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5

(요한복음 12:1-11) 향유옥합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3. 29. 13:44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의 집에 다시 들르셨다. 이는 이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마지막 여정을 앞둔 시점이었다. 나사로의 집에 들렀을 때에 그 누이 마리아가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깨어서 그 안에 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로 그 발을 씻은 일이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향유 옥합’의 기록이다.


향유 옥합은 당시 여인들의 시집 밑천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결혼을 위하여 준비한 적금과도 같은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옥합에 모아둔 향유는 결혼과도 같은 결혼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도 상당했다. 마리아의 향유는 300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했는데, 당시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가치이다.


그 귀한 향유, 여인으로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한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로 씻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어이없는 일이고, 한편으로 보면 대단한 일이다. 굳이 향유가 아니라도 어지간히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자신의 머리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길 수 있겠는가하는 관점에서만 봐도 그렇다는 것이다.


또 하나 참조하면 도움이 될 법한 것은, 당시에 유대인들은 집에 누가 오면 종들이 집에 오는 손님이나 식구들의 발을 씻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에 누군가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자신이 그 사람 앞에서 종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일면 마리아가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로 씻겼다는 것은 해석하기에 또 풀어서 전하기에 어려운 말씀은 아니다. 자신이 가진 귀한 것을 주님 앞에 종과 같이 드렸다는 관점으로 보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점이 틀린 것도 아니기에 어려울 것이 없는 말씀인 듯하다. 하지만 이 말씀은 더 깊은 뜻이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름은 그의 정체성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그 육신이나 행동이 자아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가치관, 안목, 철학과 신념과 믿음과 같은 것이 사람의 본질이다. 그것이 육신 안에 담겨 있고, 또한 육신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가진 가치관은 향유요, 육신은 옥합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하여 창조된 그릇이고 항아리다. 이 사람 안에 든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육신을 통하여 표현된다. 사람의 육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다는 것은 육신이 사용되고 소모되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다는 것이다. 즉 옥합이 깨어져야 그 안에 있는 것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자신을 위하여 옥합을 깬 것을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인의 일이 전해질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이 그러라고 지어졌으니 사람 있는 곳에는 이 말씀이 꼭 전해져야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 다들 대단한 일로 생각하고, 남들 가지 않는 오지에 선교하러 가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육신을 깨트리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육신을 깨트린다고 하는 것은 좀 더 불편하고, 남들 앞에 종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이 사건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육신을 깨트려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향기가 온 세상에 날리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옥합을 깨트리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교회에 바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도적질이다.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그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모은 재화와 용역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소유와 공로를 받으시기 원하시는 신이 아니기에 그것을 가져가서 하나님께 귀한 것 드린다고 우기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욕하는 것이기에 이 땅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바치는 것이 향유옥합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이 도적질이라는 것이다. 맞지 않는 것을 도용한 도적질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귀한 가치는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보다 귀한 것이 없다. 예수님보다 귀한 분이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 귀한 것을 나타내려면 육신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옥합을 깨트린다는 것, 육신을 사용한다는 것은 육신의 삶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삶과 같은 목적 아래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야곱과 에서의 만남이 주는 교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3. 28. 12:46 Writer : 김홍덕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과 다투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름이 바뀌는 축복을 받았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생명과 정체성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 그것을 축복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 축복은 결국 사람을 하나님으로 만나는 안목을 주신 것에 관한 것이다. 즉 세상과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얼굴과 성품과 영광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야곱에게 축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잘 생각해 봐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야곱이라는 사람의 축복을 세상에서 거부가 되었다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야곱의 그런 모습은 야곱의 삶으로 나타난 것이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야곱 안에 있는 어떤 생명이 그렇게 표현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특히나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뭔가를 도모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사회를 멀리하려 하는 것이 문제다. 그런 관점으로는 야곱이 그 형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뵈옵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없고, 사람과 다투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분명히 타락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이 뭔가를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타락했다. 성적인 타락이나 금전만능 주의는 세상이 타락한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 그것이 타락한 본질이 아니다. 세상이 타락했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가치 있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많이 가질수록 이긴 자가 되는 그 법이 주인 된 법이라는 것이 타락의 실체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 할 때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줄 테니 절하라고 시험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진 이로서 하나님이 살았다, 또 이겼다고 하는 의를 가졌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로 볼 때 귀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귀하다고 여기는 재산은 모두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한 형에게 다 바쳤다. 야곱이 원한 것은 그런 것의 보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과 다투면서 얻기를 원했던 축복, 곧 사람을 하나님으로 만나는 안목 그것이었다.


많은 신앙인들은 이것이 뭔지 모른다. 사람을 통해서 또한 에서로 대변되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세상의 법칙과 순리가 다 하나님의 일로 보이는 사람이 왜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겠는가?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잘못 경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아니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떤 달력의 시간(크로노스의 시간)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사람들이 그 기다림을 이해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시거나. 하지만 성경은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에서를 만나는 것은 죽을지도 모르는 일인데도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의 명분을 가진 자가 있어야 할 땅(사람의 정체성)으로 죽음을 무릎 쓰고 가는 야곱이 바로 예수님의 그 말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려고 세상과 결별하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 오늘도 쉬지 않고 경영하시는 이 세상, 그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 바로 신앙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그려내는 도화지고, 우리가 가진 육신은 붓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없다면 어디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여기고, 육신의 일에 창대케 되는 것은 축복이라 여기며, 이 눈에 보이는 육신의 일이 영광을 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 어리석음과 그 어리석음이 진리라 여겨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 세상에서, 주님과 같이 그 세상의 법으로 자신이 죽을 수 있지만 얍복강을 건넌 야곱과 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살게 하시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듯 에서를 만난 야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3. 26. 14:39 Writer : 김홍덕

