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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도록 강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은 사람이 그 마음 안에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마음이 생겨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삶으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억지로 자신을 믿게 하시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도 억지로 한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안에 하나님의 법이 자기도 모르게 녹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법과 다르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앞에서 말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상에서 복 받으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 죽어서 천국가야 하니 싫지만 억지로 신념을 북돋우어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조건이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로 보여주신 삶을 보니, 나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마음을 이길 수 없게 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마치 미운 오리 새끼가 하늘을 날고 있는 백조를 보고서 날아가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미운 오리새끼는 하늘을 날기 위해서도, 오리들과 다른 자신을 벗어버리고자 함도 아니라, 하늘 나는 백조가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 그것 하나 때문에 날아 오른 것이듯, 사람도 예수님을 보니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그것임을 알게 되어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되어 자기를 주관하는 것을 이길 수 없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다보니 많은 경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보상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아닐 것 같지만 이 구조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니까 믿음과 구원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두 개의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본질은 예수님을 믿는 그 자체가 구원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나의 본질이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 자체가 믿음이고 구원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세계라는 것이 그렇다. 원인과 결과는 사실 동체(同體)인 것이다. 이것을 잘 알면 <행함과 믿음>의 관계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생명의 법을 모른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과 신약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 구약은 옛날 율법이고, 신약은 지금의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생명의 법을 알면 신약이나 구약이나 한가지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면 노아 홍수가 세례와 같은 뜻을 전하고자 하심이고, 성전의 물두멍과 세족의식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믿음과 행함은 연결된 것이 아니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하면, 이러한 법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분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곧 하나님이 나타나신 분이라는 것임을 믿는 것 즉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님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 = 하나님을 믿는 것>, 또 <예수님을 본 것 = 하나님을 본 것>임을 믿고 알며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수님으로 표현되신 이유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서 “나를 보았으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만난 것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의미요 무엇보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신 분을 보니 하나님을 만난 것이 되더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본다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먼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 형상(곧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육신을 통하여 만나는 것이다. 반대로 이 육신 그대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으니, 뭔가를 하나님께 드려야 되고, 어떤 행위와 공로가 있어야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사람을 만남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보기에는 육신이 있는 것 같지만 천사와 같은 몸이라고 하는 식의 영지주의적인 발상이나, 가난한 목수의 아들 주제에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며 육신의 어떠함이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이 저래서 되는가?’하는 것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반문을 해 보면 그 기준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기준과는 전혀 다르게 사람이 만들고 세상의 기준이 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려면, 또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지!’하는 것들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기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보는 기준이 하나님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노라 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지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가치관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을 볼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고, 예수님을 볼 때 우리에게 육신을 가진 존재가 바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곧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사람들도 어떤 책을 읽고서 저자가 그 책을 쓴 목적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작가를 만났다고 하듯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하나님의 창조물(저자의 책과 같은)인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첫 열매, 사람을 만나고 보며 그 사람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알게 되는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심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그렇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육신을 가진 자기 자신이나 또 다른 사람을 보면서 ‘육신 그대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기도를 더 해라.’, ‘헌금을 더 해라.’, ‘봉사를 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일 뿐 아니라 믿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욕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을 믿고 또 만나려면, 육신을 가진 이 인생이 바로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안다면 다른 사람의 삶도 그렇게 용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 육신을 가진 연약한 다른 사람의 삶을 용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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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안에서 생각해볼 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도록 해 놓으면 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건 하나의 딜레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딱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하시지 않으실만한 이유를 쉽게 발견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딜레마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반문을 자아내기도 한다.


