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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처럼 되려는 것.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2. 3. 11:37 Writer : 김홍덕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 명제만 놓고 본다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먹었다는 것은 자기 몸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고, 또 반대로 생각하면 몸이 원하는 것을 먹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은 선악과를 먹고 싶게 하고, 선악과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명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죄인이라는 이 명제는 성경의 근간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기본 골격이다. 이 타락과 죄가 없었다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신앙이라는 것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놀기만 하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인류의 시작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고, 모든 인류가 그 그늘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의 첫 사건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그렇다 치고, 오늘 나는 선악과가 복숭아인지, 사과인지, 아니면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신비한 열매인지도 모를뿐더러, 도무지 누가 선악과라고 하는 나무의 열매를 소개시켜 준적도 없기에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왜 아담과 함께 도매 급으로 죄인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울함이다.


성경을 오늘 우리가 읽는다는 것은 분명히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상관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다른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안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의 마음과 같은 것이 있고, 또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모습과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말씀을 읽고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또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과 사투를 벌이듯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인지, 우리의 어떤 모습이 선악과를 먹은 모습과 같은 것이지를 안다면, 선악과는 아담이 먹은 것이 아니라 내가 먹은 것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 역시 내 마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나님은 신이시다. 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신이시다. 창조는 분명 무(無)에서 유(有)로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단순히 산과 바다, 또 태양과 지구를 만들고, 안드로메다가 되었든 무엇이든 우주와 같은 물리학적, 형이하학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생각과 철학, 그리고 법칙과 의, 이 모든 것도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보다 중요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지배한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 사람들도 다 아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므로 사람이 생각하는 것, 사람들의 관념 속에 있는 의(義)라는 개념과 같은 것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 ‘의’를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떤 의를 자기 삶의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빈 그릇과 같다고 하고, 때로 ‘사람 안에 든 것이 많아야 한다.’, ‘가슴을 적신다.’와 같은 말들을 공감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의, 자신이 어디선가 자기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의(義)’가 구현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늘 어떤 일에 있어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가 한 명은 삶은 감자를 두고 설탕에 찍어 먹어야 한다고 하고 한 명은 소금에 찍어 먹어야 한다고 다투다가 이혼했다고도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자를 뭐에 찍어 먹는 것이 뭐라고 그러나 싶겠지만, 그 상황은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 앞에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고 관철시키는 하나의 모습일 뿐, 모든 사람은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모습은 작게는 문서를 타이핑할 때 왼쪽에서 간격을 얼마를 띄어야 하는지를 주장하는 것에서부터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결국은 단 하나 ‘나의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그 하나일 뿐이다. 하나의 사안에 생각이 같은 이들이 모여 세력이 되면 세력의 일이 될 뿐. 


사람이 가진 이 하나의 생각,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것, ‘이렇게 되어야 세상이 바로 된 것이다.’는 그 생각을 관철시키려는 시도, 이것이 결국 세상의 모든 갈등의 원인이고 뿌리다. 여기에 선악과가 있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한다는 것은,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세상이 되어야 하듯 자신이 주관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고, 그 자기의 생각을 기준에 부합하면 선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모습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만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사람이 창조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미 창조된 것의 응용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창조라면, 우주 공간에 어떤 것을 만들어 와야 하는 것이다. input 없는 output이라 할까?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존재고 능력도 없으면서 세상의 일이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이 세상의 일을 자기 맘대로 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 제일이라고 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기의 이익>이다. ‘내가 유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표현되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빨래를 걷어온 아내를 돕지 않고 누워있는 남편의 모습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이래도 된다.’는 생각이 없으면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에게 가장 유익하고, 자신에게 가장 편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그렇게 관철 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고, 자기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많은 열심 있는 신앙인들이 외국에 가서, 험한 곳에 가서 주님의 일을 하겠노라 외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어야 하는 곳은 바로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작아 보이는 그 세상, 하지만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자신이 접하고 있는 그 접점에서 자신의 의, 자기가 유익되고 편하게 되는 것을 관철 시키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고, 순종이며, 그리스도의 본성인 것이다.


이 블로그에 그렇게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아니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생명만 있으면 되냐?’고 궁금해서, 또는 부인하듯 질문도 해 온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데 사람의 유전자, 곧 사람의 생명이 있으면 되지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 단순한 것 하나를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것이며, 세상을 구할 것인가? 자기 앞에 펼쳐진 작은 세상의 일에도 순종 못하는데.


