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정확하게 아는 것은 모든 성경을 아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정통신앙이고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사도 요한 뿐 아니라 당대의 모든 사도들이 다 그러했다. 그래서인지 각자의 표현 방식이 조금씩은 달라 보이긴 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에 대한 표현들은 다 같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의 교회들은 이 예수님에 대하여 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 각종 예배의 의식이 조금씩 다르고, 세례와 같은 의식도 또한 교리도 조금씩 다른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각 교단과 종파들 마다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이다. 모든 종파의 하나님이 동일하다면 그 하나님을 경배하는 의식이 다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조금씩 다르다보니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하지만 초대 교회 때는 바울이나 요한이나 베드로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같았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하여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일 1: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도 바울은 빌리보서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 사도 모두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확히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은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오신 그대로를 용납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와 동일한 육신, 동일한 성정을 가진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 우리도, 우리 자신이나 또한 예수님을 믿고자하는 다른 사람 모두 태어나고 살아온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신앙은 잘 찾아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많이 제시하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요구들은 대부분 자연인으로서는 나름의 희생과 절제가 필요한 내용들이다.


금식기도를 하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금식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것인가? 물론 금식하지 않는다고 구원 받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금식을 많이 한 사람이 왠지 신앙이 더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도록 교회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 가진 자연인으로서의 본능을 절제해야 좋은 신앙이 되는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태어나고 자란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금식기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좋은 신앙이 되기 위해서나,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것이 너무 절실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절실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금식하라고 금식기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금식은 사람의 창조목적이 아닌 다른 것을 그릇과 같은 사람 안에 채우는 것을 금식하듯이 끊는다는 의미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표현할 때 금식기도가 되는 것이지, 금식한다고 하나님께서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잘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어떤 것이 영광이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경우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이겼다’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인데, 세상에서 이겼다는 것은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위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교인 중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고 광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으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과 이치에서 볼 때 이기고 성공한 것이 곧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것이라 생각하는 무지함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께 해가 되거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판사나 재벌 회장이 되는 것이 아쉬운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쉬운 것은 우리 육신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표현된 형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그 형상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을 그리고 사람의 육신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장 아쉬운 것은 바로 사람의 육신 그 자체이지, 이 육신이 부자가 되거나 판사가 되지 못함을 아쉬워하지도 않으시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게다가 판사나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닌데, 판사나 부자가 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공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 그런 영광 하나님께 돌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만민을 위한 복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사람이 뭔가를 이루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영광 받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태어날 때의 자연인, 그리고 육신 그 자체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그런 것을 인생을 치장하려 하고 그 치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이 육신 그 자체가 보시기에 좋았던 같이 이 육신으로 주신 삶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육신을 주실 때 덤으로 주신 기능들로 육신이 살 동안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고, 그러다 부자가 되거나 판사가 되면 좋은 것이지, 그런 자리에 오르면 더 영광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람들이 육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지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육신이 부족하고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신을 끊임없이 절제하려 했다. 그래서 수도원이 생기고 신부와 수녀가 생긴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같은 뿌리다. 우리가 부자가 되지 않아도, 판사가 되지 않아도, 이 초라해 보이는 육신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고 우리 인생을 육신으로 주심을 온전히 순종하고 고백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보니, 어떻게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꼴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너무 화가 나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마저도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고 하는 모습을 자신의 육신에 비교해 보니 자신은 그럴 수 없다는 것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지주의다 달리 영지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들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보고 듣고 만진 바 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다른 육신이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있어 절대적인 사항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삶을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그 삶을 보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영화 같은 곳에 보면 빈민들이 사는 곳에 어떤 사람이 흘러 들어왔는데, 잘 지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분이 다르면 그것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끼는 장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분명한 배신이고 갈등이다.


만약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동안의 육신이 우리와 다른 몸이었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완전히 속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는 믿어야겠는데, 이 육신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지주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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