야곱이 얍복강에서 한 사람과 씨름 하였는데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기 힘들게 되자 환도뼈를 쳐서 야곱의 뼈가 어긋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외형적으로 이 싸움은 야곱이 진 것이다. 그렇지만 야곱은 자신이 바라던 대로 축복을 얻었다. 그것은 자기의 정체성이 바뀐 것이다. 이름이란 생명이고 생명이란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코가 길어서 코끼리인 것과 같이 이름은 그 정체성이다.


야곱이 얻은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이다. 더 자세히는 하나님과 및 사람과 겨루어 이겨서 얻은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그렇게 이름을 얻은 것을 야곱은 축복이라고 여겼다. 그랬으니까 축복하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겠다던 사람을 놓아 준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그 일을 하나님의 얼굴을 만난 것이라고 했다.


사람의 정체성이 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사람이 바다를 가르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 보다,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더 놀라운 기적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나이 40이 넘으면 변하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빠르다.’고 까지 한다. 그렇게 사람은 변하기 어려운 존재다. 그런데 야곱이 자기의 정체성을 ‘뒤꿈치를 잡고 나왔다.’는 이름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 바꾼 것이다.(이것은 단순한 개명이 아니라, 축복을 주는 권세를 가진 이에 의하여 정체성을 다르게 보겠다는 약속에 관한 것이다.)


그렇게 정체성의 변화를 겪은 야곱은 자기가 가려고 한 자리인 땅, 장자의 명분을 빼앗겨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형이 있는 땅에 드디어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형 에서는 야곱을 반갑게 맞아 주고 야곱 또한 형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부분을 언뜻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택한 사람인 야곱이,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고,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 곧 사람 지으신 뜻을 가볍게 여기는 에서를 만났는데 에서가 야곱을 보고서 하나님을 본 것 같다고 하지 않고 반대로 야곱이 에서를 보고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다고 했는가 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아마 신앙을 위해서 세상일을 포기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전혀 알 수 없는 말씀일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을 가진 자신을 지키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기에 모욕을 당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나 교회들이 여성도와의 문제, 돈 문제, 세습의 문제와 같은 일에 대하여 사회적인 비난을 받으면 일관되게 보이는 자세가 자신들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그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뿐 아니라 그런 사회적인 원성을 마귀의 계략이라고 일갈한다.


그런 가치관을 가진 신앙인들은 절대로 에서의 얼굴을 보고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에서는 마귀의 자식이고 타락한 사람이듯 신앙이 없는 모든 세상의 사람들도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어떻게 마귀와 같이 여기는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신앙을 위해서는 세상의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좋은 신앙이며, 사회가 교회나 목사에 대하여 하는 이야기를 마귀의 계략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야곱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째서 자신을 죽이려 한 형 에서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했으며, 또한 야곱의 여정이 우리 신앙의 여정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에게 이 일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자.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과 및 사람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고, 초인적인 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이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과 같은 것에 길길이 날뛰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엘리야도 그랬다. 하나님을 만나려 했는데, 바위를 쪼개는 바람이나 돌을 사르는 불로 오시는 하나님을 엘리야는 만나지 못했다. 그런 놀라운 능력은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이 자신의 임재라고 하셨지만 엘리야는 사람의 육신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려면 신접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미세한 음성으로 오시는데 말이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꾸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간다. 그들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정의는 사람은 그 자체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먹어야 하는 밥을 굶고 기도하면 더 능력이고, 잠 안자고 기도하면 더 기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에서의 얼굴을 보고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자꾸 사람을 등진다. <교회가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교회가 불교와 같이 자꾸 사람 없는 곳으로 전원교회다 뭐다 하면서 가는 것은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웃긴 것은 그러면서 또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신다고 하고, 또한 하나님은 흠이 없고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찬양한다. 그러다 기도할 때면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꿔달라고 기도한다. 뭐 어쩌란 말인지 알 수 없다.


야곱이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뜻이 아니다. 야곱과 씨름한 사람 곧 하나님의 사자는 분명히 <“하나님과 및 사람과 겨루어 이긴 자”>라고 했다.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링에서 이긴 것과 같이 육신의 어떠함에 관하여 이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그래서 승자의 아량으로 에서를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곱이 이긴 것은 사람이 가진 사람에 대한 ‘정의(definition)’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 만든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스스로 정의하는 것은 사람을 만든 신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정의가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 인생에 대한 정의와 같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은 율법으로 그 행위를 바꾸어내지 않으며 의롭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관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들은 신약의 시대, 복음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여기는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성경말씀을 몸으로 지켜내어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던 그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다.


야곱이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 ‘하나님과 및 사람과 더불어 이겼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얻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었기에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린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사람의 정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과 같아졌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가진 사람에 대한 관념을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겪었기에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 한 형 에서(믿는 사람이 볼 때 세상사람)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이 그랬다는 것, 그것을 우리에게 전하셨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되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인,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 사람인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아는 은혜를 얻고, 또한 모든 사람이 사람인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 그것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 세상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될 때 그런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