신앙인들이 신앙이 좋아지면 망각하는 것이 있는데, 신앙이 얼마든지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가진 신앙대로 세상이 되어야, 또 교회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것이 정말로 신앙이고 선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게 하려는 유대인들을 다 잡아다가 족쳤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믿음대로 되어야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실제로 베드로가 그랬지 않는가?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이러면 하나님의 일이 되겠느냐?”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 특히나 열심 있고, 계시가 밝다는 사람들이 이 오류에 매몰되어 있다.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의 방향대로 하지 않으면 죄라고 강요하는 것, 그 왜곡된 신앙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심화되면 이단이 되는데, 그렇다고 기성교회가 자유로운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강요하는 신앙은 사회적인 관념과 적당히 타협한 사마리아요, 세상의 법과 결탁한 이방 신앙일 뿐이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강요를 견디지 못해서 가나안 교인이 되는지 우리는 보고 있다. 돈을 많이 내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면 가난한 이들이 견딜 수 없고, 교회에 봉사를 신앙이라 강조하면 바쁜 사람이 견딜 수 없으며, 노방 전도를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한다면 숫기 없는 사람에게 힘들고, 금식과 철야가 좋은 신앙이라 하면 허약한 사람에게 넘사벽이 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자기가 가진 육신의 역량에 따라 표현되고 감당하는 것이지, 그것이 신앙의 기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육신과 삶의 한계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부인한다면 또 모르지만.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은 아주 작은 것이다. 눈앞에 마주친 어떤 일과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대로 하자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눈앞에 그 일을 펼치시고, 사람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달리 자기가 그 일의 주관자가 되고, 그 사람을 주관하려는 하나님이 되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순종하여 지신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즉 삶의 순간순간 사람은 하나님과 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삶의 현장에서 내 앞에 조성된 일들을 볼 때, ‘이래서야 되겠는가?’하는 순간 자신이 의로워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하시는 것이고, 저 인간이 왜 저러냐고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이 잘못하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잘못된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사람이 그러고 있다는 것,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딱 그 하나의 생각이 세상의 모든 죄와 분쟁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서로가 옳다 주장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참 신앙은 세상의 일에 자신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법을 좇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아내가 빨래를 걷어 왔을 때, ‘나는 피곤하니 쉬어야겠다.’가 아니라,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신앙이다. 행여 아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신앙이 없다고 생각하기를 ‘신앙이 없으면 몸이라도 굴려야지!’한다면 단언컨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다.(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딴 것이 아니라. 그때 그냥 빨래를 개는 것, 그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다면 목숨은커녕 자기 자신을 구원도 못할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삶,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어느 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어떤 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어떤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겠는가? 그리고 이쯤 되면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 자기 앞에 펼쳐진 일과 만나는 사람에게 자기 생각이 아니라, 펼쳐진 일에 순종하고 그 사람의 의에 따르는 그 사람이 셀 수 없는 신앙인들이 목이 터져야 부르짖기도 하면서 다짐하는 성경대로 사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사 그러려 해도 그럴 수 없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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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또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지를 물으셨는데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요 7:19-2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또 병든 자를 고치시면서 ‘죄를 사하노라’ 하시고, 성전에서 가르치면서 유대인들이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니,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이유가 바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이라면 우리가 다 지키고 있으니,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가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것이라면 누가 그러냐고? 즉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가 없다고 반문하고 있다. 오히려 그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면서.


정말로 이런 때는 곤경에 처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확실히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이 스스로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확신했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의 본체이신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기에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 없다고 해 놓고서는 예수님을 잡으려고 사람을 보내었다. 스스로 모든 것을 개판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이 땅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지금은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율법을 다 지키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요즈음은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대인데, 누가 율법을 지키겠는가?’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 말씀이 구약에 기록되었느냐 아니면 신약에 기록되었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다 복음이다 나누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율법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율법과 복음의 기준은 어떤 것이든 ‘해야 하는 것, 무엇을 바치는 것’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의 말씀이라도 그 사람에게는 율법이 되는 것이고, 구약의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면 그 사람에게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과 율법의 차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율법으로 다가간 사람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예수님을 죽이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다. 율법을 다 지키려고 한다고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의 행위로 내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넘어선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서로 말하지 않을 뿐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켜내는 것은 율법이고,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것은 복음이라는 논리도 우스운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에 있지만 지금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노력할 뿐이다.’라고 한다. 모든 것이 다 지기 유익에 맞게 해석되었을 뿐이다. 종교인들의 이런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과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형성된 시점이 언제인지, 또 누가 가르친 것인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이든, 심지어 설교나, 어떤 사람의 말이나 책이라도, 그것을 지켜야만 어떤 원하는 결과나 기준을 통과하거나, 하나님이나 혹은 어떤 신 앞에서 의로워진다고 생각해서 행동으로 지키려 할 때 율법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율법이나 성경 말씀의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게 율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 보면, 어떤 것이든 사람들에게 같은 결과를 준다. 사람은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도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그 사람의 행위의 어떠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함이다. 즉 하나님은 행위나 소유의 드리는 자를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분명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율법으로 시험하시는가? 싶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는다고 죽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없듯이, 율법이라는 것이 어차피 지키지 못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지만, 살면서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가 있듯이, 율법이라는 것이 어차피 그 형태로는 사람이 지켜낼 수 없지만, 율법이라는 것의 목적이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율법을 어차피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 지키라고 주신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끝내 율법의 목적을 ‘지키는 것(Do)’에 관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즉 그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율법인 것이다. 주신 목적이 아니라, 주신 형상과 형태만 중요하기에 그것을 몸으로 지켜내어서 형상만 유지하려하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이 다 율법인 것이고, 결국 그 율법이 자신을 심판할 뿐이다.