세상에는 가끔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일을 한 사람이 있어 사회적으로 칭찬하고 좋아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자작극이나 조작이거나 계획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사건과 같은 일들이 있다. 또 비정상적 상황에서 고문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실토나 거짓말도 있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자의적이지 않은 일들이다. 이런 일들의 특징은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러 가겠다고 할 때, 제자들은 ‘그럴 수 없다.’고 만류했다. 베드로는 심지어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 중의 하나의 귀를 칼로 자르면서 까지 저항하기도 했다. 그때 예수님은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3-54)

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계기 역시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지게 되는 생명의 시작은 성령의 감동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 성령의 감동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일을 사람이 듣고 보았을 때, 그 예수님의 모습에서 거울(놋 뱀)을 보듯 자신의 모습이 발견이 되는 성령의 감동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마음속에 탄생한다는 것이다.(그것이 성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억지로 하지 않는 나라인 것이다. 그러니까 감동을 줄 수 있는 자의적인 것, 더 본질적으로 본다면 생명이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 때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어떤 강압이나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삶에도 있는데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에서 그런 예를 볼 수 있다. 부모도 사람인지라 자식들이 맘에 들지 않을 때도 많은데, 부모라는 그 정체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식들을 위하여 희생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부모가 되면 자식을 위하여 어떤 것을 하는 것은 그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금할 길이 없는 것이다. 자식이 나중에 자기를 잘 봉양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물론 그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람에게 감동을 느끼지는 않지 않는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스스로 그것을 금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목적, 어떤 이유로 인해서 자신은 싫지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도 그렇다. 적어도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 동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죽어서 천국에 못가도 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믿는 것이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볼 때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노후 대책이란 기대를 때로 생각하기는 해도 우선 자식을 키울 동안 부모라는 정체성으로 인하여 자식을 위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 그것 때문에 희생하고 봉사하듯이 예수님을 믿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곧 생계였던 시절이었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출교 당하면 시장에서 물건 하나, 빵 하나도 살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것은 협박이기도 했지만 신앙의 목적이 육신의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단순한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육신의 삶을 보존하는 것에 관한 것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께 밥 달라, 배우자 달라, 돈 달라, 명예 달라, 그렇게 되어야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그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오늘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어서 천국 가야겠다는 목적 때문에 때로 싫지만 억지로 교회에 다니고 기도하는 것은 감동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감동으로 인하여 자기 안에 예수님을 믿는 생명이 잉태되고 그것이 자라서 자기 삶을 주관하므로, 때로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삶이 아니라면 감동이 없는,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인하여 억지로 하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었을 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천국 가겠지만 그 목적으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가 늙어 아들에게 기댈 수 있겠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라는 정체성 때문에 자녀들이 자랄 동안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자기 안에 성령의 감동으로 잉태된 생명의 본성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아태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라고 한 예레미아와 같은 마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런 마음이 아니라 다른 목적, 천국에 가는 것, 이 땅에서 성공하고 영광을 얻는 것과 같은 목적과 이유 때문에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았던 바리새인들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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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20-36) 하나님의 영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4. 6. 10:51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길은 알지 못하면서 ‘호산나’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 다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왕이라 부르며 섬기려 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섬기는 자는 예수님의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밀알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의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그 자리(운명과 정체성)에 함께 있는 자가 예수님을 섬기는 자라는 것이다. 밀이 죽어 밀이 나듯,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이가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이어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를 귀히 여기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데(요 12:27,28)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육신을 가지셨기에 이제 닥친 십자가의 길을 면키 원하시는 기도를 하시기도 했지만 예수님 기도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곧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얻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다면 우리가 또한 십자가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다시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이들은 많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것일까? 아마 대표적인 것이 수상소감과 같은 것일 것이다. 어떤 경쟁에서 이겨서 Winner가 되었을 때, 자신의 이김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수상자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렇게 공로와 성과를 기준으로 사람을 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의 법칙, 곧 육신의 능력을 겨루어 이겨서 승자가 되는 그 법을 기반으로 한 승리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긴다. 그것은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세계에서의 승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전락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스스로 있는 자” 곧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이 된다. 아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말씀하시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라는 세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견해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말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한 기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육신이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신분)를 하나님께 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또 이제 십자가로 인하여 다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난 이 소리를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 삶의 어떤 것이 영광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 그 때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몰랐다고 했다. 그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도 몰랐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도 그 하늘의 소리가 무엇인지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이신 것이 육신을 가진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나서야 그 소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영광이라는 것은 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어떤 것이 어떤 의미의 영광을 얻으려 해도 일단 그것이 나타나야 영광이 되든지 저주가 되든지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일단 하나님이 표현되고 나타나셔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름은 바로 그 존재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 계획, 뜻)이 육신이 되신, 그러니까 육신으로 표현된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그 육신 가진 삶으로 표현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삶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육신으로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하심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사는 것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것의 실체는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실 텐데 그것이 하나님을 또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광, 세상의 법으로 세상에서 경쟁해서 이기는 이김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은 스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만, 세상의 법으로 패한 이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저주요 심판이기 때문에 영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만 사법고시에 붙는다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영광일지 모르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원망을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또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십자가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의 경쟁에서 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셔서 사형 당하신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도로에서 운전할 때, 자기가 빨리 가고 자신의 운전 습관이 가장 옳다고 생각해서 이리저리 뽐내듯 다시는 사람으로 인한 불편을 감수하며 법규를 지키며 가는 것, 내가 피곤하니 설거지를 좀 하라는 아내의 기준에 맞추어 설거지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이익을 구하고,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것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음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고 귀찮고 분하지만 그렇게 해야 천국에 간다니까, 아니면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험한 일 당하지 않게 하신다니까 하는 것은 다 거짓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 없이 몸을 불사르는 것이다. 남이 자기의 의와 이익을 주장하는 것 앞에 죄인이 되어 그것을 순종하는 삶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이유, 즉 생명의 본성 때문에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생명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을 보고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와 인생에 대한 목적임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삶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과 같이 십자가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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