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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31-59) 예수님과 아브라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2. 15. 13:3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은 엉뚱하게도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서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자유케 되는 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말을 한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국이었고, 역사적으로도 애굽에서부터 바벨론까지 종이 된 적이 있었는데 자신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모른 체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이 말씀이 정치적인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죄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고 볼 수 있다.


종과 아들은 어떻게 다를까? 종은 그 정체성으로 주인인 아버지께 인정을 받는, 그러니까 관계가 있는 사람이고, 종은 그 수고의 성과를 가지고 주인에게 인정을 받는 관계라는 것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아들은 일하지 않아도 되지만 종은 일하지 않으면 종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많은 종교인들이 자신들을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믿으니 나는 자유롭다.’라고 착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주기적으로 회개하는 것으로 인하여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경향이 크다. 그렇지만 율법, 즉 성경의 말씀을 종이 수고하듯이 지켜내는 신앙이라는 것은 적어도 아들의 신앙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을 지켜내지 않으면 벌을 받고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종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도 아버지에게 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행위에 관한 관계가 아니라 정체성과 혈연의 관계다. 그런 중에 아들의 행동이 문제가 되어 아버지께 벌을 받는다고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들의 행위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이 주인에게 벌을 받는 것은 종과 주인이라는 관계 그 자체의 문제이기에 이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이라고 하시는 것이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없으므로 내가 거할 곳이 없노라.”라고 하시는 것은 같은 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다 성과와 행위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종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면 그것은 다 종과 같은 신앙이고, 그런 마음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혈통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지금의 사람들이 자기 이름이 교회의 교적부에 있기에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 아브라함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면서 단지 혈통이라는 것만으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유대의식에 빠진 것이나, 교회라는 곳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사람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교회인 것은 알지 못하면서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으로 지켜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내용은 모르고 형식만 남은 외식이라는 것에서 데칼코마니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이 있어도 자유롭지 않다.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자기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칼의 존재 목적을 잘 이해한 사람이 칼을 다루는 것을 자유롭게 다룬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든,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든 간에, 그 사람의 생각 속에 자신의 본성은 동의하지 않는데 신앙 때문에 뭔가를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고, 그런 상황에서 자기의 정체성과 본성을 꺾고 해야 되는 것을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그것은 다 종의 신앙이다.


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의 목적을 벗어난 것이 죄다. 자기 정체성을 벗어나서 종교적으로 아무리 경건하고, 사회적으로 아무리 도덕적이고 예의 바르다고 해도 다 죄인이다. 이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동의가 되지 않고 있다면 필시 종교적인 경건과 사회적인 도덕성은 적어도 그렇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보상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 보상에 메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들 안에 없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본성이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그 관계성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다면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자리로 가라는 의미이다. 그 의가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인생의 자리이자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 안에 있어야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공로나 소유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 종의 신앙이다. 종이라는 것은 이미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다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이 신앙 안에 있다.