이렇듯 율법을 그 행위로, 그 말씀의 모양을 행동으로 이루어내려는 사람들은 결국 율법을 범하게 된다. 율법이라는 것이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을 깨닫게 주신 것인데, 그것을 버리고 지키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런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율법을 주신 목적이 결국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얻도록 하게 하심인데, 그 목적을 져 버리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도,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지 2,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은 늘리고 늘렸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하나님이 아들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 기도할 때 예수님을 내가 죽였다고 말하곤 한다. 또 오늘날도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낸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미 2,000년도 더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셔서 부관참시조차 불가능한데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어떤 마음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마음과 같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도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한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지금의 서기 몇 년이라 할지라도 오늘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엇인가를 자꾸 하려 한다. 목숨도 내어 놓겠다. 바다 끝이라도 가겠다. 험한 산이라도 가겠다. 등등.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지금의 자리에서 할 일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존재의 신으로서 어떤 생명을 가졌는가 하는 것에 있는데, 어떤 존재가 되기도 전에 자꾸 무엇을 하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경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성경이 생명이라 여기는 것이 자기 생명이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 생명으로 살다보니 바다 끝에 가야할 일이 생기면 그 때가면 되고, 험한 산에 가야할 일이 생기면 그 때 가면 되고, 목숨을 바쳐야 할 일이 생기면 연어처럼 목숨을 걸고서 자기 생명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는 그 나라와 그 의가 자기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것, 그것부터 해야 한다. 그것을 하지 않고서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 말씀을 자기 몸의 행동으로 지켜 내려는 사람들은 율법을 주신 목적을 버린 것이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따라 해야 할 어떤 행동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가 아니다. 그런 사소한 것 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는 것,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을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아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이것은 아주 핵심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사람의 중심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이 있으면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적으로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삶의 모양과 행동양식으로 나타나는 존재로 지어졌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어떤 것을 생명으로 여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삶의 모양과 행동과 의로움이 표현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의 오신 뜻,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사람의 행동을 근본으로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의도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생각인 것이다. 못을 박기 위하여 산 망치로 사과를 깎으려고 하는 것은 (목적 안에서) 망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듯, 예수님을 오신 목적대로 보지 않고, 자기 육신의 일을 해결하는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 역시 주님을 오신 목적이란 관점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율법에 관해서 본다면, 율법을 주신 목적을 버리고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려는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야구의 타자에게 공을 쳐서 1루로 나가라는 것은 경기를 이기기 위한 하나의 행동이지, 타자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타자라는 이름에 무색하게 번트를 대기도 하고, 때로는 헛스윙도 하는 것이다. 타격의 목적이 타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듯 율법도 지키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이라 이름 붙은 것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경이든 그렇게 행동으로 지키려 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율법을 어긴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 군대는 구타 자체가 교육일 때도 있었다. 어떤 훈련병 내무반에 보안과 선임하사와 사병들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보안 교육을 실시하겠다. 알겠나?” 그리고는 갑자기 불을 끄고 보안과 사병들이 훈련병들 구타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때린 후에 다시 불을 켜고 선임하사가 물었다. “지금 혹시 구타당한 사람 있습니까?”라고 묻자, 많은 훈련병들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또 불을 끄고는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번 하자, 대부분의 훈련병들은 구타당한 뒤에도 “구타당한 사람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또 손을 들려고 하자 다른 사병들이 만류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보안 교육이기 때문이다. 군에서 있었던 일을 밖에서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즉 무엇이 본질인지를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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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명절에 성전에 가셨다는 것은 명절을 완성시키시는 것이다. 모든 명절, 절기, 그리고 율법의 모든 말씀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을 사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시면 성전이 완성되고, 명절을 지키러 가시면 명절이 온전케 되며,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야기하시면 율법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심도, 절기를 또 율법과 성전을 사람에게 주심은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하심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지으셨기에,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게 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성전과 율법과 절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신 것이기에 결국 그것 역시 예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전이 동물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일부 짐승들에게는 제물이 되는 곳일 뿐이고, 율법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이니 사람이 아니면 성전도 율법도 절기도 의미가 없다. 그런 모든 것은 결국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도 결국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다. 사람 밖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먹은 음식이 자기 것이 되듯 자기의 것이 되지는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밖에 있으니까. 