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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강화도 모임 안내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6. 4. 14. 16:59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성경은 내 이야기다.>를 운영하고 있는 김홍덕입니다.


전국 여러 곳에서 저의 블로그를 보시고 많은 연락과 또 관심을 주심에 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적지 않은 분들과 몇차례 모임을 가져 왔는데 이번 봄에도 모임을 가지게 되어 알려드립니다.


4월이 되면 인천 강화도에 <진달래 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이때 강화도에 계시는 <곽근태 선생님>께서 

운영하시는 회사에서 모임을 할 수 있게 준비해 주신다고 하셔서 

모임을 가지게 되었으니 많은 분들이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모임의 일정은 


4월 23일(토요일) 오후 5시에 시작되며,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1박을 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신다고 하니 

많이들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모임 안내>

일시 : 2016년 4월 23일(토) 오후 5시 - 다음날까지(여건 되시는 분들과 함께)

장소 : 강화도 <레누아 건축> 사무실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대로 506 (인천 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188-2) 

연락처 : 김홍덕(010-3396-5555)

회비 : 없음 / 숙식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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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족의식>에 관한 말씀이다. 이제 세족의식은 단순히 종교적인 퍼포먼스를 넘어서 TV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인용될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한 탓에 발을 씻긴다는 것의 의미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면 발을 씻어야 했고, 그래서 주인이 집에 오면 종들이 그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로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손님에게도. 그러니까 발을 씻긴다는 것은 씻기는 사람이 발을 씻는 사람을 섬기는 관계라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전에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된 줄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이 말씀은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을 사랑하시므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고 자기 목숨을 내어 주려 함이라>고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막 10:45)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심으로 제자들을 발을 씻기려 하자,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씻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셨고,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그러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부탁하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길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요 13:6-10)


많은 경우 세족의식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설교를 할 때, 세족의식의 의미보다 <목욕한 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본 뜻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섬김을 받지 않은 자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섬기시는 섬김을 받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아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섬김이 바로 십자가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심으로 발을 씻기셨으며, 발을 씻기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로 알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야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종들이나 하는 행위를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하셨다는 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종과 같이 섬기는 일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섬기신 섬김의 결정체는 누가 뭐라 해도 십자가다. 십자가는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벌을 대신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도 온전한 의(옳음과 맞음)를 가진 이가 그렇지 않은 이의 주장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사건이다. 이 관점은 아주 중요하다. 예수님의 섬김이 어떤 섬김인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또 유대인(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왕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하나님께서 왕으로 여기시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이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과 왕이라는 것을 밝혔다고 죽여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죄인들이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움으로 의인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섬김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늘 말씀하셨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가장 온전한 의와 법을 가지셨음에도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죄인들이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 예수님을 심판할 때 그 심판에 순종하신 것이 십자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섬김이라는 것을 보이시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섬기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과 무관하다는 것을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섬기신 섬김이 없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섬김이 자신의 섬김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성전의 규례를 주실 때에 물두멍을 만들라고 하신 것에서도 나온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글을 참조) 예수님의 섬김이 자신의 섬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는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 성전의 물두멍과 세족의식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상관이 있다는 것은 2인칭의 관계요 <내용과 형식>처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하나님의 의가 그것을 본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섬기심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섬김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관계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지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진 삶, 곧 목욕한 자의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명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명, 부활 생명, 하나님께서 어떤 정체성을 살았다고 하시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또한 당연히 생명에 관한 것이다. 생명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으로 나면, 제 아무리 대단한 수를 가지고 있어도 그 생명의 본성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예수님과 같이 살지 않으려 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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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44-50) 예수님의 말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Date : 2016. 4. 13. 14:59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저버리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비단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어떤 말은 무엇인가를 전달하기 위하여 한다.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어떤 것을 말씀하시고자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입으로 한 말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이 무엇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의 오심 그 자체가 말씀이고, 오히려 입으로 하신 말씀은 그 일부일 뿐이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한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 내용이 객관적으로 사실이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한다는 것은 받아주기를 바라는 기대로 하는 것이지 전하는 내용의 검증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신 내용이다. 그러니까 사람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순종하기를 바라시면서 전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사실이었다는 객관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시고 전하신 내용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를 지으신 분이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전하시는데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 그 객관성을 역사적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과연 믿음일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시고 전하신 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이것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외면한 체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만 객관적으로 믿으려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말씀을 전하셨는데도 그 전하신 뜻이 아니라 육신으로 나타내신 예수님의 기적이나 행하신 일들을 자기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베푸실 것이라 믿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으로 예수님을 저버리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심판을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예수님을 저버리는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이 심판한다는 것은 어떤 차이인가? 같은 것 아닌가? 싶겠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려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그 사람의 정체성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내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의와 성품이 나타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 하신 하나님의 뜻 그것이 바로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전하신 그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 주기를 바라며 전하신 의를 자기 삶의 목적과 의로 삼느냐 아니냐가 바로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은 당연히 예수님의 자의로 하신 말씀이 아닌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의 자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전하신 그 말씀이 바로 영생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전하신 말씀이 왜 영생인가? 그냥 하나님이 하셨으니 영생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이라고, 또 예수님께서 그것을 전하시면서 그것이 영생의 말씀이라고 하신 것은 당연한 근거가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사람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이 왜 영생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일 것이다. 사람이 따로 공부하거나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알 수 있는 영생의 법이라면 적어도 그 영생의 법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적어도 자신이 사람이고 인생이라는 것만 인지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영생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 영생이라는 것이 진시황의 희망과 같이 불로초를 먹고서 육신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이를 아는 것,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그 말씀을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생을 생각할 때 진시황과 같이 몸이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체.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영생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겠다는 것이지, 사람의 육신의 삶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서 육신의 문제를 의탁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하는 것이다. 그게 가능이나 하면 또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닌데 허구한 날 노력한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의 문자 그대로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살다보면 실생활로 증명이 된다는 것이나, 예수님의 기적이 다 사실이었음을 역사적 과학적으로 실증된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청전이 바다에 빠져야 효도라고 전하는 것이 아니듯이 예수님의 말씀도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하신 것이 자기의 운명이요 정체성이라는 것에 순종하면 예수님과 같이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전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또 성경을 통하여 전하신 사람 지으신 분으로서 사람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그 의도를 사람이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신이 되는 것이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생명이 사람 안에 있고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데 그 생명의 본성이 명하는 것을 어길 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영생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이기에 당연히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는데 무슨 수로 영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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