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성령의 강림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성령의 강림과 부활을 믿을 믿음이 없는 것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성령께서 생물학적으로 남자의 유전자 없이 생명이 되게 하셨다는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정녀 탄생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여자와 신부 같은 사람이 세상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생명이 되게 하심을 설명하시는 사건이고 성령이 잉태케 하신다는 것은 사람 안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 말씀의 본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들 앞에 달리신 것은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 안에 그 모습이 심기게 하심이고, 그것이 농부이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흙으로 지은 사람 안에 심기면 성령이 그것을 생명이 되게 잉태시키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땅과 같은 우리에게 심기면(주기도문) 그것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며,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심을 성령이 잉태케 하심이고 성령의 강림이다.
따라서 제자들에게는 이미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되었다고 할 만한 것이 있었으나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여기서 미세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은 성경 속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이 믿지 못하고 있음을 여러 차례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도마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리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마리아와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을 때도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믿지 않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미 예수님께서 목욕한 자라고 하시고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실 만한 말씀이 심령에 심겨져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확신한 가룟 유다와 달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를 알지 못함을 인하여 갈등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었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이 믿지 못하고 있었다.
즉 그들 안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분명하게 심겨져 있었고, 예수님은 약속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에는 의심이 없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들 자신 역시 부활에 합당한 존재라는 것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성령이 아직 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지?’, ‘우리는 그러지 말고 부활을 믿어야지!’라고 말할 것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성령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온전한 죽음과 하나님의 안식이 있는 이들이었다. 예수님께서 달리 영화로운 자들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는 것이 제자들과 우리에게 더 나은 것이 될 것인데 이는 성령이 오시기 때문이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해 봐야 한다.
그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로 가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고 제자들 안에 있던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미지와 부활로 드러날 새로운 생명들이 온전한 생명이 되고 그 본성이 그들을 삼 천명이 회개하는 설교를 이끌고 순고하는 자리로 이끌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고 쉽게 타산지석으로 삼고, 쉬운 말로 ‘나는 부활을 믿어야지!’할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런 각오나 다짐 혹은 신념으로 되지 않는다. 들은 것, 곧 순종함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실 것이 심겼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부활의 절대적 조건인 죽음과 세상의 가치로 이해할 수 없겠지만 죽음으로 인한 안식이 자기 심령 안에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또한 예수 믿기 전,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믿기 전과 믿은 다음에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의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인지 또한 반추해 봐야 한다. 구하는 것이 같은데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부활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새로 살렸는데 이전과 동일한 것을 살리시는 어리석은 분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성경에서 죽었다 살아난 이들을 부활이라 하지 않는 이유를 상기해보면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매년 삶은 계란을 먹으면서 기념하고, 새벽에 큰 운동장에 모여서 예배드리므로 자신이 부활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부활절의 본질인 부활에 대한 두 가지 큰 관점을 생각해 보았다.
부활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믿지 못함을 보고 우리 안에 그런 믿음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활은 신앙의 추가적인 옵션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부활신앙이 없다면, 즉 자신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안식으로 여기시는 죽음을 당한 이들을 살리시는 역사하심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살리시는 존재가 되어야 맛볼 수 있는 것이 부활이라는 의미다. 오늘 나는 하나님이 살리실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생각해 보는 시절이 부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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