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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10-24) 명절을 지키러 가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9. 11:0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셔서 그 육신의 형제들과 나름의 갈등을 겪던 그 때는 유대인의 질기 곧 초막절이라는 명절이었다. 초막절은 유대인들의 출애굽 과정에서의 광야의 삶을 기념하기 위한 것인데, 시기적으로 추수하는 시절이라 지금으로 치면 어쩌면 감사절과 비슷하게 절기를 지키는 것 같았다고 할 수도 있다. 초막절은 결국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지키심과, 그 광야의 삶을 지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풍족함을 기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들이 명절을 지키러 가면 좋겠다는 권유에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가시지 않았다가 몰래 성전에 가셔서는 유대인들과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논쟁을 하신다. 논쟁의 시작은 글도 배우지 않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교훈을 말씀하심에서 시작되어 예수님 교훈의 정통성,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자격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과정에서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셔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시므로 유대인의 공분이 극에 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성전에 가시지 않았는데, 자신의 말씀을 뒤집고 몰래 성전에 가셔서는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본다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사람들의 삶의 의미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들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는 것을 위하여 오셨는데, 아직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명절이 초막절 즉 감사절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꼭 감사절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또한 가나안 땅에서 풍요로움을 주시므로 그 시절을 기념하는 절기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절기를 주시고 그것을 기념하게 하심은 하나님께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 초막절 그 열매를 가지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된 사람들을 즐거워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그것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농부가 땅에 씨를 심어 얻는 것이 열매이기에,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고,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싹이 나고)되고, 자라서 그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요 형상이 된 존재는 하나님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에,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직 없는 때에 초막절을 지키러 가라는 말에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성전에 가서는 사람들에게 열매가 아직 맺히지 않은 것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정체성과 말씀과,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삶을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글도 배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놀라는 교훈을 전하시고는 그 교훈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 것이라고 하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6-17)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의 존재 목적을 깨닫고 삶의 의미를 누리는 것에 이르지 못함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예수님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대부분의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고 창조주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사화복을 지원하시기 위한 신으로서 그 능력을 입증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그 일만 보기 때문이다. 


즉 존재의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시고자 보내신 예수님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초인간적인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고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쟁쟁거리며 하나님의 뜻을 더 알고자 한다. 물론 그들이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일 뿐, 하나님의 본뜻과는 거리가 멀다.


글을 배우지 않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놀랄만한 교훈을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글을 배운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봐야 하는데, 그것을 보지 못한 유대인이나,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려면 목사가 되어야 하고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 같은 부류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전혀 모르는 족속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성경과 신학은 목사나 신학자의 하나님일 수는 있어도 사람의 하나님은 아님을 왜 모르는지 오히려 그것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고, 또 명절이 외식에 그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초막절의 열매, 감사절의 열매는 사람이 먹을 양식이 풍년이 드는 것이 아니다. 즉 풍년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열매를 보면서 그렇게 표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열매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이유이지, 땅의 소산을 하나님이 어디 쓰시려고 그것을 바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심과 같이,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열매가 되고, 그런 열매가 나오는 때가 바로 예수님의 때이며,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이나 자신이나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왔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데, 그 깨달음의 표상인 예수님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때가 아니라며 명절을 지키러 바로 가시지 않으신 것은 아직 사람들 중에 그런 세계가 열린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기에, 명절이 명절다운 것이 전혀 없으니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도 않았고, 명절도 모양만 있을 뿐 기념할 것이 빠진, 알맹이가 없는 껍질뿐인 명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명절에 가신 것은 그런 명절, 그런 사람들의 상태, 그런 가치관, 그 빈 껍데기 뿐인 사람들의 삶과 명절과 절기의 본질이신 예수님께서 명절 안으로 들어가심으로 명절을 명절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하시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일을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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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1-9) 예수님의 때(time)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1. 28. 10:06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고향에서와 형제, 친척들에게 환대 받지 못했다는 것은 모든 복음서에 나와 있어서 익히 아는 말씀이다. 요한복음에서는 그 형제들이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는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를 청하기까지 한다. 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아직은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으니라(요 7:6)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시게 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그 형제들과 함께 있었고, 어쩌면 형제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로 인하여 자신들도 해를 당할까 해서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청하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요한 사도가 기억하기에 그 당시에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예수님의 때는 그냥 쉽게 생각하면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예수님의 때라 쳐도, 어떤 목적으로 십자가를 지는지를 알아야 예수님의 때가 어느 때인지를 알 수 있다. 시간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 시각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 때가 되었을 때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고, 그래서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이루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그 목적이 다 이루어지신 분이다. 그런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 뜻이 사람들에게 자기 것이 되지 않았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때는 부활 하신 이후에도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심에서, 그 때는 예수님 안에 이루어지는 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점심을 먹기 위하여 점심시간을 기다림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말씀하시고 전하러 오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님의 때라는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떠나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 그 형제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의 때>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하신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마음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준비되었듯 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람은 누구라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자기 삶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예비 된 존재라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예수님께서 그 형제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 7:7)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그 형제들에게 그리 우호적인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이라고 하셨다는 것에서, 그 형제들은 세상이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형제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자들이 너희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죽이려는 마음이나 다 세상에 속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전구를 만들 때 빛을 내게 만들고 그렇게 테스트해서 시장에 보낸다. 그러니까 전구로서의 기능은 이상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것은 아니다. 온전해지려면 가정이나 필요한 곳에서 그 기능이 나타나야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것과 같이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때이다. 예수님은 완성된 전구와 같은 분이시지만 전구가 가정에서 빛을 내는 것과 같이 사람 안에서 예수님의 성품이 생명이 되는 것이 예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 안에 이루어지는 때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와 생명이 사람 안에 이루어지는 그 때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도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만지지 말라고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도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시기 전에는 다들 그 마음 안에 예수님의 대가 제대로 임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엠마오로 도망가기도 하고 그랬던 것이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전에 “성령이 임하시면”이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하늘로 올리우시니,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이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시대, 곧 예수님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