교회에 봉사해야 천국에 가서 상급이 크다는 것이나, 십일조를 내어야 천국에 가서 부자로 산다는 것이나, 소나무 하나 뽑을 정도로 기도를 해야 방언을 받는다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은 것들이 모두 종의 신앙의 단면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잘 돌봐주시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이 다 그것이다. 신앙이 Give and Take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종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종이 그 수고를 주인에게 드림과 같이 신앙적으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보답으로 무엇을 주신다는 것이 다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모든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신앙인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거하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사람에게 말씀하신 그 의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어야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그럴 때 비로소 진리를 아는 사람인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 사람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아들이고, 그것이 진리고, 그것이 자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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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유명한 말(씀)이다. 많은 기독교 학교 현관이나 학교 안에 새겨진 말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신앙의 큰 전환점이 싹튼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행위(Do)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존재(Be)에 관한 것인지 고민하도록 만든 촉매와 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죄의 종노릇을 한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진리는 자유케 하고 죄를 범하는 것은 죄에 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죄를 범한다는 것은 죄의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죄의 종이라는 것은 죄에 구속되어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빛이라고 하셨다. 어두우면 아무 것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 맘대로 한다는 것은 한계를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도 마찬가지다. 자유란 그 존재의 정체성이 자유롭게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기 정체성을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죄다. 자유란 자신의 존재 목적에 맞는 의미를 맘껏 누리는 것, 그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자기 자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간첩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것과 같다. 그의 신분은 그의 모든 것을 통제한다. 간첩이 우리 국민이 아니라는 그 죄가 그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죄다. 심지어 죽어가는 우리나라 사람을 살려내도 그에겐 죄다. 그가 묶여 있지 않아도 간첩은 그 신분 때문에 자유롭지 않은 것과 같이, 사람이 자기의 존재 목적을 벗어나 있으면 그의 모든 삶은 다 구속을 받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어두운 것, 흑암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빛이 없는 방에 들어가면 빛이 없다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이 자유롭지 않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자기 맘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자유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이 그렇다. 한치 앞을 모르기에 늘 걱정하고, 보험 들고, ‘이러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 아니면 저렇게 했어야 하나?’라고 갈등하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냐며 삶의 일들을 묻는다. 그게 자유롭지 않고 어두운 것이며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진리이신 것은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유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왜 사는지?,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을 아는 것은 삶의 자유이다. 사람들도 뭔가에 대하여 밝히 알고서 그 물건을 다루는 것을 자유롭게 다룬다고 하는 말하는데 바로 이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사람에게 그 존재의 의미를, 삶을 마음대로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삶을 지으신 그 의가 사람으로 표현되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의 존재 목적, 곧 진리를 알게 되기에 아들이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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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반을 떠나는 야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2. 13. 12:56 Writer : 김홍덕

야곱이 라반과의 약속에 따라 점 있고, 아롱지고, 검은 양과 염소를 얻었는데 그 수가 많으니 라반의 아들들이 이를 시기하여 아비 라반에게 고하므로 라반이 마음이 변해서 야곱과의 언약에 대하여 재고하려 하는 것을 야곱이 알고 그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게 된다.


이때 야곱은 그의 두 아내, 즉 라반의 두 딸에게 떠나려는 마음을 알렸는데 야곱의 두 아내는 야곱을 흔쾌히 따라 나서겠다고 한다. 그들의 생각은 “어차피 아비의 집에 자신들의 분깃이나 유업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그 두 딸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팔았다고 생각(창 31:15)한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게 된다.


성경에선 늘 남자가 여자에게로 가서 결혼하고 여자가 남자를 따러 떠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적어도 아브라함에서 야곱의 때까지는 그렇다. 아브라함이 왜 그러냐고 할지 모르는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당시 아브람)에게 찾아 가셔서 떠나라고 했고, 아브람이 말씀에 순종해서 떠난 것은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은 인생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그 여자와 같은 인생이 남편 곧 하나님의 의를 좇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같다. 이삭과 야곱은 둘 다 자기 고향에 가서 아내를 얻고 아내들 곧 여자들이 남편을 따라 나선다.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생들에게 찾아오시고, 그 인생들은 신부에게 신랑이 와서 그 신랑의 아들을 얻게 되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생명을 얻고,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따라 나서듯이 육신의 의를 떠나서 남편과 같은, 또 아들의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여정을 지나서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이 야곱이 나라의 근간이 되는 족속을 이루는 것으로 표현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두 딸이 아버지가 자신들을 팔았다는 것은 자신들을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세상의 법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를 따른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한 인생은 자기들이 볼 때 외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미워할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에 나타나셔서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출생지라 함은 자기의 원래 모습,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즉 출생 곧 존재의 원래모습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땅의 지명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야곱이 있는 자리는 라반이 볼 때는 외인으로 여기는 자리(정체성)인 것이다. 그래서 라반은 딸을 주는 것도 야곱의 노동의 값으로 계산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은 세상의 모든 본성이다. 문제는 세상이야 그렇다 쳐도 교회도 그렇다는 것이 문제다. 이 블로그에서 아주 자주 이야기하는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것인데, 세상의 법이 들어온 교회는 신앙적 가치, 즉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사람이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에 늘 값을 요구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장로나 장립집사와 같이 소위 신앙의 직급이라 하는 자리에 오르는 때에 많은 헌금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야곱의 아내들은 그 아버지의 그런 의에서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즉 당대의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야곱, 즉 자기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이와 함께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문제는 조용히 떠났으면 될 텐데 둘째 딸이자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친 것이다. 드라빔은 뭐랄까? 가문의 상징 혹은 가문의 우상과 같은 것이었다.


