 동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풍족함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런 것이다. 그것이 그렇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신이 다 풍요와 다산의 신이고, 사람들이 그 신을 신앙하는 단 두 가지 방법은 자신의 소유를 드리는 것과 그 신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공로를 드리는 것 그것뿐이다. 산신령이든 부처든 뭐 어떤 신이라도 사람들이 섬기는 방식은 단 두 가지 그것뿐이고,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육신의 삶의 풍요 그것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알고 있는 모든 신(神)중에 유일하게 존재의 신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인데 그 뜻이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원하는 어떤 재화나 용역을 풍요롭게 하는 신이 아니라, 그저 그냥 단순하게 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저 있기만 하는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의 신이며, 그 신을 만나는 것은 어떤 존재로서, 어떤 정체성으로 또한 어떤 관계로 만날 것인지가 중요한 신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만드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지만 그 능력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너는 나에게 어떤 의미, 어쩐 관계, 어떤 존재냐?”라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랄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의 정체성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생의 의문인 ‘나는 누구인가?’의 명제와 연결된 것이고, 그 안에 해답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셨다. 그것은 당연히 사람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목적을 알고, 그 원하시는 바대로 하나님을 섬길 때 비로소 <살아 있다>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연은 살아 있다’라고 한다. 그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대로 오차 없이 잘 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유일하게 사람만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것은 선악과로 인한 타락에서 비롯되었는데,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났음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알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존재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에게 기도하고 바라는 것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는 것이나 자신의 존재 목적을 이루는 것에 있지 않고, 존재의 하나님께 풍요를 얻기 위해 소유와 공로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죄며 이런 삶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생명이 없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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