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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1-12) 실로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2. 18. 11:34 Writer : 김홍덕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에 대하여 제자들은 그 사람이 소경인 이유가 그 자신이나 부모의 죄로 인함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면서부터 소경이니 자기 자신의 죄라고 하긴 좀 그랬는지 예수님께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고는 ‘실로암’이라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셔서 그 사람이 시킨 대로 하였더니 보게 되었다. 그 실로암이라는 연못의 이름이 가진 뜻은 <보내심을 받았다.>라는 의미라고 되어 있다.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위하여’라는 것이 연결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육신의 눈을 뜨고 있으면 소경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삶의 여러 자리에서 소경으로 살고 있다. 주식하는 친구가 하는 말을 나는 잘 알아들을 수 없다. 봐도 모른다. 주식시황 화면에 있는 글자를 못 읽어서가 아니라, 그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식에 대한 소경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소경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목적에 대하여 소경인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면 왜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상태로 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인생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다? 그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이 땅에 삶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타낸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영광>이다. 즉 모든 인생이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자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에서 세상의 법과 규칙대로 다투어서 이겨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을 위하여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운명이고 존재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삶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함이다.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기 존재의 목적을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좀 그렇지 않다. 앞에서 먼저 글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제자들이 소경이라는 불행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믿는 믿음이 육신의 일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죄의 결과 사람의 육신의 삶이 해를 받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진 기본적인 신앙의 구조가 그렇다. 사람이 살면서 하는 행동들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생각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회에 다니면 천국에 데리고 가고, 십일조를 내면 이 땅에서도 부자로 살게 해 주고 죽어서 천국에 가서도 부자로 살게 된다는 식이다. 이런 모든 생각들의 내용은 한 마디고 하나님은 우리 행동에 반응하시는 수동적인 신으로 여기는 것과 같고, 하나님과 내가 바둑을 두듯이 나의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반응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모든 생각의 핵심적인 구조는 바로 육신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반응이 사람의 삶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십일조를 내면 육신의 삶이 부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잘 보인 것이 이 육신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인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모든 것이 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찾아가신 하나님께서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시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번도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것이었고, 범죄 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육신의 삶은 무엇인가의 표현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이 그렇다. 사람의 행동은 그 행동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생각이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알면서 이 육신의 삶이라는 것 전체는 무엇에 대한 표현이며, 무엇을 표현하고자 주어졌는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경이다. 바로 사람의 중심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란 어떤 행동을 자의적으로 해서 하나님께 그 행동을 심판 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심판은 모세의 율법이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은 자신이 자의적으로 행동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담기는 것이 먼저고, 그 의가 표현되기 위하여 모든 행동을 하는 육신의 삶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 주어진 목적이다. 그 의가 있으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의 말과 모든 행동이 그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생물로서 사람의 모든 삶이 그 의를 표현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그 법을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신 것이다. 사람의 육신이란 그런 것이라고, 이 인생을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바로 그것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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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 중에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 제자들이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라고 묻는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이니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렇게 된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러면 누구의 죄로 인함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많은 것을 시사하는 질문이고, 지금도 너무나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관점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질문의 가장 핵심은 사람의 육신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어떤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은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인데, 이것은 사람들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신에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그리고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종교가 이와 같다. 하나님(신)은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상을 주시기도 하고 또 소경이 되는 것과 같은 벌을 주시기도 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교회라고 다를 바 없다. 다만 그렇게 의지하고 믿는 신이 하나님이라는 것 외에 큰 차이가 없다. 다소간 신을 숭배하는 방식이 다를 뿐, 신을 또 하나님을 믿고 숭배하는 이유는 대부분 이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 그것이 바로 “누구의 죄로 인하여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는가?”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을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하시고자 하심이니라(요 9:3)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 사람에게만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설교도 그렇게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만난 그 소경 한 명에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태어날 때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소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대답은,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어둡다. 가장 핵심적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모른다. 간혹 안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삶을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힘으로, 자기 선택으로 이 세상에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기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있겠는가? 단지 살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에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다.