라헬이 무슨 의도로 그것을 훔쳐서 분란을 일으켰는지는 알기 어렵다. 더욱이 그 드라빔으로 인하여 야곱의 일생에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다만 라헬이 그 드라빔을 훔침으로 인하여 야곱이 라반에게 오히려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사건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야곱이 라반을 어떻게 섬겼는지, 반대로 라반이 야곱을 어떻게 보고 착복했는지가 드러나게 된다. 즉 세상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와,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의 본성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드러난다.


라반은 결국 자신의 신인 드라빔을 찾지 못하고 야곱이 원하는 대로 야곱과 자신의 두 딸인 야곱의 아내와 손자들을 보내주게 된다. 자신의 신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히 드라빔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지닌 야곱이 자신에게서 떠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신을 찾지 못했다는 자기 말로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야곱은 자기 신을 찾지 못한 라반, 즉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있는 분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부정한 라반에게 정성을 다했다. 어떻게 보면 야곱이 라반에게 한 행적을 보면서 야곱을 야비하다 할 수 있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성실하고 신실했다. 이것은 정말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은 하나님을 알고 그들이 말하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한다. 심지어 ‘짐승들’이라는 표현들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다. 장자의 명분이 없는 신앙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필자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예를 들면 도둑질 수준이라 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직장의 물건, 예를 들면 종이컵과 같은 것들을 교회에 가져와서는 ‘신앙 없는 것들의 것은 이렇게 쓰도 된다.’식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봤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도적일 뿐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이들일 뿐이다.


야곱은 라반의 짐승이 죽거나 상하면 자신의 것으로 다 보상했다고 했다.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어도 그렇게 했다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의의 장자가 보이는 삶의 모습이다. 야곱이 형을 속인 것, 그렇게 야비하게 보이는 야곱의 모습도 알고 보면 세상의 것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오히려 더 철저해야 한다. 야곱이 그랬던 것은 아내를 위해서와 양떼를 위하여서였다. 즉 세상을 얻기 위하여 그런 것이다.


많은 교회들, 특히나 스스로 성경에 대하여 다른 교회나 종교보다 더 안다는 사람들이 세상을 멸시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이 우위에 있음을 말한다. 그것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시댁이나 부모님 댁을 들리지 않는 것, 신앙이 없는 부모와 같이 살 수 없으니 가출해서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것과 같은 모습은 아내와 양떼를 얻는 모습이 아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시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졌지만 그 장자의 명분으로 세상에 속한 이들, 라반과 같이 딸을 팔아 버리는 그런 가치관을 가진 이들을 멸시하거나,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는 삶을 살았기에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내란 자기 의를 표현해 줄 세상의 형식과 삶의 모양이고, 또한 라반의 양떼는 세상에 있는 양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과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고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법에 따라 그들을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그렇게 해야 천국에 간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 즉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의가 자기 삶으로 표현되고 이끌기 때문에 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 밖에 없는 본성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성경의 어떤 말씀이 저촉될까? 또 세상의 어떤 사람이 그를 욕할까?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몰라주고, 비난하는 것은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사느냐?”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이지, “니들이 뭐 길래 우리에게 이러며, 그렇게 별나게 사느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가치관, 그런 신앙으로는 참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이룰 수 없다. 교회라는 건축물과 제도로 묶인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가능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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