반면에 밖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 안에 어떤 의미와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명절과 절기, 율법과 성전을 보면서 그것이 사람 안에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전과 율법과 절기와 명절을 보고 지키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표현하신 하나님의 성품, 결국은 음식이 사람과 하나가 되듯이 사람 안에서 의미와 생명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이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과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위하여 성전과 율법과 절기와 명절이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온 세상이 모두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생명 가진 존재가 되기를 바라셔서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즉 그런 모든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 안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교훈과 말씀이 생명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그 모든 것은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한 로켓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로켓을 지구 밖으로 쏘아 올리는 것이 로켓을 위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것이 가진 그 모든 첨단 과학의 목적은 오직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것, 그것에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글을 배우지 않아도 율법을 다 아시는 것이기에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다른 것을 말씀하실 이유가 없다. 현재의 설교자들처럼 성경의 신학적 배경이 이러니저러니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 안에 생각나는 것, 그것만 말씀하시면 성경을 다 말씀하시는 것이고, 사람이라면 그 말씀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오신 분이니 그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많은 교회가 있지만 사람들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교회에 회의를 느끼면 떠나고 가나안 교인이 되는 것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생명이 된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성전의 규격과 율법의 구조를 설명하듯이 설교하는 것 그 둘 뿐이다. 전자는 밭이 자갈과 가시밭인 것이고, 후자는 씨가 없는 말씀을 가진 자가 시험 쳐서 면허를 얻어 배타적 자리를 확보하고 설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교훈은 지금의 그런 설교와는 다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행위와 소유의 세계, 육신의 어떠함에 관한 것, 외모에 관한 것이 아님을 깨달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사람의 말과 뜻과 글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교훈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함에 있어 글을 예수님께서 배우지 않아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구원하셨듯이, 지금도 신학교를 졸업할 이유도, 목사 면허도 필요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심령, 그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교훈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모든 주권을 가진 듯이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런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 사람이라는 유전자가 시키는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의 유전자를 가지지 않았다면 사람처럼 말할 수 없고, 사람과 같은 생리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사람이라는 생명이 시키는 대로, 그 생명의 교훈대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또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생명이 삶이 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삶은 마치 사람의 유전자가 사람을 이끌 듯, 예수님의 모든 삶은 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 모든 사람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부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성경을 어기려고 해도 어길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유전자를 스스로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생명이 삶이 된 사람은 아무리 자기 자랑을 해도 그 삶은 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이 열심히 해서 우주를 정복한다고 하면 인류의 위대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 the Man이라는 영광이 점점 드러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굳이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해달라고 시끄럽게 소리치지 않아도, 또 목숨도 내어 놓겠으니 어디라도 보내 달라고 울부짖지 않아도 된다. 보내긴 또 어딜 보낸단 말인가? 이미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셨는데, 자기 사는 자리에서 자기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삶으로 사는 것부터 해야지.


사람이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영광은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이어야 한다. 한 나라의 장수가 전쟁에 이긴 영광은 패전국에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일이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일이면 일이지 그런 것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영광이란 화려한 것이 아니라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것이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그 생명이 있어야, 외국 선교도 있고, 군 선교도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생명,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신 그 사람의 정체성은 외면 한 체 위대한 일만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사랑장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것은 다 소용 없는 것이라고.


사람은 뭐 다른 것 할 것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지금 그 상태 그대로 만드시고, 그 삶의 자리로 보내신 것이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간의 정체성, 그것이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먼저 구하는 그 나라의 의(義)이기 때문이다. 이것 없이 하는 모든 것은 다 간첩이 침투한 나라에서 위대하고 착하며 선행을 하면서 지내는 것이나, 해적들이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우정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렇게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늘 불의하다고 책망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여기면서 그것을 극복하려 그렇게 경건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정체성을 부인하고, 그렇게 부인한 자기 정체성을 만회하려고 하듯이 세상에서, 또 신앙으로 위대한 일을 하려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교훈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을 불의하게 여기고 도전하는 것이며,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이다. 가장 먼저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자기 본성과 생명이 되는 일에 자신을 순종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며,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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