소경은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소경이다. 그래서 그냥 모든 것이 캄캄한 사람이 소경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의 일이고, 진정한 소경은 어떤 세계에 대하여 무지한 모든 사람은 다 소경이다. 경제에 대하여 모르면 경제에 대한 소경이고, 물리학에 대하여 모르면 그 또한 그 세계의 소경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은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 역시 소경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빛이신 것이다. 자기 존재의 이유와 정체성에 대하여 전혀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는 소경들에게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인생을 창조하신 이로부터 전하여 주러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빛이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께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을 의지하지 않고, 살면서 겪는 일들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 사람이 누구의 죄로 인하여…”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블로그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교회에 가서 기도한 내용을 돌아보면 과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이유와 목적을 신앙의 핵심으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이 인생이 살면서 겪는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또한 인생으로서 하나님께 무엇을 하여야 천국에 가고, 또 사는 동안 험한 일 겪지 않는 축복을 받을 것인지를 기도한 것인지 정직하게 돌아보면 예수님께 “누구의 죄로 인하여 소경이 되었나요?”라고 묻는 제자들과 자신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면 낮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이 이 땅에 계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 본다면 예수님이 계시는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은 항상 낮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세상에 계시다는 것은 빛이 있는 낮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물질세계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자아의 세계, 가치관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한 때문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낮과 밤이라는 현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밤이고 소경이며, 예수님이 계시면 빛이 있고 보게 되는 낮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가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셔서 낮인 세계는 끝이 날 것이라는 것이다.(그것은 육신의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고치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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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고 또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일까? 다들 죽기도 했고, 또 앞으로도 예외 없이 다들 죽을 텐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것이 의문스러워야 하고, 또한 이런 말씀이 자기 안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지금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과 연관하여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심에 있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다는 말씀도 하신다. 이런 말씀들을 들으면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적하던 유대인들의 모습이야 당연히 마귀에게서 난 것이지!’라고 생각해 버린다. 하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는 유대인이 아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는 어떤 사람들을 말한다.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을.


그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이 자기 조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육신의 혈통으로 조상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과,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안에 책의 행간을 읽듯이 알아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의가 있는데 그것을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사람들은 전부 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묘한 복선이 있다. 먼저는 예수 믿는 신앙을 성경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라 믿고, 또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또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또 성경말씀은 행간과 같이 뜻하시는 바가 있다고 하면 반박한다. 문제는 그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는 문자 그대로, 어떤 것은 또 의미로 받는지, 또 어떤 것은 시대적이 고려를 하는지 그것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불분명한 것이 아니라, 다들 자기 맘대로 정하고는 서로 다르니 다투어야 하는 것을 피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큰 주제가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신 것도 그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몰골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항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봄으로 생기는 문제는 먼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본뜻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사람이 가진 자기의 기준으로 사람의 외모를 보니 그 모습으로는 자기 기준으로 세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보이는 것에 관한 것, 공로와 소유를 하나님께 어떻게 드릴 것인지에 대하여 골몰하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좀 장황하게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이라는 것이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 말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죽음을 육신의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순간에는 지키고, 어떤 형편에서는 지키는 그런 것이 아니다. ‘회사일이 바쁘면 주일 지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리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회사일이 바쁘든 아니면 안식년이든 간에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타협하면서 신앙이라 하고, 이것을 타협하기 위하여 신학의 논조를 들이대고, 이것을 이야기 하면서 세상과 시대의 상황을 반영해야한다고 타협하는 것은 다 탁락한 것이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것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그 말씀을 지키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 아닌 것이 사람 노릇하려고 매 순간 사람처럼 행동하려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사람 노릇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은 그냥 살면 사람인 것이다. 여기엔 노릇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 없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군 면제를 받기 위하여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논산훈련소에까지 입소했지만 그곳에서도 그렇게 행동했고, 입소 후 신체검사에서 그것이 통해서 열외 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행동이 아무래도 미심쩍다고 생각한 군의관 한명이 몰래 뒤로 돌아가서 아주 작은 귓속말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열외 상태에서 이제는 귀가 안 들리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고 싶어 마음을 놓고 있던 그는 작은 소리로 이름을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 생명. 자기 정체성이 아닌 것을 흉내 내고 노릇하는 것이란 것이 바로 이렇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모든 것은 다 하나로 꿰어진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육신을 가진 정체성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기에 예수님을 보고서 그 모습, 세상의 기준으로 볼 대 보잘 것 없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 깨달음은 성경의 감동으로 되는 것이기에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고, 그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삶의 목적과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던 것을 종식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서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삶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므로 그 목적을 벗어났던 죄에서 구원 받음이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시는 생명의 세계이고, 하나님의 세계이며, 그것이 바로 산 생명이기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이 육신이 죽었다고 해도 그것을 알았다는 내 자아는 영원히 그것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생이란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는 것에서 그 하나님의 생명을 아는 자는 영생을 얻은 것이기에 이것이 바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는 안목이 이 성경을 어떻게 행동으로 지켜낼 것인가 하는 관점을 고수하고 싶다면 그 육신도 죽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가능한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성경과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세상적인 방식,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음의 지향점으로 삼는 것과 같은 신앙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우기는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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