그러므로 예수님의 때는 달력의 어떤 시간이 아니라, 그 때는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때요, 한 사람이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을 존재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때며,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그 때가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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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잠깐 예정론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 보았다. 구원 받을 사람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인지가 정해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이 그 법을 선택하는 것에 대하여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이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몫이다.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의로 선택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할 때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오는 것이지, 사람의 의지 없이 하나님의 의지를 사람에게 강제시킨다면 그것을 적어도 사람이 영광으로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때 이미 사람은 하나님 그 자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위 말하는 예정론은 예상이나 계획이라기보다는 늘 간증에 가까운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겪은 사람이 그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니 그것이 정말로 예정되었고, 하나님의 계획이 그런 것이었다는 것을 자기 안에서 생명이 표현되어 나올 때 그것을 인지하고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인식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선택된 자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미래라는 것은 미리 알면 아는 그 때 이미 현재가 되는 것이듯.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뜻을 예수님을 보내셔서 보이셨다. 그것은 심판이기도 하고, 택정이기도 하며, 은혜이기도 하고, 운명이기도 하며,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그런 식의 말은 어떤 것이라도 다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전하여 듣고, 또 성경을 통하여 읽고 난 다음에 선택을 해야 한다.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게 된 사람들이 놋뱀을 볼 것인지, 아니면 ‘그거 본다고 낫겠어?’ 하며 보지 않든지.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지 않으면 예수님께 올 자가 없다고 하시니 것이다. 즉 이는 육신의 존재를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비약인 것 같지만, 요한복음 6장 전반에 흐르는 맥락이 그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즉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적인 왕으로 옹립하려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피했는데, 그렇게 육신의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는 이들을 피하시는 주님을 제자들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다를 건넌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한 사람들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풍랑을 만났다. 즉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섬기는 안목을 가진 이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풍랑 같은 것이다. 육신의 문제는 끊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믿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교회 다닌다고 세수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믿음은 마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렇게 육신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어떤 문제의 주인으로 보는지는 결국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에서 다시 드러난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믿음이라 여기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떡이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떡이라 또한 피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먹어서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신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임금을 삼으려는 안목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제자들이 그 말씀이 어렵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주제의 급을 급하게 높여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예수님께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이러자 제자들은 거의 멘붕에 빠졌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이 육신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안목은 오병이어가 시작되면서부터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시점까지 변하지 않았다. 모든 믿음의 포인트가 바로 육신의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조차 육신의 개체를 선택하는 것으로 들은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신의 어떠함으로 보시지 않으시는 만큼 육신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남은 것은 12 제자들뿐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우리의 용맹한 베드로가 나서서 답하였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69)

이쯤 되면 ‘그래 기특하다.’ 뭐 이런 칭찬이라도 하시면 좋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가룟유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라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가룟유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배신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하게 12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이의 마음 안에 가룟유다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알고 보면 가룟유다는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기대하는 왕이 아니라고 확신했기에 팔아 버린 것이다. 자신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삼으려 한 그 왕, 곧 육신의 문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가진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왕으로 끝까지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판에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왕은커녕 같이 있다가는 자신도 죽을 지경이다 싶었던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가룟유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얼마 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누가 좌우에 앉을 것인지를 다투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 제자들의 마음은 지금 오병이어를 보고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한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가진 신앙 역시 그렇다.


하지만 베드로는 비록 가룟유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잡히실 때 도망을 가긴 했지만 그는 끝내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알고자 했다. 그러니까 가룟유다처럼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심문 받으시는 자리까지 갔던 것이다. 정말로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예수님과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모습이 왜 다른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가룟유다는 알고 싶지 않았고.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예수님을 육신의 임금으로 옹립하려는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버려두고 배 타고 떠나버린 자신이나 다를 바 없을 수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영생의 말씀이고, 무엇보다 거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룩함이라는 것은 구분된다는 것이다. 즉 그래도 예수님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오늘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아니 그러면 좋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노라하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적어도 한 번은 이 믿음이 온전한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그마저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책도 없다 사실.) 그때 결국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예수님께서 거룩하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은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 구분은 예수님을 육신의 주님으로 보는 것과, 존재의 주님으로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거룩이다. 그런 거룩함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영생이심도 알 수 없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기름 넣고, 세차해 주기 위하여 차를 사지 않듯이, 하나님도 사람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과 즐거움으로 알고 사람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보내신 예수님을 육신의 배부름을 해결할 왕으로 옹립하는 것을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베드로는 그런 마음도 있었고 또한 예수님의 거룩하심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도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들이 우리의 몸과 삶이 되어야 한다. 즉 예수님이라는 떡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have to를 사용한 것은 그것이 사람의 운명이고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형광등은 불이 들어와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배불러서 예수님을 임금 삼는 신앙을 떠나야 한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육신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영생도 아니고, 거룩함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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